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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다시 쓰는 마영전]별의 불꽃. 6

그락란라우
조회: 945
추천: 1
2015-07-26 03:44:18

  며칠이나 지났는지 확인하고 싶다. 편지를 받은 그 날 이후로 퍽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곳 로체스트까지 오는 데만 거의 보름 가까이 걸렸다. 못해도 편지를 받고나서 한 달하고 보름이 좀 지난 듯했다. 

  사내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공기가 무겁다. 사람이 많이 사는 도시라 그런 듯했다. 사내는 맑고 쾌청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햇살이 따갑다. 어두운 녹색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겼다. 날은 더웠지만 땀은 나지 않았다. 좋은 날이었다.

  사내는 로체스트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돌아다니며 콜헨이라는 마을까지 가는 차편을 찾았지만 쉽지 않았다. 무척 외진 곳인지 길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처량한 모습으로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던 사내는 갑자기 불어오는 돌풍에 놀라 눈을 감았다. 그러자 곧 거대한 물체가 날아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또 한 번 돌풍이 몰아쳤다. 사내가 눈을 떴다. 주변이 어둡다. 밤이 된 느낌이었다. 사내는 의아함에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서 거대한 것이 날아가고 있었다. 

  드래곤이다.

  세상 전부를 뒤져보아도 그만한 크기를 가진 생명체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그런 생명체가 살아서 움직인다는 사실은 퍽 충격적이었다. 또 그런 생물이 인간의 편을 들어준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내는 저 드래곤이 인간의 편을 드는 건 아닐 거라 생각했다. 자존심과 오만함으로 뭉친 그들이 누군가의 편을 들어준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인간의 편이 아니라 ‘드래곤라이더’라 불리는 단 한 사람을 돕는다는 게 맞을 것이다. 그 자가 인간이기 때문에, 저 드래곤은 인간의 편에 서 있는 것이다.

  드래곤이 날 뛴 전장을 한 번 본 적 있다. 전장은 말하기 힘들 정도로 쑥대밭이 되어있었다. 전장은 말하기 힘들 정도로 참담하게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드래곤이 내뿜은 불의 숨결이 휩쓸고 간 땅은 불모지가 되어 사내가 그곳에서 철수할 때까지 죽어 있었다.

  ‘지금도 그렇게 죽은 땅일까?’

  사내는 한껏 기지개를 켜며 몸을 풀었다. 그는 나무 옆에 세워두었던 두 자루의 칼을 챙긴 후 몸을 일으켰다. 드래곤을 가까이서 볼 기회는 흔치 않다. 마침 드래곤도 근처에 있으니 구경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내는 번화가 쪽으로 걸어갔다. 

  번화가로 다가가는 내내 사내는 드래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몸집이 얼마나 큰지 활짝 펼친 날개는 번화가를 모두 뒤덮고 있었다. 사내는 경이로울 정도로 거대한 드래곤의 거체에 다시금 감탄했다. 드래곤의 꼬리로 추정되는 것이 머리 위를 노리고 지나간다. 어안이 벙벙해지는 광경을 사내는 퍽 재미있다는 눈으로 바라본다. 그는 드래곤을 쳐다보며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따스한 햇살을 받아 드래곤의 비늘이 밝은 붉은 빛을 띤다.

  드래곤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드래곤이 갑자기 로나운 성채 위로 올라가버리는 덕분에 그럴 기회를 놓쳤다. 아쉬워하며 사내는 고개를 돌렸다. 시간을 지체했다. 지금쯤 아이단의 연락을 받은 자들은 대부분 복귀했을 터이다. 기껏해야 복귀하지 않았을 법한 자들은 허크, 카록, 카이 뿐일 것이다. 사내는 콜헨으로 향하는 차편이나 길을 묻기 위해 로체스트를 다시 한 번 뒤져보기로 했다. 발걸음을 옮긴 사내는 문득 수많은 인파가 몰려오는 걸 봤다.

  휘황찬란한 빛을 반사하는 은빛의 플레이트 갑주로 무장한 자들, 기사였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 서 걸어오는 건 하얀색과는 정반대의 색, 칠흑의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사내였다. 보나마나 기사들의 우두머리가 분명했다. 사내는 다가오는 기사들을 보며 어두운 녹색 머리카락을 묶었다. 

  길게 늘어진 머리를 정리하려는 목적은 아니었다. 저자가 기사들의 우두머리라면 붉은 드래곤을 조종하는 자가 분명할 것이기 때문에 어떤 자인지 알아보고 싶었다. 그러려면 시간을 끌 필요가 있었고, 선택지로 머리를 묶는 방법을 택했다. 이윽고 검은 갑주의 사내가 지나갔다.

 갑주와 같은 칠흑빛의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정리하여 깔끔하게 돋보이게 한다. 그리고 그런 모습에 어울리는 수려한 외모는 여자들에겐 선망의 대상, 남자들에겐 시기의 대상이다. 사내는 슬쩍 그를 훑어보며 지나쳤다.

  검은 갑주의 사내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한순간 알 수 없는 한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어두운 녹색 머리카락을 뒤로 묶으며 걸어가고 있는 사내와 시선을 마주쳤다. 검은 눈동자와 녹색 눈동자는 서로를 주시했다.

  “카단 님?”

  카단은 고개를 돌렸다. 기사는 의아하다는 얼굴을 한 채 카단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카단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투로 고개를 내저었다. 카단은 걷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이 녹색 눈동자를 가진 사내를 향했다. 사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카단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낯이 익은데…….”

  “예?”

  “……아무것도 아니다.”

  카단은 검은 빛을 띠는 어두운 녹색 머리카락을 가진 자를 기억 속에서 지우려했다. 하지만 곧 다시 뒤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분명…….”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이비는 턱을 괸 채 말했다. 나이프로 고기를 썰던 피오나의 손길이 멈췄다.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이비를 주시했다. 

  피오나의 얼굴을 가린 검은 로브의 후드가 움직였다.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던 이비는 손가락을 살짝 튕겼다. 그러자 빈 접시 위에 놓여있던 포크와 나이프가 둥실 떠올랐다. 이비는 집게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녀의 손가락 움직임에 맞춰 포크와 나이프도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비가 말했다.

  “몇 번이나 친해지려고 해봤는데 좀처럼 기회를 안 줬잖아요. 그래서 언니라고 부르면 기회를 주진 않을까 해서요. 괜찮죠?”

  피오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비는 이정도 반응을 끌어낸 것만 해도 충분히 성과가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녀가 칼브람 용병단에 들어온 뒤로 쭉 지켜봤다. 피오나는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걸거나 다가가지 않았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자리를 피하는 일이 태반이었다. 이비는 해맑게 웃으며 능숙한 손놀림으로 고기를 썰어 입안에 넣는 피오나를 바라보았다.

  동작 하나하나가 절제되어있고 우아하다. 이비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해보였다. 보면 볼수록 특이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상대가 누구든지 절대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건 당연하고, 어떤 행동을 하던 고고함과 기품이 느껴진다. 걷는 것, 먹는 것 하나하나에서 그러한 것들을 느낄 수 있다. 이비는 피오나가 귀족이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높은 집안의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피오나가 보여주는 모습 하나하나가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피오나가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거 계속 쓰고 있으면 안 답답해요?”

  이비는 피오나가 쓰고 있는 후드를 가리켰다. 피오나는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비는 피오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이비의 시선을 마주보았다. 이비가 말했다.

  “머리색 같은 거 때문이면 도와줄 수 있는데. 머리색 바꾸는 건 엄청 쉽거든요.”

  이비는 피오나의 어깨가 흠칫 떨리는 것을 보았다. 혹시나 해서 넌지시 던져본 말이었지만 피오나에겐 구미가 당시는 화제인 듯했다. 이비는 설렘을 안고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는 것처럼 보이던 피오나의 입술이 움직였다.

  “염색 정도로는 안 되던데. 다른 방법이 있을까?”

  “영구적은 아니어도 반영구적은 가능하죠.”

  “……혹시, 눈동자 색도 가능해?”

  “못할 건 없죠. 만들어 드릴까요?”

  “가능하다면.”

  “그럼 조건이 하나 있는데…….”

  이비는 씩 웃었다. 피오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의문을 가지고 있다 말하는 피오나를 향해 이비가 말했다.

  “언니 얼굴을 보여줬으면 하는데요.”

  제법 긴 정적이 흘렀다. 이비는 자신이 뭘 잘못한 게 아닐까하는 심각한 자기혐오에 가까운 자책을 하며 피오나의 반응을 살폈다. 탁자 위에 올라와있던 피오나의 손가락이 탁자를 톡톡 건들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이비는 피오나가 갈등하고 있다는 걸 느꼈고, 그녀가 마음을 정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마침내 피오나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래. ……대신.”

  환호성을 내지르려던 이비는 아직 피오나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알고 기다렸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네! 약속해요!”

  피오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덩달아 이비도 일어섰다. 피오나는 이비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이비는 피오나를 따라 마을의 하나밖에 없는 여관으로 향했다.

  콜헨은 작은 마을이다. 마을 사람도 그리 많은 편이 아니고, 찾아오는 사람도 많지 않은 외진 곳이기에 여관 사업이 원활하게 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관이 존재하는 이유는 여관 주인이 가진 소박한 꿈 때문이다. 여관 주인은 여행자들이 지치고 힘든 몸을 쉬게 할 집을 마련하고자했다. 그래서 거의평생을 모은 돈으로 콜헨에, 자신의 고향에 여관을 세웠다.

  여관은 2층으로 이루어져있다. 1층은 여관의 주인인 에른와스와 여신의 무녀라고 하는 티이가 지내는 두 개의 방과 거실, 부엌이 있다. 그리고 2층은 총 4개의 방이 있다. 평소에는 텅 비어있는 일이 자연스러운 방이지만 지금은 4개의 방 모두 만원이다. 방의 주인들은 하나같이 칼브람 용병단의 용병들이다. 그리고 그 중 하나의 방은 피오나의 것이기도 하다.

  피오나의 방은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이비나 벨라의 방과는 달리 이렇다 할 가구도, 장식물도 찾아볼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창문을 가린 검은 커튼과 하얀 침대보가 깔린 침대, 그리고 옷장뿐이었다. 

  이비는 그 흔한 화장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는 거울도  없다. 이비는 마치 피오나가 스스로의 모습을 자신에게마저 감추고 있다는 느낌을 진하게 받았다. 피오나가 천천히 로브의 후드를 벗기 시작했다. 단추를 풀어헤친 그녀는 곧바로 후드를 뒤로 넘겼다. 

  피오나는 로브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이비를 향해 돌아섰다. 

 

  “딱히 부작용은 없을 거예요. ……아, 눈 때문에 약을 좀 강하게 해서 시력이 많이 떨어질 거니까……, 이거요.”

  이비는 피오나에게 테두리가 반 밖에 없는 안경을 내밀었다. 피오나는 잘 보이지 않는지 몇 번 허공에 헛손질을 했다. 안경을 받아 든 그녀는 바로 안경을 썼다. 익숙하지 않은 물건을 다루기 때문인지 어색한 모습이 엿보인다. 

  시력이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생활하는데 지장이 있는 건 아니었다. 이비가 말했다. 

  “그 안경은 수시로 시력을 보정해줄 거예요. 처음에는 생활하기 편한 정도에 그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예전 같이 볼 수 있을 걸요? 또, 눈동자 색깔은 단순 약물로 바꾸는 건 한계가 있어서 마나로 겉을 덧씌워놓은 거나 마찬가지여서 ‘마나 번(Mana Bun)’, ‘마나 이터(Mana Eater)’계열의 공격을 받으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도 있어요. 언니가 뭘 하려는 지는 대충 짐작이 가지만, 그렇기에 ‘인퀴지터’들과 만나면 조심하는 게 좋아요. 알겠죠?”

  피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비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피오나를 훑어보았다.

  찬란하게 빛나는 금색의 긴 머리카락은 용광로에서 방금 녹여낸 황금이 발하는 눈부신 빛과 불의 뜨거움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박동하는 불꽃의 생명력을 가진 듯 화려하다. 그리고 차가운 푸른 바다가 새하얀 백사장과 만나 얼음 같이 투명한 푸른빛을 띠는 것처럼 파란 눈은 제법 무뚝뚝하게 보이는 눈매와 만나 아름다움을 더한다.

  너무 높지 않게 오뚝하게 솟은 코는 어떤 위치와 각도에서 보더라도 결점이라 할 만한 건 찾을 수 없다. 콧날 아래로 이어지는 아주 연한 보랏빛을 띠는 입술은 너무 두껍지도 얇지도 않고 마주하는 상대가 누구든지 훔치고 싶다는 탐욕을 끌어낸다. 

  전체적으로 군살이 없는 갸름한 얼굴은 어두운 곳에서도 잿빛이 아닌, 투명도가 높은 하얀 피부와 좌우대칭이 완벽한 이목구비로 인해 세상에는 다시없을 아름다운 조각상을 연상시킨다. 또한 오른쪽 눈 밑의 검고 작은 점은 아름답기만 했을 조각상에 매력을 불어넣어 활기를 갖게 한다. 

  수수해 보이는 하얀색 와이셔츠와 반물색에 가까운 긴바지는 활동성을 고려한 것인지 몸에 딱 달라붙지 않는다. 셔츠의 단추를 목깃까지 잠그고 소매의 단추도 풀어져 있지 않는 모습을 보면 무척 단아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그저 자신을 드러내는 걸 무척이나 싫어하는 사람일 것이다. 

  또 노골적이 아니라 은연중에 드러나는 군살이 없고 균형 잡힌 몸으로 보아 자기관리가 철저하다는 걸 말해준다. 이비는 피오나에게서 풍겨지는 느낌이 마치 리시타라는 사내와 무척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비는 배시시 웃었다. 

  처음에는 인퀴지터도 아니면서 마나를 태우는 모습에 호기심이 생겼었지만, 지금은 그저 식구가 늘었다는 사실이 이비의 기분을 들뜨게 한다. 이비는 로브의 단추를 궤고 있는 피오나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마을로 가서 눈도장이나 찍고 오셔야죠, 언니!”

  등살을 떠미는 이비를 쳐다보던 피오나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비는 어떻게 해서든 피오나의 얼굴에 표정이 생기는 걸 보고 싶었고, 그러려면 관계를 만드는 것에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해 마을로 보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피오나는 혼자 있고 싶다는 뜻을 피력하듯 이비의 힘에 저항했다. 그렇게 그녀들의 실랑이가 계속되고 있을 때 뿔피리 소리가 들렸다.

  청아하면서도 웅장하게 울리는 뿔피리 소리는 이비와 피오나의 주의를 끌었다.

  “……소집을 알리는 뿔피리?”

  이비는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마을의 수호신이라 불리던 거대한 거미의 포효소리가 마을을 덮쳤다. 

  때아니게 울려 퍼진 거미의 포효 소리에 마을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적막이 흘렀다. 그 속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용병들의 모습만이 이질감을 부각한다. 

  이질감이 가득한 용병들의 선두에 선 셀브림은 한 달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제법 그럴싸하게 모습을 갖춘 무기고를 열며 소리쳤다. 

  “2, 3소대는 발리스타 운용해서 종탑을 포위한 1소대를 지원한다. 각 발리스타 사수는 위치 선정, 거리, 풍속 계산하고 부사수는 사수를 도와 사격 준비를 마쳐라. 나머지 전투병은 사수가 선점한 위치에 발리스타 옮겨놓고 바로 종탑으로 간다. 이동해!”

  지시를 내린 셀브림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병사들의 모습을 확인하며 무기고에서 발리스타를 꺼내는 것을 도왔다. 병사들과 함께 발리스타를 꺼내 선정된 위치에 이동시킨 셀브림은 발리스타의 사수와 부사수를 제외한 2개 소대 인원을 정렬시킨 채 기다렸다. 셀브림은 정면을 주시했다. 멀리서 뛰어난 승마기술로 말을 몰고 다가오는 아실의 모습이 보인다. 셀브림이 아실과 그의 뒤편에서 종탑을 포위한 소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사격 준비 끝났다고 전해.”

  셀브림의 뒤에 서 있던 기수는 녹색 깃발이 달린 깃대를 높게 들어올렸다. 그러자 다가오던 아실은 한손에 들 수 있는 노란 깃발을 좌우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셀브림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사격 대기?”

  셀브림은 의아해하며 아실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셀브림은 아실이 다가와 말의 고삐를 잡아당기기도 전에 쏜살같이 물었다.

  “뭐야, 사격 대기라니? 무슨 일이야?”

  “워, 워. 전투 시작하면 불같은 건 여전하네. 좀 진정하라고.”

  “빨리 말해.” 

  “단장 지시사항이야. 대기하라고 하시네.”

  “뭔……?”

  “무녀 아가씨가 저 괴물을 설득해보겠다고 하는 바람에 잠시 대기라고.”

  셀브림은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그게 무슨 좆같은 개소리야? 그러다 놓쳐서 작전 범위만 넓히는 거 아니야? 법황청이랑 가까워서 이비가 큰 마법을 사용하지도 못할 텐데, 저 거미는 이동속도도 빨라서 쫓는 것도 한계가 있어.”

  “일단 사격 대기로 알고 있어. 3소대는 나를 따라서 종탑 포위에 합류한다. 셀브림. 지금부터 10분. 정확하게 10분 뒤에 사격 중지 명령이 내려오지 않는다면 쏴버려. 인지?”

  셀브림은 찜찜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3소대, 이동하자.”

  셀브림은 자신의 소대를 이끌고 종탑을 향하는 아실의 모습에서 종탑을 기어 올라가는 거미의 모습으로 시선을 옮겼다. 2소대와 발리스타가 자리 잡은 곳과 종탑가지의 거리는 적어도 1킬로미터 이상. 아무리 실력이 출중한 사수라도 정밀한 조준을 하는 건 어렵다. 불만 가득한 듯 혀를 차며 셀브림은 속으로 시간을 쟀다. 

  그리고 정확하게 10분 뒤, 마법으로 강화 된 발리스타의 사격이 시작됐다. 


  검은 로브가 펄럭인다. 

  바람 같은 화살은 로브를 스쳐지나가고 다음 순간 아찔하게 높게 올라간 다리가 종탑의 돌벽과 놀의 머리통을 한꺼번에 박살낸다. 종탑을 이루는 돌벽이 포탄에 맞은 것처럼 박살나고, 놀의 두개골 가득 차 있던 뇌수가 터져 나오자 피오나는 다리를 내렸다. 그녀는 티이를 돌아봤다. 티이는 2층에 와서 만난 첫 번째 놀의 머리통이 깨지는 모습을 본 이후로 피오나가 남은 일곱 마리를 모두 죽인 지금에서도 구역질을 하고 있다. 피오나는 우아한 여인의 걸음걸이로 티이에게 다가갔다. 

  피 튀는 전투의 흔적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고고한 모습은 마치 피를 한껏 머금고 태어난 새빨간 장미를 떠올리게 한다. 피를 머금고 태어난 장미는 도도하고 고결하며, 절대 꺾여 부러지는 일이 없을 것만 같다. 

  티이 앞에 선 피오나는 티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티이는 혼미해지는 정신 속에서 피오나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한없이 부드러운 손길이 티이의 지친 몸을 끌어당긴다. 티이는 피오나의 오른손을 잡자 갑자기 힘이 솟는 듯한 착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후들거리던 온 몸은 점차 활력을 갖기 시작한다. 티이는 앞장서서 걸어가는 피오나의 등을 뭔가에 홀린 것처럼 바라보며 따라갔다. 마치 불꽃을 향해 맹목적으로 날아드는 나비를 보는 듯하다. 

  종탑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앞서가던 피오나는 중심을 잡기 위해 잠시 멈춰섰다. 그녀를 뒤따라오던 티이도 피오나를 따라 멈춰섰지만 중심을 잡지 못했다. 티이는 휘청거리다가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때 흔들림이 최고에 달했다. 

  거미가 종탑을 오르는 덕분에 부서진 석재와 목재들이 눈 오는 것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종탑을 만드는 데 사용했던 재료들이 부서져 내리며 만들어낸 먼지가 시야를 가린다. 피오나는 시야를 가리는 먼지를 손짓 한 번으로 몰아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주저앉아 있기는 하지만 티이의 몸에 외상은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다시 티이에게 다가갔다. 다가가 손을 내미려는 순간 몸을 전율케 하는 파공음이 들린다. 

  파공음은 정확하게 피오나가 서 있는 곳을 노리고 있었다. 피오나는 왼팔을 들었다. 

  티이가 목격한 건 피오나의 왼쪽 소매에서 새하얀 빛이 새어나오는 것뿐이었다. 피오나의 왼팔에서 빛이 새어나오는 순간 파공음을 만들어낸 발리스타의 거대한 화살이 날아들었고, 종탑 외벽이 뚫리며 날린 석재에 머리를 맞아 티이는 기절했다.

  피오나는 하얀 얼음에 뒤덮인 발리스타의 화살을 내던졌다. 들기에 벅차 보이는 발리스타 화살을 가볍게 내던진 피오나는 뒤늦게 기저란 티이를 발견했다. 

  옥상, 거대한 거미가 있는 그곳으로 데려가는 것보다 이곳에 놔두는 게 훨씬 안전할 것이다. 그렇지만 옥상으로 나가면 살아남을 확률이 생기지만 이곳에 놔두면 무너지는 종탑과 함께 죽음을 맞을 뿐이다. 피오나는 티이의 여린 몸을 두 팔로 안아들었다. 티이를 안은 채 피오나는 종탑의 정상을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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