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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Ep.1 고독한 폐허. 1

그락란라우
댓글: 2 개
조회: 1072
추천: 7
2015-10-18 03:28:36

  짐승의 으르렁거림이 어둠 속을 배회했다. 어둠은 그 소리에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또 다른 으르렁거림이 들려왔다. 같은 짐승이었다. 어느새 어둠은 짐승들의 날카로운 시선에 둘러싸여 있었다. 어둠을 되려 잠식해버린 시선들 사이에서 붉고 커다란 짐승이 몸을 일으켰다. 그를 따라 반대쪽에서 검고 커다란 짐승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붉은 짐승과 검은 짐승의 움직임에 살벌하던 짐승들의 시선이 사라졌다. 그들은 눈을 내리깐 채 그들의 우두머리의 행동에 집중했다. 그들은 명령만 떨어진다면 언제든지 상대방을 습격할 수 있는 준비를 끝마쳤다. 금방이라도 본능에 따라 서로에게 이빨을 들이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의 우두머리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거대한 짐승들이 지면을 두드리는 소리가 멈췄다. 두 짐승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부싯돌을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쌓아두었던 장작에 불씨가 튀었다. 불시는 장작을 먹어치우며 금세 불길이 되었다. 불길은 환한 빛과 함께 솟아올라 주변을 비췄다. 그러자 모닥불 앞에 앉아 있는 우락부락한 놀 두 명의 모습이 나타났다. 하나는 달빛도 별빛도 보이지 않는 밤하늘처럼 새까만 털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분화구에서 갓 터져 뿜어져 나온 용암처럼 시뻘건 털을 가지고 있었다. 


  말없이 모닥불을 바라보던 붉은 털의 놀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아 있던 검은 털의 놀이 쓰고 있던 견두 모양의 철가면을 벗었다. 철가면 뒤에 숨겨져 있던 놀의 얼굴은 크고 작은 흉터로 가득했다. 그는 녹색 안광을 흩뿌리며 달이 뜨지 않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털의 놀이 허리춤의 작은 가방에서 곰방대를 꺼내며 말했다.


  “왜 그랬나?”


  검은 털의 놀은 그가 담뱃잎을 채워 건네준 곰방대에 불을 붙였다. 연기를 폐부 깊숙이 찔러 넣고 천천히 내뱉었다. 붉은 털의 놀이 새로운 곰방대를 꺼내 불을 붙였다. 붉은 털의 놀이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검은 털의 놀은 그제야 흉터투성이의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뭐를?”


  붉은 털의 놀이 연기를 뱉으며 말했다. 


  “종탑. 인간들이 있는 곳에 왜 아이들을 보냈느냐고 물었네.”


  “자네라면 왜 그랬는지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검은 털의 놀이 붉은 털의 놀을 쳐다보았다. 그의 녹색 눈동자가 발하는 안광을 샛노란 눈으로 마주한 채 붉은 털의 놀은 연기를 다시금 들이켰다가 내뱉었다. 


  “마족과 협력하기로 했나?”


  “아직 결정한 건 아니지. 자네의 의견을 듣지 못했으니까.”


  붉은 털의 놀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입술을 들어 기다란 송곳니를 손톱으로 톡톡 건들었다.


  “언제부터 우리가 마족 따위와 협력을 했나, 응? 형제.”


  “언제까지고 가운데 서 있을 수는 없는 게지, 형제여. 인간들은 그들과 닮은 것이 아니면 모조리 배척하는 우둔한 생물이네. 그런 자들이 패권을 쥐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설마 우리가 무사하리라 생각하나? 물론 자네와 나는 무사하겠지. 하지만 종족은? 절대 그렇지 못해. 저들이 했던 짓을 생각해보게. 저들은 저들에게 우호적이던 종족마저 마족으로 몰아 몰살시킨 자들이야. 우둔함이 도를 넘은 종족이지. 이건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론이야. 부디 자네도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검은 털의 놀은 이를 건들고 있는 붉은 털의 놀을 쳐다보았다. 붉은 털의 놀은 여러 감정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보이지 않는 달을 향해 담배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그래, 맞아. 인간들은 배척을 미덕으로 아는 우둔한 생물의 정점이지. 하지만 마족이라고 다르다고 할 수 있나? 생각해봐, 형제. 저 가여운 리자드맨들, 마족의 일원으로서 오랜 시간 그들에게 봉사했지. 안 그래도 적은 수의 종족이 자신들이 속한 틀을 지키겠다고 누천년 피를 흘려왔어. 그런데 그 결과가 뭐였는지는 자네도 잘 알지 않은가? 그들은 종족의 보존을 위해 잠깐의 휴식을 원한 거였어. 하지만 그들의 수명이 다한 거라 판단한 마족은 매몰차게 내쳤지. 그래서 지금은 그들을 이끌어줄 지도자도, 온전한 보금자리도 없이 멸종의 위기에 놓였네. 리자드맨만이 그런 게 아니야. 렛맨, 임프, 트롤……, 셀 수도 없이 수많은 종족들이 멸시받고 배척받고 있네. 그저 힘이 부족할 뿐인 것을, 그들은 성전에 참여하지 못하는 악한 자들이라 부르지. 힘이 없으면 악한가? 아니면 그것이 죄인가? 아니야. 약한 건 죄가 아니야. 약한 것도, 강한 것도 모두 정당한 거지. 다만 강한 자는 약자를 핍박하지 않고 그들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자주적인 선에서 도와주어야 함이 옳은 것이고, 약자는 스스로가 약하다는 것을 빌미로 강자를 이용하려 하지 않는 것이 정당한 것이지. 하지만 이 세상 어떤 종족이라도 강자는 강자이고, 약자는 약자일뿐이지. 강자는 약자를 핍박하고 배척하는 언행과 행동이 지배적이고, 약자는 그것에 순응하거나 압제에 저항하지. 마족도 결국 똑같아. 인간과 하나도 다르지 않아. 그들은 언어와 피부색만이 다를뿐, 나온 배가 같은 형제네. 지금은 샤칼의 지배아래 있는 마족의 상황이 좋아 보이겠지. 하지만 샤칼이 죽고, 자네도 죽고, 나도 죽으면 우리 종족은 그들처럼 배척받을 거야. 멀리 쫓겨나 배고픔과 추위에 하나둘 죽어가겠지. 자네의 행동은 무척 경솔했어.”


  경청하고 있던 검은 털의 놀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가 곰방대의 물부리에서 입을 뗐다. 그러고선 붉은 털의 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녹색 눈동자는 씁쓸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의 입이 열렸다. 


  “그렇다고 이렇게 늘 피하기만 할 셈인가? 인간과 마족 중 하나가 패권을 쥘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 스스로의 자주권을 인정받자 이건가? 형제, 형제. 형제! 친애하고 동경하는 내 친구여! 나는 자네의 이상에 동조하네. 그리고 자네를 정말 사랑하고 존경하지. 하지만 말이야, 변화가 없으면 결국 정체될 뿐이네. 정체는 도태의 다른 말이고! 우리가 언제까지 살아있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지금껏 오랜 세월을 살아남고, 수많은 격전을 치러 내 몸에 상처를 쌓아가면서도 한 번도 죽음의 그림자를 곁에 둔 적이 없네. 하지만 그런다고 죽지 않는다는 게 아니잖은가? 우리가 죽기 전에, 살아있는 동안! 종족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서는 자네와 내가 마족에게 협력하는 수밖에 없네. 진정 모르겠는가? 패권은 결국 마족이 쥐게 될 걸세. 인간은 서로 분열하기에 이르렀지만, 마족은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네. 적어도, 인간이 전의를 상실하고 항복할 때까지 마족은 분열되지 않을 테야. 또한! 우리가 살아있는 한 우리 종족의 권위에 도전할 자, 감히 누가 있겠는가? 오거? 고블린? 오크? 그들 모두가 함께 덤빈다고 하더라도 우리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해내고도 남지. ……나를 따라주게. 우리 종족은 절대적인 지지와 함께 다음 세대의 패자의 자리를 차지할 걸세.”


  붉은 털의 놀은 한숨을 내쉬었다.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소리였다. 그는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그리고 그것은 검은 털의 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서로를 적대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오랜 시간 뜻을 함께한 두 친구는 마침내 갈림길에 섰다. 이 갈림길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하는 순간,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갈림길의 선택지의 최악의 결과 또한 알고 있다. 종족을 보전하기 위한 숭고한 의지를 가진 자들의 견해차이가 결국은 파멸로 인도할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모순적이다. 붉은 털의 놀이 으르렁거렸다. 그가 곰방대를 슬며시 움켜쥐었다.


  “오랜 친구…… 아니, 내 영혼의 반쪽, 형제여. 아직도, 피가 그리운가?”


  검은 털의 놀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손에는 얼마나 많은 숭고한 자들의 피가 묻었는지 모르네. 각기 다른 이상을 위하던 자들의 피를, 셀 수도 없이 많이 묻힌 뒤에야 깨달았네. 더 이상 무고한 피를 흘려서는 아니 되고, 혹여 피를 흘리더라도 출혈을 최대한 막아야한다는 것도 말일세.”


  “자네의 길은 많은 피가 흐를 테야.”


  검은 털의 놀이 눈을 감았다. 그 또한 곰방대를 움켜쥐었다. 


  “이것이 내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의 마지막 출혈이 될 것이네.”


  “그 길에 마지막이란 단어가 존재할 성 싶은가?”


  “반드시. 내 그렇게 하고 말겠네.”


  “그렇담, 나의 몸뚱이부터 짓이기시게.”


  검은 털의 놀이 이를 악물었다. ‘결국 이렇게 되었는가……, 형제여. 어찌 그리도 매정한가? 어찌 이번만은 물러서주지 않는 것인가! 우리 모두가 죽어도 살 길은 이것뿐이거늘…….’ 그는 고개를 떨궜다. 붉은 털의 놀은 우수에 가득 찬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는 달도 별도 모습을 감춘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참으로 을씨년스러운 날일세.”


  바람이 불어왔다. 두 친구의 갈라진 길을 대변하듯 북해의 찬 기운을 가득 담은 바람이 두 사람을 감쌌다. 붉은 털의 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거들 중에서도 유달리 크고 강한 ‘블랙해머’와도 견주어도 될 정도로 거대한 몸체에는 흉터가 가득했다. 오랜 세월 크고 작은 수많은 전장을 본능이 이끄는 대로 휩쓸고 다니며 생긴 강함의 증거였다. 앉아 있을 때는 잘 보이지 않았던 흉터들이 그가 몸을 일으킴에 맞춰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붉은 털의 놀은 거대한 몸체를 일으키면서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가 곰방대의 재를 털어냈다. 그의 행동에 검은 털의 놀이 눈을 감으며 말했다. 


  “이건 내가 가짐세. 그래도 되겠지?”


  곰방대를 두 손으로 꼭 붙잡고 있는 검은 털의 놀을 보며 붉은 털의 놀이 미소 지었다. 씁쓸함이 묻어나는 미소였다. 붉은 털의 놀이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러게.”


  붉은 털의 놀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모닥불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검은 털의 놀은 한동안 고개를 숙인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지켜보고 있던 새까만 눈동자와 어두운 적색 빛이 도는 털을 가진 놀이 다가왔다.


  “검은 치프틴. 붉은 치프틴께서는…….”


  “렘페이지.”


  “예.”


  “지금부터 치러질 전쟁은 우리의 생애 그 어느 때보다 숨 가쁘고 정신없을 거다.”


  렘페이지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오감이 예민한 놀 종족이었지만 우두머리끼리의 진중한 대화를 엿들을 만큼 무신경하지는 않았다.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무산되었다. 검은 털의 우두머리는 그답지 않은 힘없는 모습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생각과 행동을 너무나 잘 알지. ……시작한 이상 그는 모든 수를 동원해 나를 막을 것이다. 그의 적이 나이기 때문에, 더욱 악착같이. 물론 두고만 보고 있는 건 정말 멍청한 짓이지. 후……. 렘페이지. 우리는 성역으로 향한다.”


  “성역…… 말씀이십니까?”


  되묻는 렘페이지를 향해 검은 털의 치프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까지와는 달리 강인한 투지가 그를 감싸고 있었다. 


  일어선 검은 치프틴의 풍채는 렘페이지를 왜소하게 보이게 했다. 붉은 치프틴과 신장 차이가 없는 검은 치프틴의 녹색 안광을 흩뿌리는 두 눈은 렘페이지의 눈보다 인간 남자의 머리 네 개를 쌓아올린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그의 어깨는 렘페이지보다 몇 뺨 정도 더 넓었으며, 몸을 장식하는 근육은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크고 발달되어 있었다. 렘페이지는 두 치프틴을 지켜볼 때마다 중압감을 느낀다. 그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나도 비슷하다. 풍채, 기백 어느 하나 빠진 것 없이 모두가 다 그렇다. 심지어 생각마저 똑같아 지휘관들을 종종 당혹케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두 치프틴은 단 한 가지가 똑같지 않아 등을 돌렸다. 검은 치프틴이 철가면을 썼다. 


  “골 빈 거미들이라도, 어딘가 쓸데는 있겠지. 준비를 서둘러라. 그리고 ‘딤그레이’와 ‘에버화이트’를 불러와라. 그도, ‘그들’을 불렀을 테니.”


  검은 털의 치프틴을 상징하는 새까만 깃발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



  허크는 한 번의 칼질로 수십 명의 고블린을 썰어버리고 대검을 멨다. 그는 이번 전장에 투입 된 이후로 계속 느껴지는 이질감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하지만 커다란 변화는 없었다. 그는 땀이 차는 손으로 옷가지를 매만졌다. 이상했다. 지금껏 많은 전장을 돌아다녔지만 이렇게까지 이질적인 전장의 공기는 처음이었다.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대검은 마치 벼락과도 같은 속도로 휘둘러져 인간 병사를 공격하던 고블린들을 뭉텅이로 썰어버렸다. 고블린들은 무엇이 자신들의 몸통을 반으로 잘라버렸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눈을 감았다. 허크는 대검을 늘어뜨렸다. 문득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먼지구름이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먼지구름은 가까운 곳에서 일지 않았다. 단번에 좌익에서 피어오르는 것이라 확신한 허크는 오거가 내려치는 둔중한 망치를 몸을 틀어 피했다. 그는 망치의 머리를 밟고 뛰어올라 오거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5미터를 넘는 오거의 어깨 위에서 내려다본 전장의 상황은 괜찮은 편이었다.


  상당한 전력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마족을 밀어내고 있었다. 오거가 어깨에 올라탄 허크를 떨어뜨리기 위해 두 팔을 들어올렸다. 허크는 귀찮다는 듯 대검을 집어던져 대포로 인간 병사를 조준하던 고블린을 죽였다. 자유로워진 두 팔로 오거의 머리통을 붙잡은 그는 그대로 목을 꺾어버렸다. 쓰러지는 오거의 어깨 위에서 허크는 글렌의 부대가 전투를 이어가고 있는 좌익을 바라보았다. 얼핏 보았던 것과는 달리 먼지구름은 상당히 컸다. 부대의 전투를 가려버릴 정도로 피어오른 먼지구름이 심상치 않았다. 허크는 어떻게 하면 먼지구름이 저렇게까지 피어오를 수 있는지 의아해하며 오거의 시체를 걷어찼다. 그는 고블린의 몸통을 부수다시피 박살내버린 채 땅에 박힌 대검을 집어 들었다.


.  인간 남성 두 명을 곧게 세워 이어붙인 것 같이 육중한 대검이 고블린들의 목숨을 세기 어려울 정도로 앗아갔을 즈음 허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상했다. 마족어로 무어라 지껄이며 창을 내지른 고블린의 얼굴을 주먹으로 뭉개준 뒤 그는 얼굴에 튄 피를 닦으며 전장을 둘러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허크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놈들이 없다!’


  언제나 전투에 돌입하면 인간 병사를 학살하던 고블린 장교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유일하게 단번에 목을 치는 게 불가능했던 자들이 없다는 사실과 좌익에서 지금까지도 피어오르는 먼지구름이 오감을 저리게 했다. 허크는 충혈된 눈으로 적을 향해 달려가는 병사의 목덜미를 낚아채며 소리쳤다.


  “이봐! 고블린 장교들은 어디 있냐!”


  병사는 허크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허크는 인상을 쓰며 병사를 내동댕이쳤다. 바닥을 몇 번 구른 병사는 그대로 기절했다. 허크는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날카롭게 곤두선 오감이 이번 전장은 위험하다는 신호를 보내온다. 


  포탄이 떨어져 병사들의 몸뚱이를 찢어버렸다. 미리 준비하고 있어 파편을 대검으로 막아낸 허크는 고블린들이 쏘아대는 포격에서 벗어날 필요성을 느꼈다. 그가 혀를 찼다.


  ‘이럴 때는 용병단이 그리워.’


  대검의 날이 땅과 수평으로 되게 고쳐 쥐고 그대로 고블린들의 몸뚱이를 향해 휘둘러 날렸다. 마치 공처럼 날아오는 고블린들을 손으로 쳐낸 오거를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오거는 자신만만하게 허크의 대검을 향해 창 자루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함께 잘렸다. 허크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인간 병사를 학살하고 있는 그렘린 기계를 향해 이동했다.


  그렘린들이 만든 기계를 박살낸 허크는 다시 격전지로 뛰어들려다 멈칫했다. 그는 자신이 부순 기계더미 위로 올라갔다. 대검을 비스듬하게 세워 기계더미에 꽂은 그는 그 뒤에 몸을 최대한 밀착시키며 좌익과 우익의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우익은 로췌의 중장기병대가 돌입하여 승기를 잡았다. 혼전의 와중에도 대열이 흐트러지지 않는 고블린들이었지만 로췌의 중장기병대 앞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허크는 피식 웃었다. 그의 전술은 적의 전술을 완벽하게 파훼했다. 그는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로췌와 그의 기병대의 난폭한 돌격을 지켜보았다. 


  적의 포격에 대비해 두꺼운 방패로 방진을 이룬 보병이 진입하고 그들의 사이사이에 끼어있던 궁수와 장총병들이 돌격을 방해하고 방진에 구멍을 만든다. 이어서 보병은 적의 첫 열과 만나기 직전 한참 뒤에서 속력을 붙이던 중장기병을 위해 순간적으로 수 미터 간격을 벌린다. 이후 벌어진 간격을 통해 3기 내지는 4기의 랜스를 든 중장기병이 통과하며 당황한 적을 뭉갠다. 보병은 기병의 파괴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점진적으로 거리를 벌리기 시작하고, 또한 적의 포격이 중장기병에게 집중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중장기병의 뒷열에서 따라오던 용기병들이 마치 벌떼처럼 퍼진 뒤 사방에서 적을 향해 돌격해 시선을 빼앗는다. 중장기병은 이러한 병사들의 엄호 속에서 수 회, 수십 회를 반복해서 돌격한다. 결국 말이 지쳐 더 이상 달릴 수 없게 되면 바로 다른 말로 갈아타고 또 다시 돌격한다. 


  허크는 아름답다고 표현해도 좋을 로췌의 전술에 감탄했다. 로췌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 마족의 방진을 완전히 와해시켰다. 문득 허크는 로췌가 과연 진지에서 전황을 지켜보고 있을지, 아니면 스스로 중장갑을 입고 달려들었을지 고민해보았다. 그는 피식 웃었다. 기병의 돌격이 계속되고 있는 와중에 한 마리의 말과 중장갑을 걸친 기수 하나가 적진을 마치 산책로처럼 누비고 있었다. 그자는 온통 새까만 갑주를 걸치고 있었다. 그의 말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중장기병의 랜스를 들고 보병의 창처럼 휘두르고 있었다. 어찌나 힘이 센지 그가 휘두른 랜스에 맞는 것은 고블린이고 오거고할 것 없이 오체가 박살나며 멀찌감치 날아갔다. 


  “여전히 무식한 놈이네. 저게 여자라니……, 믿기지가 않는다.”


  우익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자 허크는 좌익을 돌아보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먼지구름이 심해졌다. 먼지구름은 전황을 파악하는 걸 방해했다. 


  ‘저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군.’


  쏟아지는 포격 속에서 좌익의 전황을 주시하고 있던 허크는 먼지구름이 점차 옅어지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는 집중했다. 그리고 먼지구름 속에서 늑대인지 개인지 모를 머리통을 달고 있는 생물을 발견하고 어이가 없었다. 


  “지랄, 설마?”


  그러자 거의 동시에 어떤 병사가 악에 받쳐 소리 질렀다.


  “놀!”


  그의 외침에 허크를 포함한 거의 모든 병력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포효를 내지르며 달려드는 놀의 모습에 허크는 이를 갈았다. 병력차에도 불구하고 마족이 뒤로 밀려나던 이유를 알았다. 그들은 인간들이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깊게 유인한 것이다. 그리고 충분히 유인했다 생각되자 필살의 패를 꺼내들었다. 


  “후퇴! 후퇴! 전군 후퇴! 놀이다! 놀 종족이 마족에 가담한다!”


  기사 한 명이 외쳤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똑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검을 뽑아든 허크는 기계더미에서 뛰어내렸다. 그제야 이 전장에 와서 느꼈던 이질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허크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씨발! 놀이라니! 이거 완전 독박 썼잖아!”


  문득 허크는 좌익과 중앙에도 놀이 모습을 드러냈다면 우익에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하늘을 까맣게 물들인 그렘린 기술자들의 정수에 넋이 나갔기 때문이다. 


  “비행정이다!”


  허크의 욕지거리와 동시에 누군가가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깜짝 놀라 위를 올려다본 허크는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방금 전 이질감을 느끼게 하던 것이 ‘놀’이라는 종족 때문인지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지금 저 비행정 중 하나에 진짜 ‘이질적인 것’이 타고 있다. 


  몇몇 전장을 떠돌던 중 마족 기술의 결정이라 불리는 저 비행정이 폭탄을 다발로 퍼붓고 갔던 적이 있었다. 그 전장에서 허크는 처음으로 광기를 마비시킬뻔한 죽음의 공포에 직면했었다. 그리고 지금 그때의 악몽이 떠오르게 만드는 수십 척의 비행정은 머리 위를 날며 폭탄 대신 ‘놀’이라는 생물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파공음과 함께 허크 바로 옆으로 놀 한 마리가 떨어졌다. 상공 백여 미터 위에서 대지를 흔들어버릴 정도의 충력량과 함께 떨어진 놀이 몸을 일으켰다. 


  2미터가 넘는 허크를 어린애처럼 보이게 하는 압도적인 거대함을 가진 놀이었다. 온 몸이 새하얀 털로 뒤덮인 놀은 완벽한 전투를 위해 순백의 미늘갑주로 무장하고 있었다. 놀이 몸을 일으키자마자 하늘에서 그의 몸체만한 자루와 바위 같은 크기의 머리를 가진 망치 하나가 떨어졌다. 전체적으로 새까만 색인 망치는 머리에 알 수 없는 붉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 찰나 허크는 육중한 대검에 모든 체중을 실어 휘둘렀다. 


  풍압만으로 땅에 상처를 입힐 정도의 힘이 실린 공격을 놀은 투쟁본능이 이끄는 대로 떨어진 망치를 붙잡아 기다란 자루로 어렵지 않게 막았다. 하지만 충격을 완전히 상쇄시키지는 못해 수 미터를 미끄러지듯 밀려났다. 놀의 새하얀 눈동자가 번뜩였다. 허크가 입매를 비틀었다.


  ‘피아르스피어의 광란과 부딪치고도 상처하나 없다니……!’


  놀이 투쟁과 살의에 가득 찬 눈으로 허크를 쏘아보았다. 순간 허크는 대검을 들었다. 그 위로 망치가 떨어졌다. 그리고 망치가 내려쳐진 순간 수백 킬로그램의 화약으로도 낼 수 없는, 귀청을 터트리는 소리와 함께 주변 일대가 대폭발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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