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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잭스X소나 팬픽-가로등과 별 38화

아이콘 강철안개
댓글: 3 개
조회: 2216
추천: 4
2020-02-16 11:35:04


#. 병실

 잭스가 불타고 있었다.

 “끄…아아아아아!”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그는 불타고 있었다. 예의 그 푸른 불꽃이 그의 전신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불길에 휩싸인 그의 모습은 끔찍했다. 그리고 그것을 태양빛처럼 찬란한 황금의 빛무리가 막고 있었다. 마치 우리에서 튀어나오려 발악하는 야수를 억지로 틀어막고 있는 것만 같았다. 

 퍼엉!

 “꺅!”
 “조심하세요! 집중을 흐트러뜨리면 안 됩니다.”

 빛무리 주변에서 간헐적으로 푸른 불꽃이 튀자 여사제들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녀들은 비명을 지를지언정 맡은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들을 독려하고 있는 레오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굵은 쇠사슬에 침대째로 묶인 채 타오르는 잭스의 모습은 너무나도 처참했다. 반쯤 의식이 없어진 그가 고통으로 울부짖을 때마다 레오나의 마음도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몇 시간 전 평화로웠던 시간을 비웃기라도 하듯, 상황은 시시각각 나빠져 가고만 있었다. 잭스의 몸에서 불꽃이 처음 피어올랐던 건 불과 30분 전이었다. 허나 지금까지의 그 30분은 마치 3년 이상으로 길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 불꽃이 어찌나 맹렬하게 타올랐던지 레오나를 비롯한 솔라리 사제단은 앞뒤 잴 것도 없이 가장 강력한 보호의 수단인 ‘굳은 맹세’의 기도문을 읊고 있었다. 

 강력하지만 준비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굳은 맹세’의 기도문을 이토록 빨리 읊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베사리아의 혜안 덕분이었다. 그녀는 잭스가 오늘 밤이 최악의 고비라고 했고 그 예상은 정확했다. 만반의 준비를 해뒀던 것이 불행 중 그나마 다행이었다. 

 순간, 갑작스럽게 빛무리를 뚫고 다시 푸른 불꽃이 치솟았다.

 “이런……!”
 “내가 막겠네!”

 뒤에서 마력 보충용 영약을 비커째로 한 사발 들이킨 맨드레이크가 거대한 마력 덩어리로 불꽃을 찍어 눌렀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푸른 불꽃을 두른 잭스와 맞붙어 본 그였다. 에스트렐인지 발싸개인지 하는 놈들에게 영문도 모르고 조종당했을 때의 기억이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거지같은데, 그게 도움이 되는 상황에까지 처하니 참으로 오묘한 기분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불꽃은 마력과 생명력을 연료 삼아 타오르네!” 맨드레이크가 다시 한 번 불꽃을 마력 덩어리로 찍어 누르며 외쳤다. “어수룩하게 막았다간 불쏘시개만 주는 꼴이야! 불꽃이 튀어나오는 쪽에 온 힘을 집중하게!”
 “그게 말처럼 쉽습니까!”

 레오나가 짜증스럽게 소리치면서도 맨드레이크의 말대로 행동했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주문인 건 맞았다. 지금 기도문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불꽃이 삐져나오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온 힘을 다하고 있는데 거기서 또 온 힘을 다하라니, 욕이나 안 먹은 게 다행이었다. 다행히 맨드레이크가 작정하고 가세하고, 레오나도 기도를 유지하는 틈틈이 그를 보조하며 불꽃은 종전에 비해 많이 사그라진 상태였다. 적어도 잭스의 모습이 보일 정도로 꺼지긴 했으니 말이다. 

 옷이나 침대 따위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오로지 그의 몸만 태우고 있는 푸른 불꽃은, 역설적이지만 그가 아직 숨이 붙어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생명을 원천으로 타오르는 불꽃이니, 거꾸로 말하면 불꽃이 타오르는 이상 아직 생명이 남아있다는 반증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호전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고통에 몸부림치던 잭스가 의식을 놓아버렸으니 말이다. 

 “죄송…합니다…….”

 결국 기도하던 여사제 한 명이 고꾸라지고 말았다. 한계에 도달한 것이었다. 다른 여사제들의 상태도 거의 비슷했다. 챔피언인 레오나나 영약으로 잔뜩 도핑한 맨드레이크가 그나마 버티고 있었지만 그것도 문자 그대로 버티고만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내색은 안 하고 있었지만, 맨드레이크 역시 얼마 전 학회 습격 사건 때 혹사시켰던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은 상태였다. 그런 몸 상태로 영약까지 잔뜩 마셔버렸으니 뒤에 어떤 후폭풍이 올 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뒤를 걱정할 정도의 여유조차도 주지 않고 있었다.

 상황은 시시각각 나빠지고 있었다. 단지 그 나빠지는 시간이 조금 늦춰졌을 뿐이었다. 그녀와 사제단, 그리고 맨드레이크가 버티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잭스의 몸에서 불꽃이 피어오르자마자 베시리아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30분만 버텨 보라는 요청을 했기 때문이었다. 

 “콜민예 의원님!”
 “알아요!”

 잭스를 감싼 빛무리를 뚫고 다시 한 번 불꽃이 튀어 오르자, 레오나가 발작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그 외침엔 더는 버틸 수 없다는 좌절과 함께 뭐라도 해보라는 분노가 섞여 있었다. 그것은 병실 한쪽에서 미친 듯이 무언가의 주문식을 짜고 있던 베사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외침과 동시에 그녀는 나는 듯 돌진했고 잭스를 감싸고 있던 빛무리에 냅다 손을 쑤셔 넣었다. 방 안의 모든 사람이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을 땐, 이미 베사리아는 손을 뺀 상태였다.

 “하…하하, 어떻게든 늦지 않긴 했네요.”
 “…….”

 침묵이 흘렀다. 한시름 덜었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건 베사리아 뿐이었다.

 그녀가 무슨 수를 쓴 건지, 잭스를 태우던 푸른 불꽃은 거의 꺼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그 푸른 불꽃은 그녀의 왼손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손을 보던 두 명의 눈빛이 달라졌다. 한 명은 레오나였고, 나머지 한 명은 맨드레이크였다. 그 둘의 시선은 피부가 찢어질 정도로 마력이 빠직거리는 그녀의 왼팔에서, 그녀의 손목부터 시작해 팔 전체에 족쇄처럼 채워진 종잇장 같은 고리로 움직였다. 고대 문자가 빽빽이 빛나고 있는 그것은 딱 봐도 대단히 수상쩍었다. 이전에 베사리아가 농담 삼아 잭스에 팔에 채웠던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팔찌를 경계로 베사리아의 손은 푸른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잭스에게서 타오르던 푸른 불꽃이었다. 조금 다르다면 잭스의 몸에서 타오를 때보다 훨씬 짙은 색깔을 띠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찌나 그 농도가 짙은지, 베사리아의 손을 태우고 있는 그 불꽃은 불꽃이라기보다 끈적한 액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레오나는 서둘러 잭스를 살폈다. 그의 몸에서 타오르던 빌어먹을 불꽃은 종전에 비하면 훨씬 더 사그라져서, 이젠 잔불만이 조금 남은 상태였다. 하지만 레오나는, 아니 베사리아를 제외한 여기 모인 모두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레오나는 뭔가를 깨달은 듯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베사리아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허나 맨드레이크는 달랐다. 그는 생각을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짜악!

 순식간이었다. 그 노구에 어디 그런 힘이 있는지, 맨드레이크는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냅다 그녀의 뺨을 올려붙였다. 그의 눈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고, 수염 밑으로는 가느다란 핏줄기가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영약의 부작용으로 속이 만신창이가 된 것이 분명했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겐가?”
 “아파요, 맨드레이크.” 그녀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별일도 아니라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의 불꽃을 이쪽으로 옮겼어요. 저 불꽃은 마력을 연료로 삼으니까, 그렇다면 매개체를 통해 공간을 왜곡시킨 뒤에 내 쪽으로 마력의 농도를 짙게 하면 그 다음에야 뭐 삼투압 현상 일어나듯 자연스럽게…….”
 “누가 원리 따위가 궁금하다고 했나!”
 “친절하게 설명해줘도 뭐라 그래요…….”

 그녀는 볼멘소리로 투덜거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마치 장난치다 걸린 어린아이처럼, 뭐 별일이냐는 듯 말이다. 맨드레이크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불안감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가 그의 가슴을 찔렀다. 그 공포를 애써 지우려는 듯 그는 더 불같이 화를 냈다.

 “자네가 쓴 마법 따윈 나도 알아! 대체 저놈의 불꽃을 자네에게 옮겨서 뭐 어쩌려고 그러는 건가? 대신 희생이라도 할 참인가?”
 “설마요, 저도 목숨이 아까운데 그러겠어요? 딱 제 팔까지만이에요. 저 지금 팔에다가 마력을 엄청 집중시키고 있고, 보석도 몇 개 박아 넣어서 있는 대로 마력을 쑤셔놨으니까 어지간한 불꽃은 다 이쪽으로 넘어 올 거예요. 다행히 잭스는 가진 마력량이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그녀는 타오르는 왼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미리 마취제로 통각을 죽여 놔서 다행이네요. 우웩,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게 아플 것 같아요.”
 “콜민예 의원!”
 “끝까지 들어 봐요. 저도 이걸로 끝났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이건 일종의 시간 벌기에요. 잭스의 팔에 채워둔 팔찌와 제 팔찌 사이에 있는 공간을 몇 십 겹으로 왜곡시켜놨으니, 불꽃이 이쪽으로 넘어오기까지 시간이 꽤 걸릴 거예요. 그 전에 잭스를 살릴 해결방안을 찾아보자고요.”
 “자네 정말……!”
 “불꽃이 다 넘어가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레오나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사제복 사이사이로 벌건 화상 자국이 보였고, 표정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베사리아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피곤함 이상의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말했잖아요, 시간 벌기라고.” 레오나의 맥 빠진 소리에 베사리아가 왜 같은 말을 또 하게 하냐는 듯한 눈빛을 쏘아내며 말했다. “운이 좋다면 제 마력량이나 잭스의 생명력을 다 갉아먹기 전에 저 불꽃이 꺼질 수도 있겠지만, 그건 잭스의 현재 상태나 제 경험으로 봤을 때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이에요.”
 “…비관적인 전망도 있다는 뜻으로 들리는군요.”
 “그래봤자 뭐, 사이좋게 타죽기밖에 더하겠어요?”
 “방금 목숨 아까우니까 왼팔까지만 희생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말이 그렇단 거예요. 째째하시긴.”

 베사리아가 심드렁하게 말하자 레오나는 입술을 깨물었고, 그동안 이를 득득 갈고 있던 맨드레이크가 폭발하기 반 보 직전의 목소리를 씹어뱉듯 토해내기 시작했다.

 “난 전쟁학회의 상임의원으로서 전쟁학회의 재산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네, 콜민예 의원.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야.” 맨드레이크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으르렁거렸다. “자네의 재능과 지식, 마력 그리고 몸도 모두 전쟁학회의 일부고, 자네는 그것을 보존하고 보전해서 마법의 진보를 이끌 의무가 있어. 자네의 목숨은 자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단 말일세. 그런데 겨우 이따위 일로 목숨을 버릴 생각을 하는 겐가?”
 “이따위 일이라뇨, 잭스가 죽어가는데…….”
 “이따위 일이지. 이렇게 자기 목숨을 헌신짝처럼 버리는데.”

 순간 어린애처럼 부루퉁하던 베사리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맨드레이크의 말이 그녀의 뭔가를 건드린 셈이었다. 방금 전까지 어린애처럼 투덜거리던 그 모습은 가식이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그 모습도 그녀고, 지금의 이 모습도 그녀일 수도 있었다. 대리석처럼 핏기 하나 없이 매끄럽고 하얀 얼굴, 인간으로서 필요한 무언가가 결여된 그런 모습. 부서지고 깨진, 생기라곤 하나 없는 끝도 없이 깊은 어둠. 근육 하나 움직이지 않는 그녀의 표정에서, 오직 두 눈만이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건 제정신을 가진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잭스가 죽어가요.”
 그녀는 앞서 했던 말을, 이번에는 소름끼칠 정도로 조용하게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모인 거 아닌가? 왜 혼자 폭주하느냔 말일세.”
 “상황이 급박했으니까요.”
 “그래, 상황이 급박했으니 자기 목숨이라도 걸겠다 이건…….”
 “그럼요.” 베사리아가 맨드레이크의 말허리를 자르며 말했다. “필요하다면 그보다 더한 것도 걸 수…….”
 “우리는 이 빌어먹을 용병 놈을 구하기 위해 모였네!” 이번에는 맨드레이크가 그녀의 말허리를 자르며 분노에 찬 일갈을 내뱉었다. “여기 있는 누굴 희생해서가 아니라, 힘을 합쳐서 이 녀석을 구하려고 모였단 말이네, 콜민예 의원! 고작 자기 손이나 태우려고 우리보고 시간을 벌라고 했나? 자네가 그렇게 해서 잭스가 목숨을 건진다 한들 과연 기뻐하리라고 생각하는 겐가?”
 “설마요, 뺨이라도 한 대 때리겠죠. 미쳤냐고. 근데 그거 알아요, 맨드레이크? 나 그래주면 너무 기쁠 것 같아요. 그렇게라도 잭스가 살아주면, 살아만 준다면, 나, 그까짓 뺨 몇십 대 맞아도 상관없어요.” 
 “주변 사람도 생각 좀 하게! 맘대로 날뛰는 건 자네지만 으깨진 꼴을 봐야 하는 건 주변이란 걸 왜 모르는 겐가! 빌어먹을, 그런 놈은 이 녀석 하나만으로도 충분해!”
 “괜찮아요. 저, 잭스한테만 이러니까.”

 베사리아가 웃었다. 두 눈은 광기로 가득 찬 채 입꼬리만 올라가는 그 미소는 섬뜩하고, 서늘하고, 한편으로는 너무 애처로운 미소였다.

 맨드레이크는 이를 득득 갈며 그녀를 노려봤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작금의 이 말다툼은 아무짝에 쓸모없는 애들 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감성적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베사리아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지만, 한번 잭스에 ‘미치면’ 정말 주변 사람들이 말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광기에 가득 찬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왜 그런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 이유를 아는 건 오직 당사자들인 잭스와 베사리아뿐이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인연에 대해 입도 뻥긋 하지 않았다. 그나마 그들에 대해 알고 있는 바로는 룬 전쟁 당시부터 알고 지낸 오랜 사이란 것뿐이었다. 그때 무언가 끔찍한 일을 겪었던 것이리라, 그로서는 그저 짐작만 할 뿐이었다. 

 베사리아를 바라보는 맨드레이크의 시선에 안타까움이 깃들었다. 그녀의 두 눈은 여전히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맨드레이크를 노려본다기보다는 그 너머 텅 빈 곳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그 광기에선 절박함마저 느껴졌다. 잭스라는 이름의 밧줄을 잡은 채, 발밑에 도사린 바닥없는 심연을 보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처럼 안간힘을 쓰는 것만 같았다.

 그라고 왜 잭스를 돕지 않고 싶겠는가.

 베사리아가 보여주는 광기만큼이야 아니지만 그도 잭스를 꽤 아꼈다. 어쨌든 나름대로 오래 알고 지낸 사이기도 하고, 몇 번인가 도움을 주고받은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약간 낯간지러운 표현을 쓴다면 그의 생애를 통틀어 몇 없는 친구라 부를 만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마법사였고, 전쟁학회의 한 축이었다. 그는 상임의원이었고 나름대로는 한 집단의 대표자였다. 잭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그에게 있어 베사리아 콜민예와 잭스의 중요도를 따진다면 당연히 베사리아 쪽의 중요도가 더 높았다. 분명 그의 이성적인 면은 그랬다. 그런데…….

 ‘…나도 마음에 군살이 생기긴 했나 보군.’
 맨드레이크는 입술을 깨물며 그 말을 속으로 삭혔다. 옛날 같았으면 이런 일 따윈 코웃음도 안 치고 무시했을 터였다. 잭스나 베사리아의 목숨을 가지고 저울질 따위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 이렇게 신경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잭스를 구할 방법을 찾으려고 머릿속으로 온갖 변수를 계산하고 있지도 않았을 터였다. 정말 지독하게도 비이성적인 일처리 방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이런 와중에도, 맨드레이크는 베사리아를 걱정했다. 그와 동시에 잭스도 걱정했다. 비이성과 비합리의 극단이 아닐 수 없었지만, 지금 그는 둘 다를 구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베사리아를 따라주는 게 그나마 가장 나은 방법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잭스의 상태를 가장 꿰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였으니 말이다.

 그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일종의 패배 선언이었다.

 “생각해놓은 바가 있으리라 믿네.”
 “술식 하나 짜주세요.” 그가 말이 끝나자마자 베사리아가 말했다. “제가 말하면 바로 사용할 수 있게요.”
 “무슨 술식 말인가?”
 “리그의 심판 때 쓰는 거요. 내면을 드러내는 거.”
 “그걸 왜……. 일단 알겠네. 대상은?”
 “두 명이요.” 베사리아가 잠깐 멈칫 하더니 다시 말했다. “아니, 세 명이요. 몇 분이나 걸려요?”
 “13분만 주게.”

 그는 지금 상황에서 그 마법이 왜 필요한지는 몰랐다. 하지만 기왕 협력하기로 한 거 전력을 다하자는 게 지금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테이블로 걸어가 양피지와 보석 가루 따위를 꺼내 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베사리아는 그에게 재촉하지 않았다. 정통 마법 분야라면 그는 베사리아보다 한 수 이상의 실력자였다. 그가 그만큼 필요하다고 했다면, 그런 것이었다. 

 “레오나, 사제들과 방금 전의 기도문을 다시 한 번 읊어주세요. 시작하기 전에 잭스의 상태를 최대한 안정시키고 싶어요.”

 그녀는 폭풍처럼, 그러나 놀랄 정도로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한 손만으로 마력선을 뽑아내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나머지 한 손은 축 늘어져 힘없이 덜렁거리는 게, 마치 그녀의 어깨에 가짜 팔을 달아놓은 것 같은 느낌을 줄 정도였다. 끈적이는 것만 같은 푸른 불꽃은 어느새 그녀의 손을 모조리 태우고, 도화선을 기어오르는 불꽃처럼 이제 그녀의 손목 쪽을 태우고 있었다. 새까맣게 타버린 손가락 끝이 바스러져 떨어지자 그걸 지켜보던 여사제들 중 누군가가 헛구역질을 했다.

 소름끼치는 건,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에겐 자기 몸에 대해 조금이라도 걱정하는 기색조차 없다는 점이었다. 허공에서 베사리아와 레오나의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 레오나는 등을 돌렸다. 그녀를 마주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잭스는 구해야 했다.

 “기도합시다, 자매님들. 루암의 목숨이 달려있습니다.”
 “하지만 레오나 자매님…….”

 레오나가 조용히 말하자 헛구역질을 하던 여사제 하나가 그녀를 애원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다른 여사제들이라고 다를 것 없었다. 레오나도 잭스를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 하나로 이 일련의 사건을 견디고 있는데 그녀들이라고 오죽하겠는가. 레오나는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자신마저 무너지면 끝이었다. 이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따지는 것도 우는 것도 어쨌든 루암을 구하고 나서입니다. 시작합시다.” 
 여사제들이 잭스 주위에 모여 다시 기도를 시작하자 레오나는 병실 한쪽에 남아있던 황금 사과 몇 알을 들고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레오나의 손에서 잠시 빛나던 사과는 점차 작아지더니 곧 손톱만큼이나 조그마한 단약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녀는 남은 사과를 모두 그렇게 바꿔 만든 약 몇 알을 조심스레 들더니 한 알은 여사제들끼리 나눠 먹게 하고, 나머지는 잭스에게 다가가 입에 정성스럽게 넣어주기 시작했다. 
 “약이에요? 신기한 수를 쓰시네요.”
 “솔라리의 비전(祕傳)입니다. 황금 사과의 약성을 끌어내 원기를 보충하는.” 레오나가 짧게 말했다. “기도만 하는 것보다야 훨씬 나을 겁니다.”
 “어머, 그래요? 다행이네요. 협력 고마워요, 레오나.”
 “착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알아요. 잭스를 위해서겠죠. 그것만 생각하시면 돼요. 전 아무 것도 아니니까요.”

 베사리아가 빈정거리는 것도 감정이 실린 것도 아닌 기묘한 어조로 말했다. 그건 그것대로 또 섬뜩한 모습이었다. 레오나는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나중에 뭘 해도 지금 눈앞에 닥친 일만 끝내자는 일념 하나로만 버텼다. 

 잭스는 여전히 의식 불명인 듯 축 늘어져 있었다. 다행히 약이 듣는 모양인지 호흡이 종전보다 훨씬 편해지긴 했지만 말이다. 레오나는 푸른 안개에 휩싸인 잭스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당장 지금에라도 잭스가 툴툴 털고 일어나며 뭘 이리 소란이냐고 핀잔이라도 주길 바랐다. 하지만 현실은 잔혹했다. 그런 일 따윈 일어나지 않았다. 레오나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너무 힘들었다. 잭스가 이 지경이 된 것도,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전혀 몰랐던 자신에 대해서도, 그리고 평소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의 베사리아도…….

 “눈 감아요!”

 베사리아가 외치더니 마법진을 가동시켰다. 순간 엄청난 빛이 터져 나오더니 마법진 위에서 소나가 나타났다. 상임의원의 권한으로 챔피언인 소나를 강제로 소환한 것이었다. 종전에 데리러 갈 거라고 약속했던 것과는 좀 다른 형태로 데려온 것이었으나 베사리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 그녀는 도덕관이나 예의 따위는 잠시 접어둔 상태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베사리아도 하나 예상하지 못했던 게 있었으니, 바로 소나의 자세였다. 에트왈을 끌어안고 달려가는 자세 그대로 소환된 소나는 베사리아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리고 소나 자신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시원스럽게 돌진해 베사리아와 한 덩어리가 되어 나뒹굴었다. 

 “아.”
 우당탕!

 “…….”
 -…….

 침묵이 흘렀다. 베사리아나 소나나 서로를 무슨 신기한 생물 보는 양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아주 우스꽝스러운 상황이라 웃음이 터질 법도 했다. 하지만 웃음은 없었다. 침묵을 깬 건 베사리아의 무기질적인 목소리였다.

 “도와주세요, 소나 양.”

 그 한마디에 모든 상황이 이해됐는지 소나가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려 잭스 쪽을 바라봤다. 푸른 불꽃과 그것을 막고 있는 황금의 빛무리, 그리고 레오나를 비롯한 여사제들. 테이블에 양피지를 펼쳐 놓고 뭔가를 갈겨쓰고 있는 맨드레이크의 모습도 보였다. 다시 베사리아를 바라보는 소나의 눈동자엔 더 이상 어리둥절함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공포와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다. 베사리아는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쥐어짜내듯 간신히 한 마디를 내뱉었다.

 “잭스가 죽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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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오랜만에 올립니다. 이번엔 마무리 지으려고 쓰고 있습니다.
내일 한편 더 올리겠슴다.

Lv74 강철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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