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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잭스X소나 팬픽-가로등과 별 42화

아이콘 강철안개
조회: 2057
2020-02-26 02:53:42


***

 “…잭스?”

 베사리아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눈앞의 그것은 잭스라기보단, 잭스의 형상을 한 무언가였다. 기세 좋게 뛰어나온 그녀들이었지만, 눈앞의 광경은 그녀들의 발을 얼어붙게 하기에 충분했다.

 새파란 횃불 같았다.

 비명인지 포효인지 모를 괴성을 지르며, 그는 다가오고 있었다. 자신이 타오르는 것도 모르고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온몸이 타오르고 있었다. 불꽃은 걷잡을 수 없이 맹렬했다. 차라리 그가 타오르고 있다는 말 대신 불꽃이 그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는 편이 나을 정도였다. 뒤틀리고, 일그러진 그의 한쪽 손엔 예의 그 황동 가로등의 잔재인 양 누렇게 비틀린 쇠꼬챙이 하나가 달려 있었다. 처참한 모습이었고, 비참한 말로였다.

 [잭스 님…….]

 소나가 그의 이름을 안타깝게 속삭였다. 

 잿빛으로 죽은 그의 눈과 그녀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하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소나의 맑은 눈동자에는 그가 비치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엔 소나가 없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 한 줄기가 또르르 흘러내렸다. 겨우 다시 만났는데, 마침내 여기까지 왔는데, 또다시 잭스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만 같았다. 

 허나 그녀를 괴롭게 하는 건 그의 모습뿐만이 아니었다. 꿈과 환상 속에서 스치듯 봐왔던 그의 내면에 대한 풍경이 점점 더 또렷해지고 있었다. 그때의 슬픔, 그때의 괴로움, 그때의 추위……. 그 모든 것이 들려오고 있었다. 

 귀로 ‘들리는’ 그의 모습은, 마치 그 부분만 뻥 뚫린 무저갱처럼 소름끼칠 정도로 고요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라면 응당 지니고 있어야 할 소리가 결여된 그 모습은 섬뜩함을 넘어 처참할 지경이었다. 그 고요는 이 메마른 황야보다도 몇 배는, 몇 십 배는 더 슬프고 비참했다.

 저 불꽃은, 분명 추웠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추웠다. 소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저건 마음을 갉아먹는 불꽃이라고. 
 저건 도저히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정신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의지의 문제도 아니었다. 숨을 오래 참는 사람은 있어도 숨을 안 쉬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저 불꽃은 분명 살아 있는 사람의 무언가를 태워버리는 끔찍한 이물이었다.

 “주인, 정신 똑바로 차려야 돼.”

 아브릴의 부드러운 음성과 함께 소나는 정신을 차렸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등허리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그것은 베사리아라고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소나보다 더 상태가 나빴다. 잭스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새파랗게 질린 그녀의 몸은 가여울 정도로 와들거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데 쓰러지지 않는 건, 오직 잭스를 구하겠다는 광기 어린 의지 덕분이었다. 그 광증이야말로 지금 베사리아를 움직이는 유일한 원동력이었다. 

 “잘 들어, 주인이랑 마녀야. 저 불덩이가 우리 쪽으로 건너오면 너랑 주인은 다 죽어. 그러니까 여기서 쓰러뜨려야 해!”
 […쓰러뜨린다고요? 잭스 님을?]

 소나의 의문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었다. 어떻게 우리끼리 저 무지막지한 싸움꾼을 쓰러뜨리냐는 것과, 진짜 그것밖에 방법이 없냐는 것이었다. 애석하게도 소나의 물음엔 그 두 가지 뜻이 전부 들어있었다.

 “응!”
 [그 다음엔요?]

 “글쎄? 앉혀놓고 얘기라도 하면 정신 차리지 않을까? 너 모르니? 주인이 모르면 나도 모르는 걸! 너는 아니, 마녀야?”
 […….]
 “…….”

 아브릴이 (이런 상황에서도)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말하자 소나와 베사리아는 할말 잃은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볼 뿐이었다. 하긴 아브릴의 말이 맞긴 맞았다. 소나도 그냥 잭스를 마주한다는 생각만 했지 구체적인 방법 같은 건 몰랐으니까. 그저 막연히 베사리아가 뭔가 방법이 있겠거니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베사리아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녀도 이런 상황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와, 나 마녀가 에트왈한테 죽을 것도 각오하고 우리 주인 데려와서 뭔가 알고 온 줄 알았는데. 뭐 상상했어? 차라도 마시면서 얘기하면 해결될 줄 알았어? 나 가서 차 가져올까?”

 베사리아의 얼굴이 점점 더 찌그러졌다. 하긴 저렇게 말하며 주위를 휙휙 날아다니는데 성질이 안 긁히는 게 이상할 노릇이었다. 그러나 정말 놀랍게도 아브릴의 천진난만한 목소리엔 단 한 점의 이죽거림도 들어있지 않았다. 너무 순박하고 순수해서 생각이 그대로 입 밖으로 나온다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었다.

 “…쓰러뜨리죠.”
 [정말요?]

 소나가 조금만 더 거친 성격이었다면 ‘제정신이세요?’란 말이 튀어나왔을 터였다. 베사리아는 은근히 따갑게 꽂히는 소나(와 아브릴)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말했다.
“저건 우리가 알던 그와는 많이 달라요. 어차피 저건 이쪽으로 오고 있고, 충돌은 필연적이잖아요. 그러니 막아야하고, 막는 김에 쓰러뜨리자는 거예요. 이른바 일석이조라는 거죠.” 
 [하지만…….]
 “소나 양, 사정 봐줄 생각은 하지 마세요. 아무리 해괴한 몰골이라도 저건 잭스에요. 사정 봐 줄 정도로 쉬운 상대도 아닐 뿐더러…우리들도 그리 녹록한 상황은 아니에요.”

 베사리아가 타오르고 있는 왼손을 슬그머니 감추며 말했다. 불꽃은 벌써 그녀의 손목을 다 태우고 팔뚝 쪽으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맺힌 식은땀이 정말 긴장과 공포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아닌 척 하려 애쓰고 있어도 베사리아의 미간은 고통으로 조금씩 일그러지고 있었다. 결국 소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잭스를, 잭스의 형상을 한 불덩이를 노려봤다. 어떻게 보면 고민할 시간도 그녀들에겐 사치였다.

 그것은 그녀들을 관찰하는 것처럼 가만히 멈춰 있었다. 그를 보는 소나의 눈동자가 떨렸다. 여기서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가 그녀들을 알아보고, 정신을 차리고 모든 일이 끝나버렸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그가 움직이는 것과 함께 산산이 부스러져버렸다. 적의를 감지한 건지, 아니면 그녀들을 방해물이라 생각했는지, 그는 불타 뒤틀린 쇠꼬챙이를 단단히 꼬나쥐었다. 불꽃 속에서 그의 눈동자가 광기와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한 번에 쓰러뜨리는 건 무리에요. 차근차근 깎는다고 생각하세요!”

 말을 마치자마자 베사리아의 등 뒤에서 수십여 개의 마탄이 생겨나 잭스를 향해 짓쳐들었다. 동시에 잭스가 육중한 곰처럼 돌진했다. 파파파방, 하는 리드미컬한 소리와 함께 마탄은 잭스의 온몸을 두들겼다. 별 효과가 없었다. 돌진해오는 그의 속도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베사리아의 노림수는 그게 아니었다.

 디리리링

 [아브릴, 부탁해요.]

 소나가 어루만지듯 에트왈의 현을 튕기자 느릿한 가락이 그에게로 울려 퍼졌다. 늪처럼, 빽빽한 깊은 숲처럼 답답한 그 음색은 잭스의 발걸음을 끈적하게 사로잡았다. 아브릴이 그녀의 연주에 맞춰 화음을 넣어줬다. 그녀는 ‘활력’을 관장하는 봄의 노래. 몇 배로 증폭된 노랫소리는 그를 눈에 띄게 느려지게 하는 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칠 베사리아가 아니었다.

 “Tempestate et flamma, hic eiciam(폭풍우와 불꽃, 이곳에 몰아쳐라)!”

 무려 두 소절의 고대어 영창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정확하게 계산된 그 발음에 따라 그녀의 마력이 요동쳤고, 그녀의 주변에는 다시 한 번 마력의 덩어리들이 비산(飛散)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은 맛보기에 불과했다는 것처럼 그 수는 세 자리 수를 거뜬히 넘는 것처럼 보였다. 소나의 입이 딱 벌어졌다. 세상에, 저걸 다? 마법을 잘 모르는 소나가 봐도 하나하나의 마탄은 매우 흉흉하게 보였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수백 개라니! 베사리아가 전쟁학회의 상임의원이란 걸 다시금 느끼는 소나였다.

 “좀 아플 거예요, 잭스! impetus(공격)!”

 콰과과광!

 지휘자처럼 휘두른 베사리아의 손짓에 마탄들이 일제히 잭스를 향해 발사됐다. 소나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좀 전이 주먹으로 연타하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에는 대포알이 수백 발씩 꽂히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마구잡이로 공격하는 것도 아니었다. 모든 방향에서, 피할 수 있는 모든 경로를 차단하며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그것은 문자 그대로 폭풍의 현현 그 자체였다. 

 [잭스 님…저러다 잭스 님이 다치시겠어요!]
 “다치라고 하는 거예요, 지금! 공격 안 할 거면 발이나 계속 묶어둬요!”

 베사리아가 공격을 더 퍼부으며 외쳤다. 소나는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지만 일단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연주를 계속했다. 공격은 잠시 뒤 베사리아의 숨 고르는 소리와 함께 끝났다. 소나는 그녀의 숨소리를 듣고 왜 그렇게 전력을 퍼부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지금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공격이었던 것이었다.

 “끝…났겠죠?”
 “아, 그거 하면 안 되는 대사 아냐?”
 [제발 조용히 좀 하세요, 아브릴…….]

 소나는 아브릴의 악의 없는 깐족거림을 제지하며 조그마한 소리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했다. 베사리아가 어찌나 마탄을 있는 대로 퍼부었던지 잭스는 물론이요 주변까지 초토화가 돼 버려서 흙먼지가 엄청나게 피어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집중하느라 눈을 꼭 감고 있던 소나의 얼굴이 점점 더 창백해져갔다. 잭스에게서 느꼈던 그 특유의 무음이, 무저갱 같은 침묵이 종전과 다를 바 없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무음의 덩어리가 포탄처럼 날아온 건 찰나의 순간이었다.

 띵!

 소나는 앞뒤 잴 것도 없이 음파로 베사리아를 밀쳐냈다. 그 직후 콰직, 하고 조금 전까지 베사리아가 있던 자리에 정확히 쇠꼬챙이가 꽂혔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저 쇠꼬챙이가 베사리아를 관통했을 터였다. 나가떨어진 베사리아는 그대로 죽은 듯 엎어져 일어날 줄을 몰랐다. 간신히 부여잡고 있었던 정신줄이 결국 끊어진 것이었다. 이제, 남은 건 소나뿐이었다.

 소나는 훅 밀려드는 열기와 함께 잭스를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마탄에 두들겨 맞았음에도 그에겐 상처조차 없었다. 오직 푸른 불꽃만이 타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소나는 안심했다. 그녀는 그가 다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메말라 죽은 눈으로 그녀를 노려볼 뿐이었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아.]

 그 잠깐의 시간이 매우 길게 느껴졌다.

 죽는다.

 소나는 잭스를 멍하니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연주를 할 시간도 없었고 피할 시간은 더 없었다. 애초에 소나의 저질스런 운동신경으로 피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아브릴이 그녀에게 뭐라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잭스가 에트왈을 걷어찼다. 에트왈은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소나는 아브릴이 힘이 다해 사라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그녀에겐 저항할 힘이 없었다. 협곡에서 보여줬던 그 위용이, 무력이 지금 자신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가 손만 뻗는다면, 그녀는 죽은 목숨이었다.

 도망쳐야 했다. 살고 싶다면 그래야 했다.

 [잭스, 님…….]

 그런데 대체 왜일까. 

 [잭스 님, 구하러 왔어요.]

 도망쳐야 한다고 이성이 말하고 있는데, 도망쳐도 살 수 있을까 말까 모를 상황인데, 소나는 오히려 그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도망가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를 안아주고 싶었다. 그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그가 울고 있는데…….

 그는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소나는 그런 그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를 상냥하게 안아줬다. 푸른 불꽃이 그녀를 덮쳤다. 불꽃이 그녀의 손을, 팔을 그리고 온몸을 덮칠 기세로 타올랐다. 그래도 소나는 잭스의 머리를 꼭 안고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자신을 사랑해주세요, 잭스 님.] 

 그녀는 속삭였다.

 [전 알아요, 잭스 님이 누구보다도 따뜻하고 상냥한 마음을 가진 분이시란 걸. 그리고 누구보다도 책임감이 강하신 분이란 걸……. 전 잭스 님을 믿어요. 강인한 당신을 믿어요. 그리고 연약한 당신도, 상냥한 당신도 믿고 있어요. 그러니 당신을 사랑해주세요. 잭스 님이 자신에 대해 나쁜 점은 열 가지 말하신다면, 제가 좋은 점을 열 가지 말해드릴게요. 백 가지라도, 천 가지라도 말해드릴게요.]

 소나는 계속해서 속삭였다. 잭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저번에 말씀드렸죠? 저, 잭스 님을 영웅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건 지금도 변하지 않았어요.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예요. 잭스 님은 제 영웅이세요. 절 구해주신 분인 걸요. 훨씬 오래 전에도, 전 당신께 구원받은 적이 있어요.]

 과거, 소나는 그 오래 전 어머니와 처음 리그 경기를 구경 갔던 때를 떠올렸다. 그 괴로운 감정의 폭풍 속에서 잭스는 그녀를 구해 준 인물이었다. 그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소나는 분명히 잭스에게 말하고 싶었다. 스스로를 미워하지 말아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상냥한 말과 함께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하지만 소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저, 잭스 님께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안 말할 거예요. 아직 전 당신의 뒤에 있으니까요. 전 당신과 같이 걷고 싶어요. 당신께 보호받아야 하는 여자가 아니라, 당신이 기대고, 당신에게 기댈 수 있는 여자가 되고 싶어요. 그때가 되면 당신께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 그러니……. 그러니까 제발, 이제 그만 돌아와 주세요.]

 뜨거웠다. 이미 불꽃은 소나의 온몸을 태우고 있었다.

 [제가 당신께 그 말을 직접 할 수 있도록, 이제 그만 자신을 용서해주세요.]

 소나는 그렇게 말하며 잭스를 다시 한 번 끌어안았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조금씩 내리던 빗줄기는 봄비처럼 잔잔하게 내렸다. 생기가 없는 황야에서, 그것은 분명 처음으로 맞이하는 은혜로운 단비였다. 빗줄기는 소나와 잭스를 부드럽게 덮었다. 둘을 감싸던 푸른 불꽃이 조용히 사그라지고 있었다. 

 “…미스, 부벨르.”

 마침내 잭스가 입을 열었다. 갈라지고, 탁한 그 목소리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지금 소나에겐 이 세상 어떤 소리보다도 감미롭고, 안정을 주는 목소리였다.

 [잭스 님, 제 목소리가 들리세요?]
 “내가 정말 그대에게…모두에게 너무 큰 폐를 끼쳤구려.”
 [다 우리가 원해서 한 일이에요.]
 “난…하지만, 나는…….”
 [과거에서 눈을 돌리라고는 하지 않을게요. 그건 잭스 님의 삶의 방식을 부정하는 거니까요. 하지만 잭스 님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셔야 돼요. 모르시면,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 전 잭스 님이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시길 바라고 있어요.]
 “난 그렇게 대단한 놈이 아니오, 미스 부벨르. 이렇게까지 해서 구할 가치가 있는지도 모르겠소…….”
 […하아, 정말 갈 길이 머네요. 괜찮아요. 저, 참을성 많으니까.]

 소나는 그렇게 말하며 잭스의 머리를 가만가만 어루만졌다. 따뜻한 빗줄기가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안락한 욕조에 몸을 푹 담그고 있는 것만 같은 포근한 기분……. 잭스는 자신도 모르게 소나의 가는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온기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난 그대를 죽이려고 했소.”
 [그리고 제 목소리도 들어주셨죠.]
 “그래도 그대를 죽이려고 했단 사실은 변하지 않소.”
 [제 목소리를 들어주셨다는 사실도 변하지 않아요.] 

 소나는 무릎을 굽혀 잭스와 시선을 맞췄다. 여전히 그의 얼굴은 푸른 안개에 가려져 있었지만, 소나는 그 속에서 이전과는 다른 눈빛을 볼 수 있었다. 거칠지만 자애로운, 강하지만 연약한 그의 눈빛을 말이다. 소나는 안심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비에 젖은 그 모습은, 분명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계속 하실래요? 저, 얼마든지 반격해드릴 수 있어요.]
 “…정말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말을 잘 하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어머, 그거 칭찬 맞으시죠?]

 잭스가 못 이기겠다는 듯 작게 투덜거리자 소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그리고 그의 품을 떠나 슬쩍 뒤로 물러섰다. 왜 그러나 싶어 올려다본 잭스의 표정이 약간 굳었다. 베사리아가 서있었던 것이었다.

 “베사리아.”
 “고생시키니까 좋아요?”

 베사리아는 애써 퉁명스럽게 말하려 한 것 같았지만, 울먹이는 소리를 감출 순 없었다.

 “…미안했소. 이러니저러니 늘 고생만 시키는군.”
 “그럼 제발 부탁이니까 만날 죽으려고 발악하는 짐승처럼 행동하지 말고 자기 몸 좀 아껴요.”

 베사리아는 좀 강하다 싶을 만큼 쏘아붙이며 왼손을 슬쩍 로브 밑으로 숨겼다. 소나는 베사리아가 일부러 그러는 걸 눈치 챘다. 왜냐하면 그녀의 감정이 굉장히 안정적으로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소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베사리아의 모든 것은 잭스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가 있어야지만 그녀의 모든 세계가 정상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그녀가 ‘당신 없이는 이 세상을 견딜 수 없어요’라고 한 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소나 양, 이리 와요. 주문 해제할 테니까. 누구 씨 덕분에 진짜 피곤하네요. 맨드레이크한테 내일은 무조건 쉰다고 해야지.”

 베사리아는 소나가 뭐라 하기도 전에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그녀는 좀 과장되게 쾌활한 척을 했다. 평소의 잭스라면 뭔가 수상한 점을 눈치 챘을 터였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금 잭스에겐 그럴 여력이 없었다. 소나는 애틋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베사리아는 모른 척하며 주문만 외울 뿐이었다. 하긴 지금 그녀에겐 잭스가 제정신을 차렸다는 것 외에 그 어떤 일도 중요하지 않을 터였다. 

 하나의 상처는 극복했지만, 아직 많은 상처가 남아있었다.

 […저, 힘낼게요.]

 소나는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잭스를 구하기까지 많은 마찰이 있었다.  분명 그 상처는 소나가 알지 못하는 과거에서부터 이어져 온, 지독하리만치 낫지 않는 상처일 터였다. 하지만 소나는 당면할 문제에 억눌리지 않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어쨌든 이미 지나온 길이 아니던가.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후회가 없냐고 자문한다면, 없다고는 단언할 수 없었다. 다급함에 눌린 나머지 분명 원만하게 해결하지 못한 일들도 있었다. 에트왈에게 심한 말을 했고 결국 그는 마음을 닫아버렸다. 베사리아는 어마어마한 절망의 소리를 내뿜으며 무모하리만치 그에게 집착했고, 주변을 강제로 휘말리게 했다. 

 …그래도 잭스를 구할 순 있었다.

 물론 결국 소정의 목표를 달성했으니 됐다, 라는 식으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목표를 이뤘으니 수단을 정당화해도 된다는 야비한 생각은 금물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잭스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 뒤가 분명 좋게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베사리아의 행동을 안다면 잭스를 분명 화날 것이고, 또 슬퍼할 것이었다. 맨드레이크도 그렇고, 레오나와 여사제들이 휘말린 것에도 괴로워할 터였다. 그리고 소나 자신에게도 미안해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난, 당신이 살아주길 바라고 있어요.’

 그렇게 소나는 기도했다. 분명 이 마음만은 잘못되지 않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소나는 이 남자가 가진 상처를 치유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옆에 서고 싶었다. 이 감정을 그녀는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다. 차마 말하기 부끄러운, 하지만 소중한 연분홍빛 감정. 기분 좋게 울리면서, 한편으로는 격정적이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감정.

 마법진이 그들을 감싸기 직전, 소나는 잭스의 손을 잡았다. 거칠고 커다란 손이었다. 연분홍빛 감정이 부드럽게 두근거렸다.








 그녀는 사랑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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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말을 진짜 고심했는데 어떨진 모르겠네요...

Lv74 강철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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