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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잭스X소나 팬픽-가로등과 별 43화

아이콘 강철안개
조회: 1933
추천: 7
2020-02-29 03:17:36

#. 후일담: 베사리아

 때때로 악몽을 꾼다. 그가 사라져버리는 꿈이다. 그는 없고, 나 혼자서 이 잿빛의 세계를 견뎌야 한다. 목숨을 끊을 용기도 없고, 그렇다고 살아갈 의지가 있는 것도 아닌 채로.

 그건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누군가는 묻는다, 그를 사랑하느냐고.

 사랑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물어본다면, 물론 이 감정은 사랑에 가깝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순진한 단어를 쓰기엔 그와 나 사이엔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나는 내가 그를 지킬 수 있을 줄 알았다. 그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한때는 그렇게 자신감에 차있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완전한 착각이었다.

 기댄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당신 때문에…!]

 저주받을 그 한 마디가 아직도 귓가를 생생히 맴돈다. 

 나는 그를 배신했다. 

 그가 가장 힘들 때, 그가 가장 의지하고 싶을 때, 누구라도 좋으니 위로해줄 사람이 필요할 때, 나는 바로 그 순간 그를 배신했다. 그를 품어주지 못했다. 그에게 기댔다. 그리고 그를 저주했다. 그를 저주했고, 그와의 만남을 저주했다. 피맺힌 분노로, 내 모든 것을 담아 그를 증오했다.

 […미안하오.]

 차라리 그때 뺨이라도 때려줬으면 속이라도 후련했겠지.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긴커녕 그는 내게 사과했다. 그것도 그냥 상황을 넘기려고 한 게 아니라 정말 미안해하면서. 하지만 그때 내겐 그는 그저 위선자일 뿐이었다. 난 그런 그를 죽일 만큼 싫어했고, 그 이상으로 죽을 만큼 날 증오했다. 그에게 기대는 나를 견딜 수 없이 증오했다.

 빚은 그때부터 생겼다. 

 그는 내게 빚을 지웠지만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빚은 점점 더 커져갔다. 갚을 수가 없었다. 나는 사과했다. 그는 괜찮다고 했다. 용기를 내서 사과하면 용기를 낸 만큼의 비참함이 돌아왔다. 나는 그에게 빚을 갚을 수 없었다. 

 세월이 지났다. 기억하던 사람들이 사라져갔고, 더러웠던 과거는 평화라는 초원 아래에 파묻혔다. 아무도 나에게 잘못을 묻지 않았다. 나를 칭송했다. 나를, 우리를, 우리의 위대한 업적인 전쟁학회를 칭송했다. 나는 웃었다. 으리으리한 연회장에서 이름만 들어도 허리가 저절로 구부러지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갖은 칭송과 아첨을 듣는 날들이 계속됐다. 내 행동 하나에, 내 말 하나에 사람들의 눈과 귀가 따라다녔다. 아무도 나를 비하하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탓하지 않았다.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의 상냥함에 기댔다. 

 그게 야비한 위선이란 걸 알면서도, 때때로 참을 수 없는 자기혐오에 빠지더라도 그에게 점점 더 기대어 갔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수없이 되뇌며 그에게 기댔고 그것으로 그에게 평온한 일상을 선사해줬다는 위선적인 기쁨에 만족했다. 그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랐다. 딱 하나, 내 마음 속 양심이 있다면 그의 옆자리에 내가 서있는 건 상상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위선으로 점철된 내가 가진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죽어가고 있었다. 파랗게 타올라 죽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게 그가 가진 힘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원인을 알 수 없고 기원도 알 수 없는 고대의 이물. 저주라고 이름 붙였지만 사실상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꽃은 그의 몸을 좀먹어갔다. 그걸 써선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땐 이미 그가 만신창이가 된 후였다. 나는 두 번 다시 그가 그 불꽃을 쓸 상황을 만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리고 그 맹세는 우스울 정도로 쉽게 깨졌다. 협곡에서 그는 그 불꽃을 사용했고, 그 어떤 때보다도 오랫동안 사용했다. 하지만 그는 생각보다 멀쩡했고 나는 불안한 가운데서도 안심했다. 아, 괜찮구나. 오랜만에 사용해서 그런가 보구나. 나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마도구를 제작하면서도 한편으로 안심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착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날 밤 그의 몸엔 불길이 치솟았다.
 
 그가 비명을 질렀다. 목구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것처럼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이 칼날이 되어 내 전신을 난도질했다.

 그가 죽는다.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것 말고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발밑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것만 같았다. 그를 구해야했다. 그를 구할 행동이라도 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 나락으로 떨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무서웠다.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내 모든 것을 짜내어 그를 구할 방도를 생각했다. 그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바칠 수 있었다. 뭐든 이용할 수 있었다. 내 목숨도, 그 자리에 있던 모두도…….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소녀의 마음도.

 그래서 내 손을 바쳤다. 실낱같은 가능성에 매달려 그의 목숨이라도 연장시키고자 손을 바쳤다. 그를 사랑하는 소녀를 꼬드겨 그를 위해 목숨을 걸게 만들었다. 그래, 미친 것처럼 보였겠지. 하지만 난 놀라울 정도로 제정신이었다. 결국 나와 소녀는 그를 구했다. 그는 여전히 내게 사과했다. 나는 위선적인 기쁨에 몸을 떨며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오직 내가 기댈 수 있는 장소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사실에 안도했다.

 그렇다.

 난 결국 마지막까지 위선적인 인간이었다. 

Lv74 강철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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