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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잭스X소나 팬픽-가로등과 별 44화

아이콘 강철안개
댓글: 2 개
조회: 1619
추천: 2
2020-03-05 12:36:43

 ***

 머리가 멍했다.

 잠기운이 가시질 않아서, 간신히 눈을 떴는데도 지금 깨있는 건지 자는 건지 구분이 안 갈 지경이었다. 목 아래로 감각이 없…다기보단 아주 푹신한 침대에 푹 파묻혀 있는 것처럼 온몸이 노곤했다. 어쨌든 몸이 잠을 요구하고 있었다. 눈이 다시 스르르 감겼다.

 “베사리아.”

 그때 아주 그리운 목소리 하나가 내 의식을 붙잡았다. 잭스의 목소리였다. 

 “깼으면 이거라도 먹고 자든가 하시오.”

 아, 이 특유의 툴툴거리는 듯한 거친 목소리, 그렇지만 그 안에는 걱정이 가득 묻어 있는 기분 좋은 울림. 부드러운 크림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며 나는 눈을 떠 그를 바라봤다. 그래, 그가 햇살 속에 앉아 있었다. 내 옆에 앉아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차림새로, 여느 때와 다름없는 태도로. 내가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거기 있었다. 나는 잭스를 바라봤다. 

 “잭스.”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또박또박 발음한다고 한 것 같은데 술에 취한 듯 몽롱한 목소리가 나와 조금 놀랐다. 하지만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를 구했다는 만족감과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장소를 지켜냈단 안도감이 마약처럼 등골을 타고 올랐다. 포근한 쾌감 너머로 약간 켕기는 무언가가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지금은 그와 있는 이 상황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다시 그가 있는 일상이 시작됐으니까 말이다.

 “붕대투성이네요.”
 “맨드레이크의 특제 붕대지.”
 “또 트롤 피로 만든 영약을 듬뿍 묻혔다던가요?”
 “이번엔 그림자군도 쪽에서 채취한 나무수액이라더군.” 그가 음울하게 말하며 팔을 들었다. “미끄덩거려서 기분 나쁘긴 하지만, 어쨌든 화상엔 잘 듣는 것 같소.”

 옷자락 사이사이로 마법 문자가 새겨진 붕대가 보였다. 과연, 대충 휘갈겨 쓴 것 같으면서도 놀랄 정도로 정교한 솜씨가 딱 맨드레이크의 작품이었다. 보니까 단순히 문자만 새긴 게 아니라 묶는 방법이나 방향도 포함해서 일종의 마법진을 그린 것 같은데……. 맨드레이크는 이런 점에선 정말 대단하단 말이야. 주변 사람들을 거리낌 없이 실험체로 삼는 그 정신머리가 문제긴 하지만…….

 그는 내가 뭘 먹을 기미를 보이지 않자 과일을 찍어 입에 물렸다. 아삭아삭하면서도 부드럽고 달콤한 식감이 느껴졌다. 뭔진 모르겠는데 맛있었다. 분명, 몸 상태가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맛이었다. 공복이 반찬인지라 나는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새처럼 입을 벌렸고 그는 가타부타 별말 없이 과일만 계속 입에 넣어줬다. 

 분명 저 가면 너머로는 입을 삐죽이고 있겠지. 손이 많이 가는 여자라고 투덜거리면서 말이다. 뭐, 그것도 저 사람 나름대로는 신경 써주고 있다는 취급이니 넘어가도록 했다. 지금은 기분이 아주 좋으니까, 그 정도는 넘어가줄 수 있다. 

 “나 얼마 만에 깼어요?”

 하지만 이제 슬슬 본래 문제로 돌아와야 한다. 그와의 일상을 되찾았으니까 이제 그 전에 벌였던 짓에 대해 해명도 해야 하고, 용서도 빌어야 한다. 내가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알아야 하고. 나는 약간 굳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잠기운은 달아난 지 오래였다.

 “열흘.”
 “오래도 잤네요. 맨드레이크가 절 죽일 기세겠어요.”
 “그도 나흘 전까진 병상 신세였소. 많이 안 좋았지.”
 “…절 진짜로 죽이려고 하겠네요.”

 나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하긴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무리한 부탁만 연속해서 했다. 마지막엔 그 부작용 심하다는 영약까지 몇 병 들이키게 했으니 속병이 들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이었다.

 “일은 둘째 치고 몸이나 다 나아서 오라고 했소. 대충 나은 척 하고 왔다간 그때야말로 정말 가만있지 않을 거라더군.”
 “몸이요? 아, 설마…….”

 찰칵

 그 말까지 들으니 비로소 머릿속이 현실로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겨우 몸을 움직여 왼손을 들어보니 거기엔 왼손이 있었다. 내 원래 손이 아니고 만든 왼손이. 언뜻 보기엔 팔꿈치까지 감싼 하얀 토시처럼 보였다. 주제에 금박에 금실에 진짜 최고급 비단까지 써서 고급스러워 보이는……. 약하게 톱니 돌아가는 소리만 안 들렸어도 나조차도 헷갈릴 모양새였다. 그렇지만 무게만은 진짜여서, 나는 채 10초도 버티지 못했다.

 “와.” 나는 감탄 반 비꼼 반의 탄성을 질렀다. “우리 키얼스타 맨드레이크 의원님은 머리도 좋으셔라. 제가 왼손 없다는 핑계 대고 의원직 사퇴할까봐 선수 치시네요.”
 “상태가 너무 나빴소.”

 보통 이 정도로 빈정거리면 받아주는데 잭스는 여전히 담담했다. 기묘한 느낌이 슬쩍 이불을 들춰보니 아니나 다를까, 왼쪽 어깨까지 피부가 시퍼렇게 물들어 있었다. 마력의 폭주로 일어나는 피부 괴사의 초기 증세였다. 솔직히 팔 하나쯤이야 각오는 했는데 이런 꼴이면 아무래도 괴로움이 배가 된다. 내가 아니고 잭스 때문에. 그가 담담한 이유를 비로소 알아차렸다. 

 화가 난 것이다. 그것도 엄청나게, 화를 넘어 슬픔이 될 정도로. 괜히 농담이랍시고 빈정댔던 게 후회됐다.

 “조금만 늦었다면 팔이 아니라 심장이 위험했을 거라더군. 그저께 맨드레이크가 퇴원하자마자 한 일이 뭔지 아시오? 당신을 병상 째로 여기 필트오버로 옮긴 거였소.”
 “어? 여기 데마시아 아니었어요? 어머, 진짜로 필트오버네.”

 지금까지 그가 있던 왕립 병원 옆 병실이겠거니 했는데 알고 보니 병실 모양이 영 달랐다. 창밖 풍경도 완전히 달랐고. 게다가 아침햇살이라고 착각했던 건 저녁노을이었다. 다른 의미로 머리에서 피가 싹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열흘씩이나 혼수상태였고, 잭스는 저리 담담하게 말하지만 맨드레이크가 마법으로 옮겨 줄 정도였으면 정말 위급했을 테고, 아무튼 보통 일이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잭스가 화가 난 것도 이해는 간다. 이제 무조건 저자세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 안 그러면 진짜 절교 당할 지도 모를 일이다.

 “베사리아.”
 “넷? 네?”

 너무 당황해서 혀를 씹을 뻔했다. 보나마나 불호령이 떨어지겠지. 긴장감이 찌르르 울리는 것 같다. 잭스는 화를 잘 안 내지만, 한번 내면 너무 무섭다. 그러니까 무조건 용서를 빌어야 한다. 불같이 화를 내지만, 솔직하게 용서를 빌면 용서해주는 게 잭스의 좋은 점이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대답은, 내 예상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었다.

 “미안하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정신이 이 상황을 따라가는 데에 몇 초가 걸렸다.

 “뭐가 미안해요, 제가 더 미안하지. 다른 사람들에게 폐만 끼치고…참, 다른 사람들은 어때요? 레오나는요? 소나 양은요?”

 좋아, 잘 넘겼어. 잘 틀었어. 별일 아닌 것처럼 가볍게 넘어가야 한다. 뭐 그런 걸로 사과하냐는 것처럼. 여기서 더 파고들게 하면 안 좋다. 심각한 분위기가 되는 건 이쪽에서 사양이다. 잭스, 부탁이에요. 그냥 ‘다음엔 이러지 마시오.’ 정도만 하고 넘어가줘요. 그럼 난 다시 일어설 수 있어요.

 당신만 있으면 난 다시 일어설 수 있어요.

 하지만 그는 대답 대신 내 뺨을 어루만졌다. 아, 정말 안 좋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베사리아, 누차 말하지만 날 위해 희생할 필요는 없소.”
 “그럼 당신이나 좀 그러지 말아 봐요.”

 쏘아붙이는 내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놀랄 만큼 차갑고 날이 서있었다.

 “자기는 항상 남을 위해 목숨 거는 주제에.”

 그를 상처 입히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그가 상처 입는 걸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 두 마음이 섞여 감정이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져 간다.

 “항상, 항상…자기 목숨은 늘 마지막으로 생각하는 주제에! 그런 당신이 뭘 나한테 목숨을 걸지 말라는 말을 할 자격이 있냐고요!”

 감정이 북받친다. 일그러진 두 감정이 한계까지 비틀린 나선처럼 끼익, 소리를 내다 결국 찢어져 터져 나온다. 그에게 미안하다고 듣고 싶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이 너무 싫어서, 결국 이 아슬아슬한 일상을 먼저 찢은 건 내 쪽이었다.

 그래도 그는 담담하다. 나는 안다, 저 태도를. 참는 게 아니다. 정말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자기 잘못이라고, 내가 화를 내는 이 상황마저도 자기 잘못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도 미스 부벨르와 똑같이 말하는구려. 하지만 그 상황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안 그래요!” 

 그래서 그가 그렇게 말할 줄 예상했는데도, 마음속에서 뭔가 뚝 끊겼다.

 “안 그런다고요! 누구나 자기 욕심 먼저 챙기려고 한다고요! 날 봐요! 나, 당신을 구하려고 거기 있던 사람 전부를 이용했어요! 소나 양의 마음까지 이용했다고요! 내가 꼬드겼어요, 당신을 구하지 않으면 소나 양도 목숨이 위험할 거라고 거짓말까지 치면서요!”

 가면 너머로 그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도발했다는, 조금이라도 격앙시켰다는 야비한 쾌감이 온몸을 휩쓸었다. 그가 화가 났다는 걱정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아니, 차라리 화를 내라고 난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그가 모든 일을 내 탓으로 돌려주길 빌었다. 나 때문에 인생이 망가졌다고 말해주길 빌었다.

 내가 그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가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그를 배신했던 것처럼.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미스 부벨르에게 사과해야 할 게 하나 더 늘었…….”

 짜악!

 군, 이라는 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당연하다. 내가 몸을 일으켜 그의 뺨을 때렸으니까. 또 용서받지 못했다는 절망과 그를 슬프게 했다는 괴로움이, 그보다 결국 나 자신을 우선시했다는 자괴감이 휘몰아쳤다. 

 “나가요.”
 “…….”

 결국, 나는 또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보듬어주지 못했던 그의 상처로부터. 

 “나가요. 안 나가면 이 팔 뽑아버릴 테니까!”

 나는 아무렇게나 악을 썼다.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비참하고, 슬펐다. 내가 한 모든 짓이 한없이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왼팔을 잡으려는 내 시도는 잭스에 의해 막혀버렸다. 그의 억센 손아귀는 버둥거리는 내 몸을 꽉 잡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다치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상황까지 와서 그는 내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게 눈물 날 정도로 기뻤고,

 한편으론, 죽을 정도로 괴로웠다.

 “사람 부를 거예요! 놔요!”
 “놓겠소. 놓을 테니 그러지 마시오. 나중에 다시 오리다.”
 “다시 오지 마요! 꼴도 보기 싫어! 그냥, 제발, 그냥…그냥 지금은 혼자 있게 해줘요, 잭스……. 이 이상 나를 비참하게 만들지 말아요.”

 눈물이 미친 듯이 흘러나왔다. 그를 보기 싫었다. 이런 모습을 보이기는 더 싫었다. 과거를 제대로 마주할 용기도 없는 주제에 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내가 너무 싫었다.

 내가 힘을 빼자 그는 날 놓아줬다. 나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었다. 

 “나가줘요.”
 “…….”

 그가 일어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무거운 발걸음이 들렸고, 문이 닫혔다. 

 모든 게 악몽 같았다. 잭스가 그냥 넘어가줬다면, 그랬다면 모든 게 잘 돌아갔을 것이다. 그만 그냥 넘어줬다면 말이다.

 난 내 새로운 왼팔에 대해 조금 더 투덜거렸을 것이고, 소나 양과 레오나의 안부를 물어봤을 것이다. 그 둘과는 나도 얘기를 나눠봐야겠지만 그건 나중으로 미뤄도 되고. 우선 잭스가 그 둘에게 온갖 잔소리와 푸념을 들었다는 걸 한탄하듯 늘어놓을 때 즐거워하며 들었을 것이다. 맨드레이크가 날 걱정하긴 해도 잡아먹으려고 이를 득득 갈고 있다는 소리도 들었을 것이고. 거기서 약간 심각한 얘기로 가서 에스트렐 일족에 대한 대책 방안을 상담했겠지. 그런 식으로 이번 일은 자연스레 넘어갈 것이고, 난 다시 일상으로 만족스럽게 복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만 넘어갔다면, 그렇게 일상을 찾을 수만 있다면 내 팔 하나쯤이야 코웃음 칠 정도로 하찮은 대가였다. 하지만 세상일이 늘 자기 원하는 대로만 움직이는 건 아니지 않던가.

 그에게 지독한 짓을 했던 과거를 지워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울 수 없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그렇다면 과거를 기억나게 하는 원흉을 대신 지워버리면 될 일이다.
 
 에스트렐 일족. 그들이 나와 잭스의 과거에 관련되어 있었다.
 내가 잭스를 상처 입히고 그의 마음을 배신했던 이유가 그들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들이 다시 대륙의 평화를 위협한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그들을 멸족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또 그 야욕을 불태우고 있다. 질리지도 않는 악마 같은 녀석들. 과거의 유령 주제에, 죽다 남은 찌꺼기들 주제에 겨우 묻어놨던 과거의 상처를 다시 파헤쳤다. 그리고 잭스를 죽일 뻔했다. 

 이를 갈았다. 증오심이 용암처럼 흘러나왔다. 그들 때문이었다. 그들이 내 일상을 망가뜨렸다. 잭스와의 일상을 망쳐버렸고, 그를 위험에 처하게 했다. 난 그가 행복해지길, 느긋하게 살아가길 원하는데 그 과거의 잔재들이 모든 걸 망쳐버렸다.

 그러니 지워버릴 명분은 충분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팽팽한 긴장의 끈이 놓이자 다시 잠기운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이번의 잠은 평화로운 일상을 위한 잠이 아니었다. 전쟁을 위한 체력 보충이었다. 물론 그 전에 우선 심한 말을 했던 것에 대해 잭스에게 사과해야만 한다. 괜찮다. 이제 그를 마주볼 수 있다.

 이번에야말로 그가 모든 걸 혼자 짊어지게 두지 않을 거야.

 그렇게, 세뇌하듯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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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사리아 파트 끝!

Lv74 강철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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