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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잭스X소나 팬픽-가로등과 별 외전: 어느 여름날 꿈(완)

아이콘 강철안개
조회: 3154
추천: 5
2021-04-14 11:56:12

***

 “난 이럴 때마다 사이리아가 당신 딸이라는 게 절절히 느껴져요. 한창 달아올랐을 때 찬물 끼얹는 건 정말 제 아빠를 똑 닮았다니까요.”
 “한 마디를 안 지려는 건 당신을 빼닮았지.”
 “당연하죠, 누구랑 누구 앤데.”
 “…….”

 자랑스럽다는 듯 으스대던 베사리아는 침대에 누워있던 잭스의 가슴팍에 파묻히듯 안겨왔다. 아까 으르렁거렸던 게 거짓말이었다는 듯 둘 사이에 흐르는 기류는 잔잔하기만 했다.

 그는 쓴웃음을 짓고선 그녀가 조금 더 편하게 안길 수 있도록 허리를 감싸 안았다. 널찍한 가슴팍에 얼굴을 부비며 파닥파닥 발을 휘젓는 베사리아의 모습은 영락없는 철부지 어린애였다. 그녀의 이런 흐트러진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오로지 그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다.

 베사리아는 그렇게 잭스의 품을 만끽하다 약간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래도 아까 사냥 도구들은 정말 정리해둬요, 알겠죠?”
 “…그, 내일까지 책임지고 정리해 놓으리다.”

 잭스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베사리아는 아까처럼 싸늘한 표정을 짓는 대신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그의 턱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천천히 해도 돼요. 급하게 하다 다치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적당히 팔아넘길 것들은 팔거나 주변에 선물로 줘 버려요. 그리고 보관하는 방에 자물쇠라도 걸어 두고요. 사이리아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아무리 당신 닮아서 팔팔하다고 해도 이제 겨우 열 살 된 어린애라고요.”
 “뭐라 할 말이 없군. 미안하오.”
 “후후, 좋아요.”

 사과가 빠른 건 잭스의 장점 중 하나였다. 베사리아는 피식 웃더니 그의 허리를 힘껏 껴안았다. 아련히 풍겨 오는 달콤한 향기와 부드러운 감촉에 그는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를 써야만 했다.

 “나라고 당신하고 싸우고 싶겠어요? 잘해주고 싶어요. 앞으로도 잘해가고 싶고요.” 그러더니 베사리아는 조금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머리도 당신이 긴 거 좋아하니까 매일 밤 정성 들여 빗는 거예요. 예쁘게 기르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데, 흥.”

 새침하게 토라지는 그녀는 정말이지 사랑스러워서, 잭스는 무의식중에 그녀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결혼 후부터 생긴 그만의 버릇이었다.

 “늘 고맙소, 베사리아. 머리 기르는 것도 그렇고, 여기 저택으로 억지로 이사하게 한 것도 그렇고. 이거 결혼 후부턴 늘 내 억지를 들어주는구려.”
 “그런 건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오히려 기분 좋으니까. 다른 사람들한텐 그런 적 없잖아요? 오직 내게만 부리는 고집이니까 그 정돈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어요. 당신도 내가 조르면 투덜거리면서도 받아줄 거잖아요, 그렇죠?”
 “거 왜 투덜거린다는 게 전제가 되는 거요?”
 “봐봐요, 투덜거리잖아요.”
 “끙.”

 역시 말싸움으론 당해 낼 재간이 없는 베사리아였다. 그녀는 장난스럽게 미소를 짓더니 조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여기로 온 것도 나 때문에 온 건 아니죠?”
 “뭐가 말이오?”
 “당신 리그에 있을 때 소속 챔피언으로 와달라고 계속 여기저기서 요청 들어왔잖아요. 공식적으로도, 비공식적으로도, 심지어 개인적으로도요. 나한테도 들어왔고.”
 “…….”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잭스는 대륙에 이름과 얼굴(정확히는 가면 쓴 모습)이 단단히 팔린 상태였다. 이전에 자칫하다간 룬 전쟁이 재래할 수 있는 심각한 사건이 있었고, 그걸 성공적으로 해결한 중심에 바로 그가 서있었으니 말이다. 그 뒤로 그에게 러브콜이 빗발치는 건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잭스는 그 모든 걸 전부 거절했다. 하지만 요청은 그에게만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베사리아에게도 들어왔다. 모든 사건이 마무리 됐을 때 즈음부터 겨우 마음의 상처를 치료한 그녀에게 그 일은 너무 가혹한 처사였다. 잭스와의 관계를 밝히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정재계의 주요 인사들을 분리수거 쓰레기 내놓듯 걷어찰 수도 없는 노릇이고. 거기에 혹시 잭스가 자기 곁을 떠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은 베사리아에게 무엇보다도 큰 두려움이었다.

 그가 조용히 은퇴를 발표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은퇴하겠단 말 한 마디와 함께 그대로 잠적해버렸다.

 아마 베사리아는 그때의 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았다.

 “겸사겸사였소. 싸우는 게 지긋지긋하기도 했고, 몸 상태도 별로였고 말이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무에게도 연락 안 하고 지내다가 여기로 온 거니 더 이상 내 일로 당신을 귀찮게 할 일은 없을 거요.”
 “내가…내가 당신 하고 싶은 일 못 하게 방해가 된 건 아니죠?”

 베사리아가 유난히 약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불안으로 조금 떨리고 있었다.

 “나 때문에 당신이 희생하고 있는 건 아니죠?”
 “절대 그렇지 않소. 내 맹세하리다. 사이리아의 이름에 걸고 말이오.”
 “가만히 자고 있는 애 이름은 왜 걸어요?” 베사리아가 맥없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됐어요. 하지만 날 위해 당신이 희생하는 건 싫어요. 지금껏 당신은 너무 많이 희생해왔잖아요. 이제 좀 이기적으로 굴어도 돼요.”
 “…….”
 “자꾸 까먹는 모양인데 저 이제 전쟁학회 학회장이에요. 명실상부 최고 권위자죠. 돈도 엄청 많고, 권력도 있고, 마법도 잘 써요. 당신 하고 싶은 건 뭐든지, 정말 뭐든지 들어드릴 수 있어요. 당신 이름을 딴 새 전장은 어때요? 원한다면 내일이라도 바로 승인할 수 있어요.”
 “끔찍한 소리 말고 그런 허무맹랑한 거 있으면 바로바로 쳐내버리시오. 듣는 것만으로도 닭살이 오를 지경이니까.”
 “어머, 진짜네.” 베사리아가 장난스럽게 그의 닭살 돋은 팔뚝을 만지며 말했다. “그런데 당신이 당신 이름 딴 전장에서 싸우면 되게 멋질 것 같지 않아요?”
 “…못 들은 걸로 하겠소.”

 잭스가 무겁게 한숨을 쉬며 말하자 베사리아는 오히려 더 눈을 반짝였다. 그는 자기의 이런 태도가 오히려 베사리아의 가학심(?)을 부추긴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럼 내가 당신 멋지게 싸우는 모습 보고 싶다면 나가줄 거예요?”
 “하하, 그럼 나가야겠지. 어느 분 분부신데 내가 감히 어기겠소?”
 “농담이에요. 리그 같은 데엔 나가게 하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요.”

 쓴웃음을 짓는 듯한 그의 말에 베사리아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런 그녀의 눈빛엔 단호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당신이 싸웠던 이야기는 그냥 과거 이야기로 충분해요.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다더라, 아빠가 이래봬도 대단한 사람이란다, 이렇게 애한테 자랑하는 정도로만요. 난 당신 싸우는 모습 보기 싫어요. 아마 사이리아도 보기 싫어할 걸요? 그 애, 만약 당신이 리그에 나가서 싸우는 모습 보기라도 한다면 울어버릴 거예요. 얼마나 당신을 좋아하는데요.”
 “어떻게 그리 확신하는 거요?”
 “엄마니까요.”
 “…….”

 그녀는 으스대듯 말했다. 간단명료하면서도 납득이 갈 수밖에 없는 한 마디였다.

 “솔직히 나도 빨리 후임자 골라서 학회장 같은 거추장스러운 직함은 벗어던지고 싶어요. 그도 그럴게 같이 있는 시간만 뺏어가는 주제에 당신한테 매력적으로 보이지도 않잖아요.”
 “험, 직함이 어떻든 그대는 그대니까 말이오, 베사리아. 하지만 당신이 남들에게 돋보인단 건 썩 기분 나쁜 일만도 아니라오.”
 “난 남들한테 화려한 드레스 차려 입고 꿀 발린 말 백 마디 천 마디 듣는 것보다, 당신하고 이렇게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쪽이 백만 배는 더 기분 좋아요.”

 낯 뜨거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베사리아였다. 내친 김이라는 모양인지 그녀의 입에선 마음에 담아뒀던 소망이 줄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은퇴하면 저택 근처에 작은 채소밭을 만들고 싶어요. 거기서 우리 가족들이 먹을 채소를 기를 거예요. 아, 온실도 하나 만들어서 약초들도 기르죠. 사이리아한테 마법약 이론도 가르쳐줘야 하니까요. 걔, 당신 닮아서 하기 싫다고 투덜거려도 마법에 굉장한 재능이 있어요. 조금만 가르쳐 주면 나중에 제 앞가림 정돈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대륙 최고의 마법사에게 개인 과외를 받는다, 라. 남들이 들으면 그 자리에서 졸도해버릴 파격적인 혜택이었지만 잭스는 새파랗게 질릴 사이리아의 얼굴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천성이 그런 건지 사이리아는 책상에 붙어 앉아서 보석에 담긴 마력의 수치 따위를 재며 기록한다거나, 오차 하나 없는 정교한 마법진을 그린다는 점에 전혀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그 점만큼은 베사리아와 완전 반대였다.

 물론 잭스는 지금 잔뜩 신이 나서 재잘거리는 베사리아 앞에서 찬물을 끼얹을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나중 일은 나중 일이었다. 언젠가 건드릴 벌집이라도 나중에 건드리는 게 나을 때도 있는 법이었다.

 “저기, 듣고 있어요?”
 “물론이오.”

 사실 안 듣고 있었지만 말이다. 베사리아의 눈매가 슬쩍 가늘어졌지만 다행히 넘어가주는 듯했다.

 “하루하루가 꿈만 같아요, 잭스.”
 “꿈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잖소.”
 “알아요. 그런데 너무 믿기질 않는 걸 어떡해요. 이렇게 당신과 느긋하게 얘기할 수 있는 것도, 집에 돌아오면 사이리아와 당신이……가족이 반겨준다는 것도 예전에는 꿈에서조차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었어요. 지금 당신에게 딸애의 미래에 대해 얘기하는 건 더더욱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일이고요.”
 “…하루하루가 새로운 일의 연속이긴 하지.”
 “맞아요, 그러니까 불안한 거예요.”

 베사리아가 말하는 불안감을 잭스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과거에 얼마나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많았던가. 폭풍에 작은 조각배 휘말리듯 엮여든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죽을 고비도 몇 번이나 넘겼고, 아군이 많은 만큼 수많은 적들과도 마주한 적이 있었다. 그때에 비한다면 지금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거친 바다만 겪은 뱃사람이 잔잔한 바다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에게도 과거의 상처를 잊을 시간이 필요했다. 잭스는 베사리아를 꾹 안고 가만히 속삭였다.

 “베사리아, 이 시간은 절대 꿈이 아니오. 그러니 불안해하지 마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당신과 사이리아를 꼭 지키겠소. 내 약속하리다.”
 “…약속할 필요 없어요, 잭스. 언제나 믿고 있으니까요.”
 베사리아도 그에게 안기며 가만히 속삭였다. 그리고선 이전과 다르게 아주 요염한, 달콤한 꿀이 떨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이리아에게 동생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
 “남동생이 좋겠죠? 여동생도…후후, 쌍둥이도 괜찮겠네요. 애들이 많으면 하루하루가 너무 바빠서 불안해할 틈도 없을 거예요, 그렇죠?”

 그제서야 스멀스멀 떠오르는 아까의 기억. 베사리아가 야릇하게 몸을 일으키더니 그의 앞에서 사르르 머리카락을 늘어뜨렸다. 그녀의 손끝을 따라 베일처럼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은 진한 황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두 손을 올리고 있자니 얇은 잠옷 아래로 몸의 곡선이 유독 돋보였다.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베사리아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예전에도, 지금도.

 그가 부끄러워한다는 걸 이미 눈치 챘는지 베사리아의 표정엔 뜨거우면서도 당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맘에 들어요?”
 “굉장히.”
 “얼마나요?”
 “덮치고 싶을 정도로.”
 “네? 꺄아! 후훗, 당신도 참…….”

 베사리아를 시원스럽게 안아든 그는 냅다 그녀를 침대에 던지듯 내려놓고 그대로 입술을 포갰다. 곧 그녀의 매끄러운 두 팔이 그의 목을 감싸 안으며 열정적으로 입술을 받아들였다. 뜨거운 열기가 잠시 오갔다. 잠시 뒤 그를 바라보는 베사리아의 시선은 잔불처럼 타오르는 열기가 가득했다.

 “잭스?”

 그녀가 짧게 입을 맞추더니 녹아내릴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날, 맘대로 해도 좋아요.”
 “…….”

 말은 필요 없었다. 깊은 밤처럼 깊어가는 사랑을 속삭이며 그렇게 둘은 다시 행복에 잠겨갔다. 

 한여름 밤의 꿈을 즐기듯이, 느긋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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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다른 히로인들 존재는 다 제외시켜두고, 세세한 과거사 설정 안 하고 그저 느낌대로 써본 편입니다.

소소한 일상도 좋네요. 메인 스토리가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언젠가 이런 단편 다시 썼으면 좋겠습니다.



Lv74 강철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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