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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신라의 골품제

Krieg0
댓글: 15 개
조회: 17594
2016-12-28 23:28:32

출저:

https://namu.wiki/w/%EA%B3%A8%ED%92%88%EC%A0%9C

 

 

 

 

 


신라에서는 사람을 등용하는데 골품을 따진다. 때문에 진실로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더라도 넘을 수가 없다. - <삼국사기> 열전 제7 설계두전.

 

 

 

 

 


세부적으로 따지자면 관등은 외위제에 근거해 옛 고구려의 지배층에는 7등급, 백제의 지배층에는 11등급 이상의 벼슬을 제한하는 차별적인 정책을 실행한 것도 문제이다.

 

 

골품의 경우 고구려계는 6두품, 백제계는 5두품으로 골품을 제한하였다. 실제로 망국의 옛 지배층들이 벼슬한 기록이 없고 중앙 경주의 진골이나 6두품만이 중요 직책에 오를 수 있었다.

 

 

이 지경인데 어느 누가 신라와 협력하고 싶었겠는가?

외부 인사로 신라에서 최상급인 진골을 받은 것은 딱 3가지 경우 뿐이었다.

 

 

금관가야의 왕실이 구형왕의 항복 이후 진골에 편입되었는데, 이것이 김유신의 가문이다. 그리고 고구려 부흥운동을 벌이던 고구려 왕족 출신 안승이 신라에 귀순해 보덕국왕의 직책을 받으면서 진골이 된다.

 

 

 

마지막으로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이후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는데, 이 때 신라가 사여한 벼슬이 대아찬으로써 진골의 품계이니 대조영을 진골로 인정한 경우가 된다.

 

다만 마지막은 명목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안승 가문은 이후에 반란 일으켰다가 아작났다. 안승 본인이 어떻게 됐는지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금관가야 왕족의 경우에도 김유신이 어마어마한 전공을 세우는 무열왕 등극 이전까지는 비주류로 따돌림을 받았다. 애초에 골품제도는 신라의 왕경인 서라벌 즉, 지금의 경주시 지역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 학설에 따르면 철저한 수도 중심편제가 된다.

 

 

 

이쯤 되면 신라 망국기에 왜 그리 지방호족세력들이 신라를 그렇게 쉽게 버렸고 망한지 200년이 넘은 옛 고구려와 백제지역 백성들이 왜 후고구려와 후백제의 기치 하에 모여들었는지 설명이 될 것이다.

 

 

참고로 6두품 이하부터는 정복당한 호족층이며 6 ~ 4두품을 가르는 것은 세력 순으로 결정되었다 하는데, 즉 투항한 고구려의 지배층은 깡촌 소읍의 두령 수준, 백제쪽은 그만도 못한 대우를 받은 것이다. 그나마 고구려계의 중심 지역인 패서 지역은 신라 중앙의 통제를 받는 시기가 상당히 늦은 편이었지만 백제는 웅진도호부가 축출된 이후론 계속 이런 차별을 견뎌야 했다.

 

 

 

골품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으며, 골품에 따라서 올라갈 수 있는 벼슬에 한계가 있었고 6두품의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6두품의 최고직인 아찬에는 중위제를 두었는데, 이는 관직은 그대로고 명목상의 직위만 높이는 식이었다. 그러니까 니가 아찬 중에서 1등 정도의 의미밖에 없었다.

 

 

그런고로 제 아무리 직위 높아봐야 대아찬보다 밑이였다. 한국군에 비교한다면 오래 근무한 하사가 갓 들어온 소위보다 밑인 것과 비슷하지만, 한국군에선 소위가 상사를 우습게 알았다간 군생활 꼬이는데 비해 이 당시는 아니라는 것. 아찬은 제 아무리 오래 근무를 하든, 능력이 우수하든지간에 상관없이 뭘 해도 진골 출신의 대아찬보다 밑이었고 대아찬에게 숙이지 않으면 봉변을 당했다.

 

 

집의 크기, 쓸 수 있는 색 등등 일상의 사소한 것까지 제한을 두고 있었다. 심지어 당나라에서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온 최치원조차도 6두품이라는 신분 때문에 한계에 부딪쳐야 했다.

 

 

 

최치원이 쓴 시무 10조는 왕은 눈여겨봤지만 결국 진골귀족들에 의해 산뜻하게 무시당했고 그 일로 완전히 좌절한 최치원은 관직에 물러나 은거하게 된다. 사실 시무 10조 중에 진골귀족의 세력을 무너뜨리는 것이 포함된 것을 생각하면 강제로 '은거당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최치원에게 6두품의 한계가 있기는 했으나, 이것만으로 최치원의 말년을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단적으로 최치원이 시무10조를 올린 것은 진성여왕 시절로 이후 최치원은 6두품의 한계인 아찬까지 승진했다.

 

 

그리고 최치원이 벼슬을 물러난 것은 효공왕 시절로 이 와중에도 신라국왕의 명칭으로 보낸 국서를 작성하는 등 할건 다 했다.

 

 

어느 정도 지방에서 세력을 잡고 있으며 실력도 있었지만 승진이 제한되던 6두품 층에서 항의를 많이 했으며, 나라 망치는 제도라고 없애려는 시도가 많았지만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는 진골 귀족들이 그렇게 할 리가 있겠는가? 결국 중앙의 통제력이 약해지는 신라 하대부터 중앙의 통제가 미치는 경주 일대를 제외하고 제대로 먹혀들지 않게 되었다. 덕분에 진골들에게 차별받던 신진 지식층인 6두품들이 호족과 군벌들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도록 만들어 신라 멸망의 으뜸가는 원인이 되었다.

 

 

 

 

 

 

 

 

 

 

 

 

 

 

 

 

 

 

 

 

 

 

 

 

 

 

 

Lv77 Krieg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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