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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다시 쓰는 마영전]별의 불꽃. 5

그락란라우
댓글: 2 개
조회: 1085
추천: 1
2015-07-26 03:43:42

  비가 내린다. 

  도시는 가을 하늘에 내리는 맑은 빗방울에 점차 젖기 시작한다. 우산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이비는 건물의 처마 밑에 몸을 숨겼다. 그녀는 흑갈색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물방울을 털어냈다. 

  “갑자기 웬 비람…….”

  이비는 뚱한 얼굴을 하며 비 내리는 하늘을 쳐다봤다. 빗줄기는 점차 거세지기 시작한다. 이비는 상공을 뒤덮은 먹구름을 보건데 비는 퍽 긴 시간 내릴 것이라 예상했다. 그녀의 예상대로 비는 한 시간이 넘도록 쏟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빗줄기는 약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비는 한숨을 내쉬곤 처마 밑의 땅에 쪼그려 앉았다.

  비가 그치길 기다리며 이비는 멍하니 작은 처마 밑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결국 다리가 아파오자 이비는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훑어보았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이비는 건물의 벽에 등을 기댔다.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이비는 배시시 웃었다.

  로체스트로 오던 중 아주 진귀한 보물을 발견했다. 물론 그녀와 같은 연금술사나 마법사들에게는 무척 진귀하고 값진 보물이지만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일반 사람들에겐 그저 평범한 돌에 지나지 않는 물건이다. 이비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마력의 결정’이라 불리는 푸른 돌멩이를 꺼냈다.

  고작 어린애 주먹만한 크기의 마력의 결정이지만 이것에 내재된 힘은 이비도 깜짝 놀랄 정도다. 그녀는 마력의 결정을 눈앞까지 들어올렸다. 반짝이는 마력의 결정을 보며 이비가 중얼거렸다.

  “너를 봤으면 뭐라고 하셨을까? 기특하다고 해주셨으려나?”

  마력의 결정을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이비는 빗줄기가 약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다른 곳으로 이동할 기회는 지금뿐이라 생각했는지 그녀는 심호흡을 하곤 비 내리는 골목길을 뛰어갔다. 물웅덩이를 밟아 찰박거리는 소리가 아무도 없는 골목길을 메아리처럼 맴돈다.

  한참을 뛰어가던 이비는 지쳤는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곧 골목길을 벗어날 수 있다. 이비는 골목길을 빠져나가면 있는 돈 없는 돈을 다 털어서 마차를 타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아이단이 화가 났을 리는 없다. 그렇지만 긴급소집령을 무시한 채 개인적인 일에만 몰두했다는 걸 ‘그 사람’이 알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북쪽 땅으로 간다고 했다. 북쪽이면 이곳보다는 마족과의 혈투가 훨씬 치열한 곳이니 금방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상념에 잠겨있던 이비는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사내들을 뒤늦게 발견했다. 걸음이 멈췄다. 언제부터인지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이비는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건만, 지금은 제법 흉흉한 기운을 풍기는 자들로 즐비하다. 이비는 수집품이 가득 들어있는 가방의 끈을 꽉 붙잡았다. 법황청의 몸이나 다름없는 로체스트에서 마나를 사용할 수는 없다. 그랬다간 법황청의 표적이 되기 딱 좋다. 이비는 도망칠 방법을 생각해보았다.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이 정도 숫자를 피해 도망치려면 지팡이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도 마땅치 않다. 이비의 지팡이는 지금 이곳에 없다. 로체스트에 의심받지 않고 들어오기 위해 잠시 숨겨두었다. 지팡이를 사용할 여력이 되지 않으니, 순수한 육체능력으로 벗어나야한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면 그 나이대의 평범한 여자나 다름이 없기에, 그것도 여의치 않다. 이비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한 사내와 시선이 마주쳤다. 이비가 피식 웃었다.

  “허튼 수작 부리려 하지 않는 게 좋아. 마력의 결정을 볼 수 있다는 건 너도 마나를 다룰 줄 안다는 건데, 법황청의 몸이나 다름없는 여기 로체스트에서 마나를 사용했다간 인퀴지터의 표적이 되기 좋다는 건 알 거 아니야? 그랬다간 나도 표적이 되니까 봐주라고.”

  “글쎄요. 무슨 말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는데…….”

  이비는 빙긋 웃으며 사내의 말을 받아쳤다. 사내는 피식 웃더니 손을 내밀며 말했다.

  “마력의 결정만 내놔. 그럼 적당히 놀아주다가 보내줄게. 창녀촌에 넘기지 않는 걸 고맙게 여겨. 너처럼 반반한 년을 원하는 놈들은 많으니까.”

  “그런다고 진짜로 주면 나 바보 되는 거 맞죠? 아무래도 수지가 안 맞는 거래인 거 같은데요? 마력의 결정을 주면 곱게 보내준다던가 하는 걸로 거래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아무래도 안 될 거 같은데요.”

  “……거래가 불공정했다는 건 인정. 그런데 네가 뭔가를 제안할 그럴 입장은 아니거든.”

  사내는 턱짓했다. 그러자 이비를 앞뒤로 포위하고 있던 사내들이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비와 대화하던 사내는 길게 자란 손톱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냥 마력의 결정도 팔고, 저년도 팔까? 귀족 놈들은 비싸게 사줄 거 같은데.”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상념에 잠겨 있던 사내는 만족스럽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래. 둘 다 팔자. 안 그래도 요즘에 ‘테텐 조각’으로 거래하느라 돈이 궁했는데 마침 잘 됐…….” 

  기분 좋은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사내 앞으로 커다란 검은 물체가 무척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그리고 그것이 날아가며 가지고 온 돌풍에 사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신을 차린 사내는 의아하다는 얼굴로 날아간 물체를 눈을 가늘게 뜨며 쳐다봤다. 

  사람이었다.

  복장을 보건데 이비를 잡으라고 보내놨던 머저리들 중 하나 같다. 하지만 누구인지 알아보는 건 힘들다. 망치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얼굴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져있었기 때문이다. 사내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이비를 잡으라고 시켰던 놈들이 하나같이 벽에 처박혀 있거나 멀찍이 날아가 인체구조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자세로 자빠져 있었다. 사내는 이비가 마법을 사용한 것이라 확신했다. 법황청의 추격을 뿌리칠 방법을 생각하며 그는 이비의 모습을 찾았다.

  이비는 혼자 있지 않았다. 남자라고 생각하면 키가 작고, 여자라고 생각하면 키가 제법 큰 편인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자와 함께 있었다. 사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제 보니 마법을 사용한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다. 

  스무 명을 이렇게 날려버릴 정도면 제법 큰 마나의 파동이 느껴져야 하는데, 그것이 없다는 건 일단 이비와 저 검은 로브의 사내는 마나를 사용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건 순수한 육체와 특수한 무기를 이용한 방법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후자는 아닌 것 같다. 저 두 명의 몸에는 무기라고 부를 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전자가 된다는 말인데, 이것 또한 말이 안 된다. 적어도 사내가 지금까지 살며 본 인간 중에서 같은 인간을 이렇게 날려버릴 수 있는 파괴적인 힘을 가지고 있던 자는 그 ‘검은 거인’뿐이었다.

  사내는 어찌되었건 좋은 상황은 아니라고 여겼다. 그도 이비와 같은 마나를 다루는 마법사이기에 이곳, 로체스트에서 행동이 제약되는 건 마찬가지다. 사내는 검은 로브를 쓴 자의 정체가 궁금했다. 

  궁금한 건 이비도 마찬가지였다. 한참 빠져나갈 궁리를 하던 중 이 사람이 갑자기 나타났다. 퇴로를 막고 있던 사내들을 수려한 발기술로 고꾸라뜨리며 말이다. 빠르고 정확하며 무게까지 가진 발차기였다. 여자의 몸에서는 나오기 힘든, 사람을 망치로 내려친 것처럼 뭉개버릴 수 있는 정말 강력한 힘을 가진 발차기였지만 이비가 본 몸의 유연함과 부드러운 움직임은 아무래도 남자의 몸에서 나올만한 섬세한 모습이 아니었다. 

  방수를 목적으로 로브를 후드까지 깊게 눌러쓰고 있던 그는 이비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이비가 자신을 쳐다본다 생각했는지 목을 감싸고 있던 검은 천을 콧등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이비는 후드 틈새로 살짝 보이는 하얗고 깨끗한 피부를 보았다. 그리고 아주 잠깐이지만 보였던 선홍색을 띠는 입술도.

  이비는 만약 이 사람이 남자라면 지금까지 한결같던 마음이 흔들릴 것도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검은 로브를 입은 자가 천천히 마지막 남은 사내를 향해 다가갔다. 사내는 다가오는 자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봐. 일 방해하지 말고 갈 길 가는 게 어때?”

  대답은 없었다. 사내는 한숨을 내쉬며 허리에 꽂아두었던 막대기를 꺼냈다. 나무로 만들어졌고, 팔뚝 정도의 짧은 길이를 가진 막대기다. 이비는 한눈에 저것이 저 사내의 무기라는 걸 알아봤다. 아마 지팡이처럼 많은 마력을 담은 무기를 사용할 수 없는 곳이기에 저런 작은 막대기, 완드를 들고 온 것이 분명하다. 

  완드를 사용하여 마법을 구사한다 해도 마나의 파동이 퍼지는 건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추적자들이 쫓아오기 전에 완드를 버리고 자리를 떠버리면 마법을 사용한 자를 찾는 건 불가능하다. 마나를 끌어올리는 게 인간이라고 해도 완드를 통해 그것을 마력을 가진 마법으로 구사하는 순간, 마나의 파동은 완드를 주체로 하여 퍼져나가기 때문이다. 지팡이도 이와 같은 원리다. 하지만 완드와 지팡이는 위력적인 면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다. 

  완드를 손에 쥔 사내는 그것을 다가오는 자에게 겨냥했다. 이비는 한순간에 주변이 마나로 들끓기 시작하는 걸 느끼고 몸을 떨었다. 저 작은 완드, 심지어 영험하지도 않고 특별한 마법으로 능력이 증폭된 것도 아닌 물건으로 이렇게 마나를 끌어올린다는 건 저 사내의 실력이 수준급을 넘어선다는 뜻이다. 이비는 이정도 마나를 통해 뿜어져 나올 마법에 대비하기위해 마나를 끌어올렸다. 

  매개체 없이 마나를 끌어올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완드를 쥔 사내는 이비가 하려는 짓을 속으로 비웃었다. 그러나 한순간에 이비가 끌어올린 마나가 자신을 웃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사내는 혀를 찼다.

  ‘아무래도 저 쪼끄만 것이 나보다 자연 친화력이 더 좋은 것 같군. ……이미 나랑 저 꼬맹이 때문에 이 일대는 마나로 가득. 슬슬 마나의 파동이 법황청의 눈에 들어갈 시간. 여기서 시간을 끌면 완드를 버려도 내 고유의 마나 파장을 읽어 뒤쫓겠지. 그랬다간 지금까지 준비해둔 게 엉망이 된단 말이야. 이것 참 골때리는군. 괜히 마력의 결정 하나에 욕심냈다가 본전도 못 찾겠어.’

  사내는 더 이상 망설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끌어올렸던 마나를 전부 사용했다. 완드의 끝에서 청명한 푸른빛이 잠시 머무는 것 같더니, 이내 사라졌다. 사내와 이비는 이게 무슨 일이냐는 얼굴을 하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일대에 가득하던 마나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퍼져나가던 마나의 파동까지 모조리 사라졌다. 사내는 멍한 얼굴로 금이 가기 시작한 완드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완드의 상태를 보고 짐작했다.

  ‘마나가 고갈됐다고?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

  “지금 법황청의 눈을 끌면 곤란합니다.”

  두껍고 무거운 남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가늘고 높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이비와 사내는 그를 쳐다보았다. 목소리를 듣고 보니 어딘지 여자 같은 모습이다. 사내는 혀를 차며 다시 마나를 끌어올렸다. 

  사내가 쥔 완드가 빛나기 시작했다. 마나의 움직임이 피부를 찌른다. 이비는 사라진 마나보다 더 많은 양을 한순간에 끌어올리는 사내가 정말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아까처럼 끌어올렸던 마나가 한순간에 사라진다는 건, 무슨 이유가 됐던 마법사의 마나가 고갈되어버렸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다시 마나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제법 시간이 필요하다. 고갈된 마나를 생성하고 순환시키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하지만 저 사내는 그런 것 없이 바로 이어 마나를 끌어올렸다. 그 어떤 거부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몸 안에 마나가 흐르는 길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보통 마나의 길이 두 개 이상인 마법사의 경우, 두 개 중 하나는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두는 습성을 생각해보면 저 사내는 최소 세 개 이상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무식하게 마나를 끌어올리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

  사내는 다시금 증발해버린 마나를 아쉬워하지 않았다. 대신 로브의 여자를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상대를 잘못 만난 것 같다. ‘이건 본전도 못 찾는 수준이 아니라 독박쓰게 생겼군.’ 그녀를 노려보던 사내는 문득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오른팔에……, 저게 뭐지?’

  여자의 오른팔에 검은 것이 붙어 있다. 그것은 마치 ‘불’처럼 유동하고 있었기에 더욱 눈에 띄었다. 사내는 의아하다는 듯 그것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이를 갈며 완드를 버렸다.

  “뭐인지는 몰라도 인퀴지터 놈들 같은 귀찮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봤자 내 마나를 태우는 한계치는 정해져 있겠지. 한계치를 넘으면 스스로 타버리는 그놈들과 똑같을까? 대부분 날 잡으러 온 심문관 놈들은 자멸하곤 했지. 그러면 어디 당신의 한계치가 그놈들보다 뛰어난지 한번 보자.”

  “관두는 게 좋을 겁니다. ‘이건’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니까. 제가 원하는 건 저 아이를 놓아주는 것, 그리고 법황청의 눈길을 끌지 않는 것뿐입니다.”

  “내가 듣지 않을 거라는 건 알면서 하는 소리겠지? 이렇게 된 이상, 이젠 마력의 결정이고 나발이고 내 자존심 문제거든.”

  “그렇습니까.”

  여자는 고개를 숙였다. 사내는 다시금 마나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완드를 쥐고 있을 때보다는 모이는 속도가 느리지만, 모으려는 양은 훨씬 많다. 비교를 불허할 정도다. 이비는 이쯤 되어서야 사내의 수준을 정확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지금 무기가 없는 상황에서 단순히 마나를 다루는 능력만 보자면 이비보다 한 수 위. 저 정도 수준의 마법사라면, 이비가 아는 사람 중엔 세 명 뿐이다. 그 유명한 대마법사 자레스와 그녀의 스승, 그리고 언젠가 한번 길에서 마주친 적 있던 이름 모를 남자. 이비는 눈을 크게 뜨고 여자와 남자에게 집중했다. 그리고 여자가 왼팔을 들었다. 

  “……!”

  사내는 갑자기 땅을 얼려버린 하얀 얼음의 모습에 당황했다. 얼음은 사내를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듯 다리를 얼려버렸다. 사내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마나의 흐름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마법이 아니다. 하지만 마법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초현실적’인 능력을 사용할 수 있을까. 답은 하나뿐이다. 사내는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이런 게 진짜 존재하는지 처음 알았어. 소문인지만 알았거든. 정말 내 소유욕을 불러일으키지만, 지금 이게 내 힘을 쭉쭉 빨아들이고 있어서 그건 힘들 거 같네.”

  “벗어날 수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군요. 가능할 거라 보십니까?”

  사내는 오른팔이 검게 타오르며 다가오는 여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할 수 있다면 해보라는 듯이 사내를 향해 달려갔다. 짧은 거리였지만 거의 축지를 사용한 것처럼 순식간에 눈앞으로 다가오는 여자를 보며 사내가 중얼거렸다.

  “자랑할 건 아니지만, 난 ‘영감탱이’의 제자거든. 그래서 이런 것도 사용할 수 있어.”

  사내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에게 다가가던 여자는 멈칫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여자가 고개를 돌려 이비를 바라보았다. 이비는 흠칫 놀라며 시선을 마주했다. 

  후드에 가려져 눈동자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비는 여자의 눈이 후드를 투과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시선을 옮겼다. 그대로 말없이 멀어져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멀뚱히 쳐다보던 이비는 마른 목을 적시기 위해 침을 삼켰다. 

  손에 땀이 난다. 방금 전 ‘공간이탈’로 사라진 사내보다도 마나를 일순간에 소멸시켜버린 힘을 가진 저 여인이 흥미를 자극한다. 지금까지 아니, 방금가지만 해도 마나를 이길 힘은 없다고 자부해왔기에 더더욱 구미가 당긴다. 이비는 군살 없이 매끈한 턱선을 따라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죄송해요, 스승님. 악어 입속에 머리는 집어넣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래도 너무 궁금한 걸 어떡하죠?’

  이비는 골목 밖을 향하는 여자의 뒤를 맹렬한 기세로 뒤쫓았다. 그녀와의 거리가 넘어지면 코 닿을 정도가 되었을 때 여자는 이비를 쳐다보았고, 이비는 여자의 몸을 사정없이 끌어안으며 말했다.

  “제안할 게 있습니다!”

  거의 들이받다시피 한 육탄 공격에 여자는 퍽 당황한 듯했다.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는지 여자는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이비도 갑자기 몸을 끌어안는 건 도를 넘었다고 생각했는지 헛기침을 하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머쓱해진 분위기를 풀 방법을 생각하던 이비는 여자가 다시 뒤돌아 가려는 걸 붙잡았다. 그녀의 오른손을 꼭 붙잡은 이비는 어떻게든 눈을 마주치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

  “우리 용병단에 와주세요!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뭐든지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여자는 말없이 이비를 내려다 볼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서 보니 여자의 키는 무척 컸다. 활동을 위해 높은 굽이 있는 신발을 신지 않았음에도 이비보다 10센티미터는 족히 컸다. 이비의 신장이 160센티미터 초반이니 자연스럽게 여자의 신장은 170센티미터를 훌쩍 넘는다는 뜻이다. 또 큰 키에 어울리게 여자는 마른 편이었다. 깡마른 건 아니었다. 몸을 껴안아본 결과 모든 여자들이 부러워할만한 잘록한 허리를 가지고 있었다. 잠깐 만져본 것뿐이지만 군살은 느껴지지 않았다. 

  손끝의 감촉은 여자의 몸이 단순히 마른 게 아니라 철저한 자기관리로 다져진 몸이라는 걸 말해준다. 이비는 해맑게 웃으며 여자를 올려다본다. 여자는 무슨 반응을 보여야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이비는 여자가 대답해주기를 고대했다. 그리고 여자가 말했다.

  “미안합니다. 아직 저는 해야 하는 일이…….”

  “제발요!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이비는 길거리에 버려진 고양이의 애원이 담긴 듯한 눈망울로 여자르 바라봤다. 여자는 이비를 떼놓고 가려는 듯 팔에 힘을 주었지만 이비는 기절시키거나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절대 갈 수 없다는 굳은 결의를 눈빛에 담았다. 여자는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가 말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셀브림은 아이단을 찾아갔다. 아이단은 마구간에서 말들에게 여물을 먹이고 있었다. 셀브림이 찾아오자 아이단은 말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착 준비는 끝냈나?”

  “대충 정리 끝났습니다. 발리스타 아홉 대는 보관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임시 무기고를 제작하는 중이고, 이번에 만든 점착폭탄 같은 폭발무기는 봉인해서 사무실 위층에 처박아뒀습니다. 재고는……, 어, 나중에 정리해서 다시 보고하겠습니다. 그 외, 투석기와 충차 등 공성무기는 먼젓번 싸움에서 개박살난 덕에 해체하고 임시 무기고로 만드는 중입니다. 덧붙이자면 우리가 머물 곳이 없어서 지금 이렇게 비나 처맞는 중인데, 벌목 좀 해서 막사 좀 짓겠습니다.”

  “자네가 필요하다면 해야지. 동의는 미리 얻어놨으니 바로 실행하면 되네. 아, 물건 재고는 케아라가 확인했네. 필요하거나 더 보고할 사항이 있나?”

  “흠……. 없네요. 있다면 가능하다는 가정 하에 보고서로 작성해서 올리겠습니다. 또 구두가 되겠지만요.”

  아이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셀브림은 경례한 뒤 임시 무기고가 만들어지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셀브림이 떠나고 아이단은 용병단 사무실로 마련 된 건물로 들어갔다. 건물 내부는 방금 막 이사왔다는 걸 증명하듯 난장판이었다. 아이단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리 좀 할까.’

  아이단은 지저분한 사무실 내부를 혼자 정리하기 시작했다. 널브러진 서류를 연관성 있는 것끼리 묶어 차례로 보관했다. 사무실 밖에서는 셀브림이 병사들과 함께 임시 무기고를 만드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아이단은 흐르는 땀방울을 닦았다. 많이 움직이지도 않았건만 힘이 든다. 아이단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의자에 몸을 기대자 피로가 몰려온다. 아이단은 정리가 덜 된 사무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면 살림을 도맡아하던 여자들이 그립다. 그녀들이 다 모여 있으면 이정도 난제는 문제 축에도 끼지 못한다. 아니, 애초에 그녀들이 있었다면 이렇게 난장판이 될 수도 없다.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아이단은 피식 웃었다. 기대하지 않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다. 아이단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사무실을 이대로 놔두고 몸져눕고 싶지만 그랬다간 그녀들이 복귀했을 때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지 모른다. 아이단은 귀청 떨어지는 소리를 듣느니 마저 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는 정리하던 서류를 마저 모으기 시작했다.

  용병단 사무실에서 어지럽혀진 서류의 정리를 대충 끝냈을 때 아이단은 담배 연기를 그리워하며 의자에 앉아 있었다. 비가 내리는 하늘을 창문을 통해 바라보던 아이단은 셀브림의 고함소리 대신 마렉의 윽박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사무실의 문을 정중하게 두드리는 소리에 아이단이 말했다.

  “들어와.”

  문이 열렸다. 아이단은 지금 시기에 찾아올 자는 셀브림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보고할 게 있나?”

  “있긴 있는데……, 지저분한데 좀 치우시죠?”

  “응?”

  아이단은 문을 쳐다봤다. 그리고 셀브림의 모습 대신 물에 홀딱 젖은 우의를 걸친 여자를 볼 수 있었다. 아이단은 말을 잇지 못했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했다. 편지를 보낸 지 아직 한 달도 지나지 않았다. 편지는 도착했을지 몰라도 사람이 벌써 도착하는 건 시기상조다. 

  놀란 얼굴로 두 눈을 깜박이며 아이단은 그녀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 검은 로브를 후드까지 깊게 눌러 쓴 자가 나타났을 때 아이단의 놀람은 배로 증폭되었다. 너무 놀라서 말도 못하고 있는 아이단을 향해 이비는 물에 젖은 우의를 벗으며 말했다.

  “후, 비 진짜 많이 오네요. 굳이 비 오는 날 저렇게들 고생시켜야 해요? 아, 됐고. 보고 드릴 게 있거든요. 저 이 사람은……, 단장님? 저기요?”

  “어?”

  “뭐하세요?”

  아이단은 눈을 비비고 다시 문을 쳐다보았다. 우의를 벗어 걸어놓을 곳을 찾는 이비의 모습과 그 뒤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검은 로브를 걸친 자의 모습을 확인했다. 믿기 어려웠지만 아이단은 믿기로 했다. 이비와 아리샤가 한 달도 되지 않아 콜헨에 도착했다는 걸 말이다. 

  행색이나 신장을 보건데 영락없는 아리샤였다. 다만 다른 건 언제나 손에서 놓지 않는 장검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고, 왼손에서 빛나는 물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빼면 아리샤가 분명했다. 아이단은 헛기침을 하곤 말했다.

  “웬일로 빨리 왔구나, 이비.”

  “가까운 곳에 있었거든요. 그건 그렇고 보고할 게 있다니까요.”

  “그래. 그렇게 들 뜬 얼굴로 보고할 게 뭔지 한번 들어나 봐야겠군.”

  이비는 빙긋 웃으며 검은 로브를 입은 자를 가리켰다. 아이단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리샤도 보고할 게 있나?”

  “아리 언니 아니구요, 새 입단 인원이에요. 그리고 실력은 제가 보장합니다! 단장님. 허락해주실 거죠?”

  일단 아리샤가 아니라는 말에 아이단은 안도했다. ‘내일은 해가 제대로 뜨겠군.’ 갑자기 있을 수 없는 일이 겹겹이 나타난다면 불안함을 감추기 어려웠을 것이다. 안도하고 난 뒤 아이단은 이비가 가리키는 자를 훑어보았다. 자세히 보니 신장은 아리샤와 비슷하지만 더 크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비슷하지만, 아리샤가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 같다면 저 자는 먼 북쪽 극한의 땅에서 차갑게 얼어버린 바다를 보는 듯하다. 아이단은 저런 분위기를 풍기는 자를 한 명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자의 실력은 아이단이 아는 한 최고다. 이비는 아이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 마을이나 둘러볼 테니까 입단시켜주세요, 단장님. 그리고 정리도 좀 하시구요. 우산이 안 보이잖아요.”

  이비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사무실의 난장판 속에 감춰져있던 우산이 자석이 이끌리는 철가루처럼 날아왔다. 이비는 그대로 우산을 펼치며 비 내리는 마을로 가버렸다. 용병단 사무실에 남겨진 아이단과 검은 로브를 입은 자는 서로를 쳐다봤다. 아이단은 자리에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단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무뚝뚝한 자로군.’

  뻐근한 허리를 편 아이단은 그에게 말을 건넸다.

  “신원 확인이 되지 않아도 별 상관은 없네. 이비가 데려온 자이니 믿을만한 사람일 테니까. 하지만 개인적으로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물어도 되겠나? 싫으면 대답하지 않아도 좋아.”

  “말씀하시지요.”

  아이단은 퍽 놀랐다. 얼핏 여성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고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달콤하기에 그 맛에 빠져버리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치명적인 마약과 같다. 제법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아이단은 목소리에 빠지지 않으려 정신을 붙잡았다.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여자의 대답에 반응했다.

  “……별 것 아니네. 이름을 알려줄 수 있는가?”

  “이름…….”

  여자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아이단은 그녀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성명을 밝히는 걸 꺼려하는 자는 이미 몇 명 있다. 두 명은 밝혀지면 곤란하기 때문에 가명을 사용하고, 한 명은 이름이 없기 때문에 가명을 사용한다. 눈앞의 여자를 보건데 아무래도 전자일 확률이 높다. 이름이 없는 사람이 흔하지는 않을 테니까. 아이단은 여자가 마음을 정리하기에는 제법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 여겼다. 오래 걸릴 것을 생각하고 아이단은 이비가 내 준 숙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그는 사무실을 마저 청소하기 시작했다.

  “이름을 묻는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너, 자네, 당신, 야 등으로 불리고 싶다면 상관없네. 그런데 될 수 있으면 부르는 우리 입장도 생각해주면 좋지.”

  “그렇습니까. ……피오나라고 합니다.”

  “전장에 핀 장미라……, 알겠네. 입단을 환영하지. 피오나.”

  피오나는 로브의 후드를 더욱 깊게 눌러썼다. 그녀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아이단은 사무실을 나가는 그녀를 보곤 청소를 마저 했다. 

  

Lv36 그락란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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