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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다시 쓰는 마영전]별의 불꽃. 8 完

그락란라우
댓글: 1 개
조회: 1354
추천: 3
2015-07-26 03:44:55

  사내는 잠시 고민했다. 

 

  지금 수중에 있는 돈이라고는 고작 은편 일곱 닢. 하지만 마부가 요구하는 값은 은편 열 닢이다.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수치의 값을 부르는 것을 보니, 바가지가 분명했다. 왕국 수도로 가는 차편도 다섯 닢이 채 안 되는 판국에 시골마을로 가는 요금이 열 닢이란다.

 

  그는 외투 주머니를 꼼꼼하게 뒤져보았다. 만져지는 건 짤그락 거리는 일곱 개의 은편 뿐이다. 사내는 마부를 쳐다봤다. 마부의 눈이 흉흉하다. 아무래도 돈이 없다는 걸 눈치 챈 듯했다. 사내가 말했다. 

 

  “어떻게 열 개나 받아갑니까?”

 

  “싫으면 마. 아쉬운 게 당신이지 나유?”

 

  “그래, 아쉬운 건 나니까……. 시간 뺏어서 미안하게 됐습니다.”

 

  사내는 아쉬울 것 없다는 투로 등을 돌렸다. 제법 강단 있는 태도에 마부는 당황했다. 급해보였기에 바가지를 씌울 작정으로 가격을 높게 불렀다. 이렇게 높게 불렀을 때 급한 사람들의 반응은 보통 두 가지였다. 그냥 돈을 내던가, 아니면 가격을 흥정하려 들던가. 마부가 아는 한 급하면서도 저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낭패했다는 생각이 든 마부는 사내의 어깨를 붙잡았다. 사내는 가볍게 어깨를 흔들어 마부의 손을 쳐냈다. 마부는 움찔거리며 물러섰다. 사내가 뒤를 돌아보았다. 마부는 그의 시선에서 날카로운 쐐기 같은 것을 발견했다. 그저 시선일 뿐임에도 사람을 찔러죽일 것만 같은 기세. 사내가 말했다.

 

  “필요하긴 하지만 장난을 받아 줄 생각은 없습니다.”

 

  사내는 마부를 향하던 시선을 거두었다. 마부는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냉혹하기 그지없는 고요함에 겁을 먹었다. 

 

  영롱한 빛을 디는 눈동자는 고요함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 고요함 깊은 곳에는 끝 모를 심연이 자리하고 있다. 마부는 멀어져가는 사내의 등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콜헨으로 향하는 길을 아는 마부는 한참을 돌아다녀도 찾을 수 없었다. 

 

  두 자루의 칼을 비스듬하게 세워놓고 공터 벤치에 앉아 있던 사내는 손을 깍지 꼈다. 길이라도 알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길도 모르니 이건 방법이 없다. 사내는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로체스트의 날씨는 요 며칠 꿀꿀하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처럼 먹장구름이 가득하지만 비를 내리지는 않는다. 도시를 한가득 채운 습기 속에서 사내는 땀이 흐를 것 같은 날씨에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비가 왔으면 시원하기라도 했을 텐데 말이다. 사내는 아이단이 보낸 편지를 다시 꺼냈다. 

 

  아무리 뒤져봐도 가는 길을 언급해놓지는 않았다. 그저 로체스트 인근에 있는 작은 마을인 콜헨으로 오라는 말뿐이다. 사내는 이런 불친절한 내용이 가득한 편지를 계속 가지고 있어야하나 고민했다. 사내는 편지를 다시 접어 품속에 집어넣었다. 일단은 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의 편지니 버리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다. 

 

  충분히 쉬었는지 사내가 벤치에서 일어났다. 잊지 않고 두 자루의 칼을 허리에 찬 그는 길을 아는 마부를 찾았다. 

 

  마부를 찾아 헤매던 사내는 어느새 시장을 걷고 있었다. 그는 시장을 헤매던 중 문득 잡화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멍한 얼굴로 잡화점을 바라보던 사내는 가게에서 나오는 빨간 머리의 여자와 마주쳤다. 사냥꾼인지 동물의 가죽을 이용해 만든 가죽 옷을 입은 큰 키의 여자다. 여자는 조심스럽게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손님이신가요? 그런데 지금 주인이…….”

 

  “손님 아닙니다. 지나가던 중이었죠.”

 

  “아…….”

 

  사내는 고개를 꾸벅였다. 여자는 얼떨결에 마주 인사했다. 여자에게 인사를 한 사내는 잡화점을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빨간 머리의 여자가 가게 안쪽을 향해 던진 한마디 때문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르셴, 나 콜헨에 있을 거야. 한번쯤 찾아와주지 않을래?”

 

  여자는 분명히 ‘콜헨’이라 말했다. 사내는 이제야 이 미로 같은 로체스트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사내는 여자가 부담스러워하지 않을 거리를 유지하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갑작스러운 사내의 말에 여자는 어리둥절해했다. 사내는 여자가 말하기만을 기다렸다. 여자는 사내가 단순히 뭔가를 물어보려 한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콜헨이라는 마을로 가는 길을 물어보려고 합니다. 괜찮으시다면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콜헨 말씀이신가요?”

 

  사내는 그녀가 되묻는 말에 가벼운 몸짓으로 확답을 주었다. 

 

  여자는 마침 얼음 딸기주의 계절도 다가오고 하니 콜헨을 찾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았다. 길을 알려주려던 여자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허리춤에 두르고 있던 작은 가방이 여럿 달린 벨트를 뒤적였다. 작은 가방에서 한 장의 낡은 종이를 꺼낸 여자는 그것을 사내에게 내밀었다. 종이를 받아들고 펼쳐보는 사내를 향해 여자가 말했다.

 

  “약도 비슷한 거예요. 도움이 됐으면 좋겠군요. ……낯선 분.”

 

  “리시타입니다. 언제까지 쓰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가씨.”

 

  “커스티라고 해요.”

 

  “……커스티 씨.”

 

  리시타는 커스티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자는 의미가 분명한 몸짓이었기에 커스티는 리시타이 손을 붙잡았다.

 

  지도에 대한 감사인사를 전한 리시타는 지도를 쳐다보며 시장을 떠났다. 커스티는 겨울의 눈보라처럼 살을 에며 차갑고 날카롭지만, 함박눈이 내리는 바람 없는 설원을 보는 듯한 고요함을 가진 사내의 이름을 슬며시 입에 담아본다. 

 

  “리시타라……. 괜찮은 이름인걸?”

 

  커스티는 리시타를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로체스트의 상인 슈렌더에게 납품할 물건이 담긴 배낭을 짊어졌다. 묵직한 배낭이었다. 아파오는 어깨를 뒤로하고 커스티는 슈렌더가 만나자고 약속한 상인조합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익숙한 소리였다. 

 

  아무래도 정장을 오래 떠돌다보니 익숙해지는 게 당연한 소리였다. 발리스타의 탄력적인 시위가 만들어내는 소리는 아주 먼 거리에서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발리스타의 화살이 내리꽂아 부서져가는 건물의 모습도 익숙했다. 리시타는 목적지에 다 왔다는 확신이 들었지만 목적지보다는 당장 종탑을 향해야한다는 생각에 달리기 시작했다. 

 

  종탑이 무너지는 모습은 제법 장관이었다. 종탑만큼 커다란 건물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성벽이 공성병기의 집요한 공격을 버티지 못한고 쓰러질 대와 같은, 귀청을 도려내는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종탑이 주저앉는다. 

 

  리시타는 비 내리는 가을 날씨 덕분에 먼지가 피어오르지 않아 종탑이 무너지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수 있었다. 무너지는 종탑의 잔해 위로 커다란 종이 떨어졌다.

 

  무너진 종탑의 주변을 돌아다니던 리시타는 머리에서 붉은 선혈이 물처럼 흘러나오는 금발의 여자를 발견했다. 여자의 왼쪽 발목은 두꺼운 종탑의 잔해에 깔려있었다. 여자의 복장을 보건데 마렉이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여신의 무녀가 분명했다. 리시타는 무릎을 굽혔다. 금발의 무녀는 숨을 쉬고 있었다. 

 

  피가 흐르는 머리에 손을 얹어본다. 피는 출혈 부위에서 나와 흐르는 게 아니다. 빗물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더 이상 상태를 확인할 필요가 없다. 가벼운 뇌진탕이다. 리시타는 여자의 발목을 깔아뭉갠 돌덩이를 들어올렸다. 

 

  돌은 퍽 무거웠다. 팔에 힘줄이 솟는 것이 느껴지는 걸 보니 못해도 몇 십 킬로그램은 거뜬히 넘는다. 리시타는 한손으로 집어 든 돌덩이를 종탑의 잔해가 싸인 곳을 향해 힘 있게 집어던졌다. 그런 뒤 무녀를 들고 마을로 가려는 생각에 무릎을 굽혔다. 그런 그의 시선에 무녀와는 다른 금발의 여자가 들어왔다. 

 

  집채만한 쇳덩이인 종에 몸이 깔린 여자였다. 리시타는 그녀의 피 흘리는 얼굴을 보며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시선도 관심도 빼앗아버리는 어떤 자연 풍경이 만들어내는 장관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다운 여자였다. 리시타는 지금껏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던 마음의 평정과 고요함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그는 심호흡했다. 그리고 허리춤에 걸려 있는 두 자루의 칼을 동시에 뽑았다.

 

  죽었을 것이 거의 확실시되는 여자였다. 하지만 리시타 본인도 지금 칼을 뽑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두 팔은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리시타의 이성과는 반대로 행동했다. 리시타는 두 팔이 뭘 하려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종은 두껍다. 무슨 목적으로 이렇게 두껍게 만들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이런 두꺼운 쇳덩어리를 자를 수 있을리 만무하다. 하지만 리시타는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두 칼을 휘둘러 종을 노렸다. 

 

  칼날은 마치 물렁한 물건을 자르듯 저항 없이 두꺼운 종을 파고든다. 칼날이 스치고 지나가는 종의 일부는 엄청난 양의 불꽃을 만들어낸다. 칼날과 종이 만들어내는 불꽃 속에서 새하얀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종을 잘라낸 리시타는 칼을 칼집에 도로 넣었다. 종의 단면을 떼어낸 리시타는 커다란 종을 올려다봤다. 무게중심을 잃은 종이 여자를 향해 기울어지고 있었다. 리시타는 지체하지 않고 여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심장이 뛰고 있어.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상태야. ……이대로 두면 죽겠지.’

 

  여자의 상태를 확인한 리시타는 그녀를 안았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많이 나가봐야 50킬로그램 중후반일 여자를 든다고 몸에 힘이 달릴 리는 없다. 리시타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이 느낌을 알고 있다. 이건 타인의 기력을 빼앗는 힘이다. 

 

  리시타는 여자를 조심스럽게 훑어보았다. 그는 여자의 소매 사이로 드러난 양 팔의 손목에 채워진 물건을 빤히 쳐다보았다. 

 

  수갑을 연상시키는 모양이지만 두께는 무척 얇다. 여자들이 흔히 장신구로 선택하는 팔찌다. 팔찌는 수갑을 연상시키는 투박한 모양새와는 달리 무척 세련되고 멋들어진 장식 때문에 돋보인다. 여자의 왼손에는 백금으로 된 새하얀 팔찌가, 오른손에는 어두운 보랏빛이 감도는 까만 팔찌를 차고 있다. 

 

  이 두 개의 팔찌 중 하나가 리시타의 기력을 빼앗고 있다. 보통사람이라면 순식간에 정신을 잃을 정도로 기력을 빼먹는 걸 보니 절대 평범한 물건은 아니다. 아마 평소에는 착용자의 기력마저 갉아 먹는 물건이리라. 그렇지만 지금은 착용자를 지키기 위해 주변 환경을 갉아먹고 있다. 팔찌와 여자는 공생관계. 팔찌는 여자에게 힘을 주는 대신, 여자의 기력을 먹는다. 

 

  ‘과연 기력만 먹을까…….’

 

  리시타는 피식 웃었다. 

 

  세상에 이렇게 특수한 힘을 가진 물건은 하나뿐이다. 리시타는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리시타는 종탑의 잔해 속을 해쳐나갔다. 그리고 마지막 잔해를 뒤로했을 때 급하게 뛰어오는 회색 투구를 뒤집어 쓴 사내를 마주했다. 사내는 리시타의 모습에 퍽 당황한 듯 가만히 서 리시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시타는 사내에게 말을 걸려다 귀를 아프게 하는 높은 목소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리 오빠!”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이비. 그건 그렇고 이 여자 많이 위험한데, 네가 도와줘야겠다.”

 

  리시타는 헐레벌떡 뛰어온 이비를 향해 말했다. 이비는 리시타의 품안에 안겨있는 피오나의 모습을 보더니 입을 틀어막았다.

 

  “어쩌다가……?”

 

  “그야 나도 모르지. 종에 깔려 있더라고. 그 덩어리도 아니고, 살아있는 게 신기하지. 시간이 많지는 않아. 이놈들, ‘흔적’ 때문에 간신히 버티고 있는 정도니까. 네 도움이 절실해. 안 그러면 죽어.”

  “알았어. 먼저 이것부터 먹이고.”

 

  이비는 작은 가방에서 꺼낸 포션을 피오나의 입에 흘려 넣었다. 이비는 반쯤 남은 포션 병을 닫고 빨리 오라는 말과 함께 콜헨을 향해 뛰어갔다. 리시타는 이비의 뒤를 따라 걸으며 투구를 쓴 사내에게 말했다.

 

  “마렉. 입버릇처럼 말하던 무녀는 저기 잔해에 있으니까 수색해서 찾아.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바쁘니까 먼저 간다.”

 

  마렉은 리시타가 이비를 뒤따라가고 난 뒤에야 티이를 찾아 무너진 종탑을 수색했다.

 

 

 

 

 

  

  “어디 갔다 온 거야? 허크 씨처럼 전쟁터를 돌아다닌 것도 아닐 텐데.”

 

  “평소에 하던일이지.”

 

  “아, 글쎄 그게 뭐냐구!”

 

  리시타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찌푸린 얼굴로 노려보는 이비를 무시했다. 리시타는 찻잔에 담긴 유자차를 마셨다. 그러고는 덮어두었던 두꺼운 가죽으로 양장 된 책을 펼쳤다. 이비는 무슨 재미난 내용이 들어있는지 모를 책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리시타를 답답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참으로 말이 없는 무뚝뚝한 사람이다. 표정변화라고는 무슨 내용인지 모를 책을 볼 때 가끔 눈이 평소보다 조금 더 커지는 것밖에 없다. 햇수로 치면 알게 된 지 벌써 4년 가까이 지났지만 감정이란 게 있는지 의심스러운 경우가 많다. 

 

  이 남자가 적에게 자비를 베푸는 모습 같은 건 본적도 없다. 그렇기 때문인지 지금 사무실 옥상으로 싸구려 술병을 나무에 열린 열매처럼 주렁주렁 매달고 오는 셀브림과 죽이 잘 맞는 것인지도 모른다. 

  셀브림 또한 무자비하고 잔혹하기로 유명하니까.

 

  “미성년자는 내려가도록.”

 

  탁자 위에 주렁주렁 매달고 있던 술을 내려놓으며 셀브림이 말했다. 이비는 살짝 화가 난 어조가 느껴지도록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성년식 했거든요?”

 

  “어허, 남자들끼리 긴히 할 말이 있어서 그래요. 숙녀분은 잠시 자리를 피해주시죠?”

 

  이비는 으르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탁자를 쾅 소리가 나도록 후려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셀브림은 멀어져가는 이비의 뒷모습을 보며 표정 없는 얼굴로 리시타를 돌아보았다.

 

  단 둘이 남게 되자 읽던 책을 덮고 바람 같은 속도로 술병을 따고 있는 리시타를 보며 피식 웃었다. 셀브림은 리시타를 따라 술병을 열었다. 

 

  싸구려 숨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리시타가 술병을 내밀었다. 셀브림은 리시타와 술병을 마주댄 뒤 그것을 마셨다. 술병 하나를 통째로 비운 리시타는 책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큰 형님은 아직 안 왔나봐?”

 

  “……너 일주일 동안 뭐했냐? 다른 세상에서 살다 왔니?”

 

  “책 읽는다고 좀 바뻐서.”

 

  “또 그거? 안 지겹냐?”

 

  셀브림의 한탄 섞인 어조에 리시타는 올려놓은 책장 위에 손을 얹었다. 셀브림은 책에 주의를 돌렸다.

 

  “요즘 마족 사이에서 최고 인기작이거든. 너도 읽으면 빠질 거야.”

 

  “안 됐지만 난 마족들 말은 몰라.”

 

  리시타는 가만히 셀브림을 쳐다보다가 덮어놓았던 책을 들었다. 책갈피를 빼며 책을 펼친 리시타는 셀브림이 술병을 내밀 때와 책장을 넘길 때를 제외하곤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셀브림은 술잔을 홀짝이며 리시타의 모습을 곰곰이 뜯어보았다.

 

  책을 잃는 리시타의 모습은 전생에 책을 잃지 못해 망부석이 되어버린 사람 같다. 셀브림은 술병을 내려놓고 가져왔던 지도를 꺼내 탁지 위에 펼쳤다. 처음으로 리시타의 시선이 책이 아닌 다른 곳을 향했다. 

 

  대충 눈으로 훑어본 결과 지도는 콜헨 마을과 그 일대 지역을 상세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들었는지 지도에 나타난 지형지물의 모습은 실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셀브림은 콜헨 인근의 작은 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가슴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셀브림이 지도에 적는 걸 가만히 지켜보던 리시타는 다시 시선을 책으로 돌렸다. 리시타가 말했다.

 

  “어차피 그 사람 오면 욕처먹고 개박살 날 전술인데, 연필로 해라. 펜으로 하지 말고. 지도 아깝다.”

 

  “언제 올 줄 알고? 그리고 네가 도와주면 처참하게 깨지지는 않을 텐데.”

 

  “검투사는 싸울 줄 밖에 모르는 무뢰배들이지.”

 

  셀브림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광고를 해라 광고를.”

 

  리시타는 셀브림을 슬쩍 쳐다보았다. 셀브림은 머리를 쥐어짜듯 관자놀이를 두손으로 누르고 있었다. 보기 안쓰러웠는지 리시타가 말했다.

 

  “이론보다는 본능에 충실한 게 네 전매특허인데, 돌지도 않는 머리로 전술이나 짜니까 깨지지. 집어치우고 목적이나 말해. 왜 왔어?”

 

  셀브림이 리시타를 쳐다봤다. 셀브림은 붉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뿌리가 검은 붉은 머리는 드문드문 보이는 기다란 검은 머리카락 때문에 날 때부터 붉은 머리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셀브림은 어두운 적색 눈동자로 리시타의 녹색 눈을 주시했다.

 

  허크와 카록이 전체적으로 호남이라면, 리시타와 셀브림은 미남으로 칭하기에 충분한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흔한 얼굴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누가 보더라도 잘생겼다는 주장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셀브림이 말했다.

 

  “다른 건 아니야. 여기가 주둔지가 된 건 된 거고, 기사들이 주는 봉급으로 먹고 살기에는 팍팍하잖아.”

 

  “돈 좀 많이 주는 일거리가 있는데 같이 가자는 걸 보면……, 내가 미쳤냐.”

 

  “뭐? 왜?”

 

  리시타는 시선은 여전히 책에 고정한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셀브림을 겨냥하며 말했다.

 

  “네가 같이 가자는 일은 아주아주, 정말정말 개 같은 일이 대부분이기 때문이지. 짐작컨대 이건 왕국 수도까지 올라가는 일이고 내용은……, 그래도 애 보기 같은 보모 짓거리보단 괜찮겠지만 씹창인 건 변함없겠지. 안 가. 일 없다. 모험심 투철한 리시타는 존재할 수 없어. 악어가 흥미롭기는 해도 아가리에 내 머리를 쑤셔 넣는 제정신이 아닌 짓거리에는 난색을 표하겠다. 끝. 더 묻지마. 꺼져.”

 

  리시타의 매몰찬 거절에 충격을 받았는지 셀브림은 마을이 더내려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의 큰소리로 비명을 내질렀다. 리시타는 귀를 막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결국 셀브림의 푸념을 한 시간 가까이 들어준 뒤에야 리시타는 혼자가 될 수 있었다. 

 

  먹장구름도 하얀 구름도 보이지 않는 맑은 하늘은 책을 읽기에는 최적의 날씨였다. 리시타는 가을이란 계절에게 감사하며 마저 책을 읽었다.

 

  한참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던 리시타는 어쩐지 곧 시끄러워질 것 같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는 리시타 본인도 모른다. 하지만 여관 2층, 벨라의 방 창문이 열렸을 때 리시타는 반사적으로 책을 덮었다. 열린 창문을 통해 잠옷차림의 벨라가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말했다.

 

  “이비가 빨리 오라고 성화잖아. 제발 잠 좀 자자!”

 

  리시타는 할 말만 하고 창문을 닫아버리는 벨라 덕분에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통보도 이런 일방적인 통보가 없다고 한탄했다. 책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리시타는 의자 등받이에 걸어두었던 긴 검은색의 코트를 어깨에 둘러맸다. 그는 이비가 부른다는 콜헨 여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여관에 도착한 리시타는 이비의 방문을 두드렸다. 반응이 없다. 몇 번을 두드려보아도 전혀 반응이 없다. 리시타는 별다른 생각 없이 문고리를 붙잡았다. 문은 열려있다. 리시타는 방문을 열었다. 

 

  여자의 방이라는 게 느껴지는 향기가 난다. 리시타는 방을 둘러보았다. 이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리시타는 이비의 이름을 부르려다가 입을 닫았다. 그는 문을 닫았다.

 

  복도 벽에 기대어 있던 리시타는 책을 왜 탁자 위에다 놓고 왔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때의 잘못된 선택을 한 스스로에게 욕을 하던 리시타는 조심스럽게 열리는 방문을 쳐다봤다. 

 

  벨라의 방도 이비의 방도 아니다. 아직 주인이 돌아오지 않은 방도 아니었다. 방문이 열린 곳은 피오나의 방이었다. 

 

  리시타는 피오나의 방에서 나오는 이비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비가 복도에 표정 없는 얼굴로 서 있는 리시타를 쳐다봤다. 이비가 리시타를 향해 말했다.

 

  “재료 좀 구해다줘.”

 

  “무슨 재료?”

 

  “이거 만들 재료.”

 

  리시타는 허공을 날아오는 종이 한 장을 붙잡았다. 종이에 적힌 것들을 살펴보던 리시타는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이비를 마주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거절의사를 읽어낸 이비는 예상했던 반응이었는지 별다른 말없이 손짓했다. 리시타는 종이를 펄럭이며 다가갔다. 충분히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이비가 말했다.

 

  “리 오빠가 저번에 구하던…….”

 

  “구했는데.”

 

  말문이 막혔다. 이비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리시타를 바라보았다. 리시타는 이비가 귀찮게 하기전에 선수를 치기로 했다.

 

  “황금 사슴벌레는 구했고, 일 끝낸지 오래됐거든. 더 이상 거래할 조건이 없다면 찾지마.”

 

  “어……, 어?”

 

  리시타는 당황하는 이비를 버려둔 채 등을 돌렸다. 멍하니 쳐다보는 이비를 무시한 채 걷던 리시타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발걸음을 멈췄다. 리시타는 천천히 이비를 돌아보며 말했다.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의식이 없다는 건 스스로가 깨어나는 걸 거부하고 있다는 뜻밖에 더 되겠냐? 철저한 자기관리로 몸은 건강한 사람이었으니, 지금쯤이면 충분히 움직일 정도는 됐을 테지. 더 이상 치료에 연연하지 않아도 돼. 때가 되면 알아서 일어날 테니까. 지금 그 여자에게 필요한 건 자의. 가슴 속 깊이 응어리 진 흙먼지를 털어내고 일어날 것인지, 아니면 흙먼지 가득한 곳에서 울며 주저앉을지는 스스로한테 달린 일이지.”

 

  리시타가 떠났다. 

 

  아무도 없는 빈 복도를 바라보던 이비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시타가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는 건 정말 드문 일이다. 적어도 이비가 아는 한 리시타는 자기 자신 이외의 사람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런 사내게 누군가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는 건 이비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이었다.

  이비는 씩 웃었다.

 

 

 

 

  별의 불꽃 完

   

  

  

  

    

Lv36 그락란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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