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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잭스X소나 팬픽-가로등과 별 25화

아이콘 강철안개
댓글: 3 개
조회: 2276
추천: 11
2016-08-29 00:11:27




#. 소환사의 회랑

 -잭스 님?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괜찮다고 몇 번을 말했소. 거기 좀 잡아보시오.”
 -이, 이렇게요?

 찌이익

 잭스가 눈을 뜨자마자 한 행동은 얌전히 앉아 소나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아닌, 제대로 상처를 싸매는 것도 아닌 바로 멘드레이크를 꽁꽁 묶는 일이었다. 넝마가 된 여행용 로브를 북북 찢어 밧줄 대용으로 쓰는 잭스를 바라보는 소나의 눈길엔 대단하다는 건지 걱정한다는 건지 모를 묘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이야기가 끝난 후 대강 전후사정을 설명해 준 잭스 덕에 전후사정은 어찌어찌 파악한 소나였지만, 그래도 거의 초면에 가까운 초로의 노인을 묶는다는 점이 탐탁지 않은지 그녀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물론 당한 게 많고 멘드레이크 같은 실력자가 적으로 돌아섰을 때의 무서움을 말 그대로 뼈저리게 겪은 잭스의 손길엔 인정 따윈 조금도 없었다.  

 어쨌든 잭스는 멘드레이크를 다 묶고 입에 재갈까지 먹이고 나서야 한숨 돌렸다는 듯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기적같이 소나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고는 하나 몸 상태가 썩 좋지만은 않았다. 사실 몸 상태가 좋은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특히 가장 최근에 맞은 명치가 제일 아팠다. 명치…잭스의 미간이 조금 찌그러지며 소나를 슥 하고 쳐다봤다. 아무리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고는 하나 짚고 넘어가야할 건 짚고 넘어가야 했다.

 “미스 부벨르.”
 -네, 말씀하세요.
 “일단 프렐요드건 어디건 명치를 때려서 정신을 차리게 한다는 민간요법 따윈 없소.”

 잭스가 시큰둥하게 말하자 소나는 삽시간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질 나쁜 장난 따위가 아니라 정말 몰랐다는 그 태도에 잭스는 낮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는 협곡에서 했던 소나에 대한 평가를 조금 정정해서 ‘의외의 부분에서 상식이 부족하다’라는 항목을 추가로 집어넣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잭스의 머릿속에 울음기가 섞인 소나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에트왈…저한테 거짓말 아니라고 했잖아요…….
 [속은 놈이 바보지, 등신아. 무식이 죄라는 말도 몰라?]

 그리고 들려오는 또 하나의 목소리. 잭스는 낮게 한숨을 쉬며 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 한 소년과 악기 하나가 있었다. 둘의 이름은 에트왈. 소나의 이야기에 따르면 저 소년은 에트왈의 본체인지 정령인지 하여간 그에 준하는 무엇이라는 모양이었다. 도저히 믿기 힘든 잭스였지만 눈앞에 증거가 저렇게 떡하니 있는데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열 보 양보해서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골치 아픈 문제는 또 하나 남아있었다. 사실 이쪽이 더 심각한 문제였다.

 -하지만 절대, 절대로 저한테 거짓말 안 한다고 그렇게 자신 있게 말씀하셨으면서…….
 [뭐? 그거야 네가 나한테 칭찬도 안…에이, 어쨌든 저 용병 나부랭이 잘못이라고!]
 -잭스 님이 대체 뭘 잘못하셨는데요? 남에 대해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건 정말 나쁜 짓이에요, 에트왈!
 [뭐, 나쁜 짓? 야! 너 정말 내가 쟤를 왜 싫어하는지 몰라서 그래?]
 -몰라요! 에트왈 미워요! 
 [미, 미워……. 야 이 빌어 처먹을 용병새끼야! 너 때문에 내가 이따위 말까지 들어야겠어?]  

 잭스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또 하나의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그를 갈아 마실 듯 노려보는 어린 소년이었다. 그렇다. 이제 잭스의 머릿속엔 소나의 목소리에 더불어 에트왈의 목소리도 같이 들리고 있던 것이었다. 게다가 조용조용한 소나의 목소리와는 달리 에트왈은 있는 대로 짜증을 부렸고, 거기에 휘말려 소나도 그 높은 톤의 목소리로 말싸움을……. 둘의 목소리가 들리는 잭스만 미칠 지경이었다. 머릿속에 직접 울리는 소리를 막을 방도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불평이라면 나중에 얼마든지 들어주고 욕도 얼마든지 들어주겠소, 에트왈. 그러니 제발 부탁이니까 지금은 소리치지 말아주시오. 몸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으니까……. 가급적이면 쓸데없는 체력 소모는 피하고 싶소.”
 -아……! 죄송해요, 잭스…….
 “미스 부벨르, 당신도 가급적이면 조용히 말해주면 고맙겠소.”
 -네……. 죄송해요.

 잭스가 머리를 짚고 서슬 퍼런 목소리로 말하자 둘의 목소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 그는 소나가 자신을 옹호해주려고 그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 옹호고 뭐고 그냥 조용히 있어주길 바랬다. 

 소나가 풀이 죽은 모습으로 손가락만 꼼지락거리자 그 모습에 배알이 뒤틀린 에트왈이 다시 뭐라 하려 했다. 하지만 이내 별말하지 않고 발밑의 애꿎은 돌멩이만 걷어찰 뿐이었다. 잭스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그를 치료한 에트왈 자신이 그의 몸 상태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놈을 살리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렀는데 이런 걸로 머리에 문제가 생겨서 죽기라도 한다면…그거야 말로 죽 쒀서 개 주려다 발로 걷어차는 꼴이었다. 에트왈이 잠잠해지자 잭스는 소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미스 부벨르.”
 -네…….

 소나는 잭스가 한소리 하려나보다 하고 착각한 모양인지 몸을 움츠렸지만, 이어지는 말은 그녀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고맙소. 목숨을 구해줘서.”
 -아…고맙긴요. 잭스 님도 협곡에서 절 구해주셨잖아요.

 감사의 인사를 받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기에 소나의 얼굴은 삽시간에 발갛게 물들이며 미소 지었다. 부끄러움과 기쁨이 그녀의 가슴 속에서 부드럽게 찰랑거렸다. 뭇 남성을 단숨에 사로잡을 듯 아름다운 미소였으나, 유감스럽게도 에트왈의 몸에서 나오는 희미한 황금빛만으로는 그녀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기 힘들었다. 잭스는 그녀의 그런 태도에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에트왈은 아니었다. 소나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에트왈의 얼굴은 흡사 똥 씹은 것 마냥 찌그러져있었다.  

 [야, 지금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데 네 목숨을 구한 건 얘가 아니라 나야.]
 “그래서 아까 미스 부벨르의 이야기가 끝날 때 말하지 않았소, 고맙다고.”
 [네 감사 따윈 필요 없거든?]

 에트왈의 맥없는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리자 가면 속에서 잭스의 입가가 짜증으로 비틀렸다. 감사 인사를 바라고 생색은 잔뜩 내면서 정작 고맙다고 하면 저따위 태도를 취하는 건 대체 뭐란 말인가. 그저 소나에게 진심어린 감사(아까 스쳐지나가듯 했던 말 말고)를 받고 싶은 에트왈의 소망을 잭스가 알 리 없었다. 거기다 계속해서 비협조적인 태도로 나오는데 아무리 목숨의 은인이라지만 그라고 해서 기분이 편할 리가 없었다. 생명의 은인만 아니었으면 머리통을 쥐어박아도 스무 대는 쥐어박았을 것만 같은 잭스였다. 자연히 그의 입에서 튀어나올 말이 거칠어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목숨 구해준거야 고맙긴 하지만 날 무슨 당신네 집 하인이라도 되는 것 마냥 그러진 마시오.”
 -맞아요, 에트왈. 목숨을 구해주신 건 오히려 잭스 님이셨어요. 전 은혜를 갚은 것뿐이고요.
 [쟤는 자기도 협곡 안에서 헤매다 얻어걸려서 널 구한 거지만 넌……. 그래, 그만하자. 그 말도 맞긴 하니까. 어쨌든 너, 고맙다고 한 마디로 퉁 친다거나 아니면 협곡 안에서 구해줬으니 쌤쌤이라고 했다간 나중에 골통 깨질 줄 알아라. 이 아이는 네 생각보다, 그리고 이 아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희생을 치렀어.]
 -네? 전 딱히 희생이라고 할 것도…….

 희생이라는 말에 소나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의아하기는 잭스도 마찬가지였다. 좀 지쳐 보인다는 것 빼고 그다지 눈에 띄는 점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 둘의 머릿속에 자못 한심하다는 에트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황 파악이 안 되지? 이것까진 안 보여주려고 했는데, 기왕 말 나온 거 사라지기 전에 그냥 다 까발리고 갈게.]
 -에, 에트왈! 지, 지금 뭐…….

 그 말을 끝으로 에트왈이 신경질적인 손놀림으로 입고 있던 블라우스를 풀어헤치기 시작하자 소나의 당황하는 목소리가 다시금 잭스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그녀가 당황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머리가 조금 짧다는 점만 빼면 현재 에트왈의 모습은 그녀의 어릴 적과 아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자신이 벗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소나는 당황하며 잭스 쪽을 휙 돌아봤지만 철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그의 표정을 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리고 그녀가 당황하는 사이 에트왈은 휙 하고 상의를 열어젖혔다. 어찌나 당황했던지, 소나는 잭스의 말도 잊고 빽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꺅! 에트왈! 무슨 망측한 짓을 하는 거예요!
 “…….”
 [야, 네 눈알은 옹이구멍이냐? 누가 가슴 보래? 후, 너도 얘 눈치의 반에 반만이라도 배워봐라. 이걸 보라고 이거…빨리 눈에서 손 안 떼? 가뜩이나 시간도 없는데 이걸 그냥…….]

 에트왈은 손을 뻗어 반 강제로 소나의 얼굴을 가슴팍으로 끌어당겼다. 한 발짝 뒤에선 잭스가 에트왈의 가슴팍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소나의 부끄러움은 눈 녹듯 사라졌다. 이어 에트왈의 가슴골을 본 소나는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나 몸을 떤 것은 비단 소나만이 아니었다. 

 에트왈의 가슴에는 황금빛 그림 같은 것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름답게 장식된 다섯 개의 별이 서로 모여 다시 하나의 별을 이루고 있는 대단히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하지만 마냥 아름답다고만 하기에는 크나큰 결점 하나가 있었으니, 바로 다섯 개의 별 중 하나가 빛을 잃고 새까맣게 변색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의외로 먼저 입을 연 자는 잭스였다. 어딘지 모르게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건 뭐요?”
 [이 아이에게 걸려있는 봉인을 나타내는 지도. 다섯 개의 봉인 중 하나가 풀렸지. 네 놈을 구하려고 어쩔 수 없이 이쪽에 손을 좀 써야했거든.]

 에트왈이 소나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이번만이야, 소나.]
 -네?
 [이번만이야, 네 투정을 받아주는 건……. 앞으로 두 번은 없어, 절대로. 내가 그렇게 만들지 않을거야. 일단 내가 나타난 이상, 그리고 네 신변에 위협이 닥친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해서 널 돕긴 할거야. 그게 내 역할이니까. 하지만 이번처럼 남을 위해 봉인에 손대는 일 따윈 없을 거야.]
 -잠깐, 잠깐만요 에트왈. 봉인이란 게 뭐죠? 제게 어떤 비밀이 있는 건데요?

 소나가 에트왈의 가녀린 어깨를 붙잡고 물었지만, 에트왈의 시선은 잭스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소나의 말을 싹 무시하고선 잭스를 향해 말했다.

 [넌 이 봉인 하나를 대가로 목숨을 건졌어. 그러니 네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이의 일상을 지켜줘야 해. 앞으로…야, 듣고 있냐? 작작 쳐다보고 내 말 들어. 야? 안 들려?]
 -잭스 님? 괜찮으세요?

 아무리 잭스가 가면을 쓰고 있어도 시선의 방향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이 가슴팍에 꽂힌 채 움직이지 않자 에트왈은 그의 팔뚝을 툭툭 쳤다. 그제야 잭스는 퍼뜩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었다. 그는 혼란스러웠다. 남의 말을 듣지 못할 정도로 깊은 생각에 빠져보기는 처음이었다. 그의 상태가 좀 이상하자 두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걱정스러운 시선과 한심하다는 시선. 후자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에트왈의 시선이었다.

 [뭐야? 너 성벽이 설마 소아성애라도 되는거냐? 변태 같은 놈.]
 “그게 아니오. 단지…….” 잭스는 에트왈의 비꼼도 무시하고 멍하니 말했다. “단지, 뭐랄까 아는 그림 같아서…낯설지가 않소. 이상하군,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잭스가 무언가에 홀린 듯 말했지만 돌아오는 건 에트왈의 코웃음 치는 목소리뿐이었다. 그의 목소리엔 말도 안 된다는 불신감이 서려있었다. 

 [착각이겠지. 그럴 리가 있겠냐? 소나야 그렇다 쳐도 너 같이 근본 없는 용병이랑은 미립자만큼의 관련성도 없는 건데. 내가 절대 착각이라고 보증하마. 자, 이제 상황도 대충 정리된 것 같고 할 말도 다 했으니 난 간다.  주변에 적의는 안 들리고 있으니까 나머지는 알아서 잘 해봐라.] 
 -잠깐만요, 에트왈!

 에트왈의 하체부터 안개처럼 스르르 흩어지자 소나가 놀라 그의 손을 붙잡았지만, 에트왈은 매섭게 뿌리치고선 투덜거리듯 중얼거렸다.

 [내가 이 이상 나와 있으면 네게 가는 부담이 너무 커진단 말이다, 이 계집애야. 아주 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 나중에 힘 돌아오면 알아서 기어 나올테니까, 몸이나 잘 추스르고 있어.]  

 그 말을 끝으로 에트왈은 사라졌다. 그 말은 이 어두운 곳을 비춰주던 유일한 빛이 사라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사방이 다시 어둠 속에 잠기자 잭스가 푹 한숨을 쉬었다.

 “멘드레이크를 미리 묶어둬서 다행이로군.”
 -믿기지가 않아요……. 어떻게 학회의 상임의원님이 그럴 수가 있죠? 멘드레이크라는 분은 이 학회를 설립하신 세 분 중 한 분 아닌가요? 

 소나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멘드레이크를 바라보며 말했다. 눈이 어둠에 적응해야 간신히 윤곽 정도만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깜깜했지만 눈보다 귀에 더 의지하는 그녀의 시선은 정확히 멘드레이크가 있는 쪽을 향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는 것도 뭐하지만, 일단 그의 의지로 이런 짓을 벌인 건 아닐거요. 협곡에서 만났던  크라운가드 양과 베인 양을 기억하시오? 멘드레이크의 상태도 그들과 똑같았소. 누군가에게 철저하게 세뇌당해 꼭두각시로 전락해버렸다 이 말이오.”

 럭스와 베인. 그녀들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자 징그러운 벌레가 몸을 타고 오르는 걸 본 것처럼 소름이 좍 돋는 소나였다. 정말이지 그 검은 남자의 행동은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함부로 대할 수 있는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새삼 그 남자의 행방이 궁금해지는 소나였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잭스는 거기 있는 검은 무리를 전부 죽였다. 그것도 아주 끔찍하고, 기계처럼 효율적으로……. 그 남자라 해서 다를 리는 없었다. 용서 받지 못할 짓을 저지른 사람이라고는 하나 소나는 가슴 한 구석이 무거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한다는 건 그녀로선 생각도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새삼 잭스가 서 있는 곳과 자신이 서 있는 곳, 둘의 차이가 너무나 크게 느껴지는 그녀였다. 그런 소나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잭스는 말을 이었다.

 “협곡뿐만 아니라 이 학회도 그들에 의해 공격받았소. 이른바 양동작전이었지. 협곡에 온 신경이 쏠려 있는 틈을 타 이곳을 날려버리려 했던 거요.”
 -날려…버린다니요?
 “말 그대로요. 학회 전체를 흔적도 없이 작살낼 작정으로 소환실에 강력한 마법 폭탄을 설치해뒀더군. 지금까지 여기가 남아있는 걸로 봐서 베사리아가 어찌어찌 해결한 모양이오. 하지만 해체했다는 소식이 없는 걸로 봐서 그쪽도 썩 좋은 상태는 아닌 것 같군. 연결이 끊어지지 않은 걸로 봐서 죽지는 않은 모양인데…….”

 마법 폭탄. 그 간단해 보이는 한 마디가 소나의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그제야 소나는 왜 잭스가 협곡에 나오기 직전 그녀에게 어디서 소환되었는지를 물어봤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다행이라고 한 의미도……. 최악의 경우 그는 여기서 죽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소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잭스는 그런 소나의 상태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소나는 참으려고 했다. 나중에 얘기해도 충분할거라고 생각했다. 죽다 살아난 잭스에게 더 부담을 주는 건 그녀 쪽에서 사양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미스 부벨르.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긴 하나 여기 오는 건 너무 위험한 선택이었소. 베사리아나 나나 둘 중 한 쪽이라도 실패했으면 어쩔 뻔했소?”
 -…네?

 잭스가,

 “네, 가 아니오. 자칫하다간 정말 죽거나 죽느니만 못한 꼴이 될 수도 있었소. 물론 목숨을 구해준 거야 정말 고맙고, 또 큰 빚을 진 셈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선택이 너무 위험했다 이 말이오.” 

 잭스가 그렇게 말하지만 않았더라도 말이다.

 지금까지 몇 번 정도는 화를 낸 적이 있는  소나였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번엔, 이번만큼은 뭔가 달랐다. 소리를 지르지도, 덤벼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머리는 놀랄 만큼 차가웠다. 그리고 슬펐다. 슬펐고, 화가 났다.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잭스 님, 어째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가요?
 “어째서냐니, 그거야 당연한 거지 않소? 간신히 살아 돌아갔는데 다시 죽을 수도 있는 곳에 왜 발을 들이민 거요?”
 -그건 잭스 님도 마찬가지 아니셨던가요?
 “난 어차피 여기서 소환된 몸이었소.”
 -그럼 피하지 않아야 한다는 건가요?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고작 여기서 소환되셨단 이유만으로, 잭스 님이야말로 협곡에서 그 고생을 하고 나와서 다시 또 목숨을 걸고 이곳을 지키신 건가요?
 “…미스 부벨르.”

 잭스가 달래듯 말했지만, 이미 소나의 두 눈에선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소나는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협곡에서도 그랬어요. 그때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잭스 님은 늘 가장 위험한 곳에 서계셨어요. 지금은 알아요, 제가 그때 엄청난 짐 덩어리였다는 거. 왜 버리지 않으셨던 거예요? 계약 때문에? 그건 대등한 관계에서 하는 거 아닌가요? 애초에 그때 전 계약을 할 만한 입장이 아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잭스 님은 절 계약이란 형태로 지켜주셨고, 또 구해주셨어요. 그리고 결국 마지막엔 모두를 구하셨어요. 적으로 맞섰던 그 검은 무리들만 제외하고, 챔피언 아홉 명 전원을요. 하지만 거기에 한 명은 없었어요. 가장 중요한, 그 누구보다도 최우선으로 구해야 할 한 명이, 잭스 님께는 없었어요.
 “…….”
 -잭스 님은 자신을 구하려들지 않으셨어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나는 그런 그를 슬픈 눈으로 바라봤다.

 -대체 뭐가 당신을 그토록 몰아세우는 건가요? 그건 분명 어긋난 거예요, 잭스 님. 자신의 안위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니 분명 이상한 거라고요. 잭스 님은 자신을 좀 더 소중히 여기셔야 해요.

 가면의 틈 사이로, 잭스는 소나의 슬픈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정말 착하고 순수한 아가씨였다. 남을 위해 진심으로 슬퍼해줄 수 있는 사람은 적은 법이었다. 그녀는 깨끗했다. 그녀가 그에게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잭스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 아가씨는 피로 피를 씻으며 살아온 자신과는 서있는 자리가 다르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말했다.

 “누구나 비밀은 있는 법이오.” 그가 조용히 말했다. “나에 대해선 되도록 적게 아는 게 좋소, 미스 부벨르. 내가 걸어온 길은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더러운 길이니까. 엮여봤자 손해를 보는 일은 있어도 득을 보는 일은 없을…….”

 하지만 그의 말은 채 끝을 맺지 못하고 중단되고야 말았다. 어둠 속에서 훅 하고 따스한 향기가 코끝에 밀려든다고 느끼는 순간, 소나의 여린 두 손이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피와 검댕에 더러워진 손이었지만 그녀는 아랑곳 않고 그 손을 가슴에 품었다. 잭스는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을, 그리고 손끝을 통해 전해져오는 그녀의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손해니 이익이니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잭스 님. 협곡에서 절 구해주신 잭스 님은 다른 분이셨던가요? 모두를 구하고, 만신창이가 된 채로 다시 이곳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거신 분은 다른 분이셨던가요? 아니에요, 전부 다 당신이 하신 일이잖아요. 맞아요, 전 잭스 님의 과거는 몰라요. 하지만 잭스 님께서 자신이 걸어온 길이 더럽다고 하는 건 용납할 수 없어요. 적어도 제가 본 잭스 님은 영웅에 걸맞은 행동을 하셨어요. 그러니…….

 소나는 그의 손을 가슴에 묻은 채 손을 뻗어 가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러니 좀 더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셔도 돼요, 잭스 님.

 그녀의 말은 봄날의 정경처럼 따스했다. 비록 가면을 만질 뿐이었지만, 잭스는 그녀의 손이 제 얼굴을 만지기라도 하는 듯 손길을 음미했다. 잠시 뒤 그의 입이 열렸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말했다.

 “고맙소.”
 -…….
 “고맙소, 미스 부벨르. 정말 오랜만에…위로를 받아보는구려.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소. 단순히 철부지 아가씨라고만 생각했는데…….” 가면 속에서 잭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인한 아가씨였구려. 협곡에서 그대를 무시했던 발언, 미안하게 생각하오. 내 사과를 받아주시겠소?”

 소나는 빙그레 웃었다. 

 -그럼요, 잭스 님. 물론이죠.
 “그 계약의 대가로 챔피언 탈퇴니 뭐니 했던 것도……크흠! 잊어주시오. 이거야 원, 부끄럽기 짝이 없군.”
 -고마워요.
 “별말씀을.”

 소나가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잭스는 그녀의 부드러운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빛이 거의 없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조금만 더 밝았으면 좋았을 것을…….

 “……?”

 밝아지고 있다? 

 순간 잭스는 온 몸에 소름이 좍 돋았다. 왜냐하면, 여길 밝힐 수 있는 건 분명…….

 “리하트 온(Lihat on).”

 확 하고 회랑이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아졌다. 어떻게,를 생각할 겨를 따윈 없었다. 머릿속에 짧게 들린 소나의 목소리 따윈 무시하고 잭스는 소나를 품에 안은 채 힘껏 뒤로 뛰었다. 혼자라면 주문이 있는 쪽으로 몸을 날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간 남은 소나가 표적이 될 게 뻔했다. 

 -잭스 님, 잠깐…꺅!

 회랑 안은 대낮처럼 밝았다. 잭스는 이를 악물었다. 숨을 공간이 없었다. 엄폐할만한 기둥은 너무 멀었다. 소나가 뭐라뭐라 떠드는 것 같았지만 다급한 잭스는 그걸 듣고 있어 줄 여유가 없었다. 그는 회랑의 단상을 올려다봤다. 믿을 수 없었다. 멘드레이크가, 거기에 서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분명히 그토록 꽁꽁 묶어뒀었는데! 

 -잭스 님! 제 말 좀…어머!

 거리가 너무 멀었다. 공격은 불가능했다. 그는 소나를 감싼 채 바닥에 엎드렸다. 한 번 정도는 이 몸뚱이로 막을 수 있으리라. 그게 지금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진정!

 퍽!

 “커흑?!” 
 -하시라고요!

 너무나 의외의 방향에서 날아온 공격에 잭스는 턱을 부여잡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소나가 손바닥으로 그의 턱을 올려쳤던 것이다. 입을 다물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재수 없었으면 혀 깨물뻔 한 잭스였다. 아니 협곡에서 뺨 맞은 것도 그렇고 명치도 그렇고 대체 왜 이 아가씨는 생긴 거에 비해 손아귀 힘이 이리도 좋은 건지……! 잭스는 너무 아픈 나머지 눈물을 쏙 빼며 짜증을 부렸다.

 “무슨 짓이오, 미스 부벨르으으으으!”
 -진정하세요!
 “거 그렇게 방정 떨지 않아도 되네, 잭스.” 멘드레이크의 목소리가 회랑 안을 우렁우렁 울렸다. “역시 이만큼 거리를 벌려두길 다행이구먼. 하는 행동을 보아하니 조금만 가까웠어도 말 한 마디 못하고 쥐어터질 뻔 했어.”
 “멘드레이크! 큭…….”

 잭스는 일어서려 했으나 금세 휘청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소나가 옆에서 받쳐주지 않았더라면 볼썽사납게 자빠졌을 터였다. 그런 잭스의 행동에 아랑곳 않고 멘드레이크는 품속에서 파이프 담배를 꺼내 한 모금 깊숙이 빨았다. 그제야 잭스도 뭔가 멘드레이크가 좀 전의 모습과 다르단 걸 깨닫고 움직임을 멈췄다. 푸른 연기를 뱉어내는 멘드레이크의 덥수룩한 수염 사이로 허연 치아가 언뜻언뜻 보였다. 그는 씩 미소 짓고 있었다. 

 “걱정 안 해도 되네, 잭스. 지배는 풀렸으니까. 그쪽의 미스 부벨르에게도 감사해야겠군. 좀 느슨하게 묶어 준 덕에 룬 문자 마법 정도는 쓸 수 있었거든. 에잉, 저 잭스란 녀석은 대체 노인 공경이란 걸 모르니…….”

 잭스는 손목을 슥슥 문지르며 구시렁구시렁하는 멘드레이크를 멍하니 쳐다봤다. 솔직히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그였다. 대체 어떻게? 그가 알기로 에스트렐의 지배는 쉬이 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잭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지만, 그런 잭스를 안심시키듯 소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요, 잭스 님. 저 분은 정상이세요. 협곡에서 봤던 럭스 씨나 베인 씨처럼 불협화음이 들려오지 않아요. 제가 장담할게요.
 “불협화음? 불협화음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요?”
 “그런데 잭스 자네 아까부터 무슨 혼잣말을 그리 하는겐가? 미스 부벨르는 말을 할 수 없다고 알고 있는데……. 뭐, 어쨌든 늦게나마 제정신을 차려서 다행이군.”
 “미스 부벨르, 아니…….” 잭스는 뭐부터 말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다가 우선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부터 물어보기로 했다. “멘드레이크! 자네 정말 제정신으로 돌아온 건가?”

 멘드레이크는 멀리서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코웃음을 치고선 잭스와 소나를 향해 둥둥 떠서 왔다. 분명 마력을 잔뜩 낭비했을 터인데 부유 마법 정도야 껌이라는 태도였다. 잭스는 멘드레이크가 늙은 호박 껍질을 뒤집어 쓴 괴물로 보일 지경이었다.

 “보면 모르나? 대답할 가치를 못 느끼겠군. 자네도 내게 궁금한 것 쌓여있을 테지만 나도 자네나 콜민예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 잔뜩 있네. 우선 이 빌어먹을 지배란 것에 대해서부터 말이야. 하지만 우선 내가 벌려놓은 이 난장판부터 수습하는 게 우선이겠지? 그러고 보니 잭스 자네 마법 연구자로서의 내 실력은 인정하면서도 상임의원으로서의 실무 능력은 콜민예 의원에 비해 떨어진다고 여겼었지, 아마?”

 멘드레이크가 으스스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미소가 가죽부대처럼 널브러져있는 헤이완 렐리바쉬와 원로 소환사들을 향하고 있었다.

 “깜짝 놀랄 준비나 하고 있게나. 아, 미스 부벨르도 잠시만…허허, 그림 좋구먼 그래. 그럼 이 늙은이는 저쪽으로 자리를 피해주겠수다.”

 의미심장한 멘드레이크의 발언에 잭스는 소나를 슥 돌아봤다. 그의 손이 아직도 소나의 가슴팍에 묻혀 있었다. 아까는 분위기도 그렇고 다급해서 전혀 몰랐는데, 새삼 자기가 한 짓이 얼마나 부끄러운 짓인지 깨달은 모양인지 소나의 얼굴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새빨갛게 변해갔다. 잭스는 재빨리 손을 땠지만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아…….
 “이, 이런. 미안하오, 미스…….”

 소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자 미안해서 쩔쩔매는 잭스였다. 하지만 그의 말은 채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부벨르의 부 자를 발음하는 그 순간, 소나의 손은 이미 잭스의 가면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으니까.

 짜악!

 ‘아니 이 아가씨는 대체 왜 이렇게 손아귀 힘이…….’

 꺄아아아아아, 하는 비명소리와 양쪽 가면을 뚫고 들어오는 무시무시한 충격파. 잭스는 데자뷰를 느낄 수 있었다. 결국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여겼던 그 귀중한 경험을 한 번 또 하며, 잭스는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잭스는 어째 앞으로도 몇 번은 더 비슷한 경험을 할 것만 같은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Lv74 강철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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