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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 그 인형은 지휘관과 서약하지 않았다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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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8 개
조회: 1485
추천: 11
2018-01-18 19:10:19





그 인형은 지휘관과 서약하지 않았다


9. 늙은 늑대와 강아지




사진은 너덜거렸고 이미지는 흐릿했다풍화되던 여자는 희미했고 HK416은 그곳에서 정보를 뽑아낼 수 없었다알고리즘이 수많은 가능성을 세우고 검토했다수백만 가지의 가능성이 확률에 따라 세워졌다가 스러지고또 솟아올랐다가 폐기되었다알고리즘은 사진속의 여자가 누구인지 확답하지 못했고마인드맵은 그 여자가 지휘관과 어떤 관계인지 끈질기게 추궁했다.

열린 창문을 따라 밀려들어오는 온풍을 맞으면서 HK416은 침묵했다미처 정리되지 못한 서류들이 위태롭게 팔락거렸다지휘관의 이마에 맺힌 땀이 관자놀이로 흐르고 있었다그는 더위에 쫒기며 미간을 찌푸리고 잠결을 헤맸다. HK416의 감각기관이 방의 온도가 상승하고 있음을 알렸다인공 피부 밑이 덥게 달궈지고 있었고 엔진이 점점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덥혀진 몸과 달궈진 마인드맵은 방황하던 관념들을 붙잡으면서 사진 속 여자에 대해 파악해나갔다.


사진에는 정보가 많지 않았다그녀가 인간인지 인형인지 알 수 없었으며그녀가 지휘관과 아는 자 인지연고가 없는 자 인지 알 수 없었다지휘관이 이 사진을 간직하고 있었던 경위조차 파악하기 힘들었다이 여성 때문인지이 여성이 HK416과 닮았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무수한 것을 알 수 없었고아주 선명하고 확연한 명제만이 머뭇거리며 떠올랐다.

HK416은 지휘관이 이 사진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으며또 자주 꺼내 들여다보았을 것을 알고 있었다접힌 부분이 하얗게 일어났고 헤진 종이를 따라 사진은 찢겨지려 하고 있었다. HK416은 이 사진 속 여성이 자신과 닮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눈 밑 점의 위치가 일치했으며 머리카락의 길이와 색이 HK416의 것과 비슷했다.

눈동자의 색깔이 같았으며 눈매의 모양새가 비슷했다가녀린 어깨와 잘록한 허리풍만한 가슴이 HK416의 몸매와 비슷했다. HK416은 자신이 웃은 모습을 본 적 없었지만자신이 웃으면 이 사진 속 여자와 비슷한 표정을 지을 거라고 어렴풋이 생각했다알고리즘은 이 여성이 자신과 닮았다고 결론내렸고동시에 알고리즘은 그 여성이 자신과 완전히 구분되어 있는 타인이라는 사실도 확신했다.

여성은 자신이 아니었고자신은 그 여성이 아니었다사진 속 여자는 그 여자대로 자신의 삶을 영위했을 것이고, HK416은 그 사진을 보면서 자신의 사고와 계산을 진행하고 있었다자신과 닮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곧바로 자신과 그 사람을 구별하는 말이었고, HK416을 미동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런 사실들이었다지휘관이 소중하게 간직한 어떤 여성의 사진은 자신이 아니었고그 여성은 자신과 닮아 있었다.


더위를 따라서 엔진이 세차게 돌았다숨이 가팔라졌고 미간이 좁혀졌다사진이 옅게 진동했다밤으로 접어드는 여름의 온풍이 거슬렸다방이 어두워지고 있었다지휘관의 땀이 식어갔고그의 주름이 어둠 속에 파묻혀 굴곡이 드러나지 않았다불안정한 정보들을 따라서 HK416의 기억들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지휘관이 해 주었던 말과 행동들의 가치가 재정립되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길 반복했다사진 속 여성의 정체에 따라 가치들은 줏대 없이 휘둘렸다.

지휘관이 HK416에게 했던 말과 행동들이 온전히 그녀에게 닿지 않았을 것이다. HK416을 바라보고 있었던 지휘관의 시선 끝에는 항상 그 여자가 서 있었을 것이고그럴 때 지휘관은 그 여성에게 말하고 행동했을 테지. HK416이 사진을 내려놓고 널브러져 있던 책으로 눌러 놓았다지휘관이 옅게 신음하다가 고요히 눈떴다눈이 어둠을 받아들이지 못해 시야가 좁았다좁은 시야 안에서 지휘관은 검은 형체로 뭉쳐 움직였다그는 작고 옅게 한숨쉬었다. HK416이 우두커니 서서 그런 지휘관을 바라보았다.


……416. 와 있었나.”

휴가 처리가 됐나 해서요.”

……그래잘 처리 되었다내일 아침에 출발하면 된다.”

.”


지휘관은 잠결 속에서 더듬듯이 말했다말은 아직 깨어나지 못한 정신 너머로 천천히 흘렀고목소리에는 가래가 많이 끼어 있었다늙은 손이 얼굴을 쓸어내렸다얇은 손바닥에 말라붙은 땀자욱이 묻었다지휘관의 시선이 책상을 훑었다시선은 이어져 사진으로 걸렸고지휘관은 조심스럽게 사진을 빼어 책 사이에 꽂아 넣었다. HK416이 그런 지휘관의 손짓을 보고 있었다.


HK416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휘관의 질문에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가 예상한 것 보다 훨씬 낮은 톤으로 흘렀다아직 삭지 않은 의문과 배신감이 마인드 맵 가운데에 꽂혀 빠지지 않았다목소리는 그 꽂힌 감정에 억눌려 낮고 어둡게 울렸다낮은 목소리는 시큰둥하게 지휘관에게 질문했고심드렁하게 지휘관에게 대답했다그 감정의 갈피를 알 수 없어서, HK416은 짧은 대답을 마지막으로 입을 다물었다.

지휘관은 정신을 깨우려 자주 한숨 쉬었고 자주 눈을 감았다. HK416의 마인드맵 안에 차오르던 수많은 질문들이 넘실거렸다목까지 차오른 말들을 망설임이 억눌렀다알고리즘은 그 망설임을 이해하지 못했지만마인드맵 너머로 형성된 감정이 망설임을 흩뿌려 말을 막았다지휘관이 목을 가다듬었다여전히 HK416은 지휘관의 앞에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용건이라도 있나?”

……아니에요.”

그래.”

질문이……있긴 합니다만.”

뭔가?”

사진……


망설임과 알고리즘이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싸움의 와중에서 말은 제멋대로 튀어나갔다마인드맵이 미처 잡지 못한 말은 자신감 없이 흐트러졌고 HK416은 시선을 가라앉혔다지휘관이 눈동자를 올려 HK416을 마주보았다어둠이 치밀어 방 안을 가리고 있었다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이 서늘했다지휘관은 오랫동안 답하지 않았다더위가 가시고 어둠이 틀어앉은 방은 다시금 쌀쌀했다.


……아까 그 사진을 말하는 건가.”

…….”

알 필요 없다중요한 정보는 아니야돌아가 보도록 해라.”

……내일 휴가 출발할 때 한번 더 들를게요.”

내일 아침에 나도 휴가 출발한다목적지가 있다면 내가 차로 데려다 주지넌 개인 차량이 없을 테니……


HK416은 대답하지 않고 지휘관실을 나섰다그녀는 경례하지 않았다지휘관은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



밤을 맞은 숙소는 고요했다간만의 해방감을 만끽하러 게임 센터라도 가는 게 어떻겠냐고 UMP9가 제안했지만, UMP45가 오늘 하루는 마인드맵을 쉬게 하고 과부하가 걸렸을 엔진을 쉬게 하자고 말하며 그 제안을 일축했다. G11이 긴 잠에서 깨어 늘어진 몸으로 누워 있었다환기가 충분히 된 방에서는 여름 냄새가 났다습하면서도 가슴 속을 간질이는 밤의 냄새가 섞여 소대원들은 일찍 잠들었다. HK416은 가라앉은 어둠과 적막한 고요 안에서 앉아 있었다그녀는 잠들지 않았다달아오른 마인드맵이 그녀의 수면을 허락하지 않았다데이터와 이미지가 마구 생성되었고 뇌리 곳곳에 스며들었다.

이미지와 생각은 상상을 거쳐 그것이 마치 실제인 양 작동했다그녀의 마인드맵 안에서 여자는 이미 지휘관의 딸이었고아내였고연인이었으며 질척한 정부(情夫)로 나타났다어느 쪽이었든 그 여자는 HK416과 구분되어 있었고 HK416은 그 여자가 아니었다지휘관의 말들이 떠올라 여자에게 달라붙었다. HK416이 손을 뻗어 그 다정한 말들을 잡아채려 했으나말들은 얌체같이 HK416의 손길을 피해 여자에게 달라붙었다여자의 흰 머리카락이 달빛에 빛나고 있었다숨막힐 듯 아름다운 달빛 아래에서 여자는 웃었다섧게 웃던 여자의 웃음이 조소로 색을 바꿔 나갈 때 마다 HK416은 한숨쉬었다.


애꿎게 여자에게로 향하던 분노는 점점 커져 지휘관에게 닿고 있었다부풀고 퍼지는 생각의 굴레를 HK416은 억누르지 않았다새파란 어둠이 생각을 부추기며 감정을 일으켜 세웠다그 속에서 HK416은 마인드맵이 향하는 곳을 따라 마음껏 흥분하고 있었다.

지휘관의 초대에 응해 저녁식사를 하던 날에지휘관은 그 여자와 식사를 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HK416이 지휘관과 자신의 동일성을 고심하며 침묵하는 동안 지휘관은 그 여자의 작은 입술을 생각했을 것이고그 여자가 포크와 나이프를 쥔 유려한 손놀림을 생각했을 것이고그 여자의 식습관을 생각했을 것이다메뉴는 그 여자의 취향을 고려해 준비했을 것이고향신료와 재료들은 그 여자가 좋아하던 것들을 많이 넣었을 것이다지휘관은 나에게 요리를 해 준 것이 아니라 그 여자에게 요리해 주었을 것이다.

지휘관이 술에 취해 눈동자를 보여 달라 하던 날그는 내 눈동자를 통해 무엇을 보고자 했는가그는 아름다운 초록빛 눈동자를 보고 싶어 했고그 여자는 눈부시게 짙푸른 녹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그 여자의 눈을 보고 싶었기에 그 감미로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지휘관이 술에 취해 멀어져가는 의식 사이로 내 눈을 보았을 때그는 누구를 떠올렸을 것인가태산 같던 지휘관의 무너져가는 틈새에서 다정함을 맛본 건 내가 아니라 그 여자였어. HK416이 미간을 좁혔다콧김이 셌고 베개를 쥔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척추골격에서 시작된 진동이 어깨와 목을 타고 몸을 흔들었다회상은 그 날을 거쳐 당장 오늘로 치닫고 있었다.

지휘관이 HK416에게 건넸던 다정한 위로는 이미 HK416을 향하지 않고 있었고, HK416은 그 방향을 곱씹고 분노하고 있었다지휘관이 HK416을 향해 했던 모든 행동들이 떨어져 나가 사진에 스며들고 있었다사진 속 여자는 웃었다지휘관과 HK416 사이에 은밀히 형성된 공감에 여자가 파고들었다여자는 무자비하게 HK416을 밀어내고 HK416의 자리를 차지했다. HK416은 밀려나며 수렁으로 떨어졌다수렁을 따라 한숨은 깊고 낮게 떨어졌다.


……416,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


G11의 목소리는 그 심연을 감싸듯 두루뭉술하게 울렸다힘이 빠진 목소리는 귀에 바로 꽂혀들지 않았지만, HK416은 갑작스런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G11의 자리를 쳐다보았다어둠 너머로 흐릿하게 G11이 꿈틀댔다.


……안자고 있었어?”

한숨 소리 때문에 깼어.”

신경 끄고 자낮에 그렇게 자더니밤이 되니까 잠이 안와?”

아니……그건 아닌데그래도 416이 한숨을 너무 많이 쉬니까……


달빛을 가리던 구름이 흐르자 G11의 얼굴이 드러났다. G11은 반쯤 눈을 감은 채 HK416을 보고 있었다지저분한 회색 머리가 배게 위에 아무렇게 흐트러져 있었다그녀는 누운 채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해서.”

……신경 꺼.”

맨날 신경 끄래……416, 요새 소대원들이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면 항상 신경 끄라고 하는거 알아?”

…….”


G11의 말은 몽롱하고 뭉툭했지만 균일한 간격으로 울렸다안정적인 말투는 말에 힘을 실었고 HK416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G11이 말을 이어나갔다.


지휘관 때문이야?”

……맨날 잠만 자고 있으면서그런 얘기는 또 언제 주워 들었대.”

맨날 자는 건 아냐눈만 감고 있을 때도 있어.”

앙큼한 년.”

잠이 다 깨 버렸어얘기해줘다시 잠들 수 있게.”

…….”


정리되지 않은 말들이 곧바로 쏟아질 듯 휘청였다. HK416은 튀어나오려 하는 말들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G11을 보았다. G11의 눈은 흐리멍텅했고 이야기를 담고 싶지 않아 했다그런 G11이 어째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지 HK416은 알 수 없었으나또 그런 이유에서 G11에게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논리는 발견할 수 없었다. G11은 항상 조용하고 중립적이며 성격을 내비치지 않았다그녀는 HK416을 비꼬지도 않을 것이고지휘관을 향한 응큼한 속내를 드러내지도 않을 것이다마인드맵이 말머리를 골랐다이야기를 함축해서 할 필요가 있었다. G11이 HK416의 말을 기다렸다. HK416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11, 우리 인형들은 어쩔 수 없이 인간의 대체품일까?”

지휘관이 416보고 어떤 사람 대신이래?”

……아니그건 아닌데.”

그것두 아닌데 왜 그런 고민을 해?”

지휘관 책상에서 우연히 사진을 봤어……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그런데 나를 아주 꼭 닮아 있었어그걸 보는 순간 다리가 움직이지 않고 생각이 멈췄어……왜 그런지 모르겠어서 한참동안 사고회로를 굴렸어마인드 맵 너머로 웬 배신감 같은 게 치밀어 오르고 화가 났어처음엔 왜 그런지 몰랐는데한참을 생각하다 보니까……지휘관이 나한테 해 주었던 다정한 말들이나 위로의 말들이 나를 향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결국 나는 그 여자의 대용품이었던 거야.”

지휘관이 다정한 말을 했어우리 지휘관이대단한데…….”

……그 얘기를 하는 게 아니잖아. 11, 제대로 들어 줄 생각은 있는 거야?”

그럼나 아주 진지하게 듣고 있다고…….”

…….”

진지하게 듣고는 있는데……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있어서 말야.”


G11이 작은 얼굴을 움직여 눈썹을 찌푸렸다미간에 새겨진 조그만 주름이 앙증맞게 그녀의 의문을 표시했다그녀는 의문이 가득한 투로 중얼거렸다.


지휘관이 직접 그렇게 얘기 한 거야그 여자 대신 416을 세워 놓고 그런 생각을 했고그런 말을 했다고 지휘관이 얘기했어?”

…….”

애초에 그 사진에 있었던 여자란 게……얼마나 416을 닮았는지 모르겠지만정말 416으로 대신할 수 있는 존재였던 거야그리고 지휘관이 그걸 얘기해 줬어?”

……아니그건 아닌데.”

그 여자와 지휘관이 관련 있는 사람이란 건 알아?”

물어봤는데대답해 주지 않았어.”

그걸 물어 보면 되겠네그리고 416, 네가 할 질문은 아직 많고.”

…….”

“416,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지휘관에게 다짜고짜 화내고 있잖아.”

G11의 말은 잠기운 없이 고르게 퍼졌다. HK416의 한숨이 멎고 호흡이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마인드맵이 새하얗게 지워져 나갔다. G11의 태도에 대한 당혹감과 지휘관에 대한 생각이 섞여들며 오묘한 색깔을 빚어나갔다.

지휘관이 그렇게 좋아? 416.”

…….”

왜 그렇게 좋은 거지그 늙고 무서운 지휘관이……


HK416은 그 색깔과 감각을 이해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시퍼런 여름밤을 따라 HK416의 몸이 굳어 있었다. G11이 눈썹에 힘을 풀고 하품했다열린 창문 너머로 시원하고 건조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


안녕하세요 :D 사진작업입니다!


항상 읽어주신 분들께 일일히 댓글 달아 감사를 표시하고 했지요. 

허나 요새 좀 바빠져서...일일히 댓글을 달기는 힘들것 같습니다. ㅠㅠ

댓글에 달 감사인사를 여기서 미리 대신합니다.


읽어주신 분들 모두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 편은 주말 내로 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


질문은 달게 받습니다! 궁금한 게 있으시면 댓글 달아 주세요! 성의껏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

Lv44 X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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