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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 (UMP40) 다시 한번 그 총성이 울리기를.

아이콘 렝가는op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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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763
추천: 11
2018-01-22 11: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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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높은 하늘. 알록달록한 나뭇잎. 쌀쌀한 바람. 여름이 지나고 벌써 가을이 찾아왔다.
나는 아침 일찍부터 수많은 총기가 있는 창고로 들어갔다. 수많은 철 덩어리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나는 그중에서 UMP40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곳곳이 부서지고, 흠집이 나있는 총기는 왠지 모를 그리운 기억들을 떠올리게 했다.
총 한 자루를 들고 내가 일하고 있는 사격장 문을 열었다. 과녁으로 사용하는 철혈모형, 그 밑에는 철로 만들 레일들이 가득했다. 모형들은 전부 부셔져서 내부에 있는 붉은색 가루들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하루 일과의 시작을 알리는 모형 교체작업을 마치고 나서, 나는 사격지점 위에 섰다.
오랜만에 이곳에 서니 감회가 새로웠다. 50M앞에 있는 목표도 정말 멀게 느껴졌다. 맞출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한때는 600M의 표적도 맞추던 저격수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참.
들고 있던 검은 기관단총의 개머리판을 내 어깨에 견착시키고 자세를 잡았다. 총알은 이미 장전 되어있었다. 안전 모드로 설정되어 있는 레버를 단발로 바꾸었다.
탈칵. 하는 소리가 조용한 사격장에서 홀로 이질감을 발산했다.
총을 들어 목표를 고정하고 오른손의 검지손가락을 방아쇠에 가져다 댔다.
그녀에게 이 총을 받은 후로는 한 번도 쏘아 본적이 없는 총이다. 노리쇠가 부서져있을 수도 있고 최악의 상황에는 총열에 이물질이 있을 수도 있다. 흙먼지가 가득한 이 총이 발포와 동시에 터질 가능성은 이미 충분하다.
쓰흡.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숨을 참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긴장된 내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탕.
한발의 총성이 실내를 뒤흔들었다. 거대한 소리가 벽을 괴롭히며 메아리 쳤다.
표적에서는 붉은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다행이도 제대로 발포가 되었다.
그리고, 이로써 한 가지 증명된 게 더 있다. 그녀는 늘 자신의 사격실력이 부족한 걸 총 탓을 했었지만 총에는 전혀 이상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총구를 살짝 내리고 멍하니 총을 바라보았다.
“거봐. 네 주인 문제였어.”
총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모형을 교체 했다. 다른 인형들이 연습할 때 지장이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너무 아날로그 방식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게 내 일이다.
디지털로 만들어진 사격연습장이 존재 하긴 하지만, 그곳은 엘리트인형의 소유물이 된지 오래다. 기왕 만들 때 크게 지으면 어디가 덧나나.
이곳은 그리폰의 하급인형으로 취급받은 아이들이 오는 장소다.
그녀는 저 총을 들고 이곳에서 매일 같이 연습을 했었다. 내가 출근을 하면 이곳은 그녀의 총소리만 가득했다. 해가 떠 있을 때도, 해가 질 때도.
이제는 그 총성이 들리지 않는다. 그녀의 존재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한발의 총성도 울리지 않는다. 권총의 소음, 돌격소총의 소음, 기관단총의 소음. 수많은 소음사이에서도 들리던 뚜렷하게 들리던 그녀의 총성은 이제 내 기억의 일부분만으로 남았다. 더 이상 들을 수도 없다. 찾을 수도 없다.



2.


“저기, 저기. 너 말이야. 사격 잘한다며?”
여름이 시작되던 6월. 매일같이 나와서 총만 쏘던 그녀가 갑자기 나에게 말을 걸었다.
뜻밖이었다. 총 쏘는 것밖에 모르는 것 같았던 여자가 대화도 할 수 있었구나. 게다가 이렇게 싱글벙글 미소도 지을 수 있다는 게 정말 신기했다. 지나다니면서 보았을 때는 진지하게 사격에 임하고 있어서 그런지 차가운 성격인줄 알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했다.
나는 바닥을 닦던 대걸레를 벽에다 잠시 기대어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회색빛의 머리카락, 약간 누런빛이 도는 눈동자, 초록색의 작은 점퍼 안으로 보이는 검은색 옷. 무엇에 쓰이는지 짐작도 안가는 구시대 무전기와 그녀의 얼굴 사진이 들어가 있는 사원증.
이름도 모르는 소녀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질문에 짧게 대답라고 끝내려고 했다. 제시간에 퇴근하려면 시간이 빠듯했기 때문이다.
“아니. 못해.”
바로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다시 대걸레를 집으려고 했다.
“어? 그럴 리가. 너 저격수 출신이라며.”
나는 손을 멈추고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건 또 어디서 들었어?”
“우리 지휘관이 그러던데? 너한테 수업이나 받아보라면서 어찌나 구박을 하던지. 으....”
아. 이 양반이 진짜. 흥분하면 이말 저말 다하는 버릇은 아직도 못 고친 모양이다.
비밀로 해달라고 그렇게나 신신당부를 해놨는데도 말한걸 보면 얼마나 속이 터졌을까. 그녀의 사격실력이 어떤지 안 봐도 대충 알 것 같았다.
“됐어. 다른 사람 알아봐.”
다시 등을 돌려 대걸레를 잡으려고 했다. 내가 뒤를 도는 순간 그녀가 내 팔을 강하게 붙잡았다. 그리고 내 앞으로 와서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도와줘. 부탁할게.”
나는 그녀의 눈을 피하며 대답했다.
“싫어.”
그러자 그녀가 내 눈을 쫓아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했다.
“도와줘.”
“싫어.”
“도와줘.”
“싫어.”
“도와줘. 응?”
“싫어”
“도와줘어.”
“싫어.”
“아! 그러지 말고!” 이제는 내 팔을 흔들며 앙탈을 부렸다. “한번만 도와줘. 한번만. 딱 한번만. 응?”
“싫어.”
“으으으으.”
여자는 답답하다는 듯이 두발을 동동 거렸다. 화풀이를 하는 것처럼 내 팔을 위아래로 세차게 흔들어대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감정이 진정된 그녀가 땅을 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좋아! 그럼 왜 싫은지 들어나 보자.”
“귀찮아.”
“귀찮게 안할게!”
“이미 귀찮게 하고 있잖아.”
“그거야 네가 싫다고 해서 그런 거잖아!”
“아, 됐어 나중에 이야기해. 나 바빠.”
“바빠? 내가 도와줄게.”
“필요 없어. 문 닫을 시간이야. 돌아가.”
“....치.”
그녀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손을 놔주었다. 내가 다시 청소를 시작하자 멀뚱멀뚱 서있던 소녀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문밖으로 향하였다. 덕분에 마음 편하게 청소를 끝마칠 수 있었다.

모든 기계장비들과 형광등의 전원을 내리자 실내는 순식간에 암흑에 잠겼다. 나는 익숙한 어둠속을 걸어 정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초여름 밤의 선선한 바람이 나 얼굴을 간질였다. 풀벌레 소리가 귀를 심심하지 않게 해주었다. 근처에 인공 불빛이 하나 없는 장소라 그런지 달빛이 밝은 손전등이 되어주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쁘지 않은 날씨다. 덥지도 춥지도 않고, 바람도 강하게 불지 않는 날씨.
왜 이 날씨를 좋아 하게 되었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런 날씨에 저격을 하면 명중률이 하늘을 뚫었는데. 갑자기 떠오르는 예전 생각에 잠깐 웃음이 나왔다가 이내 표정이 굳었다.
예전생각을 하다 보니 잠깐 동안, 아주 조금 그날의 악몽이 떠올랐다.
그때였다.
“워!!!!”
누군가가 뒤에서 내 두 팔을 붙잡으며 큰소리를 냈다. 순간 깜짝 놀란 나머지 어깨가 하늘로 치솟았다. 나는 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아까전의 그 소녀가 서있었다. 그녀는 내 반응이 재밌었는지 한손으로 입을 가리고 다른 한손으로는 배를 잡은 채로 깔깔댔다.
순간 짜증이 치밀어 올라 욕이 목까지 올라온 걸 겨우 참아냈다.
나는 심호흡을 한번하고 짜증을 억누르며 말했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그녀가 웃음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말했다.
“집에 같이 가려고 그랬지.”
“아무리 그래도 안도와주니까, 그냥 가.”
“아, 왜에~. 어? 자, 잠깐만. 같이 가!”
나는 그녀를 무시하고 길을 걸었다. 제대로 포장되어있지 않은 길은 온통 돌투성이라 발을 내딛을 때마다 불규칙한 돌들이 느껴졌다.
그녀는 가로등에 꼬인 나방처럼 내 주위를 얼쩡거리며 계속해서 도와달라고 했다. 그런 그녀를 떼어놓기 위해 나는 점점 속도를 높여서 걷기 시작했다. 내가 빨라질수록 그녀도 같이 빨라졌다.
이윽고 나는 강하게 땅을 박차고 전력으로 뛰었다. 그녀도 덩달아 뛰기 시작했다. 뛰는 와중에도 그녀의 부탁은 끊이지 않았다. 나는 무시하고 계속해서 뛰었다.
귀를 가르는 바람소리. 그사이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 울퉁불퉁한 바닥.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그녀를 거부했는지 모르겠다. 저렇게 부탁을 하는데도 왜 나는 매몰차게 거절하는 걸까.

한참을 뛰다보니 슬슬 체력에 무리가 왔다. 몸을 거의 안 쓰고 살아서 그런지 예전 같지 않은 체력이 되어버렸다. 반면에 그녀는 아직도 쌩쌩해 보였다. 현역은 현역이라는 건가. 결국 나는 그녀에게 팔을 붙잡히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늙은이들이 왜 10년만 젊었어도 라고 말하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그녀에게 붙잡힌 나는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소녀도 나를 따라 내 옆에 앉았다.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제는 좀 도와주실 마음이 생기셨나?”
달빛을 은은하게 반사하는 그녀의 은발이 옅게 빛났다. 나는 숨을 고르고 그녀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까지 하는데? 나 말고도 다른 사람 많잖아.”
“....어?”
갑자기 그녀의 미소가 꺼져가는 불꽃처럼 사그라졌다.
“...없어” 그녀가 다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부탁할 사람이 너 밖에 없어.”
말을 마친 그녀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짧은 순간 이었지만 대충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됐다. 모든 이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불운한 인생.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 겉을 맴 돌기만 하는 삶.
그녀의 눈에서 왠지 모를 익숙함이 보였다. 이때였는지도 모르겠다. 자물쇠에 열쇠가 들어간 게.
“좋아. 연습 도와달라는 거지?”
“...어?”
“내일 8시까지 나와.”
“진심이야..?”
“싫어?”
“아, 아니! 그럴 리가. 그럼 나 준비해야 하니까 지금 가볼게!”
그때 그녀의 표정은 지금까지 봐왔던 표정 중에서 제일 밝았었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때 그녀의 표정이.
달빛을 머금은 환한 얼굴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에게 의미를 알 수 없는 윙크를 날리고 어둠속으로 달려가서 이내 사라졌다.
뭐가 그렇게 기쁜 걸까.

밤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어느새 내린 이슬이 내 옷을 조금 축축하게 적셨다. 나는 검은 후드점퍼의 모자를 뒤집어쓰고 그녀가 걸어간 길을 천천히 걸었다. 땅을 힘껏 박차고 간 그녀의 발자국이 흙먼지사이에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계속해서 어둠속을 걸었다. 한참을 걸어서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내 하루 일과가 끝났다. 시계를 바라보니 새벽 1시가 넘어가는 중이었다. 평소라면 적어도 11시에 도착하는데 대체 몇 시간을 낭비한 건지. 지친 몸을 침대에 던지자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다. 나는 씻는 것도 잊은 채 그대로 잠에 빠졌다.


3.



이른 아침부터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아직 약속시간이 되기 1시간 전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사격장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멀리서 나를 보자 팔을 흔들며 노골적으로 아는 척을 했다. 급 피곤함이 몰려왔다. 바로 뒤를 돌아서 집으로 향하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참아내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왜 벌써 온 거야?”
그녀가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아침에 팟! 하고 눈이 떠지더라고. 그래서 바로 달려왔지.”
나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며 말했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 준비해야 하니까.”
“무슨 준비? 헛. 설마 나를 위해서 뭘 준비한 거야?”
나는 문을 내 쪽으로 당겨서 그녀가 들어갈 수 있게 열었다.
“그런 거 아니니까 조용히 하고 들어가.”
“칫. 네~ 네.”
실내로 들어가자마자 바로 형광등과 실내 기계들의 전원을 올렸다. 이른 아침의 어두운 실내가 순식간에 밝아졌다.
나는 바로 사무실에 들어가서 오늘의 스케줄 표를 확인 했다. 언제나 같은 일들뿐이었다.
평상시와 같이 과녁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수량, 품질을 체크했다. 표적을 움직이게 해주는 레일들도 정상작동 하는지 체크를 하고나서야 그녀에게 갈수 있었다.
소녀는 사격 포인트에 서서 검은색 기관단총을 들고 목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보더니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언제 시작하는 거야?”
나는 그녀의 옆에 서서 말했다.
“지금부터.”
갑자기 표정이 싹 바뀐 그녀가 눈에서 빛을 내며 말했다.
“진짜? 그럼 뭐부터 하면 돼?”
“일단 20M에 100발 사격 해봐.”
그녀가 과장된 몸짓으로 경례를 하며 말했다.
“라져!”
왜 이러는 건지. 참.
그녀가 진지하게 자세를 잡더니 목표를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소음과 반동으로 그녀의 몸이 앞뒤로 흔들렸다. 조용했던 사격장내부는 공사장이나 콘서트장과 비교할 수 없는 소음으로 잠겼다.
탄창을 4번 정도 바꾸고 나서야 그녀의 사격이 멈췄다. 나는 천천히 발길을 옮겨 과녁을 확인 해보았다.
골 때리네 진짜. 실소만 나왔다.
“어때? 몇 발 맞췄어?”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4발.”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았다. 100발을 연사로 갈겨댔는데 그중 96발이 빗나가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이것만으로 이미 전술인형 실격이다.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표정을 보니 하루 이틀이 아닌 것 같았다.
“여, 역시 총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하, 하...”
그날 이후로 그녀와의 지옥훈련이 시작되었다. 우선은 글러먹은 자세부터 고쳤다.
“무슨 놈의 자세가 이등병보다 못하냐.”
“어쩔 수가 없다고! 내 마인드맵에 용량이 부족한 걸 어떡해.”
“팔 내리고. 더. 더. 다리 낮춰. 그렇지.”
“나 다리가 끊어 질 것 같아!!”
“안 죽으니까 버텨!”
“1시간이나 이러고 있었어. 더 이상은 무리야! 무리!!”
그녀가 괴성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앞길이 막막했다. 기초부터가 제대로 잡혀있질 않았다. 프로그램을 어떻게 만들었길래 기초자세도 제대로 못 잡을까. 그녀가 이상한건지 회사가 이상한건지 의심스러웠다.
“잠깐 쉬자. 수고했어.”
자리에 뻗은 그녀는 총을 지지대 삼아서 상체만 세우고 있었다. 너무 강하게 굴린 걸까. 다 쓰러져가는 그녀를 보니 조금은 측은지심이 들었다.
나는 사무실로 가서 음료수 몇 개를 챙겼다. 가는 김에 과자 몇 개랑 빵 하나도 챙겼다. 그녀가 이걸 좋아 할까. 잘 모르겠다. 아. 그러고 보니 서로 통성명도 하지 않았었네. 이름이 뭘까. 그리폰의 인형들은 전부 총기의 이름을 코드네임으로 사용하던데. 딱 봐도 UMP시리즈인건 알겠지만 탄창이 일자형이여서 40인지 45인지 구분이 되질 않는다. 좀 있다 가서 물어봐야지.
냉장고 문을 닫은 후 나는 다시 사격장으로 들어갔다. 방음처리가 확실해서 인지 밖에서는 안 들리던 총성이 문을 열자 귀를 쪼아댔다.
그녀는 그 잠깐을 못 참고 과녁을 향해 총을 쏘고 있었다. 나는 가져온 물건들을 책상위에 올려놓고 잠시 그녀의 모습을 감상했다. 아까보다는 훨씬 안정적인 자세로 반동을 제어하는 그녀의 뒷모습이 나에게 가능성을 품게 해주었다.
한참이 자나 그녀의 사격이 끝나고 나서 땀을 닦는 그녀의 뒷모습에 대고 말했다.
“이거 먹고 해.”
“어? 뭐야? 맛있는 거야?”
그녀의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돌더니 곧바로 책상으로 달려왔다. 눈에서 별을 내뿜는 그녀가 의자에 앉아 황홀하다는 표정으로 내가 가져온 과자를 먹기 시작했다.
“맛있냐?”
입안에 잔뜩 과자를 집어넣은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건 그렇고. 너 이름이 뭐야?”
소녀는 입 안 가득 있던 과자를 힘겹게 삼키고 나서 싱긋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UMP40이야. 너는?”
“***.”
“우하핫. 안 어울려.”
나도 과자를 하나 집어서 입에 넣으며 말했다.
“자주 들어. 그런 말.”
과자는 정말 맛있었다. 왜 진즉에 안 먹어봤었을까 하고 후회가 들 정도였다.
“그런데 너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저격수였다며. 나이도 젊은데.”
“그 이야긴 하고 싶지 않아.”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왜?”
순간 한 장면이 주마등처럼 내 머리에서 떠올랐다, 사라졌다. 순간 눈가가 찌푸려졌다. 빨라진 심장박동을 제어하기 위해 숨을 한번 깊게 들이 쉬었다. 나도 모르게 과자를 떨어트렸다.
“괜찮아?” 당황하여 조금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녀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미안해... 더 이상 안 물어볼게.”
나는 조용히 새 과자를 하나집어 입에 넣었다. 달콤한 맛이 입안에 퍼지자 상태가 조금씩 호전되었다.
나는 그녀를 보고 툭 던지듯이 말했다.
“연습 더 할 수 있겠어?”
“당연하지!”
그녀와 나의 연습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습득하는 속도가 내 생각보다는 빨랐지만 그래도 갈 길이 태산이었다.
거미가 집을 짓고, 집을 허물고, 다시 짓는 동안에도 연습은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열정적으로 훈련에 임했다. 무엇이 그녀를 이토록 열정에 불타게 만들었는지. 조금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4.

그녀와 연습을 한지도 벌써 2개월이 지났다. 그러는 사이 그녀와 나의 관계도 조금은 두터워졌다. 시답지 않게 느껴지던 그녀의 장난들도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즐기게 되었다. 즐긴다고 해도 그냥 피식하고 웃을 정도 밖에 안 되긴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꽤 큰 변화다.
그녀도 큰 변화를 겪었다. 4% 정도의 명중률을 54%까지 끌어올렸다. 내가 곁에서 지켜보았음에도 믿기지 않았다.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과녁을 확인하고 씨익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던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날 정도다.
아침에 출근을 하면 일이 끝날 때까지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내 일상은 그녀의 사격을 봐주고 고쳐주고 과녁을 바꿔주는 일상으로 바뀐 지 오래되었다.

여느 때처럼 연습을 마치고 늦은 밤에 귀가를 할 때 그녀가 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저기 말이야. 언젠가 나랑 바다에 가지 않을래?”
뜬금없었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왜하는지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바다? 거기는 갑자기 왜?”
“예전부터 가고 싶었어. 넓은 바다, 뜨거운 모래사장, 그 위에서 뛰어다니는 남녀. 로맨틱하잖아!”
“그걸 왜 굳이 나하고 가자는 건데?”
“치. 꼭 말로 해줘야 알아?”
“딱히 알고 싶지 않네요.”
“상관없어. 동생한테도 가자고 해봐야겠다. 아! 맞아. 내가 이 이야기를 해줬나?”
“뭔데.”
“나 동생 생겼어.”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이 회사는 동생도 막 뽑아내는 건가. 정말 이해가 안 되는 회사다.
“이름이 뭔데?”
“UMP45. 사격장에서 만났어.”
“우리 사격장에서? 언제?”
“네가 며칠 자리 비운 날에.”
아. 그리폰에서 엘리트인형들이 사용하는 사격장관리를 며칠 부탁했었는데 그날 만난 것 같다.
“아이. 이 말을 하려던 게 아닌데.” 그녀가 자신을 자책하듯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그러더니 역동적으로 두 손을 내리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바다 갈 거야 안갈 거야?”
어떻게 해야 할까. 딱히 손해보는 건 없으니 수락을 해줘야할까. 순간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네 명중률이 80%를 넘는다면 가줄게.”
“뭐? 80...%? 어... 알았어!! 해볼게. 어떻게든 바다에 데려갈테니 두고 봐! 썬 크림도 발라달라고 할 꺼야!”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좋을 대로”
이 이후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었다. 다만 전부 스잘때기 없는 대화뿐이라 모르는 게 나을 거다. 만약 그이야기들을 전부 여기에 적는다면 다들 지루해서 죽어버릴 거다.
어차피 읽은 사람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 이렇게 하기로 했다. 절대 내가 귀찮다거나 기억이 안 나서가 아니다.

한참을 걸었더니 그녀의 숙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문 앞까지 데려다주고 대충 손을 흔들어주었다. 일전에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절대 안 들어가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의 그녀는 이상했다. 내가 이렇게 손을 흔들면 신나서 같이 손을 흔들고 들어갔는데 오늘은 이상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계속 바라보았다.
이상함에 질문을 하려는 찰나. 그녀가 순식간에 나에게 다가와 내 머리를 잡고 자신 쪽으로 이끌었다. 그와 동시에 입술에서 낯선 감촉이 느껴졌다.
내가 무슨 상황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그녀는 평소의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들고 숙소로 들어가 버렸다.
뭔 일이 일어난 걸까.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서서히 실감이 나며 이해가 되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참으려고 해도 삐져나왔다. 손으로 얼굴근육을 붙잡았지만 소용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이렇게 가벼웠던 적은 처음이다.
달빛의 길잡이를 받으며 걸었다. 바람의 길잡이를 받으며 걸었다. 귀뚜라미가 반주하고 풀잎이 노래했다.
평범한 일상에 그녀가 들어오자 모든 것이 다르게 느껴졌다.
그날 밤에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왜인지는 몰라도 잠이 오지 않았다. 창밖에서 별들이 속삭이는 소리 때문인 걸까. 아니면 심장이 두근거려서 그런 걸까. ....잘 모르겠다.


5.


이른 아침 사격장 문 앞에 서있는 그녀를 발견하였다. 처음 보는 여자와 함께였다. 내가 다가가자 그녀가 잔뜩 들떠서 말했다.
“애가 내가 어제 말했던 내 동생이야.”
옆에 있던 소녀는 크게 당황하더니 안절부절 못했다. 자매라더니 전혀 딴판이었다. 둘의 성격을 반반으로 나누어서 섞으면 정말 좋을 텐데 말이다.
두 손을 맞잡고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던 그녀의 동생이 작은 목소리를 내었다.
“아, 안녕..하세요. UMP45라고 합니다. ...언니에게 말씀 많이 들었..어요.”
조금 과하게 소심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일단은 무시하기로 했다.
“아. 어. 반가워.”
40이 내눈치를 보며 말했다.
“45의 사격도 좀 봐줄 수 있어?”
처음에는 거절하려고 했다. 분명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을 본 순간 그럴 수가 없었다. 빨려들어 갈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데 어떻게 싫다고 말할까. 그녀의 앞에서는 점점 결단력을 잃어가는 것 같다.
“알았어.”
40은 45의 두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면서 기뻐했다. 45는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나는 45의 사격을 지켜보았다. 내가 아까 전에 그녀들이 전혀 안 닮았다고 했었나. 취소하겠다. 둘은 정말 닮아있었다. 외모가 아니라 이런 걸 닮아 있었다. 첫 사격의 명중률은 38%가 나왔다.
“그래도 동생이 너보다 낫다. 야.”
흥분한 40이 팔을 버둥대며 말했다.
“이거 봐! 역시 총이 문제라니까!!”
나와 45는 그녀의 그런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연습을 이어나갔다. 40과 달리 45의 자세는 깔끔했다. 이걸로 회사는 잘못이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나는 그녀에게 총을 제대로 조준하는 방법과 반동 제어방법, 영점조준 방법 같은 것을 알려주었다.
45는 내가 알려주는 것을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그리고 몇 주 뒤. 그녀의 명중률은 84%가 나왔다.
나는 84%가 나온 과녁을 들고 45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만족했는지 연한 미소를 지었다. 그 옆에서는 40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뭐가 그리 불만이야? 질투해?”
“아~니거든요.”
“자, 이제 네 차례야.”
“좋아! 저번의 약속은 잊지 않았지?”
“물론이지.”
40이 성큼성큼 걸어가 사격지점위에 섰다. 평소보다 훨씬 긴장되어 보였다. 뭔가가 이상했다. 이상하리만큼 신경이 예민하고 날이 서있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던 그녀가 천천히 총을 들어 올려 목표를 조준했다.
드르르르르르르륵.
엄청난 총성이 울렸다. 떨어지는 탄피가 땅에서 외치는 청량한 소리도 그녀의 난사 앞에서는 꼬리를 말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안정된 자세였다. 이 정도라면 높은 점수도 받아낼 것만 같았다.

67%. 확실히 그녀에게 있어서는 놀라운 변화지만 그녀를 만족시키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점수를 확인한 그녀의 표정은 실망 그 자체였다. 뭐라고 해줄 말이 없었다. ‘이정도면 잘 한거야’라고 말하는 건 그녀의 노력을 무시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멍한 표정으로 과녁을 바라보던 그녀가 갑자기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당황한 나와 45도 그녀를 따라서 뛰어나갔다.
바로 뒤따라 나갔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보이지 않았다. 늦어 버린 시각이라 어둑어둑 해진 주변이 그녀의 검은색 옷을 삼켜버렸다. 우리는 흩어져서 그녀를 찾기로 했다.

한참을 뛰어다녔다. 나무속을 뒤지고, 풀숲을 달리고,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은 전부 조사해보았다. 보이지 않았다. 숲속에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근처에 있는 평야로 달려갔다. 갈 수 있는 곳이 이제는 거기밖에 없었다.
나는 지쳐서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이끌고 평야로 걸어갔다.
찾았다. 평야 한가운데에 홀로 서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 그녀가 앉아있었다. 나는 빠른 템포의 호흡을 정리하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연한 반달의 빛을 받은 은발이 약하게 빛을 냈다. 나는 그녀가 앉은 바위에 기대어 섰다.
침묵이 흘렀다. 서로의 존재를 눈치 채고 있음에도 대화는 오고가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들처럼
정적을 유지했다.
예뻤다. 바람에 스치우는 별들이, 바람에 스치우는 그녀가. 그때 알았다. 나는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있었다. 언제 부터였을까. 그걸 왜 모르고 있었을까. 왜 이제야 알게 된 걸까. 무감각한 내가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인지 지금이라면 뭐든 다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기 말이...”
“나 안전국으로 발령받았어.”
“......?”
순간 세계가 얼어붙는 것처럼 느껴졌다. 진정되었던 심장이 다시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내 귀를 의심이라도 하고 싶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닐까하고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녀의 말이 너무도 선명했다.
“언제 가는데.”
“내일.”
“그걸 왜...이제야.”
“....나도 어제 밤에 들었어.”
머리의 사고가 정지했다. 그녀가 장난을 치고 있는 걸 거야. 늘 이상한 장난을 치곤했으니까. 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마저 허락해 주지 않았다.
40의 눈에서 작은 달빛이 흘러내렸다.
“바다가자는 약속은 받아놓고 싶었는데.”
그래서 그렇게 필사적이었나. 한동안 못 볼 테니까. 머릿속이 혼잡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대체 내가 뭘 해야 하는 거야. 그녀가 떠난다면 돌아올 수 있는 걸까. 이대로 영영 떠나버리는 건가. 더 이상 볼 수 없는 걸까.
나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가자.”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떨어지는 눈물이 사이에서 놀란 그녀의 표정이 보였다.
“어, 어디로?”
“바다.”
“지..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혼란스러워하는 그녀의 표정을 뒤로하고 나는 그녀의 손을 이끌어 그리폰으로 향했다. 다행이도 주차장에는 내 자동차가 잘 세워져있었고 경비실에는 내 차키가 잘 맡겨져 있었다.
45에게는 40을 잘 데리고 있다는 연락을 보내고 우리는 어두운 밤도로를 달렸다. 시계는 밤 12시를 알렸다. 조수석에 타고 있는 40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이내 다시 평소 같은 미소를 지었다.
한참을 달려서야 우리는 가장 가까운 바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차에서 내린 40은 순수한 어린아이처럼 바다로 달려갔다. 그리고 뒤를 돌아 나를 보며 손을 크게 흔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늦은 밤이라서 그런지 모래사장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저 멀리서 불꽃놀이를 하는 사람들 몇을 제외하고는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녀는 바닷물이 신기한지 파도를 피해 도망갔다가 물이 잠깐 빠지면 다시 물에 다가가는 걸 반복했다. 그런 행동을 보자 나도 모르게 작게 웃음이 지어졌다.
파도를 피하던 그녀가 갑자기 나를 보며 말했다.
“저기. 저기. 우리 술래잡기 하지 않을래?!”
“허, 무슨.”
그녀가 내 팔에 매달려서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내가 눈을 피하려고 하자 그때처럼 이리저리 내 눈을 따라다니며 말했다.
“아! 하자, 하자! 응? 하자아아~.”
“알았어. 알았어. 10초 셀게. 도망가.”
“히힛. 못 잡아도 나는 모른다.”
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전속력을 다해서 모래사장을 달려 나갔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에 나는 3초 같은 10초를 세고 그녀의 뒤를 쫒았다.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을 그녀와 나는 달렸다. 실없이 웃기도 하며, 승부욕에 불타기도 하며 바닷바람을 갈랐다. 넘실대는 파도. 바다건너의 다리에서 나오는 밝은 불빛들. 환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 모든 것이 완벽했고, 그렇기에 불안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이 현재가 영원했으면. 늘 바라왔음에도 이루어지지 않는 소망을 마음에 품었다.
그리고 이 소망을 품었을 때는 늘 그렇듯이 끝이 찾아온다.
한참을 달리던 나는 결국 그녀를 잡을 수 있었다. 다만 너무 빠르게 달리던 나머지 우리는 모래사장에서 서로를 껴안고 데굴데굴 굴렀다.
넘어지며 질렀던 그녀의 짧은 비명이 웃음소리로 바뀌었다. 실없이 웃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같이 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나란히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온몸이 모래로 가득하지만 신경 쓰이지 않는다. 검은 하늘에는 수많은 보석들이 가득했다. 그 밑은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그녀가 내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상체를 살짝 일으킨 40이 나에게 다가와 짧게 입을 맞추었다. 또다시 웃음이 이어졌다. 뭐가 그리 웃겼는지 모르겠다. 그냥 웃었다. 웃음이 나와서 웃었다. 그뿐이다.

모래사장에 걸터앉은 우리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멍하니 야경을 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 선크림 발라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우으. 지금은 필요가 없겠네. 치.”
“나중에 다시오면 해줄게.”
“......” 그녀가 잠시 멍하니 바다를 보다가 말을 이었다. “**은 동생 있어?”
“있어. 8살짜리 여동생 하나.”
“보고 싶지 않아?”
“당연히 보고 싶지.”
“그럼 말이야....” 그녀가 숨을 크게 한번 들이쉬고 말했다. “만약에 말이야. 여동생이 눈앞에서 교통사고가 나려고 하면 **은 몸을 던져서 구할 거야?”
“갑자기 그런 건 왜 묻는 건데.”
“그냥. 너라면 어떻게 할까 궁금해서.”
“당연히 구하겠지.”
“네가 죽더라도?”
“어.”
그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네.”
“뭐가?”
“나랑 같은 생각을 해서.”
그게 왜 다행인건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다. 바다에 온 게 기분이 좋아서 횡설수설 하는 걸까. 잘은 모르겠다.
침묵이 조금 흘렀다.
“저기 말이야.” 그녀가 내손을 잡으며 말했다. “네 이야기해줘. 오늘이 아니면 못 들을지도 모르잖아.”
“그렇지 않아.”
“그럼 그냥 해줘. 듣고 싶어.”
“음...좀 어두운 이야기라도 괜찮아?” “응”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 일전에 그녀가 듣고 싶어 했던 이야기를 생각해냈다.
“예전에 내가 경찰 저격수로 있었을 때 친구 놈이 하나 있었어. 성격도 괴팍하고, 싸가지도 없었지. 당연히 친구도 나 말고는 없었어.”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아웃사이더.
“그런데도 그 녀석은 절대 잘리지 않았어. 늘 상사에게 막말을 하고 대들어도 말이야. 이유도 참 웃겨. 그 녀석 만한 저격수가 없었거든. 천재였어. 그 새끼는.”
안하무인의 천재.
“그 녀석이 출동하면 언제나 대성공이었지. 그게 문제였어. 언제부터인가 그 녀석은 자기가 정말 잘난 줄 알고 자만하기 시작했지. 사실은 별 볼일 없는 풋내기였는데도 말이야.”
그게 늘 따라다니는 수식어였다.
“그런데 어느 날. 대형 인질극이 발생했어. 당연히 그녀석이 투입 되었지. 50여명의 포로가 건물 안에 잡혀있고 나머지는 전부 피신했어. 건물의 벽에는 수많은 폭탄이 설치되어있었고, 밖에서는 테러리스트 대표 한명이 총과 기폭장치를 들고 인질극을 하고 있었지.”
당연히 성공할거라는 방심과.
“그 녀석은 높은 건물에서 테러리스트를 조준했어. 테러리스트 품에 안긴 인질은 당연히 구해낼거라고 생각하고 별 의식을 하지 않았지.”
성공에 취해있었던 자만이.
“곧이어 그 녀석에게 발포 명령이 내려왔어. 녀석은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어. 스코프로 겨냥하던 곳에는 붉은 피가 흘렀지. 그런데.”
모두를 파멸로 이끌었다.
“그건 테러리스트의 피가 아니었어.”
나는 잠시 숨을 싶게 들이마셨다.
“인질은 모두 사망했어. 50여명은 건물에 깔리고. 1명은 총에 머리가 뚫렸지. 그런데 그 녀석은 가벼운 징계만 받았어. 인재를 잃기 싫었다는 거겠지. 말도 안 되는 조치였어. 주변사람들의 반응 역시 그랬어. 안 그래도 그 녀석을 싫어하던 사람들은 이때다 싶어 매몰차게 물어뜯었지. 그 녀석은 사직서 하나를 남기고 자취를 감췄어.”
대가를 치러야 했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나를 모르는 곳으로.
“그리고 최근에 들은 소식으로는 어느 숲속에서 사격장을 관리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정말 웃긴 일이야.”
그녀가 떨리는 내 손을 꼭 붙잡았다.
“그랬구나. 정말 슬픈 일이네.”
그녀가 내 품에 안겼다. 그녀의 팔도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나는 손으로 천천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전국에서 돌아오면 다른 이야기도 해줄게.”
“.......”
갑자기 그녀의 떨림이 심해졌다. 곧이어 그녀의 작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울음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커져갔다. 내 옷을 꽉 진 손이 덜덜 떨렸다. 서러운 그녀의 울음소리가 내 품에서 메아리쳤다.
그때 그녀의 울음은 어떤 의미였을까. 왜 그렇게 슬프게 울었을까. 분명 다시 돌아 올수 있을 텐데. 다시 만날 수 있을 텐데. 어째서. 다시는 못 만날 사람처럼 그렇게 울어댔을까.
한참을 울어대던 그녀는 내 품에서 잠이 들었다. 나도 머지않아 잠에 들었다.

태양은 다시 아침을 알렸다. 갈매기들은 끼룩거리며 하늘을 날고 뱃고동소리가 웅장하게 울렸다. 요란한 아침에 나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바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로 다가오니 마음 한구석이 뜯겨나가는 기분이었다.
어디에도 그녀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6.



그녀가 떠난 뒤 나는 평소와 같이 사격장을 관리했다. 몇 달 만에 맛보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기도 하고, 표적을 교체하기도 하는 지루한 일상 말이다.
시끄럽게 들려오는 수많은 총기의 소음사이에서 그녀의 총기 소리는 없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에게 관련된 문서를 찾아보려했지만 이미 전부 삭제된 뒤였다. 뭔가 이상했다. 그녀의 지휘관에게 가서 물어보아도 내가 알아 낼 수 있는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일상에 녹아 들어서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푸른 나뭇잎은 서서히 옷을 갈아입었다.
나는 여느 때 같이 사격장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어두운길을 걷고 있었다. 길을 걸을 때마다 그녀와의 추억들이 떠올랐다. 실없는 장난과 진솔한 이야기, 별 의미 없는 대화 등등. 이 어두운 길은 그녀와 나의 추억이 가득 했다.
나는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왜 그렇게 사격에 집착하는 거야?”
“나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꼭 그 사람에게 인정받고 말거야!”
“너희 지휘관?”
“맞아.” 그녀가 나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최근에 한명 더 생겼어. 그 사람에게도 인정받을 거야.”
이번에는 왼쪽을 바라보았다.
“**은 좋아하는 사람 있어?”
“없어”
“어? 정말?!”
“왜 네가 기뻐 하는데.”
“아니~. 히힛, 그냥~.”
“그런 소리할 시간에 명중률을 높일 방법이나 생각해.”
“칫. 또, 또 그런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는 거야.”
“상관없어.”
“그래. 괜찮아. 괜찮아. 그래도 내가 있잖아? 그치?”
나는 그런 기억들에 작게 웃음 지으며 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진흙에 박혀서 굳어져있는 그녀의 발자국이 보였다.
“짜잔. 내 발자국이야!”
“뭐하는 거야. 신발 더러워져.”
“뭐 어때. 이렇게 비도 오는 날에는 이런 걸 해줘야 해! 너도 한번 해봐.”
“어휴.”
“아 알았어. 기다려! 같이 가아!~”
이번에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기, 저거 봐 바! 저 별 지~인짜 밝다! 이름이 뭘까?”
“글쎄. 북극성 아니야?”
“땡땡! 북극성은 저어어거고.”
“나도 알아. 그냥 해본 말이야.”
“모르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에요~. 풋”
“아. 진짜. 너 이리 와봐.”
“아!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이번에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나란히 걷고 있는 정다운 남녀가 보였다.
“저기 말이야.”
“어.”
“**은 가정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해본 적 있어?”
“음... 글쎄.”
“나는 매일매일 해. 가정이 생기면 엄청 행복할 것 같지 않아? 그, 그, 막 자기 닮은 자식도 낳고 하하호호 하면서 사는 거지. 으으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네가 아기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너 그거 엄청 실례되는 말인 거 알아?! 그리고 자식이 없으면 뭐 어때! 남편이랑 꽁냥꽁냥 하면서 살면 되는거지!”
“그래. 나쁘지 않네.”
어디에나 그녀가 있었다. 눈을 돌리면 그때의 기억들이 비디오테이프처럼 재생되었다. 나는 기억의 파편 사이를 걸었다. 지워지지 않는 각인처럼 내 머릿속 필름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 길을 걸을 때마다. 이 길을 지날 때마다. 무한한 기억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막을 방법도 없다. 피할 방법도 없다. 그저 이렇게 받아들이는 수밖에.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길은 끝나지 않았다. 마치 미로처럼 끊임없이 이어졌다. 챗바퀴를 굴리는 햄스터처럼 같은 곳을 맴돌았다. 걷고 걷고 걷고 또 걸었다. 터질 것처럼 재생되는 기억들을 전부 떠안으며 발을 옮겼다.
그리고 그 끝에는 한 여자가 서있었다.
“....40?”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걸까. 누군가가 저 멀리에 서있었다. 어둠속에서도 약한 빛을 발하는 은발. 검은색으로 가득한 옷. 어둠과 같은 색의 기관단총. 하지만 그녀가 아니었다.
“....45구나.”
“오랜만이네요.”
그녀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고독과 불신, 절망, 혼란, 원망들이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고 깨끗하던 그녀의 눈동자를 가득 채웠다.
“...40은?”
45는 조용히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등에 매고 있던 2자루의 기관단총 중에서 한 자루를 나에게 건네었다.
“저보다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나는 그녀가 건넨 물건을 받아 들었다. 이곳저곳이 심하게 훼손이 되어있는 UMP기관단총이었다.
“40은 어디 있어.”
아닐거야.
“.....”
아니라고 대답해줘.
그녀는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공허한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가득했던 감정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녀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 눈으로 눈물 한방울을 떨어트릴 뿐이었다.
그 순간. 나의 모든 것이 무너졌다.
으아아아아아아.
나는 총을 가슴에 끌어안았다. 다리가 풀려서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평생 동안 몇 번 흘려본 적 없는 눈물이 흘러 나왔다. 자리에 주저앉아서 모든 감정을 퍼부어냈다. 고요한 산에 울부짖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 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두운 산에서 우리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게 그녀의 작별 소식이었다.



7.



그날이후 나는 1주일 간 휴가를 사용해서 혼자 남은 45와 시간을 보냈다. 주로 커다란 텔레비전에 틀어놓은 영화를 보며 지냈다.
그녀는 그곳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기를 혐오하게 될 것이라는 말만 했다. 그래서 나도 더 이상 그녀에게 그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들어봤자 슬프기만 할 이야기를 굳이 듣고 싶지도 않았다.
얼마안가 그녀는 장문의 편지를 남기고 사라졌다. 편지에는 자신이 머무를 거처를 찾았고 앞으로 어떻게 지낼지, 장래의 계획,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
나도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침 일찍 일어나 사격장의 문을 열고 과녁의 상태를 점검하고, 교체하고. 사무실에서 예산과 물품주문을 하는 그런 일말이다.

오늘은 처음으로 그녀의 총을 쏴보았다. 다른 총들은 쏘려고 하면 심각한 거부 반응이 일어나지만 그 총만큼은 괜찮았다. 그녀의 총을 쏠 때만큼은 그녀가 내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녀에게 각인이 되어있던 총기 여서 그런 걸까.

나는 아직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그녀가 이제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래도 기다릴 것이다. 다시 한 번 그녀가 이총을 들고서 이 사격장을 총성으로 메워주기를. 다시 돌아와서 웃으며 총 탓을 하기를. 언제까지나 기다릴 거다. 이곳이 사라지거나 없어질 때까지. 평생이 걸려도 상관없다. 죽을 때까지 오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다. 나는 그저 기다릴 뿐이다. 이곳에서 그녀의 총성이 울려주기를. 단 한발의 총성이라도.




fin

형편없는 글재주지만 읽어주셨다면 대단히 감사하다는 인사 올리겠습니다.

Lv28 렝가는op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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