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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 그 인형은 지휘관과 서약하지 않았다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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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3 21:51:32








그 인형은 지휘관과 서약하지 않았다



7. 회색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쉘터 밖에서 빗소리가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습도가 높고 기온이 낮았다낡은 콘크리트 벽을 타고 자라던 이끼들이 수분을 머금고 돋아났다수면을 마친 마인드맵이 부팅을 시작할 때의 감각과 비가 오는 소리는 닮아 있었다. HK416은 숨을 깊게 들이켜 냄새를 맡았다물비린내가 났다.

정리된 데이터가 자리를 잡아가고 식었던 엔진이 재가열하는 동안에기억들은 차례를 지키지 않고 튀어올랐다불침번 동안의 단절된 기억들은 물을 머금고 가라앉은 공기 사이를 떠돌았다.

UMP9는 한참동안이나 앉은 채 침묵을 지켰었다같은 인형일지라도 그녀의 생각은 타자인 HK416의 알고리즘 속으로 스며들지 못했고, HK416은 다시 돌아누워 잠든 UMP9를 보며 UMP9와 지휘관에 대해 생각했었다수면은 그 생각을 폐기처분했다알고리즘은 UMP9에 대한 생각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았다기억에는 지휘관에 대한 생각만이 찢어진 사진처럼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UMP45와 UMP9가 차례로 잠에서 깨었고마지막으로 G11이 힘겹게 눈을 떴을 때 즈음이 오전 열 시 십오 분 경이었다. UMP45는 G11을 깨우지 않고 쉘터를 정리했다잔탄을 모아 빈 탄 박스에 적재했고탄 박스와 식량 상자를 한 곳에 모았다. HK416이 바닥과 벽을 샅샅이 훑어 발자국이나 그을림손자국 등이 있는지 살폈고 UMP9가 장구류를 한데 모았다그리폰으로 복귀하는 차량은 정확히 열 시 반에 도착했다.

비는 흩뿌리는 듯이 내리고 있었다빗방울들은 곤두박질치지 않고 공기 중에 흩어져 멀리 떨어졌다물안개가 도처에 끼어 있었다태양이 아직 완전히 솟구치지 않아서 아침의 물안개는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ED와 방사능을 견뎌낸 몇 안되는 생물들이 수분을 찾아 땅 위를 기웃대었다억센 풀들은 뿌리를 힘껏 땅바닥에 뻗고 잎사귀를 긴장시켰다나무들이 온 몸을 펼쳐 안개를 훑었다천을 덧대어 씌운 그리폰의 트럭은 그런 살아있는 것들을 헤치며 왔다포장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흙길을 따라 차량은 심하게 요동쳤다.

소대원들은 입을 다물고 짐을 날랐다운전기사가 쉘터로 들어가 담배를 태웠다담배 연기는 바깥으로 새어나가 안개와 섞여 들어갔고안개 속 가라앉은 침묵 사이로 그녀들은 짐을 날랐다옷이 젖어 들어가고 HK416의 베레모가 숨을 죽이고 가라앉았다. G11의 몽롱한 잠투정이 간간히 쉘터 주변을 맴돌았다모든 짐을 적재하고 그녀들 또한 짐짝처럼 트럭의 뒤에 실려 운전기사에게 신호했을 때가 열 시 사십분 이었다운전기사는 연거푸 이어 피우던 담배를 끄고 운전석에 올랐다그는 그리폰 직원복을 입고 있었다쉘터 바닥에 담배꽁초 다섯 개가 버려져 있었다.


트럭에 씌워진 천은 두꺼웠고 먼지를 많이 머금고 있었다천을 짠 실들의 두께가 두꺼워 그 사이로 먼지와 냄새가 파고들었다가벼운 빗방울들이 그 사이로 끼어들면서 먼지와 냄새를 안고 흘렀다잔탄의 화약 냄새며칠의 여름을 견뎌낸 특전식량의 비릿한 냄새먼지 냄새와 물비린내가 섞여 트럭의 적재함은 어둡고 텁텁했다. 404소대원들은 두 명 씩 마주보고 앉아 그 냄새와 흔들림을 견뎌냈다.


……일주일 정도는 쉴 수 있을 거라던데다들 뭐 할 거야?”


UMP45는 크고 높게 말했다거칠게 산을 넘는 트럭의 엔진소리와 짐이 흔들리며 자아낸 잡음들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소리는 세상과 한 뼘 쯤 떨어져 있는 것처럼 울렸고소대원들은 얼굴을 찡그린 채 그녀의 목소리를 건져 올렸다.


글쎄……어찌 됐든 그리폰에 있기는 싫은데.”

난 잘 거야.”

……11, 그렇게 자 놓고 또 잔다고?”

침대에서 잘 수 있잖아


말의 물꼬가 트여 UMP9와 G11이 천진하게 대화했다목소리는 힘겹게 소음들을 비집고 흘러들었지만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고 눈매에 힘이 풀려 있었다그리폰은 따듯한 집이 아니었지만 적어도 적지는 아니었고작전이 끝났다는 안도감은 마인드맵을 흥분시켰다. UMP45는 더러운 천에 기대어 두 인형을 바라보며 웃었다.


“416, 너는?”

……아무것도 안 할 거야다음 작전 준비해야지.”

뻣뻣하네모처럼 받은 휴가인데 지휘관이나 몇 번 보러 가지 그래?”

……시끄러워알아서 할 거야.”


UMP45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천막 안이 다시금 트럭 엔진 소리로 차올랐다. UMP9가 입을 다문 채 언니를 흘겨보았고 G11은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차량이 포장도로로 진입하고 있었다. HK416은 숨을 깊게 들이켜 냄새를 맡았다수분 냄새와 오래된 먼지 냄새가 났다.

그녀는 그리폰에서 휴가를 보내고 싶지 않다는 UMP9의 말에는 동의했지만지휘관을 보러 가라고 제안하는 UMP45의 말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지휘관은 마인드맵 안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HK416에게 기대었지만 그녀는 그런 지휘관의 어깨를 흔쾌히 받아줄 수 없었다마인드맵은 그녀가 겪었던 사건들 사이에서 복잡하고 요란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고작 한 번의 술자리로 인해 지휘관이 이렇게 떠오른다는 사실에 대해 경계하고 있었지만 HK416은 이렇게 고민하고 경계하는 사이 UMP9는 꼬리를 살랑이며 지휘관에게 아양 떨 것을 상상했다그 비틀거리고 솔직한 모습을 자신에게만 보여줄 거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고상상은 현실이 될 것이라는 묘한 착각을 일으켰다그런 생각을 할 때면 HK416은 마인드맵이 타오르는 듯한 조바심으로 고통 받았다일주일의 시간 동안 HK416은 무얼 해야 할지 몰랐다그리폰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



비가 오는 날에 그리폰의 인형들은 야외로 나가지 않았다작전이 없거나 비번인 인형들은 일과 시간에 야외에서 훈련하거나 인간 직원들의 일을 거들었는데비가 오는 날에는 훈련도 작업도 모두 취소되었다. 3차 세계대전 이후의 비는 뼈와 강철 모두에 치명적이었다.

404소대원들은 본사 정문에 도착해 짐을 내려놓았다쉘터의 비와는 다르게 그리폰에서 비는 꽤 억세게 내리고 있었다빗방울들은 확실하게 피부에 닿아 촉각기관을 건드렸고트럭에 씌운 천막과 HK416이 입은 전투복에서는 튀는 소리가 났다물비린내가 요동치고 있었다몇몇 인형들이 창밖으로 그녀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인간 직원들은 보이지 않았다운전기사는 그리폰에 도착하고 나서도 운전석에서 내리지 않았다.

탄 박스가 세 상자였고식량 상자가 네 상자였다소대원들은 그리폰의 정문을 들어서면서 다시 침묵했다. UMP45가 미간을 찌푸린 채 상자들을 받아 내렸다. UMP9가 종종 고개를 들어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인형을 향해 인사했다미소 지어 올라간 입꼬리를 타고 독한 빗방울이 흘러내렸다그녀는 기운차게 손 흔들며 인사했다. HK416이 마지막 장구류 상자를 던지듯 내려놓으면서 중얼거렸다.


독한 년들뻔히 보이는데 도와주러 내려오는 인형이 하나도 없어.”

한두번도 아닌데새삼스럽게. 416, 지휘관에게 보고 하러 갔다 와. 9는 카리나에게 가서 잔탄이랑 남은 식량 신고하고나랑 11은 숙소에 장구류 들고 가서 정리하고 있을게.”

……알았어.”


UMP45는 뻣뻣하고 억센 머리칼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을 닦으면서 말했다그녀는 표정을 풀지 않았는데, HK416은 그것이 시야를 가리는 물방울을 향한 것인지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인형들을 향한 것인지 판단하지 못했다그녀는 가라앉은 UMP45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로비로 들어섰다.

돌바닥은 습기를 흡수하지 못했고마찬가지로 물을 머금지 못하고 흘려보내는 HK416의 신발굽은 서로 미끄러져 삐그덕거렸다위장용 니삭스가 지나치게 물을 머금고 있었다허벅지에 달라붙은 합성 천은 걸을 때 마다 물기를 새어 내보냈고 허벅지는 서로 스쳐 지나가면서 소스라쳤다긴 머리카락 너머 치마 뒷부분으로 물방울이 방울져 떨어졌다비 오는 날에 실내는 소리를 울리게 했고 HK416은 요란하게 지휘관실로 향했다지나치는 인형들이 그녀를 보면서 수군거렸다.

HK416은 인형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애썼으나 소리는 퍼져서 제 멋대로 귓속을 파고들었다날치기니도둑이니벌을 받았네아니네 하는 소리들은 큰 소리로 나오지 않고 조그맣게 웅성였다. HK416은 그 소리를 듣지 않았으나 소리들은 들렸다.

인형들은 자신들이 뛰었던 작전과 당직훈련의 성과를 번갈아 비교하며 열을 올렸고 과시했다. PPK가 거들먹거리며 야간 작전 당시 위기에 빠졌다가 살아남은 이야기를 했고, MG5는 화력전에서 자신의 기관총이 적을 찢어발겼을 때의 그 감각과 피 냄새화약 냄새를 이야기했다벡터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전장을 불바다로 만들었을 때의 이야기를 했고, SVD가 적의 스코프를 뚫어버린 일화를 이야기하며 맞받아쳤다그녀들은 쫄딱 젖어 성큼성큼 걷는 HK416을 보면서 말했다소리들은 조그맣게 웅성였다그 조그만 화살들은 지나가는 404소대원에게 향해 있었다누군가 말했다말소리는 모든 소리에 섞여 들어가 누가 그 말을 했는지 분간할 수 없게 했다쟤들은 도대체 뭘 하길래 그리폰에 계속 소속될 수 있는 걸까? HK416은 그 소리를 듣지 않았으나 소리는 들려왔다.

마인드맵이 요동쳤다눈깔을 돌려 그녀들을 바라보고 이야기의 중심부를 꿰뚫은 채 지나온 자신의 작전들을 늘어놓고 싶었다불바다가 된 전장피비린내 나는 시체살려 달라 애원하는 인형들과 죽여 달라 애원하는 인간들의 이야기들이 들끓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니삭스가 점차 말라가고 있었다인형들의 수군거림이 멀어지고 있었다지휘관실은 눈치 채지 못한 새 그녀의 앞에 다가와 있었다.



지휘관실은 여전히 쌀쌀했고 지휘관은 여전히 태산 같았으나 HK416은 경례를 마친 후에도 선뜻 발을 내딛지 못했다그리폰에서 주워들은 치욕과 지휘관을 향한 이틀 동안의 생각이 마구 뒤엉켜 혼란했다그녀는 정면을 바라보지 못했고 지휘관의 책상 밑을 바라보았다보고 드립니다, 404 소대원 전원 작전 마치고 복귀했습니다간단한 말이었고 수도 없이 말해 왔던 말이었으나 HK416은 말하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들썩이던 UMP9의 등과 UMP45의 비아냥은 동시에 떠올라 동시에 스러졌다그 사이로 지휘관이 눈을 보여 달라던 회상은 느닷없이 끼어들었고, HK416은 유탄이 터지고 철혈이 피를 뿜던 전장에서 지휘관을 생각한 자신을 떠올리면서 끼어든 지휘관을 변호했다우선순위가 높아 제일 먼저 해야 할 말이 튀어나오지 못하고 우선순위가 낮아야 할 생각들이 마구잡이로 뛰쳐나왔다엔진이 세차게 돌았다시선이 점점 밑으로 내려가 발끝을 보고 있었다.


……왜 그러지? 416.”

지휘관…….”


터져 나오지 못하던 목소리는 낮고 짧은 지휘관의 어투에 화들짝 놀라며 얼빠지게 튀어나왔다그녀는 대답하면서 고개를 들어 지휘관을 바라보았다지휘관 너머 큰 창문 빗방울들이 할퀴며 자국을 남겼다회색 구름들이 꾸물거리면서 아직도 비를 쏟아 내고 있었다창틈에 물이 고여 있었다쌀쌀한 지휘관의 방은 그런 습기들을 요동치게 했다지휘관은 손을 마주잡고 HK416을 바라보고 있었다. HK416이 목을 가다듬었다.


……보고 드립니다. 404 소대원 전원작전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수고했다몸이 좋지 않은가?”

아닙니다.”

……그래.”

……지휘관.”


HK416의 말은 목을 넘어 오는 데 모든 힘을 다 쓴 듯 맥없이 흘렀다빗방울이 창문을 때리며 균일하게 소리를 퍼뜨렸다창문 너머로 빗방울들이 나뭇잎에 떨어지는 소리물웅덩이 고여 가는 소리가로등과 아스팔트 바닥과 건물에 부딪히는 소리들이 모두 합쳐져 균형을 이루었다. HK416은 한동안 그 소리들을 들었다.

지휘관을 불러 세우기는 했으나 그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작전하기 전과 작전 중작전 하고 나서 오는 길에서 까지도 당신을 생각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지그런 자신의 마인드맵 변화가 어째서 이렇게 갑작스럽게 닥쳐왔는지 묻고 싶었는지귀엽고 어리광 잘 부리는 UMP9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우리 소대원 말고도 다른 인형들의 지휘도 맡고 있는지혹시 그 인형들 중 지휘관과 마음이 잘 통하는 인형이 있는지그 인형들이 자신과 404 소대원들을 얕보는 것을 일러바치고 싶었는지그 인정받지 못하는 서러움을 토로하고 싶었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정교하게 짜여진 수학적 알고리즘조차도 그녀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지휘관 앞에서는 항상 이런 식이야뭐든 모르게 돼. HK416은 소란스러운 입 안쪽을 밖으로 꺼내지 않았고지휘관은 끈질기게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비가 거세어졌다가 약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오래고 꾸준한 비였다.


……일주일……의 휴가를그리폰 밖에서 보내고 싶어요.”

……그리폰 밖에서?”

.”

의외군너는 항상 휴가 때 부대 내에서 보냈지 않나.”

…….”

갑자기 왜 그런 요청을 하는지 묻고 싶은데.”

…….”

……안될 것도 없지알았다카리나에게 관련된 신청을 해 놓을 테니처리되면 알려주도록 하겠다.”

고마워요그럼가보겠습니다.”

……416.”


이번에는 지휘관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HK416은 경례를 올리려던 오른손을 천천히 내렸고지휘관은 깍지를 풀고 몸을 기대어 앉았다지휘관이 마주친 시선을 거두고 시선을 높게 들었다. HK416은 그가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는지 아닌지 명확히 판단할 수 없었다늙은 성대에서 나오는 소리는 그러잖아도 아주 조그마했는데기척을 지울 줄 아는 지휘관의 소리는 더욱이 모호했다지휘관은 잠시간 뜸을 들이고 나서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아까 밖에서 인형들이 수군대는 걸 들었다내 밑에 있는 다른 인형들도 너희가 뭘 하는지 묻더군.”

…….”


지휘관의 말은 느리고 섬세했다단칼 같은 예리한 말투를 접어 둔 채 나오는 목소리에는 세월과 한숨이 묻어서 나왔다그는 말과 말 사이에 여백을 충분히 두고 말했고, HK416은 시선을 들어 지휘관을 마주보려 했으나 지휘관은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네 마음이 많이 심란한 걸 이해한다내가 알고 있다네가……너희가 뭘 하는지적어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으니너무 풀죽지 마라그리고 숙소에 들어가기 전에 카리나에게 내 방으로 오라고 일러라.”

…….”


HK416은 대답하지 않았다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는 데에 온 힘을 쏟고 있던 그녀는 소리를 낼 수 없었다그녀가 문 앞으로 천천히 걸어간 후 뒤돌아 지휘관에게 경례했다지휘관의 시선이 서류에 박혀 있었다그는 경례를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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