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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소설] 단비(2)

아이콘 순백의구름 | 댓글: 6 개 | 조회: 4384 |



 단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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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란-



 단비의 부드러운 빗소리가 멎어버리고, 타일의 몸부림치는 소리가 벽을 뚫으며 요동친다. 나는 지금 심판의 때를 기다리는 죄수처럼 방 한가운데에서 불안에 떨며 앉아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솔직히 지금도 감이 오지 않는다.

 그녀가 집에 들어가자마자 (화장실로 들어가)옷을 던져버리고, “입을만한 옷을 준비하도록!”라는 말만 남긴지 어언 10분이 흘렀다.

 나는 길을 잃어버린 미아처럼 막막했다. 그냥 이대로 엄마 찾아 길 찾아 확 울어버리고 싶은, 말 그대로 낭떠러지 근처까지 몰린 심정. 누가 몰아세웠냐고 하면 그 또한,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반항이라도 하듯 의미 없이 주변을 깔끔하게 청소해보기도 하고, 그녀의 젖어버린 옷을 세탁기에 집어넣고 탈수시키기도 해봤다. 그 과정 속에서 그녀가 자신의 속옷은 그대로 가지고 있는지, 내 눈에 발견되지 않아, 혼자 속으로 안심하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책이라도 보려고도 했지만, 안 좋은 망상이 머릿속을 지배해버려서 단념, 컴퓨터를 켜서 타블렛을 두드리며, 취미로 그리고 있던 만화를 손보려고 해도 그녀의 나체 그림으로 그려져서 단념. 그렇다보니 할 수 있는 일이 가만히 죄스럽게 앉아 있는 것밖에 없었다.

 그 순간 마치 공포게임의 때를 기다린 음향 효과처럼 화장실에서 타일을 때려대는 물소리가 자취를 감추고, 화장실의 문이 끼이익하고 음산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때, 문틈 사이로 손만 슬쩍 나와 앞에 둔 옷들을 가져가는 속도는 심상치가 않게 느껴졌다.

 잠시 후, 그녀가 화장실 문을 박차고 하얀 연기를 뿌려대며 나왔다. 젖은 머리카락을 덮은 수건 사이로 수증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며 방 전체로 은은한 레몬 향을 퍼트리고, 얼굴을 칠한 옅은 화장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풀려버린 눈동자는 목욕탕에 들어간 아저씨들 같은 나른한 후광을 입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요염하게 느껴졌다.

 “역시 뜨듯한 물에 몸을 담그니까 기분 좋네~.”

 “응…….

 샤워기 말고는 아무것도 구비되어 있지 않은 값싼 원룸의 화장실에서 대체 어떻게 몸을 담갔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배시시 웃으며 입가에 만들어지는 옅은 잔주름에 시선을 빼앗기며, 그런 단순한 사고 따위는 회로가 끊어진 채 방해받은 기계처럼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런데 역시 남자 옷이라고 조금 크네. 아, 어깨 때문인가?!”

 “아마도…….”

 내가 최대한 수수해 보이는 검은색의 단조로운 트레이닝 복을 줘봤지만, 그게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왔다. 쇠골 부근까지 지퍼를 잠갔는데도, 그녀의 몸집에 맞지 않는 큰 치수의 트레이닝 복이 어깨 밑으로 흘러내리면서, 뜨거운 물에 달아오른 분홍빛깔의 뽀얀 속살이 그대로 노출되고 말았다. 그녀가 입고 있던 트레이닝 복을 다시 매만지며 고쳐 입어보지만, 다시 흘러내리며 2차 공격. 기어코 나를 낭떠러지로 밀어버릴 심정인건가?

 “으으음~~, 역시 이 옷, 조금 불편해. 다른 옷은 없니?”

 “저기, 옷장에…….”

 남의 집에 와서는 뭐가 불만인지 방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그녀. 이제는 내 속옷이 들어있는 3층짜리의 서랍으로 된 옷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뒤지기 시작했다.

 “아, 그러고 보니.” 하고 그녀는 옷장을 뒤지다 말고,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너는 안 씻을 거야? 나랑 같이 다 젖어버렸잖아?”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 뱀처럼 몸 전체를 휘감으며 온다. 여기서 잘못 움직이고, 잘못 말하면 뱀의 매끈한 피부가 목을 단단히 조여 올 것만 같았다.

 “나, 난 괜찮아. 그으으, 별로 찝찝하지도 않으니까.” 하고 나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아마도.

 “우아~, 너 설마 그대로 있을 거라고?” 하고 그녀가 내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그제야 그녀는 아직까지도 입고 있는 내 젖어버린 옷들을 보고 말았다. 얼마나 황당해하는지 눈이 동그랗게 커지면서 그대로 동공은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떨리는 입을 제대로 다물지 못하며 말했다. “너너너, 너 왜 아직까지도 그 젖은 상태 그대로인 거야! 대체, 내가 씻을 동안 대체 뭐한 거야?! 너, 그러고 있으면 감기 걸려버린다고!”

 “……괜찮아, 바보는 감기에 안 걸린다잖아?”하고 나는 엉뚱한 변명을 해보았다.

 “그딴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하고 있을 시간에 빨리 씻기나 해!” 하고 그녀는 나를 째려보며 말했다.

 사실 갈아입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니었다. 다만, 입을만한 옷이 없었을 뿐. 지금 내 옷장에는 이 상황에 적합한 옷이 없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트레이닝 복을 제외하곤 말이다. 뭐, 따로 편안하게 입을 옷들이 있기는 한데, 딱 달아 붙는 셔츠와 반바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셔츠야 딱히 문제가 없지만, 반바지는 여러모로 많은 문제를 야기하며 내 인간성을 완벽하게 실추시켜버릴 것만 같아서 못 입겠다. 그러니 자연스레 윗옷도 못 갈아입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아, 밖으로 나가고 싶어 죽겠다. 

 가만히 이곳저곳으로 시선회피를 하는 나를 보는 그녀가 “뭐야, 진짜 안 씻게?” 하고 말하며 옷장을 다시 뒤지기 시작했다. “좋아! 그렇다면, 오랜만에 내가 옷을 골라줘 볼까!”

 “뭐야, 왜 갑자기 그런 결론이 나는 건데?!” 하고 말하는 나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떨고 있었다. “그냥 네가 빨리 돌아가면 되는 일잖아?!”

 “뭐~?! 왜 그렇게 되는 건데!”하고 말하는 그녀가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왜 나 때문에, 네가 못 씻는다는 거야. 변명을 할 거면 똑바로 하던가?!”

 그순간 머릿속에서 뭔가 완벽하게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그냥 씻으면 되잖아! 진짜.”하고 나는 결국 혼자서 인내심의 한계를 맛보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는 당황했는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옷장 맨 밑의 서랍을 열고, 안에 들어있던 속옷과 최대한 펑퍼짐한 짧은 바지, 그리고 셔츠 하나씩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갈아입을 옷들은 수건이 들어있는 작은 수납장에 넣어두고, 물을 먹어버린 옷들은 빠르게 벗어 구석에 던져버렸다.

 화장실에 딸려있는 샤워기가 나의 단순한 조작으로 미지근한 물을 토해내며 몸을 타고 내려왔다. 나를 비겨간 물들은 타일을 때려 되는 경쾌한 소리로 나의 몸속을 채워가고, 그 사이를 “아, 이제 어쩌지.”하는 고뇌의 빠진 나의 중얼거림이 진하게 섞여갔다.








 -흑역사-



 대략 30분 정도를 화장실 안에서 씻었지만, 넘쳐버리는 머릿속 때문에 전혀 개운하지 않았다. 오히려 괜한 짓을 벌인 건 아닌가라는 생각에 더 찝찝해지기만 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계속 화장실을 점령하고 있을 수만도 없기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젖은 몸을 닦아내고, 옷을 갈아입은 채 밖으로 나왔다. 이전에 입었던 옷들은 아직, 세탁기 안에 들어있을지도 모르는 그녀의 옷 탓에 그대로 방치했다.

 화장실의 문이 음산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점점 열리는, 너무나도 천천히 열리는 문틈으로 뜨거운 수증기가 빠져나가고, 차가운 공기가 기어들어오며 나를 감쌌고, 냉장고와 선풍기의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정적을 채워갔다. 도둑처럼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문턱을 넘으며 나오자, 건조대에 걸려있는 그녀의 옷들이 나를 현실로 맞이했고, 눈동자는 점점 초점을 잃어간다.

 한 걸음 한 걸음에 긴장감이 묻어왔다. 그리고 어딘지 낯설지가 않다는 기분이 머릿속을 헤집어놓았다. 잠깐만, 진짜로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같은데…….

 엄청난 괴리감에 멍청이처럼 방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조용히 과거를 회상했다. 뭐였지, 뭐였더라.

 “흠냐~”하고 그녀의 작은 숨소리가 침대 쪽에서 기어들려왔다.

 두뇌는 사고를 멈추고, 본능만이 남은 시선은 소리를 좇아 옮겨간다. 남의 침대 위에서 때 이른 선풍기를 쌔며 쿨쿨 잘도 자고 있는 그녀가 보인다. 그리고 그녀는 나의 굳어버린 머리를 강제로 가동시켰다.

 “아…….”하고 멍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니, 어떻게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생각하니 존재한다고 말한 자식, 죽여 버리고 싶다. 맞아, 옛날에도 이런 일이 있었어. 있었는데, 나는 또 바보 같이. ……저 녀석이 왜 그렇게 당당한 가 했더니, 아니 원래부터 저랬지. 아니, 그딴 것보다 나는 왜 또……. 

 혼자 머리를 감싼 채 소리 없는 포효를 내지르고, 바닥으로 웅크려진 몸뚱어리는 점점 뜨거워져갔다. 누가 그랬던가? 역사는 반복된다고. 정말 지당하신 말씀이다. 나도 그 사실을 알았다면, 지금 같지 않았을 텐데.

 한 명의 여자가 잠에 푹 빠져있고, 그 옆 바닥에서 웅크린 채 허공에 남모를 발길질을 하는 내 집 안에는, 선풍기의 날개소리와 냉장고의 과열소리로 채워져 있었다.










 -과거-




 옛날에, 아니, 불과 1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것은 한 남자에게는 잊고 싶은 부끄러운 일이었고, 한 여자에게는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추억이었다.

 그때 당시에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고등학교 3학년으로, 여름방학에도 수험 준비에 한창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 청춘의 식상한 때였다.

 집으로 가는 방향이 서로 같았던 그녀와 그는 같이 하교를 다니는 일이 잦았고, 그날도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같이 하교를 하는 날이었으며, 평상시와는 다르게 폭우 탓에 밤늦게까지 학교에 남았었던 날이기도 했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녀가 자신의 손을 접이식 우산 밖으로 내밀며 말했다. “네가 조금만 더 기다리면 비가 잠잠해지지 않겠냐고 해서 기다린 건데, 왜 더 쏟아지는 거야?! 이래서 내가 그냥 가자고 했잖아.”

 그녀는 자신의 손을 때려대는 빗물들과 바람을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멈출 줄 모르는 바람 탓에 치마가 엄청난 기세로 펄럭이고 있었지만, 늦은 밤이라 주위에 사람이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너도 결국 신발 젖기 싫다면서 좋다고 기다렸잖아.” 하고 그가 그녀 옆에서 재잘거렸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그도, 그녀의 펄럭이는 치맛자락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는지 쳐다도 보지 않고 있었다.

 “남자가 되어서 말대답하고는!”하고 신경질적으로 말하는 그녀가 빗물에 젖어버린 손을 거두며 말했다. “그래서 너한테는 잘못이 없다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러면 그냥 순순히 미안하다고 말하면 덧나니?”

 “……미안.”

 사과를 받은 그녀는 “옳지, 잘했어.”라고 가슴을 펴고 뿌듯해하며, 그와 함께 학교 밖으로 걸어갔다.

 폭우가 쏟아지는 늦은 밤. 길을 걷던 그녀와 그는 서장교라는 이름의 다리 입구 앞에서 가만히 멈춰있었다. 서장교는 축구장을 가로지르는 넓이만큼의 길이로, 평화로운 물길과 조약돌들이 아름다운 강을 보면서 지나갈 수 있는 다리였지만, 평상시와는 다른 거센 날씨와 드문드문 나있는 가로등에 몇몇 망가졌는지 불빛이 들어오지 않는 그 광경은 그런 다리를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만들고 있었다.

 “어떡하지, 너무 어두운데. 소리도 무섭고…….”하고 그녀가 침을 삼키며 말했다.

 “어떡하긴, 그냥 가야지.”하고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거기다, 여기 말고, 다른 길로 가려면 훨씬 오래 걸리잖아.”

 “으으, 너 때문이야!”하고 그녀가 그를 째려봤다.

 “알겠다니까, 내가 나중에 뭔가 사줄 테니까 그만 좀 닦달해줘.”하고 그가 길을 나서며 말했다.

 다리를 건너는 그녀는 긴장한 듯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애초부터 여름방학인데도 학교에 가야했던 것부터 잘못이야! 학생이라고 쉬는 날까지 공부를 시켜야 된다니, 그게 말이나 돼? 이게 다 사회가 못나서 그래!”라며 중얼거리듯 쉴 새 없이 투덜거렸고, 그 옆에 있던 그는 거기에 장단만 맞추듯 “응, 맞아.”라고만 말하며 걷고 있었다.

 그렇게 그 둘이 공포와는 담을 쌓은 듯한 얘기를 하며 종종걸음으로 서장교의 중간을 막 넘어섰을 때였다.

 갑자기 서장교 옆에서 거센 돌풍이 몰아치듯 불어왔고, 그녀와 그의 우산은 그대로 집어삼켜져버렸다. 그래도 그는 남자인 덕분에 어느 정도의 무게와 힘을 갖고 있어서 무사히 버텨내고 있었지만, 그녀의 경우는 달랐다.

 그녀의 몸무게와 가는 팔에서 나오는 연약한 힘으로는 거센 돌풍을 버텨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폭우가 쏟아지는 밤에 우산을 버릴 수도 없는 노릇. 그녀는 낑낑거리면서도 어쩔 수 없이 우산의 손잡이를 억지로라도 붙잡으며 놓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노력과는 다르게 그녀는 바람에 팽팽해진 돛단배처럼 바람에 더욱 팽팽해진 우산에 붕하고 떠오르며 날아가 버리려고 했었다.

 그녀가 공중에 떠오르는 것까지는 그다지 상관이 없는 일었다. 그러나 그녀의 우산이 향하고 있는 방향이 문제였다. 그녀의 우산은 바람을 따라 빠르게 난간 바깥으로 향하고 있었고, 그 모습은 마치 뭔가에 들려 억지로 난간 밑으로 끌려가는 걸 그녀가 어떻게든 저항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었다. 하지만, 실상 그녀는 저항조차도 못한 채 긴장감에 얼어붙은 손을 놓지도 못하고 어둠에 빨려 들어가려는 상황이었다.

 그녀의 시선에 닿은 난간 밑은 평소에 바라보던 평화로운 강물이 졸졸졸 흐르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드문드문 있는 가로등 불빛을 머금은 강물이 마치 눈을 부라리는 것처럼 그녀를 쳐다보는 것 같았고, 거센 바람을 타고 서로를 부딪치며 잡아먹는 물줄기는 마치 그녀를 잡아먹기 위해 아가리를 쩍 벌리며 환희로 비명 지르는 지옥인 것만 같았었다.

 "도, 도와-. 흑."

 겁에 질린 그녀의 소리를 들은 그는 예사롭지 않은 그녀의 모습을 발견하고 얼어붙으면서도, 동시에 바람에 날아가려는 우산을 미련 없이 놓아버렸다. 그리고 날아가려는 그녀에게 달려가 그녀의 허리를 잡아챘다.

 “우산 버려!”하고 그가 소리치지만, 그녀는 눈물이 맺힌 얼굴로 숨죽인 채 어둠 앞에서 울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환희의 비명 앞에서 그녀의 귀에 들려오는 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뿐. 그의 작은 외침 따위가 뚫고 들어올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었다.

 “칫!”

 어쩔 수 없이 그는 바람이 약해질 때까지 온힘을 다해 그녀의 허리를 잡아야했다. 겨우 몇 초가 흐르면서 돌풍은 잠잠해졌고, 그녀는 지옥 같았던 몇 초가 마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듯한 느낌으로 허무하게 땅으로 내려왔다.

 그는 굳어버린 그녀의 손에서 접이식 우산을 잽싸게 뺏어 접어버리고는, 남은 손으로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순간 깜짝 놀라서 움찔거리는 감촉이 그의 손에 번졌지만, 그는 애써 무시한 채 다리 너머 끝을 향해 그녀를 이끌고 달려갔다.

 그녀와 그는 밀려오는 거센 바람에 저항하며 계속해서 달려갔다. 그 일은 많은 체력을 앗아가는 괴로운 행동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둘은 도저히 천천히 걸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었다. 그저 더욱더 다리에서 벗어나고 싶어질 뿐이었다.

 그들에게 느껴졌었다. 자신을 밀어내는 바람이, 마치 다리 중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누군가의 손아귀처럼 섬뜩했었다는 걸. 멈추면, 그대로 포기하고 주저앉으면 다리 난간으로 떨어져 죽어버릴 것만 같은 패닉상태. 그래서 그와 그녀는 모든 힘을 쏟아냈고, 숨이 턱 맞히는 바람에 맞서 안간힘을 다해 도망쳐야했다.

 간신히 다리를 벗어나고, 그 입구 근처에 있는 가로등 하나가 어둠을 밝히고 있는 자리. 그녀는 땀인지, 빗물인지, 아니면, 눈물인지 구분하지 못할 만큼 엉망진창이 된 채 숨을 헐떡이며 서서 지나온 곳을 그와 함께 지켜봤었다. 주위로 부는 바람의 음산한 울음소리가 살결을 스치고, 굵은 빗물이 땅을 있는 힘껏 때려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이 그녀에게는 그저 먹잇감을 놓쳐버린 야수의 울음소리와 망령들의 아쉬움으로밖에 들려오지 않았었다.

 대략 1분 정도를 그렇게 멍하니 있던 그가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서 뺏어든 우산을 펼쳐 그녀에게 씌워줬다.

 “……집에 가자.”

 "……." 

 그녀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단순히 고개만을 끄덕이는 그녀의 패닉에 가까운 상태에다가, 우산이 없는 상태로 집까지 돌아가기는 무리이기도 해서 어쩔 수 없이 이 근처에 있는 그녀와 함게 그녀의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그녀의 집까지 걸었던 5분 동안, 그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침묵에 빠져 있었다. 그 사이에 말이라고 할만한 것은 그녀의 집 바로 근처까지 왔을 때 그녀가 자신의 허리를 가만히 만지작거리며 아까 있었던 일을 정리한 듯한 뉘앙스의 한숨을 몇 번 내쉰게 끝이었다.

 그리고, 그와 그녀의 입장이 바뀐 건 그녀의 집에 그가 들어서고 나서였다.

 그가 그녀의 집 안으로 들어서자, 꺼림칙한 분위기를 느끼고 말았다. 아무리 늦은 밤에 왔다지만, 시간은 아직 잘 시간도 아니었다. 하지만, 집 안은 텅비어버린 폐허처럼 무거운 정적에 휩싸여 인기척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는 것이었다.

 그 순간, 이전에 일은 완전히 떨쳐낸 듯이 잠잠한 얼굴로 그녀가 말했다.

 “아, 맞아. 말해주는 거 깜빡했는데, 우리 가족 여행 갔어. 그래서 지금 우리 집에는 아무도 없어.”

 “…….” 그녀의 말을 들은 그는 돌처럼 굳어버리고, 자신이 현재 무슨 상황에 빠진 건지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저 담담한 듯 입술을 빼죽 내밀며 뾰로통하게 말을 이어갔다.

 “고등학생은 공부에 집중해야 된다고 나는 빼버리고 갔으면서, 고2동생은 데리고 가는 게 말이 돼? 그럴 거면 나도 데려갔어야지!”

 “……너-.”

 그는 그렇게 말하는 그녀가 아까 그런 일을 겪은 사람이 맞는지 의심하며 대꾸하려고 쳐다봤지만, 그런 그의 기분은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가 갑자기 손뼉을 짝 치면서 “맞아, 너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라고 호쾌한 말로 그의 말을 끊어버리고 말았다.

 “…….”

 당연히 그는 할 말을 잃고 그저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방금까지만 해도 그녀의 집에 하룻밤 머물고 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님이 안 계신다는 사정을 안 현재. 그에게 있어 그녀의 집에 하룻밤을 머문다는 건, 좀 전의 있었던 일보다도 더 두려운 일이며, 거사를 치룬 다는 의미로 연결되는 일이기도 했었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이 TV 뉴스에 나오는 쓰레기 놈으로 출현하게 될지도 모른다니. 그는 그저 침을 삼키며 긴장해야 했었다.

 아무래도 그럴 수가 없었던 그가 살기위해 말했다.

 “……아무래도 아무도 없는 집에선 역시…….” 

 “그러면, 너 그 꼴로 밖에 나가겠다고? 거기다가 우산도 없잖아?” 하고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아, 참고로 우리 집 우산은 안 빌려줄 거니까. 갈 거면 그대로 가야 돼.”

 순진주구하게 웃는 그녀였지만, 그는 그 얼굴에서 미묘하게 일그러지는 표정을 읽고 말았다.

 “……그냥 자고 갈게.” 하고 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겠어."

 그의 대답을 들은 그녀가 상쾌한 듯이 웃고는 집 안으로 들어가 전구들을 켰다.

 “아, 맞아. 아무래도 젖은 상태그대로 집 안에 두기는 조금 그러니까 일단 가방은 베란다에 놔두자.” 하고 환해진 거실에서 그녀가 말했다.

 “으응........”

 그가 삐걱거리는 로봇처럼 딱딱하게 굳은 움직임으로 가방을 집 베란다에 놔두었다.

 “아참, 핸드폰도 잘 작동하는지 확인해봐. 이따가 너희 집에 연락해야지.” 하고 그녀가 말했다.

 “어, 알겠어.” 하고 그는 군말 없이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전원을 켜보았다. 그리고 스마트폰의 화면이 문제없이 나오는 걸 확인해보고는 다시 바지주머니에 스마트폰을 집어넣었다.

 그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생각하더니, “잠시만.” 이라고 말하면서, 그를 거실에 내버려둔 채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옷을 한 아름 든 채 방 밖으로 후다닥 빠져 나왔다. 

 "어?"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그녀의 교복 와이셔츠가 빗물에 젖어서 그녀의 몸과 밀착한 채 속을 훤히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게다가 그 둘의 교복은 깨끗한 흰색 바탕으로 되어 있어서 그 경우가 더 심했었다. 경황이 없었던 데다가, 그녀의 브래지어 자체가 교복의 와이셔츠와 같은 흰색이라서 착각했었던 것뿐이었다.

 얼굴이 새빨개진 그는 이리저리 시선을 굴리면서 최대한 흰색의 뽈록한 원을 보지 않기 위해 아까보다 더욱 힘을 쏟았지만, 그녀는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는지 한 아름 들고 온 옷들을 그에게 억지로 쥐어준 채 당당하게 말했다.

 “일단은 아빠 옷이니까, 이거라도 입고 있어.”

 “…….”

 그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멍청이처럼 당황하기만 했었다.

 그녀가 그런 그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다시 말했다. “그리고, 집주인으로서 내가 먼저 씻을게. 괜찮지?”

 “……아, 그게…….”

 우물쭈물 대답을 못하는 그와, 이상하다는 듯한 그녀의 시선이 교차한다.

 “뭐, 됐어.” 하고 그녀가 질린 듯이 말했다.

 “아, 맞아.”하고 그녀가 멍청이처럼 굳은 그를 내버려둔 채 갑자기 욕실로 갔다. 그리고 수건 하나를 꺼내 돌아오며 그의 머리에 씌워줬다, “일단, 말리고는 있어.”라고 말했다.

 "응."하고 그가 멍하니 대답했다.

 "그럼, 난 씻으로 간다~." 하고 그녀는 다시 유유히 그 자리를 떠나갔다.

 그는 혼자서 갖은 상황을 상상하며 몸을 말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갑자기 싸한 공기가 그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그녀의 얼핏 보이는 브래지어의 엄청난 존재감 덕분에 무섭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있었다. 오히려 부끄러워서 더욱 쪼그라들고 말았다.

 “……있어?”

 정자로 앉아 자기 다리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그에게 욕실에서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어, 왜.”하고 생각을 정리하던 그가 대답했다.

 "그게 아니……." 하고 그녀의 목소리가 울리면서 거실의 그에게 달려든다. "……너는……."

 그리고 그녀가 잠시 망실였지만, 그 뒤로 멀쩡해진 그녀가 그에게 재미난 가족얘기나, 얼마 전에 꿨었다던 꿈 얘기처럼 아주 사소한 얘기를 나누면서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그 대화는 그녀가 욕실에서 나오고, 그가 들어가서 다 씻을 때까지 이어졌다.

 “있잖아.”하고 그녀의 목소리가 욕실 문 근처에서 들려왔다.

 “왜?”하고,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던 그가 목소리의 근원지를 알아채고 긴장하면서 말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하고 그녀가 말하면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몇 초가 지나자 욕실 문 근처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그것보다도.……”라며 사소한 일상 얘기로 이어졌다.

 그는 목욕을 끝마치고 나서는 그녀의 노예처럼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했다. 다 젖어버린 가방을 말린다던가, 교복을 빨래한다던가, 그 자리에 안 계신 그녀의 부모님들을 둘이서 열심히 연기해보며 그의 집에 연락을 줘야했던가, 그녀의 집 안방으로 들어가서 둘이서 이불을 꺼내들고, 거실에 이부자리를 펴던가.

 그때, 그가 왜 이부자리를 두 개나 까는 거냐고 물어보자, 그녀가 “같이 자려는 게 당연하잖아.”라고 답하면서 그는 그대로 돌처럼 굳어버리기도 했었다.

 이부자리를 다 깔고, 그녀가 이부자리 한 곳으로 얼른 들어갔다.

 “너도 피곤할 텐데 일찍 자.” 하고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그녀가 멀뚱히 서있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응.”하고 침을 꿀꺽 삼킨 그가 방의 불을 끄고 남은 자리로 얼른 들어갔다.

 그가 불을 끄자, 그녀가 깜짝 놀란 듯 이불을 꽉 움켜 쥐었지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뒀던 그는 발견하지 못했다.

 잠잠하게 내리깔린 칠흑같이 어두웠던 밤. 구름이 걷힌 하늘에서 달빛이 내려와 거실을 비춘다. 거세게 내리던 비는 어느 사이 그치고, 잔재처럼 남은 바람만이 창문을 거세게 노크한다.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창문 바깥에서 폭풍의 끝을 알리는 축제처럼 시끄러웠지만, 그와 반대로 집 안은 그녀와 그녀를 등진 채 누워있는 그의 숨소리만으로 조용했다.

 그러나 그의 속내는 겉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엄청나게 요란스러웠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이럴 때는 남자가 다가가야 하는 건가?' 라는 변태 같은 망상과 망설임으로 우물쭈물한 채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그는 이불 속에서 아등바등 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달빛을 내리쬐는 그녀는 그런 그와 다르게 조용하고, 맑았다. 달빛이 거실을 밝히고, 눈송이 같은 먼지가 그 달빛의 조명을 받으며 춤추고 놀고 있지만, 그녀는 그런 것은 일절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돌아서 누운 그의 뒷모습을 애절하게 바라봤다.

 그녀가 분위기에 심취한 듯 입을 오물거린다.



 “……고마워.”



 그리고 분위기에 녹아들어가듯 그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

 한 마디. 단순한 한 마디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는 걸, 그는 뼈저리게 느낄 수가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자신은 변태, 쓰레기, 음란마귀의 생각을 품고 있을 때, 그녀는 자신에게 어떻게 해야 감사한 마음을 전할 수 있는지 계속 고민했었다는 사실은 그를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낯부끄럽게 만들었었다.

 더더욱 그에게 부끄러웠던 사실은, 그때 “응.”이라는 간단한 대답조차 못해줬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부끄럽다는 이유 하나로, 자는 척 연기하였고, 최악의 방법으로 끝내버렸다.

 덕분에 그날, 그는 계속 부끄러움과 후회로 잠을 이루지 못했고, 그대로 하루를 지새워야했다. 지당한 벌을 받은 것처럼, 그 다음 날에 그는 감기에 걸려서 열로 앓아누워야했고, 다음부터는 멋대로 생각하지 말자는 굳은 다짐을 하였다.

 하지만, 결국 1년도 지나지 않은 현재. 그는 그날과 같은 실수를 범해버렸다. 그리고, 그 당시의 자신의 부끄러움과 지금의 부끄러움이 해일처럼 한꺼번에 몰려오고 말았다. 

 조용히 돌아가는 선풍기의 날개소리와, 한 남자의 허공을 가르는 부끄러운 발길질소리, 냉장고의 뜨거운 모터소리가 울려 퍼지고, 옛일을 추억하며 자는 척 연기를 하고 있던 한 여자가 조용히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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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흠, 열심히 썼습니다. 네, 굉장히요. 아, 그리고 두 편 정도 더 쓰고 나면 이야기가 끝날 것 같네요. 어째서인지 읽는데 저는 재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네요.........

 암튼, 과거 편은 두 번 썼네요. 남자의 1인칭 시점으로 과거를 회상하듯이 써봤지만 조금 이상해서,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다가가서 다시 써봤네요. 시점 변경이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지만, 전 그럭저럭 만족합니다. 마지막 문장을 위해서 감행한 수단이었거든요!

 아, 망할. 여자랑 저런 시츄에이션을 겪어보지 못해서 개연성이나 핍진성이 부족해 보여요. 언제나 모니터 속 그녀와 이런 상황을 상정하지만........으아, 뭐, 그런 것보다 이런 이야기를 풀어내는 저의 부족한 필력이 가장 큰 문제기도 했죠.

 그런데 돌풍에 우산을 타고 날라가는 건 가능한 얘기에요. 예전에 돌풍에 우산을 타고 뒤로 날라가 본 적이 있거든요. 그 덕분에 (주차되어 있던)차에 치였었죠! 예, 역시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죠. 그 날아가는 걸 붙잡는 건 모르겠지만요.

 퇴고 작업을 가져 보았지만, 묘사를 지워버리는 일은 언제나 괴롭네요. 거기다가! 대화! 인물 간의 대화에 너무 지시문을 끼얹는 것 같아서 읽는 분들이 몰입하는 데 방해가 되어 버리는 것 같아서 걱정이네요. ㅠㅠ 아, 어차피 이번편은 대화가 별로 없었죠?

 그런데 이번 글 쓰면서 옛날에 꿈 속에서 카스미가오카 우타하랑 같이 소설을 썻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말았네요. 젠장, 행복해. 그 덕분에 실실 웃으면서 글 쓰니까, 가족들이 미쳤냐고 욕했어요. 아, 너무하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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