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방황과 낭만이 함께하는 쌍둥이 자매의 달콤살벌 성장기

게임뉴스 | 정재훈 기자 | 댓글: 4개 |



한 남자가 있습니다. 각진 오각형 얼굴에 짧은 머리. 키 191cm, 몸무게 111kg의 거구입니다. 이름은 'B.J 블라즈코윅즈'. 모든 게임 세계관을 통틀어 가장 많은 나치를 죽인 남자입니다. 블라즈코윅즈의 행적을 보면 진짜 인간도살자가 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크레토스가, 악마들에게 둠가이가 있다면 나치에겐 이 남자가 있습니다. 무고한 이들에게는 한없이 따뜻한 미국 남자지만, 상대가 나치라면 일단 목부터 돌리고 대화를 시도하는 그런 남자입니다.

1980년이 되자 그런 그도 늙었습니다. 흰머리가 덥수룩한 노인이 되었죠. 몸뚱이를 슈퍼 솔져의 몸으로 갈아 끼웠으니 아직도 나치 서른 명은 식후 운동 정도로 찜쪄먹을 양반이지만, 슈퍼솔져의 육체는 정신까지 강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하나 봅니다. 그렇게 나이 일흔의 갱년기 남성 블라즈코윅즈는 아내와 두 딸에게 일언반구 말도 없이 훌쩍 자취를 감췄습니다.



▲ 세상 쿨가이

FBI 국장이 헬기를 타고 날아와 못 찾았다고 말하자 아내이자 남편 못지않은 나치 킬러인 '아냐'는 화가 납니다. 하지만 남편이 마음먹고 잠적하면 찾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그저 참을 수밖에 없죠. 그런데 못 참는 이들도 있습니다. 대학 갈 나이가 머지않았음에도 아직 중2병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블라즈코윅즈의 두 쌍둥이 딸. '제스'와 '소프'입니다.

아버지가 갱년기 우울증(으로 추정) 때문에 가출했다는 첩보를 입수한 두 딸은 유일한 친구인 애비(사람 이름입니다. 비속어 아닙니다)와 함께 FBI 국장의 헬기를 훔쳐 아버지가 있으리라 짐작하는 파리로 향합니다. 어디 가냐는 무전에 쿨하게 '햄버거 사러 가요'라고 말하고 말이죠. 그렇게 지상 제일 나치 학살기계를 아버지로 두고, 지상 제이 나치 학살기계를 어머니로 둔 두 딸이 나치 치하의 파리에 도착했습니다.

스스로 '나치를 죽이기 위해 태어났다'라고 말하면서 잡병 하나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온갖 추태를 부리고, 어쩌다 첫 적을 처치하고 나니 바닥에 토까지 하면서 오만 진상을 다 부리는 쌍둥이. 대학도 안 갔을 나이에 '입안에 뇌가 들어갔어 물 좀 줘'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비범한 자매의 이야기. 햄버거 사러 간다더니 사람으로 햄버거 패티를 만드는 못 말리는 나치 킬러들의 달콤살벌 성장기. 오늘 리뷰할 게임 바로 '울펜슈타인: 영블러드(이하 영블러드)'입니다.





얘야 강해지고 싶니? '레벨'을 올리렴

그렇게 전설의 나치 사냥꾼이자 '테러 빌리'인 아버지의 발자취를 좇아가는 '테러 트윈스'의 모험이 시작되었습니다. 무대는 1980년, 나치 점령하의 파리. 예나 지금이나 파리는 테러로 고통받습니다. 다행히도, 쌍둥이 자매는 아버지보다 이 일이 더 성격에 잘 맞나 봅니다. 아버지 블라즈코윅즈는 나치 사냥을 일생의 업으로 삼은 생계형 나치 킬러였지만, 살아온 인생이 개판인 만큼 외적으로는 꽤 우울한 사내였죠. 하지만 쌍둥이들은 아버지보다 훨씬 쾌활하고, 밝은 모습으로 나치를 사냥합니다. 말이 좀 이상하지만 해보시면 진짜 그렇습니다.



▲ 이 문제적 자매가 본작의 주인공

이런 성향이 반영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만큼 게임 디자인도 달라졌습니다. 전작의 주인공이었던 '블라즈코윅즈'는 묵묵히 할 일을 하는 사내였죠. 항상 임무를 향해 직선으로 내달렸고, 늘 명확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플레이어 또한 직선으로 나아갔습니다. 최신작인 '뉴 콜로서스'에 이르러 '서브 미션'으로 수평적 확장을 꾀했지만, 이 서브 미션들도 메인 미션에 붙어있는 나뭇가지 정도의 콘텐츠였습니다.

'영블러드'는 완전한 비선형 구조로 만들어졌습니다. 영블러드의 게임 패턴을 짧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본부에서 임무 수주 -> 지역 이동 및 임무 수행(무작위 발생 액션 수행) -> 복귀 -> 본부에서 임무 수주" 이 과정에서 레벨을 올리고, 더 높은 레벨의 임무를 받고, 최종 목표까지 나아가는 형태죠. 플레이 도중 느끼는 감각은 기존의 울펜슈타인보다는 베데스다가 유통하는 다른 게임인 '디스아너드'나 온라인 게임인 '데스티니' 시리즈에 가깝습니다. 디스아너드 개발사인 '아케인 스튜디오'가 합작 개발을 한 작품이니 이해되는 부분이긴 하네요.

이 게임 디자인 자체는 딱히 문제 될 바가 없습니다. 중앙 허브가 있고, 여러 필드로 구성되는 이런 게임 구성은 전부터 액션 RPG에서 FPS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쓰인 방법이고, 비교적 최신작이라 볼 수 있는 '갓오브워'에서도 쓰인 방법이니까요. 문제는 이 디자인에 '울펜슈타인'이라는 게임을 끼워 넣으려면 알맞게 주물러 가공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런 과정 없이 우격다짐으로 끼워 넣은 모습이 꽤 많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틀과 맞지 않는 부분은 잘려나가고, 휑하니 비어있는 부분들도 생겨버렸죠.



▲ 아빠 찾으러 와서 하는 일이 일당 잡부

이런 부정교합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파워 밸런싱입니다. 영블러드는 RPG 요소가 굉장히 강화된 FPS이며, 레벨에 따라 스킬이 해금되고, 장비 업그레이드를 통해 점점 강해집니다. 하지만 절대적 '강함'의 척도를 무기의 성능이나 캐릭터 스펙이 아닌 '레벨'에 두었죠. 하나의 적을 처리한다고 쳤을 때, 무기 강화나 스킬 해금은 극적인 변화를 만들지 못합니다. 하지만 일단 레벨이 높으면 순식간에 적을 찜쪄먹죠. 반대로 말하면, 비슷하거나 낮은 레벨의 적은 손쉽게 상대할 수 있지만 레벨이 월등히 높은 적은 뭘 해도 못 이깁니다.

이는 울펜슈타인 특유의 '사람이고 기계고 다 부수면서 전진하는 감각'을 굉장히 크게 방해합니다. 아무리 본인이 아닌 쌍둥이 딸이라지만 하반신 불수도 전쟁병기로 만드는 '다트 이슈드'의 강화복을 입은 주인공들인데, 눈앞의 나치 잡병이 레벨이 높으면 뒤도 안 보고 도망가야 목숨을 건질 수 있죠. 괜히 스텔스 플레이 해보겠다고 까불다가 들키는 날엔 1초 안에 드러눕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 레벨에 따라 행동 범위가 달라집니다.

차라리 '레벨 스케일링'을 도입했다면 플레이가 훨씬 수월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가뜩이나 적들의 TTK(Time To Kill)가 굉장히 길어져 슈퍼솔져 서너 명이 나오면 탄창이 바닥나도록 총을 쏴야 하는 상황에, 압도적으로 레벨이 높은 적까지 나오니 게임 내내 시원함보다는 답답함이 느껴지거든요. 이는 머신게임즈의 고육지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블러드는 기본적으로 큰 볼륨의 게임이 아니고, 플레이 과정에서 허들을 만들지 않으면 몇 시간 만에 충분히 엔딩을 볼 수 있는 게임이거든요. 억지로 허들을 만들어 게이머가 레벨업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고, 나아가 게임의 모든 것을 플레이하게끔 강제해둔 것이죠.



이것은 울펜슈타인인가 디스아너드인가.

영블러드의 또 한가지 특징은 '수직적 필드 구성'입니다. 기존의 울펜슈타인 시리즈의 필드는 레일 슈터치고는 꽤 입체적인 구조였습니다만, 레일 슈터의 장르적 한계를 벗어나진 못했습니다. 비밀 통로나, 숨겨진 보너스 등을 위한 구성 요소였을 뿐이죠. 하지만 영블러드는 필드 구성 자체를 꽤 복잡하면서도 입체적으로 구성해 두었습니다. 처음엔 한정된 공간을 써먹기 위한 꼼수인가 싶었지만 뜻밖에 꽤 잘 만들어서 놀라울 정도였죠.



▲ 곳곳에 숨겨진 공간도 많습니다.

필드 디자인의 수준은 합작 개발사인 '아케인 스튜디오'의 대표작 '디스아너드'와 딱 비슷한 수준입니다. 건물 내부를 2~3층, 많게는 5층 정도까지 구현해 외부와 직통 연결이 가능하고, 건물 내부에 수많은 방과 비밀 통로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한참 돌아가야 하는 필드 간 지름길이 될 수도 있고, 숨겨둔 비밀 상자가 있을 수도 있지요.

덕분에 영블러드는 '넓지는 않지만 꽤 볼륨 있는 필드'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하나의 필드는 몇 개의 존으로 구분되어 있어 존에서 벗어나면 적들이 다시 리스폰되기도 하지요. 이 때문에 게이머는 하나의 필드를 몇 번이고 플레이하게 됩니다. 미니맵에 뻔히 보이는 장소가 있음에도 중반 이후에나 열 수 있는 문들이 산재해있고, 울펜슈타인 주제에 팔자에도 없는 일일 퀘스트나 주간 퀘스트를 깨기 위해서라도 가야 하거든요.



▲ 아니 이게 무슨 소리요

이 덕분에 '영블러드'는 또 한 번 시간을 벌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레벨업 허들이 그렇듯, 이 필드 구성 테마도 만만찮게 플레이 타임을 늘리거든요. 엔딩을 향한 일직선 달리기보다 뭐 하나 빼놓은 거 없나 하고 하나하나 다 살피고 가야만 직성이 풀리는 저와 같은 게이머들에겐 이런 구조가 아주 쥐약입니다. 뭔가 있어 보이는 곳은 전부 다 가야 속이 후련한데 영블러드의 필드는 이 '있어 보이는 장소' 투성이죠.

다만, 굳이 이렇게까지 만들어야 했을까?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영블러드는 볼륨이 그리 큰 게임이 아니고, 이에 걸맞게 가격도 절반입니다. 게임 하나가 기본 6만 원은 하는 상황에 3만 원 대의 가격대로 출시되었죠. 다이렉트게임즈를 통하면 2만 원 초반대에 구매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그냥 DLC 하나 정도 가격입니다. 말인즉, 게이머도 딱히 이 게임의 볼륨에 크게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거죠. 크면 좋지만, 적으면 적은 대로 즐기는 게임인거죠.



▲ 사는 이들도 별 기대 안하는 가격이긴 합니다.

하지만 영블러드는 레벨 디자인과 각종 허들을 도입해 꼼수에 가까울 정도로 플레이 타임을 늘렸고, 그 와중에 몇몇 무기와 강화복 스킨에는 '금괴' 시스템을 도입해 비즈니스 모델까지 챙겨놨습니다. 돈을 추가로 쓰지 않고 이것들을 전부 모으는 길은 꾸준한 일일, 주간 퀘스트밖에 없죠. 마치 '더 오래 할 수 있다고!'라고 온몸으로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과하게 복잡한 레벨 구성에 필요한 개발력을 돌려 시스템을 더 점검했다거나, 일반 필드를 두어 개 정도 늘렸다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고인물들은 반나절 만에 이 게임을 끝장내버렸거든요.



'영블러드' 라는 이름의 사춘기

여차여차 리뷰를 이어오다 보니 부정적인 부분들만 두드러지게 쓴 것 같습니다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전체적으로 '영블러드'는 울펜슈타인 시리즈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과정에서 탄생한 과도기적 결과물에 가까우니까요. '퍽(Perk)' 구성을 보면 감이 잡힙니다. 전작까지 울펜슈타인의 퍽 구성은 전체적으로 블라즈코윅즈의 살상 능력을 강화하는 과정이었습니다. 탄약 휴대량이 늘어나거나, 장전이 빨라지는 개념이었죠.

하지만 영블러드의 퍽은 기존보다 훨씬 '스킬'에 가까워졌습니다. 강화복을 사용한 광학 은폐나 가벼운 벽은 박살 내고 돌진하는 몸통 박치기, 그리고 후반부에 해금되는 공격 반사 스킬인 '신의 열쇠' 등이 대표적이죠. 체력을 채워주는 따봉(진짜 이렇게밖에 설명이 안됩니다...)이나 기본 기능이 된 이중 점프까지 생각하면, 정해진 길을 무력으로 죄다 부수면서 전진하던 이전 작품들과 달리 RPG 요소를 강화하고 다양한 방법의 게임 플레이를 유도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합작 개발사 아케인 스튜디오의 디스아너드가 또 한 번 생각나는 부분이죠.



▲ 뭔가 RPG같은 부분

긍정적인 부분이라면 과도기적 불안정성을 보여줌에도 울펜슈타인 특유의 박진감 넘치는 건플레이는 제대로 살려냈다는 점입니다. 다른 슈팅 게임처럼 정조준으로 적을 맞추는 것보다는 '적이 있는 공간에 탄약을 때려박는다'라는 느낌의 게임 감각은 물론이고, 피격 시 온몸이 터져나가는 적들의 모습도 그대로 살려냈습니다. 여러모로 실험적인 시도가 많이 이뤄진 작품이지만, 게임의 원초적 핵심인 슈팅 감각은 그대로라는 거죠.



▲ 적이 잘 안죽는 것 빼면 슈팅 감각은 그대로

시스템 외적 측면도 하프 프라이스 게임치고는 꽤 높은 완성도를 자랑합니다. 영블러드의 두 주인공은 마치 영블러드라는 게임처럼 과도기적 단계에 있는 인물들입니다. 정확히는 인생의 과도기인 사춘기에서 벗어나지 못했죠. 그래서인지 두 사람의 대화와 행동 양식을 보면 혼돈이 따로 없습니다.

전투 경험이 아예 없는 상태임에도 자신감만 살아있는 치기 어린 모습부터 자기 자신을 부풀리고자 하는 그 나잇대 청소년의 자연스러운 모습. 그리고 뜬금없는 사명감까지, 나이가 지긋한 주인공이 이랬다면 캐릭터 붕괴가 따로 없겠지만 여기서는 위화감이 없습니다. 일제강점기 서울의 느낌이 나는 파리의 모습과 2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더욱 개선된 나치의 전쟁장비들도 시리즈 팬들에겐 꽤 어필하는 부분입니다. 다트 이슈드 강화복을 양산해 입고 나오는 적들을 볼 땐 기가 찰 정도였죠.



▲ 지난날을 반성하게 됩니다. 나도 저렇게 바보같았을까...

정리하자면, '울펜슈타인: 영블러드'는 울펜슈타인 IP의 장르 변환 과정에서 실험적으로 튀어나온 결과물 중 하나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게임 시스템 외적 부분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음에도 기존의 울펜슈타인 IP에 부끄럽지 않은 퀄리티를 보여주지만, 게임의 줄기인 시스템과 디자인 부분에서는 여러모로 완성되지 않은 듯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요. 플래그쉽 타이틀이라기보다는 다음 작품의 디자인 방향을 정하기 위한 유료 피드백에 가까운 느낌입니다.

아마 그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의의가 아닐까 싶습니다. 울펜슈타인 시리즈는 2009년을 기점으로 오컬트 요소가 사라졌고, 2014년에 '뉴 오더'가 발매되면서 새로운 3부작이 시작되었죠. 외전 격인 '올드 블러드'와 '영블러드'가 등장했지만, 정식 시리즈는 '뉴 오더'와 '뉴 콜로서스' 둘 뿐입니다. 마지막 하나의 작품이 남아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작품은, 영블러드라는 사춘기를 겪은 후 더욱 성숙한 상태로 나오게 되겠죠. 다음에 만나게 될 블라즈코윅즈는, 아마 '뉴 콜로서스'때보다 훨씬 다양한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 그의 다음 이야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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