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본격 '엑박패드' 찬양하는 글

기획기사 | 정재훈 기자 | 댓글: 36개 |



어릴 적, 간혹 교과서를 챙기지 않고 학교에 가곤 했다. 부단히 옆 반을 돌며 그나마 아는 친구들에게 교과서를 빌려 수업에 들어갔지만, 가끔은 그 친구들마저 교과서를 챙기지 않았거나 외부 수업으로 반에 없는 경우가 있었다. 핸드폰도 잘 못 쓰던 시절. 어쩔 수 없이 옆 짝과 함께 교과서를 나눠 볼 때면 선생님은 살짝 찡그린 얼굴로 날 보며 이렇게 말했다.

"군인이 전쟁터에 총도 없이 오나?"

그렇다. 언제나 적재적소에 맞는 도구가 필요하다. 단순히 도구가 있다고 끝이 아니다. 때와 장소, 상황에 맞아야 된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 나서는데 칼과 방패를 가지고 갈 수는 없다. 수학 수업 시간에 영어 교과서를 든다고 무슨 소용이 있을까. 게임도 똑같다. 키보드와 마우스라는 무적의 입력 장치가 등장하면서 대동단결이 되는 느낌이었지만, 게임 시장이 변하면서 게이머들은 이에 맞춘 새로운 입력 장치를 찾았다. 먼 옛날, 컴퓨터 게임이 드물던 시절엔 누구나 사용했지만, 어느새 극소수만 사용하던 입력 장치. 바로 컨트롤러, 즉 '패드'다.

그리고, 이 '패드' 하면 꼭 언급되는게 패드계의 유일무이 황족, 'XBOX360 패드(A.K.A 엑박패드)' 되시겠다. 전설의 IT기업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한 것 부터 대단하며, 이 대단한 기업이 만든 하드웨어들이 온통 죽을 쑤는 와중에도 고고한 별처럼 혼자 이름을 드높였다. 게임 콘솔은 '지존박스'로 놀림받는 와중 패드 주제에 말 그대로 '지존'이었으며, 오죽하면 콘솔은 경쟁사인 소니의 PS4를 쓰면서, 컨버터로 이 패드를 물려 사용하는 이들도 있었다.(내가 그랬다)

오늘 하고자 하는 말이 그거다. 왜 엑박패드는 패드계의 지존인가? 어떻게 그렇게 되었고, 그럴 만한 이유는 무엇이며, 다른 패드는 대체 뭘 하고 있었길래 이 패드를 넘어서지 못한 걸까? 다시 말하지만, 이 기사는 엑박패드 리뷰가 아니다. 십수년 간 게이머들의 손바닥을 풍족하게 채워준 패드계의 지존을 향한 예찬이다.


패드 보급의 시대에 우뚝 서다



▲ PS2를 사용하던 나도, 다음 세대는 XBOX360으로 넘어갔었다.


'게임패드'가 게이머들 사이에 퍼진 시기는 2000년대 중반이다. 지금은 땡처리로도 안 팔리는 7세대 콘솔, PS3와 XBOX360이 한창 게이머들의 눈을 현혹하던 때였다. 그리고 지금의 콘솔 시장만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참 놀랍게도, XBOX360은 PS3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최종적으로는 Wii와 PS3에 밀리긴 했지만, 초기 경쟁에서는 PS3를 앞섰고, 국내에서도 꽤 많은 판매고를 올렸다. 오죽하면, 2009년엔 국내 판매 3주년을 기념한 팬 페스티벌이 열릴 정도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게이머들은 '패드의 참맛'을 알아버렸다. 7세대 이전 콘솔에서, 게임 패드는 사실상 콘솔 사용자들만을 위한, 콘솔 조작기구에 불과했다. 당연히 콘솔을 사지 않은 게이머들은 손에 잡을 기회도, 쓸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XBOX360이 출시되면서 참 많은게 변해 버렸다.



▲ 무려 12년 전 기사에서 긁어온 이미지... 지존박스 전설의 시작


일단, 콘솔 게이머 자체가 큰 폭으로 늘었다. PS2로 갈음되는 6세대 초기의 국내 콘솔 시장이 부잣집 아이들이나 유별난 취미를 가진 이들이 주를 이루는 시장에 가까웠다면, 7세대부터는 일반적인 게이머들도 콘솔에 눈을 돌렸다. 기술 발전이 급속도로 이루어지던 시절, 고사양 PC보다 게임 콘솔의 가격이 더 합리적이라 본 이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6세대 시장의 막바지에 유행한 '플스방'의 영향도 있었다. 재미도 봤겠다, 신규 모델도 나오겠다. 사기 딱 좋은 때 아닌가.

그리고 이렇게 구매한 XBOX360의 기본 패드가 Games for Windows 지원 PC 게임에 완벽하게 호환된다는게 알려지면서 이제는 고사양 PC를 지닌 코어 게이머들까지 패드 장만을 고려하게 되었다. 굳이 콘솔을 사지 않아도, 패드만 사면 독점작을 제외하곤 콘솔과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 'PC 호환'은 엑박패드에게 너무나도 강력한 무기였다. PS2, 혹은 PS3의 패드인 '듀얼쇼크' 도 PC에서 억지로 쓰려면 쓸 수 있긴 했다. 하지만, 별도의 소프트웨어와 복잡한 설정 과정이 필요했다.



▲ 당시 이 마크를 찍은 꽤 많은 게임이 PC에서 엑박패드를 100% 지원했다

반면, 엑박패드는 그냥 꽂으면 됐다. 구버전의 윈도우에서는 불안정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냥 됐다. 게다가, 2010년즈음부터는 흔히 'AAA급 게임'으로 분류되는 고품질 액션 어드벤쳐 게임들이 수두룩하게 쏟아졌다. 극강의 호환성으로 이미 알음알음 퍼져있던 엑박패드가 사실상 '패드의 기준'이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게이머들이 인정한 '명기(名機)'

물론, 대중화만으로 최고가 될 수는 없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굴러다니는 자동차 브랜드가 최고로 불리지는 않듯, 무릇 최고의 위치에는 그에 해당하는 성능이 필요한 셈이다. 하지만, 엑박패드는 달랐다. 많이 퍼진 것만 해도 굉장히 유리한 고지를 점한 셈인데, 그에 못지 않은 성능까지 갖췄다. 어디 하나씩 읊어보자.

먼저, 굉장히 편하다. 엑박패드는 기본적으로 묵직한 유선형이며, 왼쪽 아날로그 스틱이 자연스럽게 왼손 엄지의 끝에 해당하는 메인 존에 오도록 배치되어 있다. 사실상의 경쟁작인 '듀얼쇼크' 시리즈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는데, 이는 분명한 장점이었다. 2D 게임이 대세이던 시절 주류 이동 입력 장치던 '십자키'의 중요성이 이전만 못할 거라 판단하고 과감히 위치를 바꿔 버린 것이다.



▲ 굉장히 잘 만든 패드지만, 여전히 이전의 인터페이스를 고수하는 '듀얼센스'

소니의 경우 최신 모델인 '듀얼센스'에서도 변함없는 디자인을 선보였지만, 대세상으로는 엑박패드가 앞섰다 볼 수 있다. 이는 이미 수없이 쏟아져 나온 대부분의 게임 패드가 엑박패드의 인풋 디자인을 참고해 만들어진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별개로 엑박패드의 아날로그 스틱과 중지 버튼에 해당하는 '트리거'는 감도 조절 기능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입력 정도에 따라 다른 조작이 가능하다.

그뿐이랴, 명기의 기준에 부합되듯 내구도도 무식하게 강하다. 정상 사용만으로 고장에 이르는 경우는 좀처럼 없고, 떨어트리거나 강한 충격을 받아도 웬만한 경우는 멀쩡하다. 대부분의 고집적 기계장치가 충격에 취약하다는걸 생각하면, 굉장한 이점이 아닐 수 없다. 게임 중 집에 강도가 들 경우 패드로 응전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후기 모델에서 오히려 약해진 내구도가 아쉬울 지경이다.



▲ 엑박패드로 포토닉마스트를 조작하는 미 해군(출처: 록히드마틴)

이 내구도와 안정성은 말뿐만 아니라 이미 공공연히 검증된 사안이다. 미 해군 잠수함의 잠망경 조작에 쓰이고, 미 육군의 정찰 드론 훈련에도 엑박패드가 쓰인다. 군사 분야 기기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치는 부분이 내구도와 안정성이란 걸 생각하면, 별다른 검증 과정 없이도 이것만으로 이미 충분히 증명되었다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2018년 9월 기준으로 스팀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패드 또한 이 구형 엑박패드라는 점이다. 이미 앞에서 성능과 내구도, 대중성을 다 말했는데 뭐가 놀라운가 싶겠지만, 이 구형 엑박패드는 2018년에 단종되었다. 이미 신형 모델이 넘쳐나고, 생산이 끊긴 상황에서도 가장 널리 쓰이고 있던 것이다. 굳이 더 말할게 있을까? 이 정도면 누구나 엑박패드가 패드계의 지존킹이라는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인정? 어 인정.



▲ 2018년 9월 기준 스팀 패드 사용률, 거의 반수가 구형 엑박패드를 사용중이었다.




'패드 명가'의 위치를 지키는 후속 기종

앞서 말한 내용들이 구형 엑박패드, 즉 XBOX360 패드에 해당하는 내용이라면, 그 이후의 모델에 대해서도 말을 안할 수 없다. 이미 '엑박패드'라는 카테고리로 묶이는 모델들은 게이머들 사이에서 인정받는 명품들이며, 마이크로소프트 또한 재미가 들렸는지 게임 패드를 단순히 주변기기로 분류하지 않고 주력 사업 분야로 밀고 있기 때문이다.

8세대 콘솔인 'XBOX One'에 이르러 엑박패드는 한 번의 변화를 겪었다. 구버전 패드의 약점인 십자키가 대폭 다듬어졌고, 디자인도 완전한 곡선이 아닌, 직선과 곡선을 섞은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구형 패드 특유의 파지감과 핵심 디자인은 유지되었다. '진동의 끝판'으로 여겨지는 '임펄스 트리거' 또한 주목할 만한 부분. '왜앵-'하고 그치는 진동이 아닌, '둥-둥-둥-' 하는 느낌으로 심장의 박동마냥 묵직하게 전해지는 임펄스 트리거의 진동은 느낀 자만 아는 쾌감이다.



▲ 최초의 '하이엔드' 패드였던 엘리트 패드

이즈음, 마이크로소프트는 이미 엑박패드가 일종의 브랜드가 되었다는걸 충분히 알고 있었고, 프리미엄 모델을 내놓기에 이른다. 이른바 '엘리트 패드'다. 후면 패들과 모듈형으로 바꿔 끼울 수 있는 십자키, 조절 가능한 무게추 등 엘리트 패드는 비싼 가격임에도 그에 해당되는 성능을 보여주었고, 게이머들 사이에서 '하이엔드를 원한다면 충분히 가치있는 상품'으로 자리매김했다. 5년째 사용하는 입장에서 설명하자면, 실제로 충분히 그 값어치는 한다.

그리고, 9세대 콘솔의 등장과 함께 'Xbox Series X|S 패드'가 출시되었다. 이미 완성형에 가까웠던 이전 모델을 보다 다듬은 느낌의 이 패드는 전체 크기를 줄여 보다많은 이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으며, 입력 지연시간을 대폭 줄어들었다. 트리거 버튼에 미끄럼 방지 돌기가 생기고, 무게중심이 손잡이로 이동해 손목 피로가 덜해진 것 또한 좋은 변경점이다.



▲ 최신 기종은 크기가 더 작아졌다. '듀얼센스'와의 비교'

어찌 생각하면, 참 이상한 일이긴 하다. XBOX360 출시 시점에서만 해도, 단순히 주변 기기일 뿐이던 게임 패드가 이렇게 흥행할지 누가 알았을까. 심지어 주 기기인 게임 콘솔이 경쟁에서 밀리던 시절에도, 게임 패드는 늘 마이크로소프트의 효자 종목이었다. 뭐만 했다 하면 래핑을 한 커스텀 패드를 출시하고, 프리미엄 등급의 패드를 출시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어쨌거나, 게이머들이 손해볼 건 없다. 게임이야 재밌으면 그만이고, 게임을 재밌게 만들어줄 패드는 편하고 튼튼한게 제일인데, 마이크로소프트가 앞서서 보다 편하고 튼튼한 패드를 만들어대니 말이다. 그리고, 나도 손해볼 건 없다. 보통 이렇게 무언가를 예찬하는 기사는 높은 위험 부담 때문에 망설여지기 마련이지만, 엑박패드는 솔직히 깔 수가 없으니 말이다.



▲ 베데스다 인수기념 패드들... 콘솔은 뒷전이면서 패드는 꾸준히 내놓는 장인정신


댓글

새로고침
새로고침

기사 목록

1 2 3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