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밸브가 어두운 VR 시장에 피워 올린 작은 '불씨'

칼럼 | 박광석 기자 | 댓글: 14개 |



요즘 VR 업계가 돌아가는 모습이 심상치 않다. '소드 아트 온라인'이나 '레디 플레이어 원' 속에서 그려졌던 풀다이브 기술이라도 발표되지 않는 한 VR이 어떻게 되든 말든 관심을 두는 유저들이 거의 없겠지만, 지금의 VR 업계 분위기는 가히 초상집이라고 불러도 무관할 정도로 매우 어두운 편이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플랫폼 확산이 생각보다 더뎠던 탓이겠다. 유저 수가 늘지 않는 이유야 뭐, VR 기기가 처음 등장했을 때 매번 언급됐던 것들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비싼데다가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VR 헤드셋을 뒤집어쓰는 것까지 감수하면서 폭 빠져 즐길만한 콘텐츠가 없으니, 유저가 늘어나려야 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더욱 가깝게 체감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마 올 한 해 동안 구글이 보여준 행보 때문이 아닐까 싶다. 구글은 올해 3월부터 VR 영상 스튜디오를 폐쇄하기 시작했고, 5월엔 오큘러스의 신형 VR HMD인 '오큘러스 퀘스트'와 경쟁할만한 후속기를 공개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으며, 6월에는 데이드림 플랫폼에서 VR 영상 관련 항목들을 정리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쐐기를 박은 것이 지난 10월에 있었던 '메이드 바이 구글' 행사다. 구글은 이 행사를 통해 '구글 데이드림' 프로젝트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고 선언하며 VR 사업 중단을 공식화했다. 백일몽에 그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공공연한 사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대기업인 구글이 "잠재력을 기대했지만, 명확한 한계점을 발견했다"며 VR 사업을 모두 정리해버리자, VR 업계의 다양한 곳에서 경영진들의 퇴사 소식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이어졌다. 둘 사이에 분명한 인과관계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그저 우연이라고 하기엔 석연치 않은 행보인 것은 분명하다.

최근 한 비영리 시상 이벤트에서 'VR 최고 공로상'을 수상하며 VR 발전에 기여한 노력을 인정받은 오큘러스의 최고 기술 책임자 존 카맥이 돌연 일선에서 물러날 것이라 표명한 것을 시작으로 HTC 바이브포트 CEO인 리카드 스티버, 그리고 매직리프의 수석 부사장과 CFO 등 두 명의 경영진도 연달아 퇴사 소식을 알렸다. 항상 선두에서 VR 업계를 이끌던 중역들이 하나둘 다른 자리를 찾아 떠나는, '대탈출'의 전조로 우려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국내 기업인 삼성도 지난 5년 가까이 꾸준히 전개해온 VR 사업에 대한 미련을 털어내려는 듯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삼성이 가장 최근에 발표한 플래그십 스마트폰 '갤럭시 노트10'부터는 기어 VR을 지원하지 않게 되었고, 심지어 지난 7일에는 오큘러스가 기어 VR 애플리케이션 개발 지원의 대부분을 종료할 것이라 밝히며 사실상 '기어 VR의 종결'을 선고한 바 있다.

제대로 꽃 한번 피워보지 못하고 몰락하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우울한 분위기가 이어지던 찰나, 밸브가 자신들의 신형 하이엔드 VR HMD '밸브 인덱스'와 함께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바로 전세계의 유저가 그토록 기다리고 있던 '하프라이프' 최신작을 VR 게임으로 제작하여 공개한 것이다. 물론 3편은 아니고 1편과 2편 사이의 프리퀄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트레일러와 함께 공개된 밸브의 신작 '하프라이프: 알릭스'는 VR 게임의 다음 세대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독보적인 그래픽과 자유로운 상호작용 연출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밸브 인덱스를 구매하면 게임 본편까지 무료로 제공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벌써 "이젠 정말 VR 헤드셋을 사야 할 때"라며 벅차오르는 기대감을 드러내는 유저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벨브 인덱스의 국내 출시 여부와 정확한 출시일조차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밸브의 행보는 계속해서 어둡기만 했던 VR에 다시금 유저들의 관심과 활기를 불러온 것처럼 보인다.

물론 괜찮은 신작 하나가 출시되더라도 가라앉은 시장의 분위기가 극적으로 역전되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이미 여러 플랫폼으로 확장되며 전세계에 광선검 열풍을 불러온 VR 게임 '비트 세이버'의 사례를 경험한 바 있다. 이처럼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만한 완성도 높은 콘텐츠가 더 많아진다면, 상상 속 여자친구의 존재처럼 그토록 갈망해왔던 'VR의 보편화'도 한 발짝 더 가까워질 수 있다.

구글의 VR 사업 포기 선언과 함께 잇달아 불거진 VR 업계 중역들의 퇴사 소식으로 어둠이 깔린 밤바다에 밸브가 작은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밸브가 쏘아 올린 이 작은 신호탄이 VR 업계 전체에 밝은 빛을 뿌리고, 곧 이어질 새로운 도약을 위한 물꼬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댓글

새로고침
새로고침

기사 목록

1 2 3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