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야. 이게 진짜 소셜이고 게임이야" 스카이가 던지는 메시지

리뷰 | 정필권 기자 | 댓글: 16개 |



'소셜 게임'은 통신의 발전으로 가장 커다란 수혜를 받은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소셜 게임에 있어 PC와 달리 항상 휴대하는 모바일 플랫폼은 최적의 장소였을 테니까. 그리고 모바일을 통해 자신과는 다른, 타자(他者, other)와의 소통은 이전보다 간편해지고, 더 짧은 시간을 요구하게 됐다. 하지만 반대급부로 '소셜'이라는 단어가 가진 '관계'라는 측면은 오히려 약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요근래 소셜 게임들에서 타인은 소통할 수 있는 존재보다는 플레이어를 꾸미기 위한 곁가지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행동력을 주고받거나. 포인트를 획득하거나. 또는 타자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상대가 되거나. 관계에 집중하기보다는 결과물을 얻기 위한 수단의 의미가 강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타자와의 관계는 가벼워지고 의미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의미가 희석되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은 단편적이거나 추억할 수 없는 개념으로 변해갔다. 소통과 관계보다는 욕망과 욕구를 해소하는 일종의 창구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7월 18일 iOS에 출시된 '스카이: 칠드런 오브 더 라이트(Sky: Children of the light)'는 다르다. 자신을 '소셜 게임'으로 규정한 이 게임은, 장기적인 서비스 측면에서 도움이 될 수 있는 경쟁요소를 제거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이를 통해, 타자와의 관계가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는지를 알리고자 했다. 게임 기저에 다분히 철학적인 메시지를 녹여낸 채로 말이다.



'나'보다는 '남'을 바라보기
스카이와 레비나스의 관계론

사람은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변화한다. 타인의 인격과 존엄성을 존중하며, 인간이 인간임을. 그리고 인간이 동물과 다름을 증명한다. 타인과 교류하는 과정은 '나'라는 존재보다는 정체성이 다른 타인을 인정하는 과정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레비나스(Emmanuel Lévinas)는 인간이 타인과의 교류를 거침으로서 윤리와 가치가 생겨난다고 판단했다.

레비나스는 나라는 주체를 중심적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필연적으로 타인에 대한 폭력을 동반한다고 이야기한다. 당시 서양 철학이 '나'를 기준으로 하는 주체 중심주의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레비나스가 이야기한 이타성과 흐름은 휴머니즘과 맞물려있다.

이는 곧, 다른 가치관을 가진 대상에 대한 폭력을 벗어나 타인을 인정하고 이타적인 삶이 중요하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폭력보다는 타인에 대한 존중. 그리고 윤리를 중요하게 판단하며, 두 개념을 통해서 폭력과 전쟁이라는 물리적인 해결책을 넘어설 수 있다는 이야기다.




'타자' 그리고 '윤리'는 레비나스의 사유에서 중심을 이룬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나라는 개인과는 통합될 수 없는 존재, 이방인이자 낯선 신비로 판단했다. 타자는 개인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는 존재다. 그리고 윤리란 이러한 타자가 보이는 행위, 부름에 대한 응답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여기서 말하는 책임과 관계는 내가 아닌 타자로부터 시작되는 개념이다. 타자가 가지는 가치를 인정하고, 나의 것을 타자에게 내어주는. 수용하며 관계하는 행위다.

이러한 타자의 개념은 '스카이'의 관계에서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스카이'에서 플레이어는 이름이 없는 존재다. 그리고 이는 다른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다. 개발사는 스카이를 소셜 게임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자신이 자신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커스터마이징으로 외형을 꾸밀 수 있는 일부뿐이다. 스카이의 근간은 게임을 플레이하는 '나'라는 주체가 아니라, 타자와의 만남과 관계에서 출발한다.

플레이어 서로에게 낯선 신비이며, 게임에 접속하는 플레이어들의 숫자만큼 무한하고 다른 존재들의 집합이 된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은 얼굴. 외형밖에 없다. 플레이어는 저 멀리 있는 산을 목표로 떠나며, 타인과 만나고 교류하면서 개발사가 마련한 퍼즐과 풍경을 감상하는 일련의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 의도를 생각하면, 목적지와 퍼즐은 관계를 위한 계기일 뿐.

스카이에서 플레이어와 플레이어가 관계를 맺는 구조는 다른 소셜 게임과 달리, 철학적 깊이를 보여준다. 단순히 콘텐츠 측면이 아니다. 스카이에서의 소셜은 보다 강렬해진 사색이자, 고민거리를 녹여내고자 한 것처럼 보인다. 소셜 게임으로서 스카이가 던지는 물음은 바로 이 사색에 방점을 둔다.

개발진이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소셜 게임 '스카이'는 레비나스가 이야기한 가치와 맞닿아 있다. 폭력과 배척, 약탈은 스카이에 없다. 그저 나누고 공감하게 한다. 동시에 게임으로서의 완성도를 갖추고 여기에 철학적인 고민거리를 조용히 내민다.

게임의 엔딩에서 플레이어가 만들어 온 교류의 증거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남'에게 나눈 무언가가 최종적으로는 돌아온다는 것을 생각하면, 스카이가 던지는 메시지는 너무나도 명확해 보인다.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나의 것을 내어주는. 이타주의가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목적이다.



▲ 스카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이다.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기
스카이가 그리는 타자와의 관계

스카이는 레비나스가 자신의 저서 '시간과 타자'에서 "타자와의 관계는 우리에 대해 외재적인 것이다. 타자와의 관계는 하나의 신비와의 관계이다. 그것이 바로 그의 외재성이며 혹은 그의 타자성이다."라고 이야기했던 모습 그대로 플레이어와 플레이어의 관계를 그린다.

스카이에서 소셜은 타인과의 직접적인 교류가 된다.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스스로 이름을 붙이지 못한다. 자신을 규정하는 것은 곧, 타인과의 만남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나지만, 내가 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다른 게임과는 차별화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오직 타인을 받아들이고 도움을 주는 것을 통해서 플레이어는 캐릭터의 역할과 정체성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

심지어 타자의 온전한 존재조차 드러나지 않는다. 다른 플레이어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전까지, 이들은 검은 실루엣으로 화면에 표시된다. 그리고 내가 상대가 내민 촛불에 불을 붙였을 때, 비로소 상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스카이는 타자와의 첫 만남을 '신비'로서 기억하게 한다.



▲ 무언가를 나누는 행위부터 관계가 시작된다.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플레이어가 무엇인지를 인지시킨다. 레비나스가 현재를 과거와의 단절이라고 전제했듯, 현재에 '나'라는 존재가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는 과정에서 출발한다. 나의 모습 또한 타자에게 보이지 않으므로, 타자와 접촉하여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만이 남에게 자아를 알릴 수 있는 순간이 된다.

게임 내에서 친구 리스트는 별도의 UI가 아니라 하늘의 별로 표현한다. 별은 먼 과거의 빛이며, 현재에 있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과거의 사람들이 별을 보며 별자리를 만들고, 이야기를 부여하고 이후에 영향을 미쳤듯이 말이다. 이렇듯 플레이어들은 타인에게 이름을 붙이고 기억함으로써 관계하는 과정을 거친다.



▲ 이름을 붙이고, 손을 잡고, 감정을 나누는 과정이 이어진다.

게임과 로비를 분리해 둔 것에서도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짧은 튜토리얼이 끝나고 게임을 시작할 때, 플레이어들은 홈 스페이스, '안식처'를 기점으로 게임을 플레이하게 된다. 안식처는 플레이어 홀로 있을 수 있는 공간이자 과거의 것들을 통해 자신을 오롯이 돌아볼 수 있는 장소다.

타자와의 관계는 포탈, 별과 같은 과거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치환된다. 나라는 존재와는 다른 가치관과 행동을 가진 타자는 현재의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 과거, 이해할 수 없는 존재와의 경험이 개인의 공간이자 현재를 의미하는 '안식처'를 비추고 꾸미는 개념으로 자리한다. 이렇게 모인 과거는 현재 플레이어를 나타내는 정체성으로 작동하도록 설계해뒀다.



▲ 과거의 만남은 곧 별이 되고, 안식처를 구성하는 개념이 된다.


메시지를 게임으로 녹여내기
세련되게. 자연스럽게 그리고 아름답게.

스카이가 내포하고 있는 메시지는 큰 무게감이 있다. 하지만 직설적이지 않다. 이는 곧, 스카이가 '게임'으로서의 완성도를 먼저 내세운다는 의미다. 개발사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게임이라는 틀 안에서 자연스레 생각해볼 수 있는 요소로 자리한다.

스카이는 매우 정적인 게임이다. 잔잔한 음악. 파스텔 풍의 아름다운 그래픽을 보여준다. 그리고 게임 내에서 자극적인 부분을 극도로 억제한다. 클라이맥스는 존재하되, 잔잔함이 밀려오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피와 폭력, 경쟁, 시기 등 부정적인 감정을 제거하고 공감의 감정을 남겼다. 다른 플레이어와의 협력, 교류를 의도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 모르는 사람의 협력이 필요한 곳도 많이 넣어뒀다.

게임 전반적으로 '교류와 협력. 이타주의를 통해 드러나는 자신'이라는 메시지를 담아두고, 이를 '촛불'이라는 자원을 통해서 재화를 축적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스카이에서 타인과 나누는 촛불은 교류를 상징하는 것이자,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아바타와 제스쳐를 구매하는 데 들어가는 자원이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이타주의적인 행동과 교류로 타인과 관계를 쌓아간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촛불을 통해서 나를 구현할 수 있는 실체들. 아바타를 구매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개발사의 의도가 느껴지는 이러한 구조는 곧, 타인을 돕는 것이 개인에게도 이득이 될 수 있음을 자연스레 설명하는 과정이다.



▲ 나누고 공유하면, 스스로에게도 이득이 된다.

게임에서 만나게 되는 퍼즐은 홀로 플레이할 수 있는 것과 다른 이들과 함께 모여 해결하는 것들로 나뉜다. 이야기 측면에서야 홀로 게임을 플레이해도 무방하나, '나' 또는 '플레이어 개인'을 드러내기 위한 감정표현, 행동은 절대로 혼자 게임을 해서는 전부 획득할 수 없다. 몇 개의 감정표현은 반드시 다른 이들과의 협력(퍼즐 풀이)을 통해서 얻을 수 있도록 배치했다. 이 과정에서 협력이 이어지므로, 타인과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갖추기 위한 과정으로 승화한다.

목표를 향해 플레이어가 나아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퍼즐을 해결하고 타인과 협력하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는 점이 소셜 '게임'으로서 스카이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여기까지 보면 전하고 있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그러나 잔잔한 배경처럼 메시지는 게임 콘텐츠보다 앞서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자연스럽게 게임의 콘텐츠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메시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 단서들을 던지는 모습이다. 그렇기에 메시지는 플레이어가 게임을 종료했을 때의 기억과 추억으로 자리한다. 그리고 엔딩에서 나와 타자의 관계를 다시금 되돌아보게끔 유도한다. 이 점이 스카이를 더욱 대단한 게임으로 만드는 부분이다.





개발사, 댓게임컴퍼니
고민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들

글의 마지막에서야 밝히는 것이지만, '스카이'의 개발사는 '플라워', '저니'를 개발하며 잘 알려진 '댓게임컴퍼니(Thatgamecompany)'다. 두 게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댓게임컴퍼니를 두고 '예술적인 개발사'라는 표현을 아끼지 않을 듯싶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관계'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개발사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텍스트, 화려한 연출이 없더라도. '관계'라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사색하게 하는 개발사는 댓게임컴퍼니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신작 '스카이' 또한 관계에 주목한 작품처럼 보인다. 개발사 스스로 소셜 게임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으리라.

하지만 스카이가 다루는 관계의 의미는 가볍지 않다. 지금까지의 소셜 게임들이 가지고 있었던 경쟁 또는 도움을 주고받는 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스카이에서의 관계는 타자의 철학을 기반으로 읽어낼 수 있는 것들이 게임 곳곳에 녹아들었다.




스카이는 한편으로는 철학적이며, 댓게임컴퍼니의 여느 전작들보다 복잡한 게임이기도 하다. 소셜, 관계라는 존재를 통해서 개발사가 플레이어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하나다. 타인과 경쟁하는 것 대신 협력을 보여주며 관계를 정의하고 긍정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타자이자 이방인, 타자로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과 무언가를 나누고 교류하는 것이 게임 내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게임 내에서 표현하려 했다. 이는, 개인이 아닌 이타적인 관계를 통해서 진정한 인간다움을 볼 수 있다는 레비나스의 철학과도 궤를 같이한다.

타자와의 관계가 인간다움에 있다면. 이타적인 삶이 존재와 미래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이라면. 댓게임컴퍼니의 실험은 스카이를 통해서 성공할 것으로 보인다. 타자에게 무언가를 베푸는 것. 이를 통해서 자신의 행위를 돌아볼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에서다.






▲ 남을 받아들이고 돕는 과정 = '소셜'인 게임이다.

스카이는 그렇기에 '악'이라는 개념을 게임 내에 구현하지 않는다. 붉은 피도. 경쟁도. 폭력도 없다. 게임 내에는 플레이어 자신과 타인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둘 사이에서 이해와 연대, 관계를 통해서 게임을 이끌어 나간다. 텍스트를 사용하는 것을 최대한 억제하고 상황과 감정 표현만으로 플레이어들이 관계를 맺게 한다. 그렇기에 '스카이'는 철학적인 게임이자 사색할 수 있는 거리를 플레이어에게 제공할 수 있었다.

자극적인 맛이 없다는 점에서 '스카이'를 모두가 좋아할 게임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충분한 의미와 가치를 주고 있는 게임이라 평하고 싶다. 게임을 두고 예술, 중독 등 다양한 의견들이 난무하는 상황. 외부적 이슈로 시끄러운 상황에서 게임이라는 콘텐츠가 얼마나 많은 의미를 세련되게 내포할 수 있는지 증명한 게임이기 때문이다.

저니가 그러했듯. 스카이 또한 다방면으로 많은 의미를 남길 게임임은 분명하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개발자들의 의식도 게임 내에 잘 녹아들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주목해야 하고 성공했으면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바람이 들 따름이다.



▲ '같이의 가치'라는 카피라이트가 가장 어울리는 게임이 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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