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의 가치가 무겁게 느껴질 때 쯤, 얄궂게도 찾아오는 갑작스런 작별. 그대로인 우리의 마음은 몰라준 채 변해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허탈함. e스포츠에 대한 남들보다 늦은 관심이 문득 짝사랑으로 변모할때쯤, 어느덧 집 만큼 익숙해진 공간과 이별을 맞게 된 기자의 기분과도 같습니다.
용산 e스포츠 경기장은 2006년 첫 스타리그 경기 이후, 벌써 10년 째 한국 e스포츠 리그들의 진행을 소화해냈습니다. e스포츠에서의 10년이라는 시간. 당시 부모님의 눈치를 살살 보며 게임을 즐기던 초등학생들은 벌써 대학생이 되었고, 데이트를 하다가 우연히 코엑스에서 리그를 보며 e스포츠를 알게 된 청년들은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습니다. 이 글을 쓰는 기자처럼 군대에서 e스포츠와 친해진 사람들 역시, 벌써 30을 앞두거나 넘겨버린 어른이 되어 버렸네요 (그리워요, 공군 ACE!).
동료들에 비해 비교적 늦깎이로 입문한 e스포츠 관계자로서, 그토록 오랜 시간을 모두 함께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마음입니다. 그래도 첫 e스포츠 리그 취재 현장이자 언제나 한 주의 스케쥴에서 1/3 가량을 차지했던, 그렇게 벌써 3년간의 추억이 깃든 용산 e스포츠 경기장. 돌발 포토를 찍어오며 갖게 된 그 곳에서의 돌아오지 않을 추억. 그리고 용산에 남은 세월의 흔적들을 LoL 리그들을 중심으로 소소하게 살펴볼까 합니다.
1. 장소
지난 2014년 2월 13일, 2014 LoL 마스터즈 취재를 통해 처음으로 마주한 용산 경기장. 이미 꽤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던 만큼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다양한 부분이 낡고 허술하기도 했지만, 첫 취재의 흥분에 취해서인지 모든 것들이 그저 대단해보일 뿐이었다. 선수들 피부색이 이상하게 보이고, 눈까지 아팠던 보라색 조명이 그 당시에는 어찌나 영롱해 보였던지.
더불어, 과거 뿐만이 아닌 오랜 흔적들을 남긴 채 유지되고 있는 현재의 장소들도 사진으로 담아 보았다. 모든 것이 깔끔하고 새 것일 상암으로의 이동에 앞서, 참 묘하게도 이런 때묻은 불편함이 그리워질 것 같은 예감은 왜일까.
2. 사람
익숙한 장소는 소중한 사람들과의 이야기가 깃들며 비로소 추억이 된다. 관객들, 해설진, 선수들, 아나운서... 10년의 세월 만큼이나 다양한 사람들이 많은 이야기를 만들고 떠난 용산 e스포츠 경기장. 그렇기에 2014년 초 돌발 포토를 작성한 이후로, 사진 기사의 대부분의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히 '사람'이었다.
힘찬 응원으로 e스포츠에 대한 열정을 숨김 없이 보여주는 팬들의 모습, 그리고 그에 보답하듯 감동적인 경기를 선사하는 선수들과 해설진들. 그리고 양지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리그 진행에 도움을 준 많은 사람들. 사람이라는 피사체를 담는 사람으로서, e스포츠 현장에 진정 매료될 수 있게 해준 계기 역시 이런 열정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용산 경기장을 빛낸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 용산을 추억함에 있어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담으로, 알지매점 아주머니의 경우 용산 e스포츠 경기장의 10년 역사와 항상 함께 하며 e스포츠에 대한 다양한 추억을 가지고 계셨다. 곧 있을 이별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며, 특별히 인상 깊었고 자부심을 느꼈던 순간을 설명해주셨다.
"지금은 중국으로 코치를 갔다나, 아무튼 용산 경기장에서 경기를 하던 녀석이 있었어요. 그렇게 오래 하다가 중국에 가게 되었는데, 인터넷에 글을 남겨 놓았나 봐요. 중국에 가고 나니 8층 알지매점 김밥이 그렇게 먹고 싶다고. 그 말을 들은 순간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또한 사진에 담긴 보안 책임자는 "어차피 또 볼텐데 뭐..." 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아마도 상암으로 근무지를 따라 옮기나 보다. 어쩐지 애틋함이 조금 덜어졌다.
3. 선수
관객과 더불어 e스포츠의 가장 큰 요소인 '선수'. 그렇기에 따로 사람 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의 모습은 별개로 분류를 하게 되었다.
롤챔스의 시작은 오후 다섯 시에서 여섯 시. 하지만 기자는 대개 오후 두 시부터 현장에 자리를 잡는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도 있지만, 사진 기자의 경우 용산 경기장에 도착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찍고 싶은 욕심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약간은 비좁고 단순한 구조의 용산 경기장이기에, 다양한 선수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을 수 있었다. 비교적 크고 복잡한 구조의 상암 경기장의 개관이 사진기자로서는 내심 두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만큼, 오랜 시간이 흐르며 선수들에게도 제 2의 연습실처럼 익숙해졌을 용산 경기장. 그렇기에 그 곳에서 자연스럽고 수더분해질 수 있던 그들의 모습을 살짝 모아보았다.
따뜻한 비가 오는 봄의 어느 새벽. 용산에서의 행복한 기억을 소소한 글로 남겨놓기 위해, 지난 사진 기사와 데이터를 한참이나 뒤져보았습니다. 3년 차 사진 기자이자 초짜 e스포츠 팬의 용산에 대한 모든 기록들. 어느덧 추억에 젖어 천천히 읽다보니, 마치 졸업 앨범을 다시 보는듯한 '흐뭇한 애틋함'이 밀려오곤 합니다. 글을 쓰기 전에 태운 향초는 이미 바닥을 드러냈지만, 바쁘게 달려 온 용산에서의 기억은 점점 또렷한 향기로 남아갑니다.
비좁고 불편한 경기장, 눈부신 조명에 딱딱하고 자국까지 남는 의자, 화질이 좋지 못한 대형 화면, 부실한 팬미팅 장소와 애매한 티켓팅 시스템. 지금에서야 돌아보니 용산에서의 불편한 기억은 한도 끝도 없는 듯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e스포츠를 현장에서 보는 것을 사랑하고, 선수들의 모습을 보며 응원하기 위해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먼 길을 달려 이 불편한 현장을 찾았습니다. 관객들은 늦은 시간에도 자리를 지키며 선수들을 응원했고, 선수들은 익숙한 공간에서 관객들의 호응에 보답해 왔습니다.
당장 더욱 복잡해질 교통과 낯설 분위기에 불편함이 예상되지만, e스포츠를 사랑하는 팬들은 열정과 기대에 차 여전히 먼 길을 달려 상암 e스타디움을 찾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알기에 선수들과 관계자들 역시 낯선 장소에서 새로운 역사를 다시 써내려가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피치 못할 이별을 새로운 사랑으로 억지로 잊는 것이 아닌, 배울 점을 기억하며 더 나은 사랑의 양분으로 삼는 성숙한 이별처럼. 우리가 용산 경기장을 떠나 보내는 '쿨한' 방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것에 가려서 관심을 끌지 못하는 쓸쓸한 생활이나 처지'. 용산 경기장과의 작별을 이야기할 때 나오는 '뒤안길'이라는 단어는, 알고 보면 상당히 유감스러운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비록 존재 자체는 사라지겠지만, 오래도록 '성지'로 불리우게 될 용산 경기장은 e스포츠 팬들에게는 속절없는 이별로만 기억되지는 않을 것이라 믿습니다.
오래된 성지와의 작별과 동시에 새로운 성지와의 만남을 갖게 될 우리들은, 어쩌면 정말 행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1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지닌 채, 이제는 기억 속 애틋함으로 남은 용산 경기장. 그처럼 새로운 상암 e스타디움 역시 멋진 역사를 써내려가기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