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C#33] 서류 없으면 인간도 없다? '리갈던전'

게임뉴스 | 이현수 기자 | 댓글: 3개 |



조직이 성공하려면 관리자들은 실적이 우수한 사업과 그렇지 못한 사업 혹은 우수한 조직원과 그렇지 못한 조직원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모든 사업 부문과 조직원을 똑같이 대우한다면 조직은 반드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GE의 전 CEO 잭 웰치(Jack Welch)는 성과주의에 강력한 지지를 보내면서 이런 말을 했다.

많은 조직이 조직원들 간의 경쟁을 통하여 높은 성과 창출할 수 있고, 고성과자에게 고임금을 보장함으로써 이들의 동기를 더 높은 수준으로 유지할 뿐만 아니라 조직에 대한 충성심도 높일 수 있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성과주의 인사는 HR 시스템의 핵심 요소로 간주하여 왔다. 이는 민간 조직뿐만 아니라 공공 조직에도 전파되어 널리 사용되었다.

그런데 과연 성과주의가 무조건적으로 조직원들에게 제대로 된 방향으로 동기부여를 하고 장기적 관점에서 조직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을까?



▲ 근속으로 경위 달겠죠, 뭐...

2011년 경찰은 교통 외근 경찰관의 성과평가 항목에서 교통법규 위반 단속 실적을 없앴다. 지나친 단속 경쟁을 부추긴다는 지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교통경찰관들은 단속 실적으로 매달 최대 30점을 딸 수 있었다. 유형별로 0.2점부터 1점까지 부여됐고, 평가를 앞두고 실적이 부족하면 ‘폭풍 단속’에 들어가기도 했다.

이 처럼 성과주의는 의도한 바와 다르게 작용하기도 한다. ‘레플리카’로 인디게임사에 한 획을 그은 ‘소미’는 이번에는 이 성과주의에 대한 고찰을 담은 ‘리갈던전’을 선보였다.

리갈던전은 갓 경찰대를 졸업한 ‘신채’ 경위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그렇기에 형사2팀의 팀장임에도 관록 있어 보이는 경사의 반말에 반응도 못한 채 ‘서류 작업하면서 나의 법 지식을 자랑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철부지의 모습을 보인다.

게임은 수사가 이미 완료된 사건의 서류를 검토하고 이를 검찰에 송치하기 전 경찰의 수사 결과를 기록한 의견서를 작성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리고 게임 내내 이러한 ‘서류 작업’을 하면서 피의자의 범죄사실과 관련 법령의 구성요건, 판례, 이전 사건의 내용을 비교 분석한 후 피의자를 기소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한다.




단순 모욕사건을 다룬 사건부터 살인사건까지 다양한 형사 사건이 타임라인 형식으로 배열되어 있다. DB의 도움말을 이용하는 등 자료를 보고 서류를 꾸미는 퍼즐적인 재미가 존재한다. '역전재판'같은 게임에 있는 설전 시스템도 있어서 지루할 수 있는 흐름에 새로운 호흡을 불어넣기도 한다.

게임에서 절도범은 2점, 살인범은 15점을 제공한다. 현실의 실적평가처럼 정량 평가가 이뤄진다. 고득점자와 그 팀원들에게는 레벨업이 있지만, 저 성과자에게는 감찰조사와 직위해제가 기다리고 있다.

플레이어는 서류를 꾸미면서 딜레마에 봉착한다. 기소하면 점수를 얻고 승진할 수 있는 시스템 아래에서 점수는 욕망이다. 그런데 모든 기소 건이 취조실 의자처럼 완벽히 접히는 사건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윤리적으로, 감정적으로 고민을 해야하는 사건이 존재한다.

당연히 영달을 위해, 점수를 위해 포기해야 하는 반대 가치도 있다. 그렇게 철학적이고 심오한 가치도 아니다. 실제로 이 땅에 존재했던 사건들이 떠오르게 한다. 익산 약촌 오거리 사건이나 수많은 공안사건이 그러하다. 많은 이들이 분통을 터트리는 일이지만, 본인이 그 상황에 섰다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 것인지 생각을 해본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이다. '리갈던전'은 그에 대해 간접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리갈던전'의 겉모습은 서류 시뮬레이터다. 개발자 역시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리갈던전’의 진짜 ‘멋있음’은 서류 빈칸을 채우는 경험이 아니라 성과주의 조직에서 법과 윤리 그리고 인간 감정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생각해 보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약간의 비약일지는 모르겠지만, 대중의 법 감정과 재판부의 판결은 왜 다른가에 대해 생각할 기회도 제공한다. 최근 부산 여중생 사건과 같은 전 국민의 공분을 산 사건을 법무조직은 왜 그렇게 대하는가에 대한 의문말이다.

그리고 다시 물음은 시작으로 돌아온다. 우리가 서류를 작성하고 있는 이유. 기록물이 도구를 넘어서, 서류가 현상에 위에 있는 이 실태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서류에 적힌 성과가 가치로써 대접받을 때, 이를 증빙하는 서류가 없다면 정의도 없는 것인가. 근본적인 질문에 맞닥뜨린다.

이 게임을 단순 서류 작성 시뮬레이션으로 보기에는 담고 있는 질문이 너무 현실적이다. 단순히 성과주의의 폐해로만 접근하는 것도 너무 일차원적인 접근이다.

'겨우 게임' 하나에 너무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현장에서 체험한 '리갈던전'은 나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으며, 비단 나 혼자만 이런 경험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확신한다. ‘리갈던전’은 게임이 매체로서 성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감히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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