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게임은 당신의 선택을 기억할 것입니다

칼럼 | 허재민 기자 | 댓글: 12개 |



한 여자를 믿어보라 그대는 후회하리라
연애하지 말아보아라 역시 그대는 후회하리라
연애해도 연애를 안 해도 그 어느 쪽이든 후회하는 것이다
진정한 영원성은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앞을 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중으로 후회해야 하므로 영원은 일종의 괴로운 시간적 결과에 불과하다.

결혼을 해도, 안 해도 후회할 것이라고 말했던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냐 저것이냐'하는 선택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굳이 결혼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피곤한데 아침에 연차를 쓸지, 점심에는 무엇을 먹을지, 과금을 한 번 더 할지, 누군가에게 연락할지. 선택이 부재한 인생은 없으며,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자유롭다'고 느낀다.

우리가 게임을 좋아하는 이유는 게임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지난 NDC2018 이장주 박사의 강연에서 들었던 내용 중 하나다. 게임 속에 유저가 선택할 요소를 넣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게임 속 세계를 내가 통제하고 있다는 쾌감을 줄 뿐만 아니라, 선택을 통해서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고, 나만을 위한 방향으로 전개할 수 있다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과 같이 게임의 모든 요소가 내 선택에 달려있다. 어떤 캐릭터를 할 것인지, 어떻게 커스터마이징하고 어떤 장비를 이용할 것인지, 어떤 선택지를 선택할 것인지. 이번 턴에 나는 공격을 할 것인지, 방어를 할 것인지, 물약을 먹을 것인지. 탑갱을 갈지 바텀갱을 갈지. 오픈월드에서는 발걸음 하나마저도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



▲나의 선택과 나의 행동이 그대로 반영되기에 '재미있다'고 느낀다

유저가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은 게임 속에서 큰 마이너스 요소다. '인간혹은뱀파이어'의 김동규 대표는 게임 초반에 들어간 유저 닉네임을 강제하는 듯한 연출에서 많은 유저들이 게임을 그만뒀다고 설명했다. 그만큼 게임 속에서 유저가 선택하지 못하는 요소, 특히 아이디와 같은 것이라면 더욱 반감을 가져올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다른 미디어와 다르게 게임이 가지고 있는 매력은 내가 직접 개입하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내 선택이 자리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그 선택에는 선택지를 고르는 것만이 아닌 '어떻게 플레이할까'와 관련된 모든 것을 포함한다.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왜 재미가 있었나? - 게임 속 선택의 의미

선택이 중요한 게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퀀틱 드림. 최신작인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에서 퀀틱 드림은 그들만의 스토리텔링과 연출 방식, 그리고 선택에 따른 전개를 아낌없이 녹여내 인공 지능과 인간이 함께하는 세계를 표현 내 냈다.

퀀틱 드림의 어드벤처 게임에서 선택은 그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에 영향을 주고, 이야기를 어떻게 전개해나갈 것인지를 결정한다. 챕터가 끝날 때마다 보여주는 선택의 로드맵에서 유저는 내가 선택한 방향과 그에 따른 결과물을 확인하게 된다. 개입할 수 있는 부분과 없는 부분. 중요한 것은 내가 개입한 요소가 영향을 주고 세계에 반영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어떻게 플레이하느냐에 따라서 코너는 코너 의사가 되기도 하고 코완용이 되기도 한다"
-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에 대한 한 유저의 의견

선택에 따라 스토리가 전개되는 게임들은 일정 '루트'를 공략하기 마련이다. 연애시뮬레이션처럼 직접적으로 특정 캐릭터를 공략하는 게임에서부터 스토리 엔딩을 어떻게 매듭지을지를 결정하는 게임까지 다양하다. 루트를 공략하는 게임은 자주 공략을 보면서 그대로 따라하기도 한다. 무엇을 선택했을 때 어떤 다른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 재미있게 플레이하고 있는 '영원한 7일의 도시'가 신선하게 다가왔던 이유도 이러한 '루트' 공략 때문이었다. 내가 어떤 선택지를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특정 신기사나 CG를 얻기도 하고, 특정 구역을 공략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판가름하기도 한다. 캐릭터를 얻어서 성장시키는 RPG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지만, 매번 반복되는 7일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는 직접 선택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스토리를 스킵하다가 갑자기 나온 분기점에서 당황하기도 했다.

장르도, 플레이 방식도, 선택이 의미하는 바도 다른 게임이지만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과 '영원한 7일의 도시'가 재미있는 이유 중 하나는 게임에 의미 있는 영향을 줄 수 있는 선택지를 유저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텔테일 게임즈의 게임이나 돈노드 엔터테인먼트의 '라이프이즈스트레인지'와 같은 게임에서 내가 선택한 결과와 다른 사람들이 선택한 결과를 굳이 비교하게 해주는 것도 선택의 의미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결정할 것인가, 스토리를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 어떤 보상을 받고 어떤 루트를 해금할 것인가. 선택이 영향을 주는 결과물이 어떤 것인가는 어쩌면 크게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어쩌면 직접 게임을 '건드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선택의 의미는 선택지가 아니라 그에 따른 영향에 있다

선택이 중요한 게임 외에도 게임 속에 선택지를 고르게 하는 게임은 많다. 모바일 RPG에서도 간단하게 유저의 생각을 물어보는 선택지를 제시하는 경우도 있고, 스토리 진행에서 직접 대답을 골라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모든 선택지가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었다. 맞서 싸운다고 했더니 죽고, 굽히고 들어갔는데도 죽고, 도망가도 죽는다. 이렇게 고심해서 골랐는데 사실상 별로 달라진 것도 없을 때가 있다. 말 그대로 '선택'한다는 느낌만을 줄 뿐이었다.

중요한 것은 선택지 자체가 아니라 선택이 가져오는 영향에 있다. 언더테일을 플레이하고 왜 나는 소름이 돋았을까? 게임이 나의 선택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똑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선택지는 그저 스토리를 진행하는 데 있어서 스킵을 잠시 멈추게 하는 과속방지턱의 역할밖에 못 한다.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수백만 개의 스토리 결과물들. 선택지를 넣으려면 그정도는 준비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선택하는 것만으로도 기대감을 줄 수 있고 과속방지턱은 잠시 속도를 줄이게 한다는 것만으로 도움이 된다. 아무 생각 없이 스토리를 넘기다가 순간적으로 주의를 끌기는 하니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무도 답정너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선택하는지 너무나도 중요한 것처럼 이야기해놓고 마치 어떤 것을 선택하든 깔때기로 들어가 하나의 결과물로 귀결된다면 나의 선택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내 선택을 기억만 하는 게임은 아쉬울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선택'이 아니라 '선택으로 인한 영향'에 있다. 그리고 의미 있는 선택이 줄 수 있는 영향은 무궁무진하다.




우리는 인생의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 선택을 해야하고, 가끔은 그 자유로움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낀다. 키에르케고르는 "나의 가능성들을 보면 자유의 현기증과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 나는 공포에 떨며 선택을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선택의 기로에 서는 순간 순수함과 영원함을 잃어버리지만, 그 선택의 결단을 통해서 참된 윤리적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정립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게임은 우리로 하여금 선택의 두려움을 잊고 통제할 수 있다는 즐거움을 준다. 게임 속에서 우리는 선택하기 위해 생각하고, 선택을 연습하고, 간접적인 경험을 얻는다. 미연시가 게임이냐, 인터렉티브 드라마가 게임이냐, 게임은 인생에 도움이 되느냐. 이에 대한 답을 게임 속 선택이 가진 힘에서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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