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고전 어드벤처 게임의 전성기, 그 끝을 잡고 '그림 판당고'

기획기사 | 정필권 기자 | 댓글: 5개 |

밀레니엄을 앞둔 1990년대 말, 루카스아츠는 명실공히 어드벤처의 명가로 불리기 손색이 없었다. 기존 텍스트 위주 게임 플레이에서 마우스를 이용한 '포인트 앤 클릭' 방식이 자리를 잡으면서 어드벤처 장르는 절정기를 맞이했다. 루카스아츠는 물론이고 많은 게임사의 어드벤처 게임을 내놓던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루카스아츠가 사용한 SCUMM엔진은 '원숭이 섬의 비밀' 시리즈와 같은 명작들을 남겼으며, 당시 어드벤처 장르의 기준점이 됐다. 이후 루카스아츠는 3D 시대를 맞이하며 GrimE 엔진으로 엔진을 교체하고, 1998년 풀 3D로 만들어진 '그림 판당고'를 내놓는다. 시에라와 시장을 양분했던 어드벤처의 절정기를 상징하는 작품이자, 독특한 분위기와 게임 플레이로 지금까지 회자될 작품을 말이다.


죽음은 또 다른 시작이다
독특한 분위기와 이야기

그동안 유머러스한 게임들을 만든 루카스아츠는 그림 판당고에서 매우 독특한 세계관과 캐릭터를 선보이는 데 성공했다. 원숭이섬의 비밀 시리즈가 루카스아츠의 스타일을 정의하고 확립한 게임이라면, 그림 판당고의 캐릭터들은 그간 루카스아츠의 풍자와 해학이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아즈텍 사람들의 인식을 바탕으로 사후 세계를 유쾌하게 그려냈다.

아즈텍의 사후 세계관에서 죽음은 또 다른 여행의 시작을 의미한다. 살아생전의 행동은 여행 과정의 험난함을 결정짓는다. 이와 같은 아즈텍 세계관은 그림 판당고에도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림 판당고의 등장인물은 모두 죽은 자들이며, 사후 '죽은 자들의 땅'에 가기 위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다.



▲ 매니 칼라베라의 이야기다.

죽은 이들은 일생을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서로 다른 탈것을 부여받는다. 목적지까지 4분 만에 도착할 수 있는 열차인 9호선부터, 배, 자동차 순서로 탈것이 나뉜다. 가장 그릇된 삶을 산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은 오직 나무 지팡이 하나. 최악의 삶을 산 사람은 4년간 도보로 죽은 자들의 땅에 도착해야만 하며, 이 과정에서 많은 고통을 겪는다.

그림 판당고의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한다. 죽은 자들을 교통수단으로 인도하는 에이전트(사신) 주인공 '매니'는 자신에게 어느 순간부터 나무 지팡이만 이용하는 고객들이 배정되고, 동료인 도미노에게는 9호선 열차를 이용하는 고객들이 배정된다. 매니는 우연한 사건으로 배정에 음모가 있었음을 깨닫게 되고, 이와 관련한 진실을 찾는 과정이 게임의 주요 이야기다.




독특한 세계관과 더불어, 그림 판당고는 이야기 도중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보여준다. 게임 내에는 멋진 장식이나 외관을 가진 캐릭터가 없다. 사후 세계인 만큼 대부분 등장인물은 해골의 형상이다. 그럼에도 각자의 성격은 확실히 드러난다. 주인공인 '매니 칼라베라', 비서인 '에바', 레지스탕스 '살바도르 리모네스' 등 세련된 캐릭터들을 게임 내에서 만날 수 있다.

1998년, 루카스아츠가 야심작으로 꺼내 든 그림 판당고는 당시로써는 세련된 그래픽과 구성, 캐릭터 설정을 보여주며 많은 이들의 호평을 받았다. 게임으로 만들어내기 어려운 소재를, 반전까지 가미한 시나리오를 통해 충실하게 보여줬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가 이어졌다. 1998년 '올해의 어드벤처 게임', '올해의 PC게임', '그래픽 디자인 어워드' 등 여러 부문의 상을 휩쓸었고, 많은 이들의 추억 속에 명작으로 자리 잡았다.



▲ 리뷰 수는 적지만 크리틱 94점. 유저 평점 9.1이라는 수는 허투루 볼 것이 아니다.


그림 판당고 그리고 루카스아츠가 남긴 것
어드벤처 게임의 전성기. 그 끝을 잡고.

장르의 역사를 살펴보면, 90년대 말 즈음 어드벤처 장르의 인기가 점차 식기 시작했다. 장르의 전성기가 지나면서 루카스아츠는 어드벤처 게임의 제작을 그만두는 결정을 내린다. 장르 자체의 개발이 종료되었기에, 개발 중이던 어드벤처 게임들은 출시를 멈추게 됐다. 다른 장르의 게임들이 시장의 주류로 자리를 잡았고 기존 개발자들은 새로운 개발사로 모여 어드벤처 게임의 명맥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2004년, 루카스아츠의 게임 디자이너였던 '댄 코너스(Dan Conners)'와 '케빈 브루너(Kevin Bruner)', '트로이 몰랜더(Troy Molander)'는 어드벤처 게임을 전문으로 제작하는 독립 게임 개발사, '텔테일 게임즈'를 설립했다. 루카스아츠에서 개발이 취소되었던 '샘 앤 맥스(Sam & Max)'의 라이센스를 가져와 에피소드 형식으로 게임을 발매하기 시작했으며, 2012년 '워킹데드' 시리즈로 성공 가도에 들어섰다. 2018년 현재, 텔테일 게임즈는 폐업이 확정되었으나, 워킹데드 출시 당시에는 그 해 최다 GOTY에 선정될 정도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 2012년 최다 고티에 빛나는 '워킹데드'

그림 판당고를 제작했던 팀 셰퍼(Tim Schafer)는 루카스아츠를 떠나 '더블 파인 스튜디오'를 설립한다. 회사 설립 시점인 2000년 이후, 인디 게임 시장이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더블 파인 스튜디오는 자사의 신작과 함께 루카스아츠 게임들의 리마스터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그림 판당고 리마스터는 더블 파인 스튜디오에 의해서 진행되었으며, 2015년 팬들의 기대를 받으며 정식 출시되었다.

루카스아츠에서 떨어져나온 두 회사는 나름의 성공 그리고 실패를 겪어가면서 자신들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루카스 필름과 함께 디즈니에 인수된 루카스아츠는 다른 결과를 맞이한다. 디즈니로 인수된 이후 루카스 아츠는 2013년 폐쇄 수순에 들어갔으며,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를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개발을 직접 진행하기보다는 라이센스를 판매하는 방식으로 사업 방향을 전환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시대를 풍미했던 루카스아츠의 폐쇄와 함께, 포인트 앤 클릭 방식의 게임들은 최근 찾아보기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게임 개발 방식과 기기의 발전에 힘입어 어드벤처 장르는 이전과는 다른 특징을 갖기 시작했다. 분량과 기술 면에서 더 사실적이고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방식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다만, 과거 스타일의 어드벤처 게임이 완전히 명맥이 끊긴 것은 아니다.

루카스아츠의 대표적인 작품 '매니악 맨션'과 '원숭이 섬의 비밀'을 제작했던 론 길버트(Ron Gilbert)는 2017년 '팀블위드 파크(Thimbleweed Park)'를 출시한 것이 예시가 될 수 있다. 팀블위드 파크는 과거 루카스아츠 시절의 감성과 유머를 현 시대에 맞게 선보였으며, 평단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 현 어드벤처 장르에서 많은 결과물을 남긴 회사, 루카스아츠.


다시 돌아서 현재로
명작의 클래스는 어디 가지 않는다

루카스아츠의 마지막 시기를 장식한 명작, 그림 판당고는 출시 이후 꾸준히 리마스터 요청이 있어 왔다. 순수 어드벤처 장르의 입지가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게임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개발사인 루카스아츠는 디즈니로 합병되면서 폐쇄를 맞이했고, 오직 라이센스만이 존재하던 추억의 명작 정도로만 남아있던 상태였다.

워낙 과거의 게임이었기에 현세대 기기에서 플레이하기 어려웠던 상황. 팬들의 열망은 루카스아츠에서 나온 더블 파인 스튜디오를 통해 이뤄졌다. 2015년 1월, 게임이 출시된지 17년 만에 리마스터 버전이 출시된 것이다. 이로써 PC뿐만 아니라 PS4, iOS 와 안드로이드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됐다. 게다가 지난 11월 2일에는 닌텐도 스위치 버전으로도 자리하면서, 현존하는 거의 모든 플랫폼에서 과거의 명작을 플레이할 길이 열렸다.


과거 불편했던 조작 시스템은 마우스를 이용하는 포인트 앤 클릭 방식으로 회귀했다. 직진 버튼과 방향을 조절하는 버튼이 따로 있었고, 오브젝트를 바라봐야만 작동할 수 있었던 방식은 커서를 올리면 바로 확인할 수 있도록 개선됐다. 이외에도 팬들을 위한 컨셉 아트, 개발자 코멘터리 등을 추가해서 게임을 기다린 이들에게는 가치있는 콘텐츠들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래픽 면에서는 광원 효과, 특히 그림자 표현이 현 세대에 맞는 수준으로 올라갔다. 현 시점에서는 퀄리티가 떨어지는 텍스쳐 해상도도 개선을 거쳤다. 4:3이었던 화면비는 레터박스를 포함해서 16:9까지 지원되지만, 일부 영상과 같은 부분은 기술적인 문제로 비율을 강제로 맞춘 형태로 제작할 수밖에 없었다.



▲ 특히 그림자의 표현이 많이 개선됐다.

리마스터 자체로만 따진다면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과거의 '클래스'가 여전함은 여실히 증명했다. 현 세대 기준으로는 어디인가 살짝 모자란 그래픽과 영상 퀄리티임에도, 게임이 보여준 기준점은 변하지 않았다. 해학과 풍자는 여전하며,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행동과 이야기는 그 시절 그대로다. 게임의 외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유머와 스토리로 대표할 수 있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다만, 리마스터를 거쳤음에도 게임을 현재 즐기기에 많은 장벽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기술적인 장벽이 아니라, 고전 게임 특유의 조작과 불친절함이 문제다. 원작 출시 이후 20년. 편의성이 수정되었다고는 하나, 지금 기준으로는 매우 불편하고 즐기기 어려운 구성일 수 있다. 게임의 내용물은 시간이 지나도 훌륭하나, 이를 맛보기 위한 과정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고전 게임에 익숙한 게이머나, 루카스 아츠의 '원숭이 섬의 비밀' 시리즈를 해본 사람들이라면 언제고 다시 꺼내서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이 되기 충분하다. 그리고 동시에 루카스아츠의 명성을 확인하려는 사람들, 고전 어드벤처 게임의 전성기를 확인하고픈 이에게도 추천작이 될 수 있다. 마치 딱딱한 껍질을 가졌지만, 달콤한 과육을 가진 과일 같은 게임이 '그림 판당고'일 테니까.



▲ '그림 판당고'는 이야기만으로도 명작이 될 가치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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