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 보는데 현실 400일 걸리는 게임

게임소개 | 김규만 기자 | 댓글: 25개 |

트레일러 영상만 4시간 짜리인 이 게임은 지난 3월 5일 스팀으로 정식 출시된 방치형 어드벤처 '더 롱잉(The Longing)'이다. 앉아서 한 장면도 빠짐없이 위 트레일러를 지켜볼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생각하는데, 이 트레일러는 게임의 핵심 주제인 '기다림'에 대해 아주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더 롱잉'은 갈망, 또는 그리움을 뜻하는 단어인 제목과 아주 판박이인 콘셉트를 차용했다. 플레이어는 그림자라는 이름의 주인공. 그림자는 지하왕국의 왕이 잠들기 전 명령한 대로 꼬박 400일을 잠든 왕 곁에서 보내게 된다. 또 하나의 명령은 400일동안 어디든 돌아다녀도 좋지만, 왕국 밖으로는 나가지 않는 것. 명령을 지키든 지키지 않든 자유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400일을 보내는 것이 바로 플레이어의 몫이다.

개발자에 따르면, '더 롱잉'의 전체적인 배경은 퀴프호이저(Kyffhäuser)산 아래 잠들어 있는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깨어나는 날 다시 제국의 영광을 되찾을 것이라는 독일 민간 설화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스토리는 독일의 시인 프리드리히 뤼케르트의 시를 참고했다. 게임 속에서 볼 수 있는 동굴의 모습 또한 실제 퀴프호이저 산 동굴에서 모티브를 가져왔으며, 6.5미터 크기의 바바로사(붉은 수염이라는 뜻으로, 프리드리히 1세의 별명이었다) 조각상에서 힌트를 얻었다.



▲ 게임의 모티브가 된 신성 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전설



▲ 왕이 깨어날 때까지 무조건 기다리는 것이 게임의 목표다

졸지에 아무도 없는 지하 세계 왕국에서 왕이 깨어나기까지 400일이라는 시간을 기다리게 된 주인공. 말이 400일이지 1년 하고도 한 달은 더 기다려야 하는 날짜고, 시간으로 환산하면 9,600시간이나 된다. 400시간만 좀 더 보태면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는 최소 조건인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것도 만족시키는 셈인데, 문제는 도대체 이 시간을 아무도 없는 지하에서 어떻게 보내느냐 하는 것이다.

게임의 궁극적인 목표는 '왕이 깨어나는 것을 기다리기'이지만, '더 롱잉'의 기본적인 콘텐츠는 왕이 잠든 사이 왕국 곳곳을 순찰(또는 산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굴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석탄이나, 이끼와 같은 아이템을 채집할 수도 있고, 운이 좋아 무언가 색다른 곳에 이르렀다면 평소보다 시간이 좀 더 빨리 흘러가는 것 처럼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게임계의 '슬로우 푸드'를 표방하는 작품 답게, 이 게임은 엔딩까지 걸리는 시간만큼이나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간다. 주인공인 그림자가 걸어가는 속도도 그렇고, 어디로 이어질 지 모르는 문을 열어보려 해도 시간이 걸린다.(어떤 문은 열리는 데 현실 시간으로 2시간이 걸린다!) 어디 그 뿐인가, 움푹 패인 길을 넘어 가기 위해서는 구덩이가 동굴에서 떨어지는 물로 가득 차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그건 또 몇 개월은 걸린단다.



▲ 진짜로 한 달을 뜻하는 것이라니까

이리저리 꼬인 길도 어느 정도 다 둘러보고, 그랬더니 다른 곳으로 가는 길은 몇 달 뒤에나 열리게 된다면 그땐 뭘 하지? 그럴 때를 위해서 주인공의 아늑한 방에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여러 물건들이 준비되어 있다. 석탄으로 그림을 그려 벽을 장식할 수도 있고(더 많이 그리려면 나가서 종이를 구해와야 한다) 산책하다가 악기 부품을 다 모았다면 연주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시간을 가장 잘 보낼 수 있는 방법은 안락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는 것인데, '더 롱잉'에는 무료 전자책 목록인 '프로젝트 구텐베르크'에서 찾을 수 있는 다양한 책들의 원서가 그대로 실려있다. 진짜 그대로. 첫날에는 백경(모비딕),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권과 같은 고전명작들이 책꽂이에 꽂힌걸 볼 수 있는데, 백경만 해도 모든 내용이 1,280페이지짜리 텍스트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게임은 공식 한국어를 지원하지만, 아쉽게도 서적은 원서로만 지원한다.

물론, 하는 일이라고는 대부분 걷는 것밖에 없는 이 게임에 400일을 온전히 투자하라는 것은 아니다. '더 롱잉'을 실행한 순간부터 게임은 왕이 깨어나는 날인 400일 후까지 끊임 없이 시간 계산을 해 나간다. 게임을 끄고, 기사를 올린 뒤 새까맣게 잊고 있어도 언젠가 400일은 흘러, 지금은 절대 깨어나지 않을 것 같은 저 왕도 눈을 뜰 것이다.



▲ 400일을 어떻게 보냈느냐에 따라 허전한 방도



▲ 조금은 더 아늑해질 수 있다

게임을 개발한 독일 슈투트가르트 출신 개발사 STUDIO SEUFZ는 이 게임에 대해 "외로움과 현실 도피, 그리고 끝없이 목적을 열망하는 것에 대한 게임"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의 말마따나 게임 속 지하 동굴은 고독으로 가득하고, 플레이를 할수록 오히려 게임보다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주인공인 그림자를 무작위 장소로 걷게 한 뒤, 어디쯤 도착할 지 지켜보면서 머릿속으로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는 것이다.

집 밖으로 나가는 것 조차 망설여지는 요즘 같은 날, 따뜻한 차 한 잔 하면서 사색을 하고 싶다면 이 게임을 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첫 날은 호기심이 생겨 동굴 이곳 저곳을 둘러봐도 좋고, 그 뒤로 한동안 게임을 다시 켜는 것을 잊어버려도 상관 없다. 기다릴 시간은 아주 충분하니까.

디데이 계산기를 두드려 보니 내 게임에서 왕이 깨어나는 날은 2021년 4월 16일. 문득 게임의 엔딩보다는 그때의 나는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가 더 궁금해졌다. 게임을 시작한 날 여자친구를 사귀었다면 400일 기념일을 보낼 수 있었을까? 적어도 그때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모두가 고통받는 일이 없기를.



코멘트

새로고침
새로고침

기사 목록

1 2 3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