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비니티와 발더스 사이, 그 오묘한 외줄타기 '발더스 게이트3'

리뷰 | 정수형 기자 | 댓글: 27개 |

무려 20년 만에 '발더스 게이트'의 후속작이 등장했다. RPG의 시조인 D&D(Dungeons & Dragons)를 디지털화 한 게임 중 가장 높은 완성도를 뽐내며, 명작으로 등극한 발더스 게이트는 2000년에 출시한 '발더스 게이트 2'를 마지막으로 끝나는 듯했다. 그동안 발더스 게이트의 후속작을 개발하려는 시도는 많았지만, 실제 성공 사례로 이어지진 않았다. 그래서 2019년, '발더스 게이트 3'의 소식이 들렸을 때 한 명의 RPG 팬으로서 오래된 명작의 부활이 달갑게 느껴졌다.

발더스 게이트 3은 1편과 2편을 개발한 바이오웨어가 아닌, '디비니티 시리즈'를 만든 '라리안 스튜디오(이하 라리안)'가 개발부터 퍼블리싱까지 모든 것을 담당했다. 라리안은 아마 국내 게이머에겐 다소 낯선 회사가 아닐까 싶다. 1996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게임을 개발했지만, 대중적인 게임으로 시선을 사로잡기보단 비주류라 불리는 장르를 집요하게 파낸 이력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대중성이 없을 뿐이지 올드 스쿨 RPG 시장에서 라리안이 가지는 파급력은 엄청나다. 디비니티 시리즈의 최신작 '디비니티 오리지널 씬 2'의 경우, 메타크리틱 93점에 각종 게임 수상을 휩쓴 경력이 있으며, 스팀 기준 9만 개에 이르는 압도적 긍정적 평가를 받은 바 있다. 발더스 게이트 3의 개발을 맡게 된 경우도 디비니티의 흥행 성과에 따른 '위저드 오브 더 코스트'의 제안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올드 스쿨 RPG에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던 디비니티 시리즈

개인적으로 발더스 게이트라는 이름값보단 라리안이 만든 발더스 게이트였기에 더욱 기대되었다. 바이오웨어의 발더스 게이트를 사랑하는 팬이라면 신성 모독으로 들리겠지만, 기자가 처음으로 해본 올드 스쿨 RPG가 디비니티 시리즈이기고 했고 깐깐하게 회사를 고르는 위저드 오브 더 코스트가 먼저 라리안에 개발을 제안했다는 점에서 믿음이 갔다. 물론 초기 제안은 라리안에서 했었지만 말이다.

2020년 10월 7일, 얼리 엑세스 버전으로 출시한 발더스 게이트 3은 액트 1만 완성된 상태로 20~25시간의 분량을 갖췄다. 아직 게임의 모든 것이 등장하진 않았지만, 라리안의 스타일로 재해석한 발더스 게이트 3을 씹고 뜯고 맛보기엔 충분한 분량이었다. 20년이란 세월을 넘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롭게 등장한 발더스 게이트 3는 시리즈의 부활을 알릴 수 있을까? 두근거림을 뒤로한 채 본격적으로 게임을 즐겨봤다.


D&D 본연의 재미를 디지털에 녹이다
플레이어는 더 이상 관객이 아닌 게임 속 등장인물이다



▲ 캐릭터의 종족부터 직업, 성향을 골라 나의 분신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한다

발더스 게이트는 정해진 스토리를 따라가는 선형 구조의 게임이다.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으며, 플레이어는 게임 속에서 정해진 분기를 따라 게임을 진행하게 된다. 이는 발더스 게이트 1과 2에서도 그랬고 3 역시 똑같은 구조다. 일반적인 선형 구조의 게임이 모든 스토리를 정해두고 행동에 제약을 거는 것과 달리 발더스 게이트는 굵직한 뼈대 속에서 극한의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이를테면 게임의 초반, 플레이어가 추락하는 비행선에서 가까스로 살아남고 치료사를 찾는 메인 목표가 주어졌을 때 이를 어떻게 수행할지는 오로지 플레이어의 판단에 달려있다. 주변 마을에 찾아가서 사람들에게 치료사의 행방을 물어보는 간단한 선택지가 있는가 하면, 마을에 감금된 고블린에게 특별한 능력을 가진 고블린의 존재를 듣게 되고 해당 고블린을 마을에서 탈출시켜 특별한 고블린을 찾아간다는 다소 복잡한 선택지도 존재한다.

발더스 게이트 3에 등장하는 대부분 목표는 플레이어가 얼마나 많은 NPC에게 정보를 얻는지에 따라 스토리의 과정이 달라진다. 모든 플레이어는 추락한 비행선에서 시작하지만, 중간 과정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선택에 따라서 아군이 적이 될 수도 있으며, 반대로 적이 아군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선택지에 따른 결과는 올드 스쿨 RPG에서 느낄 수 있는 플레이 스타일이자 발더스 게이트가 추구하는 재미 요소라 할 수 있다.



▲ 시작하자마자 납치당하고 정신이 없다

하지만, 자유롭다는 것이 꼭 장점으로만 다가오진 않는다. 오히려 너무 많은 선택지가 주어지니 게임의 진입 장벽이 높아지고 점차 비주류로 밀려나는 원인이 되었다. 올드 스쿨 RPG에서 모든 결과는 아무 이유 없이 생기지 않는다. 플레이어는 게임을 진행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건, 사고를 겪게 되며, 대부분 글자로 이뤄진 대화창으로 이를 해석하게 된다. 너무 많은 글자 때문에 중반에 가서는 내가 책을 읽는 건지 게임을 하는 건지 분간이 안 가는 수준이 될 정도다.

내가 원하는 대로 게임을 진행하려면 대사를 스킵할 수조차 없다. 앞서 말했듯 NPC와의 대화 속에는 모든 정보가 담겨있다. 스쳐 가듯 웅얼거리는 NPC의 대사에 숨겨진 장소와 보물에 대한 힌트가 숨어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글자만 떴다 하면 바로 스킵하고 보는 사람들이 올드 스쿨 RPG에 적응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방대한 글자 분량 때문이다. 옛날에는 파고들 요소가 많은 플레이에 지루함보단 흥미를 느끼는 게이머가 많았지만, 최근 액션, RPG 게임들과 비교하면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방대한 글자를 포기하자니 올드 스쿨 RPG가 추구하는 게임의 재미를 살릴 수가 없다.

이 문제에 대해 라리안이 내놓은 해답은 2가지다. 하나는 시점의 변화를 통한 몰입도의 향상이며, 또 하나는 대사도 게임처럼 느끼게 만드는 D&D만의 주사위 시스템이다.



▲ 일단 읽는 것부터 게임의 시작이다 (이미지 출처 - 발더스 게이트 2 스팀 페이지)

올드 스쿨 RPG는 대부분 하늘에서 캐릭터를 바라보는 쿼터뷰 시점에서 게임이 진행되며, 화면 하단에 캐릭터들의 대사가 문장으로 표시된다. 스토리 게임 특성상 사람들과 다양한 대화를 통해 게임이 진행되는데 이 때문에 전투 장면을 제외하면 마을을 이동하면서 하단의 텍스트만 읽는 과정을 반복한다.

발더스 게이트 3 역시 쿼터뷰 시점에서 게임을 플레이하지만, NPC와 대화를 시작하는 순간 캐릭터를 정면에서 바라보는 시점으로 바뀐다. 나와 말을 하는 대상은 대화 내내 다양한 표정과 손짓을 취하면서 단순한 텍스트가 아니라 행동으로 플레이어에게 말을 걸어온다. 다채로운 표정과 풀보이스 더빙은 단순하게 텍스트만 읽던 것과는 다른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글자의 분량은 여전히 많다. 라리안이 밝힌 바에 따르면 발더스 게이트 3은 디비니티 오리지널 씬 2보다 훨씬 많은 대사가 준비되어 있다. 하지만, 바뀐 시점과 대화의 표현 방식 덕분에 지루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내가 캐릭터 그 자체가 된 듯한 시점의 변화는 게임 속 캐릭터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 만드는 계기가 되며, 상대방과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눔으로써 게임 속 내가 처한 상황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NPC와 대화하는 순간 플레이어는 하늘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는 신의 관점이 아니라 게임 속 세상을 거니는 캐릭터가 된다. 시점을 위에서 캐릭터 앞으로 바꿨을 뿐이지만, 게임에 더욱더 깊게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 역시 대화는 서로 눈을 마주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 어떤 대사를 선택하냐에 따라 NPC의 행동이 달라지는 것도 관전 포인트 중 하나



▲ 동료와의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는 캠프 시스템도 추가됐다


대화도 전략적으로
선택에 따라 이득이 따라오는 커뮤니케이션



▲ 주사위를 굴려 대화의 성공 유무를 결정한다

시점의 변화가 몰입도를 끌어올리는 장치라면 주사위는 NPC와의 대화도 전략으로 만드는 시스템이다. 주사위는 발더스 게이트의 모티브가 되는 D&D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오프라인에서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TRPG 특성상 게임의 진행은 대부분 상상력으로 이뤄진다. 이때 정확한 계산이 필요한 상황에서 사용되는 것이 주사위다. 적을 때렸을 때 몇의 데미지를 줄 것인가, 혹은 함정 해제에 성공하냐 등 어떤 행동에 관한 결과는 모두 주사위를 굴려 성공과 실패를 결정한다.

라리안은 원작의 요소를 게임 속에 반영해 플레이어의 특정 행동에 따른 성패를 주사위가 결정하도록 만들었다. 이는 NPC와의 대사에도 꽤 자주 등장한다. 내 행동에 따라 2개의 결과가 생기는 상황이라면 어김없이 주사위를 던지게 되며, 성공하면 최적의 결과를 얻을 수 있지만, 실패하면 최악의 결과를 얻게 된다. 게임 초반에 돌무더기에 깔린 괴물에게 말 잘못 걸었다가 주사위 선택지가 등장했는데 실패하니까 캐릭터가 죽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겪기도 했다.



▲ 더러운 마인드 플레이어를 조심하자



▲ 주사위에 실패했을 때의 기자 표정

모든 대화마다 주사위를 굴리는 것은 아니지만, 주요 선택지에는 항상 주사위가 등장한다. 대화의 중요도에 따라 성공에 필요한 주사위 수치가 다르며, 주사위값의 확률은 어디까지나 랜덤이기 때문에 플레이어는 매번 쫄깃한 심정으로 주사위를 굴리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사위란 랜덤 요소에 무조건 의존한다는 것은 아니다. D&D는 모든 행동에 캐릭터의 능력치가 반영되며, 주사위의 값에 가산점을 부여해주는 장치가 있다.

예를 들면 어떤 NPC를 협박해야 하는 상황에서 내 캐릭터의 성향이 군인이라면, 협박에 대해 +2의 가산점을 받을 수 있다. 주사위를 굴려서 10이 나왔다면 2를 더해 총값이 12가 된다는 소리다. 이를 통해 주사위의 실패 확률은 낮추고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다. 단순히 성공 몇 %, 실패 몇 %로 표시되는 게 아니라 보다 직관적으로 수치를 계산할 수 있기도 하다.



▲ 하지만, 가산점을 부여해도 실패할 건 실패한다. 고로 성공하길 염원하자

주사위 수치가 높은 대화일수록 성공에 따른 보상도 확실하다. 성공했다고 해서 "너 정말 잘했구나"라는 말 몇 마디의 칭찬이 끝이 아니라 숨겨진 보물을 찾을 수 있는 단서부터 스토리에 대한 핵심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등 게임을 편하게 돌파할 수 있는 지름길을 제공해주기도 한다.

확실한 보상과 플레이어의 전략에 따라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는 시스템이 더해지면 대화는 더는 지루한 글자 읽기가 아닌 새로운 보상을 획득할 수 있는 게임의 보상 시스템이 된다.


밀치고 던지고 뛰어라
8종의 액션으로 전투의 전략적 선택 강화


앞서 말했듯 D&D에서 주사위는 대화뿐만 아니라 전투에서도 사용된다. 캐릭터들의 모든 공격은 주사위를 굴려서 공격이 맞았는지, 데미지는 몇인지를 계산한다. 발더스 게이트 3에서도 전투 시 주사위가 사용되는 것은 맞지만, 대화와는 달리 전투마다 매번 주사위를 굴리는 형태로 나오진 않는다.

스킬의 데미지 표기 방식이 데미지의 합을 더하는 주사위로 되어 있으며, 캐릭터의 능력치가 여기에 가산점을 부여하는 형태다. 때릴 때마다 주사위를 굴리는 것을 표시하지 않을 뿐 결국 데미지 계산은 주사위로 이뤄지게 되어 있다. 실제 D&D에서 사용하는 계산법과 흡사하다고 보면 된다.

예를 들어 전사의 내려치기 공격이 육면체 주사위 두 개를 굴려 나온 값이라고 치자. 이떄 내려치기는 최소 공격력은 2, 최대 공격력은 12가 된다. 주사위를 굴려서 총 6이란 수치가 떴을 때 전사의 능력치 보정만큼의 가산점이 붙어 최종 데미지가 표시되는 것이다.

복잡하게 쓰긴 했지만, 실제로 게임을 하다 보면 딱히 이 부분이 와닿진 않을 것이다. 어차피 위에 말하는 과정이 실제 눈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시스템에서 알아서 계산하고 결괏값만 화면에 툭 등장할 테니 말이다. 이번 발더스 게이트 3의 전투에서 중요하게 볼 점은 주사위에 의한 데미지 시스템이 아니라 실시간에서 턴제로 바뀐 전투 방식과 새롭게 추가된 8종의 행동에 있다.



▲ 공격과 이동, 선택은 플레이어의 몫이다

발더스 게이트 2가 실시간 전투 방식이었던 것에 반해 발더스 게이트 3은 턴제 전략 전투 방식을 채택했다. 평소에 이동할 땐 실시간 드래그 앤 클릭이지만, 전투에 돌입하면 턴제로 전환되는 방식이다. 캐릭터의 행동력에 따라 행동 순서가 정해지고 각 캐릭터는 본인 순서에 공격과 이동을 선택해서 행동할 수 있다.

원작의 실시간 전투 방식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턴제로 바뀐 발더스 게이트가 다소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사실 발더스 게이트의 모티브가 되는 D&D는 턴제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TRPG인 데다 라리안이 그동안 만들었던 게임들이 턴제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변화가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발더스 게이트 3의 턴제는 치밀한 전략을 요구하는 방식이다. 플레이어가 최대로 모을 수 있는 동료는 본인 포함 4명이지만, 적들은 숫자에 제한이 없다. 한 명에서부터 많게는 수십 명까지 등장하며, 소수 대 다수의 전투를 기본으로 깔고 가니 아군의 피해는 최대한 줄이고 적을 효과적으로 섬멸할 방법을 생각해야 원활하게 전투를 이끌어 갈 수 있다.

▲ 은신을 사용하면 도둑질도 가능하다

대부분의 턴제 전투 게임 속 전략은 어찌 보면 뻔하다. 캐릭터는 순서마다 움직이거나 공격을 할 수 있고 마법을 쏠 수 있다. 직업 고유의 스킬을 활용해 적들을 한곳에 모아서 광역 마법을 퍼부으면 끝. 공격과 방어를 효과적으로 한다는 소리를 늘여놓지만 결국 다가가서 때리고 힐하고 마법 쏘는 것이 전부다. 스킬의 가짓수가 늘어날수록 사용하는 전략의 폭이 늘어나겠지만, 대부분 때리거나 버프, 디버프를 거는 방식이기에 창의적인 플레이를 발휘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발더스 게이트 3 역시 때리고 힐하는 것은 똑같지만, 일반적인 행동 외에 특별한 8종의 행동을 넣음으로써 뻔한 전략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보여줬다. 캐릭터는 점프와 밀치기, 아이템 던지기, 숨기 등 8종의 행동을 할 수 있으며, 일반적인 상황뿐만 아니라 전투에서도 응용할 수 있다. 가령 근접 공격을 하는 적들을 피해 바위 위로 점프를 해서 살아남는다거나 혹은 절벽 끝에 서 있는 적을 밀치기로 떨어트리는 게 가능하다.

▲ 여긴 내 자리야!

점프로 먼 거리를 뛰어넘으면 적들은 그만큼 다시 이동해야 하니 시간을 번다는 이득이 따라오고 높은 절벽에서 떨어진 적은 큰 데미지와 함께 짧은 스턴에 걸리니 선수필승에 따른 이득을 확실하게 채울 수 있다. 하면 좋고 안 해도 딱히 상관없는 시스템이 아니라 잘 쓸수록 이득이 따라오는 이런 시스템을 마다할 게이머는 없으리라.

또한, 모든 캐릭터가 8종의 행동을 할 수 있으니 캐릭터에 구애받지 않고 전략의 폭을 대폭 늘릴 수 있다. 2명의 캐릭터를 연계해 더 먼 거리로 적을 밀칠 수 있으며, 바닥에 불을 지른 뒤 다음 캐릭터가 무기에 불을 묻혀 던질 수도 있다. 혹은 돌진 기술이 없는 동료를 적에게 던져 이동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도 있다. TRPG에서 상상으로만 써먹을 수 있었던 전투 방식을 게임 속에 구현한 점은 참신함을 넘어서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한다.


라리안의 시선에서 바라본 발더스 게이트
D&D 원작에 더욱 충실했다




발더스 게이트 3이 출시되고 일주일 이상이 지난 상황에서 사람들의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실망하는 쪽은 대부분 발더스 게이트 1, 2편의 추억을 기억하는 게이머들이다. 전작과 너무나 달라진 전투 시스템과 게임 진행 방식은 발더스 게이트보단 디비니티 시리즈에 더 가깝다는 소리다.

그럴 만도 한 게 발더스 게이트 3은 라리안의 자체 엔진인 디비니티 엔진 4.0을 사용해 개발했으며, 파티원을 최대 4명 데리고 다닐 수 있다는 점, 디비니티의 인터페이스 디자인과 스킬 효과가 비슷한 부분 등 여러 부분에서 디비니티의 향수가 느껴진다.

기자가 봤을 때도 이들의 말이 딱히 틀리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발더스 게이트와 디비니티를 모두 즐긴 사람으로서 라리안이 만든 발더스 게이트는 디비니티 시리즈에 D&D의 규칙을 적용한 것처럼 보이니까.



▲ 더 세련되긴 했지만 어딘가 비슷한 느낌이 든다
(좌 - 발더스 게이트 3 / 우 - 디비니티 2)

하지만, 이게 꼭 옳지 않은 변화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발더스 게이트 2편이 출시된 지 어느덧 2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흘러간 세월만큼 많은 것이 바뀌었고 이제와서 발더스 게이트 2의 시스템들을 계승한들 결국 추억 보정일 뿐 새로움을 주진 못했을 것이다. 발더스 게이트 2가 명작인 것은 맞지만 지금 와서 다시 하기엔 진입 장벽이 너무 높다는 점도 한몫한다.

흘러간 세월만큼이나 새로운 변화가 필요했다. 그리고 라리안이 선택한 변화는 본인들이 익숙하다고 생각한 시스템에 D&D의 규칙을 세련되게 가공하는 것이었다. 앞서 말했듯 TRPG는 실시간이 아니라 턴제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게임이다. 한 순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이 정해져 있고 여기서 최대한의 효율을 찾아야 한다.

원작의 규칙을 게임 속에 반영하기 위해선 기존의 실시간 방식보단 턴제가 훨씬 잘 어울린다는 것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발더스 게이트 2도 실시간 전투 방식을 지원하지만, 막상 게임을 해보면 일시 정지와 시작을 반복하면서 턴제 비슷한 느낌으로 전투를 펼치곤 했다.

물론 모든 전투를 턴제로 진행하는 라리안식 발더스 게이트가 전작의 발더스 게이트보다 전투 피로도가 높은 것은 사실이다. 이런 피로감 때문에 턴제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턴제도 시스템에 익숙해지고 자신만의 전략을 세울 정도가 되면 매번 퍼즐 풀듯 어렵게 가는 것이 아니라 쉽게 풀어갈 수 있다.



▲ 오래된 무덤에서 아무거나 만지면 안되는 이유.jpg



▲ 라리안은 숨겨진 이벤트를 찾는 재미도 빼놓지 않았다

D&D 뿐만 아니라 다른 TRPG를 모티브로 만든 올드 스쿨 RPG가 전략적 플레이를 추구하기 위해 턴제로 게임을 만든 것은 여러 게임을 통해 증명되었다. 게이머들 사이에서 발더스 게이트의 정신적 후속작으로 꼽히던 '필라스 오브 이터니티2'도 실시간 전투 방식에서 추후 턴제 방식을 추가했으며, 포스트 아포칼립스 RPG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웨이스트랜드' 역시 턴제 방식의 전투를 고집하고 있다.

다시 본점으로 돌아가면 중요한 것은 이거다. 그래서 재미가 있냐, 없냐. 바뀐 변화가 재미없으면 전작만도 못하다는 비평을 받을 것이고, 바뀐 변화로 인해 전작과는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면 라리안의 손에서 발더스 게이트의 새로운 역사가 쓰일 것이다. 현재 스팀 기준으로 발더스 게이트 3은 15,800개의 매우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으며, 아주 순조로운 출발을 알렸다.

발더스 게이트 3은 얼리 엑세스로 한창 개발 중인 미완성 작품이다. 라리안의 발표에 따르면 약 1년간의 추가 개발을 끝으로 2021년에 정식 출시가 될 예정이다. 따라서 아직은 게임 내에 버그도 가끔 보이는 데다 최적화도 부족하다. 전투는 또 왜 그렇게 회피가 많이 뜨는지, 80%의 확률도 툭하면 빗나가기 일쑤이며, 상대편의 공격은 희한하게 팍팍 박혀온다. 턴제 전략 게임들이 대부분 초반에 답답한 과정을 거치는 것 치고는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 자체 개발한 엔진의 성능은 우수하나 아직 최적화가 부족하다

고칠 부분도 많이 보이고 부족한 부분도 느껴지지만, 적어도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익숙해지면 정말 재미있다. 괜히 많은 게이머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게 아니다. 게임은 지금도 꾸준하게 개발되고 있으며, 라리안은 올드 스쿨 RPG에 한 해선 엄청난 저력을 보이는 회사니 게임의 미래가 걱정되진 않는다. 현재 불편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이후 추가 개발로 얼마든지 고칠 수 있는 부분이니 말이다.

지금 걱정되는 것은 단 하나, 과연 한글화가 될 것인가다. 현재 발더스 게이트 3은 공식적으로 한글을 지원하지 않는다. NPC와 대화를 통해 게임을 진행하는 올드 스쿨 RPG 특성상 언어의 장벽은 히말라야산맥 만큼이나 높고 험난하다. 말이 안 통하는데 눈치로 찍을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동안 라리안이 개발한 몇몇 게임들에 한글화가 이뤄지긴 했지만 직접 내부 전담팀을 꾸려서 만든 적은 드물다. 비교적 최근에 한글화가 이뤄진 디비니티 오리지널 씬 2만 봐도 유저 한글패치를 라리안에서 공식으로 인정하고 자본금을 투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번에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아직 정식 출시도 안 된 마당에 이런 방식의 한글화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 그래서 얘가 뭐라는거야? / 나도 잘 몰라...

기자 역시 영알못이라 언어의 장벽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어떻게든 게임을 해보겠다는 일념 하나에 각종 번역 사이트를 이용하거나 이미지 캡처 프로그램으로 번역을 돌리는 등의 시도를 해봤다. 다행히 나름 소기의 성과를 얻어 완벽하진 않지만 NPC가 무슨 생각으로 내게 말을 하는지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진짜 게임이 하고 싶다면 기자와 같은 방식을 한번 고민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디비니티 시리즈를 통해 축적된 라리안의 잘 짜인 턴제 전투 시스템과 발더스 게이트의 세계관, D&D 규칙을 동시에 느끼고 싶다면 이번 발더스 게이트 3에서 최고의 만족도를 느끼지 않을까 싶다. 정식 발매에선 꼭 공식 한글화를 지원해주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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