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시카고의 갱단에겐 술과 총, 그리고 '이야기'가 필요하다

리뷰 | 강승진 기자 | 댓글: 7개 |



미국 금주법과 로메로 게임즈. 어디 이 둘 없이 '엠파이어 오브 신'을 50%나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1890년대 미국에는 사회 운동과 개혁의 물살이 거세게 밀려들어 왔습니다. 의료, 종교 목적의 일부 주류를 빼놓고 개인의 주류 소유를 금지하는 금주법도 이 시기인 1919년 의회를 통과했죠. 이게 나름의 효과도 봤지만, 거부감도 컸고 그에 따른 부작용도 뒤따랐습니다. 인생과 함께 흐르는 유일한 게 술이라고들 하는데 이걸 인간의 힘으로 막는다는 게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던 거죠.

사람들은 무허가 술집을 찾았고 밀주를 만들거나 밀거래를 시작했습니다. 하이에나처럼 돈 냄새를 맡고 밀주 거래를 사업화한 범죄 조직도 들끓었습니다. 흔히 알 카포네와 마피아가 상징이 된 갱스터의 전성기 이미지도 바로 이 시기 모습에서 따왔죠. 미국인들은 물론 세계 곳곳의 이민자들이 몰려 화려한 범죄자들의 도시가 만들어진 겁니다.

알 카포네가 조니 토리오를 따라 시카고에서 꿈을 키운 1920년. 게임은 이 혼돈의 시기를 배경으로 각기 각층의 갱 이야기를 다룹니다. 알폰스 알 카포네를 비롯해 안젤로 '블러디' 제나 등 실제 범죄자들의 모습을 나름 그럴듯하게 그렸죠. 미국은 물론 마피아 핵심 출신인 아일랜드와 시칠리아와 함께 아시아계, 멕시코 등 14종의 보스들이 술과 돈을 노리고 시카고에 몰려듭니다.

실제로는 뉴욕 차이나 타운을 중심으로 활동한 사이 윙 목이나 할렘을 주름잡던 '마담' 스테파니 세인트 클레어 등 서로 만날 수 없는 갱단이 함께 모이며 범죄자들의 드림 매치 같은 느낌도 내고요. 다만 갱스터들의 암약이 아직 크게 눈에 띌 시기는 아닌 만큼 갱단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게임이 시작하죠. 갱스터 두목이 되어 술과 화약 냄새가 요동치는 그때로 말이죠.



▲ 엠파이어 오브 신에 구현된 알 카포네

자, 그런데 지금까지 적은 금주령이니 마피아니 하는 이야기들이 없다면 어떨까요?

1920년 시카고에 도착한 한 범죄자. 그리고 미국식 자유주의는 엿이나 먹으라며 양조장을 차릴 돈을 쥐여주는 지역 범죄자. 게임이 플레이어의 눈과 귀에 꽂아넣는 정보는 이게 전부입니다. '역사 시간에 뭐했어'라고 묻듯 과감한 게임 구조이기는 한데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영 혼란스럽습니다.

나름 이 이야기에 관심 있는 사람도 이런데 전략적인 전투를 내세운 게임 광고만 보고 뛰어들기엔 멍해져 오는 정신을 제대로 붙잡기 어렵죠. 이야기의 구조가 오프닝을 떼고 곧장 핵심으로 넘어가기에 게임 초반은 몰입을 위한 준비보다는 튜토리얼을 따라가는 데 급급합니다.



▲ 밑도 끝도 없이 정말 이거 하나 걸고 그냥 시작한다



이번에는 로메로 게임즈 이야기를 해보죠. 오늘날 FPS의 기반을 닦은 역사적인 타이틀 '둠'과 '퀘이크'. 이 둘은 개발사 이드 소프트웨어의 천재로 불리는 존 카멕과 존 로메로가 없었다면 세상에 빛을 보는 게 불가능했을 작품이죠. 특히 존 로메로의 레벨 디자인은 오늘날까지도 정석으로 불리며 장르의 기반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천재만큼이나 괴짜로도 불린 존 로메로였습니다. 그는 새로 차린 이온 스톰의 사무실을 이드 소프트웨어가 있던 댈러스 한 마천루 꼭대기인 54층에 차렸습니다. 펜트하우스처럼 꾸며진 회사에 들인 돈도 만만치 않았죠. 하지만 정작 출시된 '다이카타나'와 '아나크로녹스'는 '둠'과 '퀘이크'를 기대한 팬들에게 실망감만 안긴 실패작이 됐습니다. 자랑하던 게임 디자인도 설정이 과하니 모자란 만 못했죠.

이후 소규모 개발작의 디자인과 개발팀에 조언을 남기는 정도로 경력을 이어온 존 로메로에게 '엠파이어 오브 신'은 본격적인 재기작과 같습니다. 앞서 유명 개발자기도 한 아내 브렌다와 함께 로메로 게임즈를 설립한 그는 둠의 정신적 후속작, '시길'을 무료 배포하며 간을 봤죠.

그리고 이번 작품은 아내 브렌다 로메로가 리드 디자이너를 맡고 게임의 핵심을 함께 다졌습니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데에만 온 힘을 쏟겠다는 의지도 드러냈습니다.



▲ 출시 전 AMA를 진행한 브렌다 로메로와 존 로메로. 행복해 보이니 그나마 다행이야...

유명 개발자의 성공적인 복귀로 이야기가 끝났으면 아름다웠겠지만, 아쉽게도 마냥 칭찬만 할 수는 없는 결과가 나와버렸습니다.

전투는 흔히 엑스컴 시리즈가 보여주는 그것을 생각하면 딱 들어맞습니다. 턴마다 AP를 써 이동하고 엄폐하고 쏘고 빗맞히고. 이 모든 게 그대로 그려지죠. 적이 총구에 맞닿아 있는데 40%의 적중률을 보여주는가 하면 90%도 헛맞추는 정신나간 '!감나빗'도 그대로입니다. 여기에 자신의 턴에 행동을 늦춰 상대방 먼저 움직이게 하고 이를 대비하는 턴밀기 등의 요소도 갖췄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래도 '전략성은 있겠다' 싶기도 하겠지만, 두목이나 중역 갱단이 합류하는 전투는 양상이 또 달라집니다. 보유 건물을 지키는 일반 갱스터인 가드끼리의 전투에서야 쪽수와 확률이 중요하다지만, 특성을 보유한 주요 갱들은 전투의 판세를 뒤바꿔 버리죠.



▲ 전투는 리부트 엑스컴 시리즈에 마피아 스킨 입혔다고 생각하면 얼추 비슷

전투 시작 전 자리를 잡기 전부터 한 방 쏘고 시작하거나 체력이 없으면 주변 적에 탄창이 빌 때까지 난사하는 등 강력한 특성 보유자가 꽤 많습니다. 두목급은 체력도, 스킬도 우수해 턴 형식을 빌린 무쌍 게임이 되기도 하죠.

저격용 총은 또 어찌나 세고 정확한지 명중률 보정 장비 한두 개만 끼워주면 혼자 '스나이퍼 엘리트'를 플레이합니다. 옆에서는 20% 확률로 기관총을 난사할때 정확히 헤드샷을 때리며 혼자 1턴 1킬로 적을 잠재우죠. 무기별 능력치 차이도 커 암시장에서 이른 시기 운좋게 고급 장비를 구할 수 있다면 게임 난이도는 더 일찍 꺾여 버리고요.

전략보다는 화끈함이 강조된 주역들의 전투를 보다 총 한 번 쏘고 주먹 한 번 휘두르는 가드 간의 전투를 플레이하면 전략성도, 그렇다고 갱들의 총격전이 난무하는 호쾌한 액션도 없는 밋밋한 턴제 전략에 그치고 맙니다. 판도를 바꿀 특출날 뭔가가 없으니 확률에 기댄 애매하게 어려운 전투가 그려지죠.



▲ 체력 41 갱단원에 치명타 4방. 이게 보스다

사실 플레이어 주도적인 전투는 가드가 아니라 직접 영입한 핵심 갱들로 진행됩니다. 밋밋한 거보다야 화끈한 게 낫고 변수 창출 요소도 있으니 그나마 조금은 더 전략적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이 게임은 전투를 뺀 모든 콘텐츠가 거대한 도시에서 실시간으로 이루어집니다.

맵도 '발더스 게이트'에 가까운 구역별 오버월드 형태에 가까워 공격이나 내 영업장을 들르는 데 직접 시간을 들여 이동해야 합니다. 택시를 잡아 빠른 이동으로 거리의 불리함은 극복할 수 있다지만 관리하는 영업장이 많아지면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해오는 적들을 한곳한곳 돌아다니며 지키는 게 불가능해지죠.

결국, 침입한 타 갱단을 수비하는 건 그곳을 지키고 있던 가드들의 몫입니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채 재미없는 전투를 억지로 플레이해야 한다는 뜻이죠. 그래서 후반에는 그냥 지키는 걸 포기하고 주력 멤버로 되찾는 걸 목표로 하죠. 수비 단계를 높인 업장은 되찾는 것도 일이고요.

이런 전투는 제작진이 강조했던 전략적인 재미를 기대만큼 보여주지 못한 셈입니다.



▲ 주인공들은 이렇게 실시간으로 맵을 뛰어다니는데



▲ 이런 건물이 이렇게나 많고



▲ 이런 도시가 또 이렇게나 많이(그..그만)
이러니 지키러 가느니 그냥 포기하고 만다



하지만 아무리 부드러운 고양이 털도 반대로 쓸어내리면 까슬까슬한 법입니다. '엠파이어 오브 신'이 주는 진짜 재미는 엑스컴 시리즈가 주는 재미와는 결이 다릅니다. 퍼블리셔이자 게임 제작 안팎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패러독스 인터랙티브 색을 더할 때야 1920년대 갱단의 삶과 디자인을 더 그럴듯하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선 패러독스가 기치로 내건 게임의 목표와 가치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죠. 대전략 게임의 명가로 불리는 패러독스는 선형적인 게임 진행을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플레이어 스스로 드라마를 만들고 그걸 게임적인 시스템으로 지원하죠. 거대한 국가를 쪼개 영주 단위로 가족과 영토 승계 등 좀 더 개개인의 이야기를 다룬 '크루세이더 킹즈'시리즈에서는 '막장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암투와 패륜적 행위가 당연하게 그려지기도 하고요.



▲ 핵심은 대화와 관계다. 중지 손가락이 세 번째로 좋아한다는 걸 뜻하는 건 아니다

'엠파이어 오브 신'은 이렇게 플레이어가 직접 이야기의 중심을 그려나가도록 했습니다. 플레이어가 영입하는 주요 갱스터는 전투나 능력치를 가늠하는 특성도 있지만, 각 인물들 간의 관계도 가지고 있죠. 특정 갱단원을 좋아하거나 1920년 이전에 발생한 사건으로 서로 죽이지 않고서는 함께할 수 없는 원한 관계도 있습니다.

당연히 원한 관계에 놓인 인물들을 영입하려 한다면 누군가는 반발합니다. 반대로 서로 별다른 감정이 없던 인물들도 한 갱에서 오래 함께하다 보면 사랑에 빠지기도 하죠. 때로는 특성과 이를 연관짓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알콜 중독자의 경우 쉽게 술을 마셔 만취 상태가 되는데요. 여기에 연계로 술에 취하면 사격 능력이 떨어지고 근접 공격 피해량이 느는 식의 추가적인 특성이 연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연인이 술독에 빠져 지낸다면 신앙심 강한 사람은 그걸 못 버텨 하겠죠. 그리고 걱정이 곧 감정 싸움으로 번지고 사이가 멀어지는 등 굉장히 다채로운 이야기가 랜덤하게 이루어집니다.



▲ 갱단원마다 가진 특성이 전투와 게임플레이 전체에 이점을 준다



▲ '나는 술을 싫어하는데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술을 너무 좋아해요. 어떻하죠?'

이게 조역 인물들의 관계 설정이라면 플레이어인 갱 두목의 이야기는 세력과 두목 간의 외교, 그리고 회담에서 발생합니다.

각 갱단 두목은 때론 서로 회담을 요청하고 아지트나 영업장에서 독대하게 됩니다.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사업적인 논의가 이루어지는데 이 선택에 따라 갱단과의 관계가 우호적으로, 때론 적대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특히 회담은 사업 논의에 앞서 서로 가족사나 안부를 묻기도 하는데 여기서 두목들의 과거 이력이나 시카고로 오게 된 경위 등을 유추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건 관계가 우호적일 때나 그렇고 대게 영업장을 강제로 뺏고 이루어지는 회담은 안부 대신 욕바가지를 얻어먹기도 하고 가족사가 패드립으로 바뀌죠.

우호적인 관계를 잘 유지해나갔다면 외교로 사업장의 방비를 튼실히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같은 지역에 주류 밀매장이나 카지노를 운영하며 손님 유치에 애쓰는 상황이 아니라면 불가침 조약을 맺고 밀주 제조나 사업장 운영 등 서로 강점을 공유하며 공생할 수 있죠. 더 강한 세력이 있다면 돈을 쥐여주고 가드를 붙여달라 요청할 수도 있고요.

시카고 전체를 지배하는 두목은 하나뿐이겠지만, 그 과정에서는 총이 아니라 말과 표정, 그리고 돈으로 얼마든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단 뜻입니다. 물론 패권을 다투는 거대 조직의 대결 뿐만아니라 불량배들과의 싸움 따위도 설득이나 협박 능력이 뛰어나다면 얼마든 피할 수 있죠.



▲ 잘해주면 이렇게 걱정도 해준다. 아니라면 돌아오는 건 패드립 뿐



유저가 직접 짜낸 서사의 자리 위에서 게임을 즐기는 재미가 올라갔다고는 하지만 그게 마냥 완벽한 게임을 만들어주는 건 아닙니다. 사실 양조장과 카지노, 호텔 등 업장을 운영하는 건 모바일 게임처럼 그저 전투를 통한 확보와 업그레이드로 모든 게 이루어지는 수준이죠.

과거의 모습을 잘 살리고자 했다지만 인터페이스나 연출마저도 1920년대에 머무른 듯 부족하고 묘하게 불쾌한 캐릭터 디자인. 그리고 시대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버그도 게임이 혹평을 받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이런 문제점을 파악했듯 브렌다 로메로는 출시 하루 만에 답을 내놨습니다. 버그와 피드백은 패치로 가다듬고 콘텐츠 다양성을 통해 게임 플레이의 폭을 더 넓게 만든다는 계획 말이죠.



▲ 요즘 게임이라고 하기에는 그래픽과 연출 모두 참...



▲ 경영도 너무 간결하게 다룬 느낌

하지만 '엠파이어 오브 신' 입문에 가장 큰 벽은 다름 아니라 이 게임을 즐기기 위해 갖춰져 있어야 할 게 많다는 점입니다. 대공황 이전의 미국 상황은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하고 게임의 목표를 창발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도 선형적 플레이를 즐기는 게임팬에겐 영 쉽지 않은 자세입니다.

그래서 '엠파이어 오브 신'을 메타 점수 60점대에 긍정적 평가가 절반 정도에 그치는 그저 그런 게임이라고 하기도.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재미있는 게임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물론 단순히 전투만이 아니라 역사적인 인물과 사건들을 엮어 게임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낼 줄 안다면 '엠파이어 오브 신'의 다른 재미를 체감할 수 있죠. 또 그런 잠재력도 풍부하고요.

그리고 1920년대 시카고로 퍼진 후 초창기 기틀을 잡아나간 시카고재즈. 그 느낌을 살린 BGM만큼은 호불호 없이 당당히 엄지 세울 수 있습니다. 배경음악은 꼭 최대로 놓고 하시길.



▲ 갱들의 이야기에 살을 붙일 수만 있다면 당신도 이미 알 카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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