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에세이] 해외출장의 빛과 어둠 Pt.2

포토뉴스 | 정재훈 기자 | 댓글: 5개 |



엑자일콘(ExileCon).

그런 이름의 게임쇼가 있다. 패스오브엑자일의 이름이 국내에도 알려지면서 코어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알음알음 알려진 행사이지만, 알고 보면 이런 비운의 게임쇼가 없다. 2019년에 1회 개최, 이후 매년 개최 예정이었으나 판데믹으로 3년을 쉬어버리면서 2회 개최가 무려 2023년이 되어 버렸다.

사실 이렇게 타이틀 하나 걸고 진행하는 게임쇼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당장 우리나라만 해도 던전앤파이터 시리즈나 검은사막 같은 게임들은 종종 오프라인 행사를 크게 열곤 하니까. 문제는, 이 작은(?) 게임쇼인 엑자일콘에서 다루는 주인공인 '패스오브엑자일2'의 영향력까지 작지는 않다는 거다.

왜 '패스오브엑자일2'가 중요한 타이틀인지 정리해보자.

1. 디아블로 시리즈의 아류로 시작했지만 아류로 남지 않고 고유 팬덤 구축에 성공한 시리즈
2. 디아블로4 최초 발표 2주 후에 패스오브엑자일2 발표, 대표는 자신있다고 일갈.
3. 디아블로4 출시한 해에 플레이어블 빌드 공개

노린 건지 뭔지는 몰라도 판데믹 때문에 통으로 날려버린 3년을 뺀 1, 2회 행사가 모두 디아블로4를 저격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완전히 노리고 쏘았다기 보다, 그냥 쐈는데 폭발 반경 안에 디아블로4가 있는 정도긴 하지만, 하여튼 그렇게 됐다.

이쯤 되면, 장거리 출장을 갈 만한 충분한 이유가 성립된다. 디아블로4의 화제성이 아직 여전한 지금, 강력한 대항마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POE2가 과연 진짜 그만한 잠재력을 갖추고 있는지는 직접 가서 확인해봐야 알 문제기 때문이다.

그런데, 출장을 준비하는 동안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보통 게임쇼 개최가 발표되면, 참관 신청과 별개로 미디어들은 '프레스'로 등록하게 된다. 입장료를 받지 않는 대신 본인이 기자임을 증명할 수 있는 문서들을 준비해야 하지만, 일단 등록하고 나면 각종 부대행사나 이슈거리, 쉽게 말해 '기사 각'이 보이는 정보들이나 기사 작성에 필요한 각종 자료들(흔히 말하는 프레스킷)을 전달받을 수 있기 때문에 꽤 일반적인 절차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라인딩 기어 게임즈는 이와 관련된 무엇도 없었다. 2019년에 내가 아닌 다른 기자가 출장을 가긴 했지만, 그 때는 일반 유저와 비슷한 포지션에서 갔었기에, 이번엔 정식으로 기자 등록을 하고 가려 했는데 그런 시스템 자체가 없었다. 취재를 염두에 두기보단 철저히 유저들을 위해 기획된 것만 같은 행사에서 보이는 모습이다. 그래도 뭐 어쩔 수 없지. 그냥 유저로서 가면 그만이다. 난이도가 조금 오르긴 하겠지만 말이다.



▲ 어쨌든 도착

세상에서 제일 빡시다는 뉴질랜드 세관 검사를 넘어 뉴질랜드의 경제 중심지인 오클랜드에 도착했다. 행정 수도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서울 포지션에 해당하는 도시인데, 해외 여행을 가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서울은 너무 지나치게 큰 도시다. 오클랜드도 사실 서울에 비하면 그리 크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엑자일콘이 열리는 '아오테아 센터'도 뭔가 아담하다. 개인적으로 벡스코나 킨텍스까진 아니더라도 블리즈컨이 진행되는 애너하임 컨벤션 센터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 정도는 아니다. 굳이 크기를 비교하자면 지방 도시 시외버스 터미널 정도 크기다.



▲ 행사 첫 날, 입장을 기다리는 관객들, 공간이 좁다 보니 줄이 엄청 길게 느껴진다



▲ 솔직히 겉에서 보면 게임쇼 하는 지도 모른다

이게 뭐 잘못된 건 아니다. 뉴질랜드의 인구는 우리나라의 10분의 1정도 밖에 안 되기 때문에 전체적인 도시 규모나 행사장 규모가 그렇게 클 필요까진 없다. 다 채울 사람이 없는데 굳이 크게 만들 건 또 뭐란 말인가.

그럼에도 놀라웠던 건 관객의 수인데, 외국에서 팬들이 오는 행사도 아니고 99.9% 내국인(0.1%는 나...)들이 방문하는 행사임을 고려하면 엄청난 수가 모인다. 저 관객 수의 10배가 국내 게임쇼에 온다고 생각하니 앞이 깜깜할 지경. 게임사 하나가 혼자 여는 행사 치곤 인구 대비 참가자 비율이 어마무시한 수준이다.




이렇게 행사에 참가하는 관객들의 수는 시 전체 규모로 봐도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행사 전날부터, 시내에는 온통 POE 티셔츠와 후디를 입고 다니는 사람이 넘쳐났는데, 다운타운 한복판에 누가 봐도 게임 좋아할 것 같은 이들이 학익진을 펼치며 인도를 점령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 욱 숨막혀...

분위기는 대충 파악했으니 이제 일을 할 차례. 그냥 차려 놓고 알아서 구경하는 종합 게임쇼가 아닌 명백한 테마를 지닌 게임쇼의 경우, 처음이 가장 중요하다. 보통 행사가 시작되면서 메인 스테이지에 높은 직급의 사람이 나와 새로운 소식을 발표하는데, 이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면 행사 취재 전체가 망한다. 여기서 발표한 내용을 기반으로 이어질 인터뷰 질문을 짜고, 시연 시 집중해서 봐야 할 점들을 미리 파악해야 하며, 이후 유저들의 동선을 예측해 사람이 안 몰릴 곳부터 잽싸게 취재를 마쳐야 한다.



▲ 메인 쇼는 보통 이렇게 무대에서 진행된다.

이쯤 되면 긴장이 슬슬 올라오면서 귓속으로 파고드는 영어들이 달팽이관을 간지럽히며 베베 꼬여버리지만, 언제나 답은 있다. 들리는 만큼만 적고, 안 들리는건 한국에서 생중계를 듣는 기자와 크로스체크를 통해 파악하면 된다.

재미있는 건, 엑자일콘의 쇼를 진행한 패널의 구성이었다. 일반적인 게임 쇼에서 첫 순서는 회사의 최고 책임자가 맡는다. 보통 CEO가 나와서 이런 저런 덕담과 함께 짧게 인사를 던지는데, 좀 노골적으로 요약하면 "저는 좋은 말만 하고 갈 예정이니 욕은 다음에 올라오는 PD에게 해 주세요"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런데, 엑자일콘은 이 일반적인 구성을 깼다. 초반에 인사를 나온 대표 '크리스 윌슨'이 곧 들어갈 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는데, 중반 이후 갑자기 다시 나오더니 게임 내 콘텐츠에 대한 디테일한 정보를 하나하나 읊어주기 시작했다. 단일 게임으로 먹고사는 개발사의 장점이랄까. 보통 여러 타이틀을 굴리는 개발사의 대표정도 되면 게임 내 디테일은 PD가 알지 대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크리스 윌슨 대표는 본인이 나서서 게임 디테일을 관객에게 퍼부어대고 있었다. 렉스 루터 닮아서 빌런같다고 생각했는데, 다 보니 히어로였다.



▲ 메인 쇼의 시작과 끝을 모두 담당한 '크리스 윌슨' 대표

행사가 끝나고 이어지는 건 줄서기. 게임 쇼를 관객의 입장에서 참가한다는 건 '모두가 자유이용권을 가진 놀이공원'과 비슷한 체험이라 할 수 있는데, 무엇을 하든 줄을 서야 한다. 게임을 시연하든, 굿즈샵을 가든, 하다못해 군것질거리를 사거나 굿즈샵을 가려 해도 줄을 서야 한다.



▲ 시연하려면 줄을 서는 건 기본



▲ 굿즈를 사려 해도 줄을 서야 하는 게 기본



▲ 그렇게 30분을 기다려 들어간 굿즈샵 상품들은 대부분 의류였다



▲ 요건 좀 끌리던 커런시 주기율표

물론, 모든 코너가 인기있는 건 아니다. 과거 2019년에 블리즈컨을 방문했을 때가 아직도 기억나는데, 다른 부스는 2시간씩 줄을 서는 반면 디아블로 이모탈은 줄이 없어 기계가 놀고 있었다. 물론 그 당시 이모탈은 그럭저럭 괜찮게 나온 게임이었지만, 게임쇼를 직접 방문할 정도의 코어 팬들을 유혹하기엔 아마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이쪽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기에 작게 마련된 POE 모바일 시연 공간은 항상 여유로웠다. POE2 시연에 시간 제한이 걸려있었기에 얼마나 할 수 있냐고 물어보자 "그냥 하고 싶은 만큼 해도 됨"이라더라.



▲ 여기만 텅텅쓰...

별개로 행사장 디자인은 매우 뛰어났다. 하나의 무대와 작은 부속 공간들로 이뤄진 현장이기에 사실 뭐가 많진 않았지만, 그 와중에도 넣을 수 있는 건 다 넣어둔 모양새인데, 입장과 동시에 볼 수 있는 조형물의 퀄리티가 기가 막혔다. 무려 2층 높이로 설치된 조형물의 하단부는 방송에 출연하는 패널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 입장과 동시에 보게 되는 풍경, 드라이아이스를 슬쩍 깔아둔게 압권이다.



▲ 밑에서 올려다 보면 이런 모습

그렇게, 그날 작성할 기사 만큼의 기삿거리를 확보했으면, 이제 숙로 들어가서 작업하는 과정의 반복이다. 사실상 시간이 정해진 메인 행사만 잘 처리하면 취재 난이도가 그리 높진 않은 편이다. 엑자일콘의 경우 명확하게 중요한 타이틀이 존재했기에 더욱 쉬웠던 취재. 별로 어렵지 않음에도 '빛과 어둠'이라는 제목을 쓴 이유는 지난 편이 너무 어둠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엔 빛으로 쳐도 뭐...

보통 이렇게 돌아가는 길에 건너뛴 끼니도 해결하고, 에너지 드링크나 커피도 보충하면서 복귀하기 마련인데, 오클랜드는 다른 출장지와는 사뭇 달랐다. 가장 가까운 식당 이름이 '강남X'이고 두 번째로 가까운 식당이 'XX곱창'이길래 GPS가 잘못 찍힌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한식당이 많고, 편의점에도 한국 상품이 많다.



▲ 생전 처음 온 출장지에서 대학교 밥집의 느낌이...



▲ 한국 수입품인줄 알았는데 검색해도 안나온다. 아마 뉴질랜드 로컬 김인가보다


이튿날엔 취재 일정을 마치고 근처를 좀 돌아보았다. 그냥 시티투어 느낌보다는 뉴질랜드에도 아케이드 게임장이나 게임스탑같은 매장이 있을까 싶어 둘러 보았는데, 생각보다 재미있는 모습들이 많이 보였다.



▲ 뉴질랜드의 빛과 어둠... 우측에 사람 누워있는걸 기사 쓰다 알았다. 분명 없었는데.



▲ 혹시 있나 하고 찾아보다 진짜 찾아버린 아케이드



▲ 뭔가 익숙한 친구도 보이고



▲ 기념비적인 클래식 아케이드 게임도 보인다. 무려 아타리 거다.

그렇게, 2일 간 진행된 엑자일콘이 마무리되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해외 출장으로서의 난이도는 빛과 어둠 중 하나라면 '빛'에 가까웠던 행사. 뉴질랜드 특유의 영어 악센트와 핵앤슬래시 게임 유저들의 겁나게 빠른 혓바닥이 어우러져 몇 번 정도 두뇌 과열이 오긴 했지만, 그래도 할 만 했다. 이번 행사는 7월이라 겨울이었으니까. 무엇을 생각해도 비교군이 GDC였던 만큼 어렵게 느껴지진 않았을 테지만, 단일 게임으로 단일 개발사가 인구 수도 적은 나라에서 이 정도 규모의 행사를 진행하는 모습을 보는 건 꽤 인상 깊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POE2가 잘 되길 한 번 쯤 응원하게 된다.잘 되어야 엑자일콘도 계속될 거고, 국내외 곳곳에서 이런 리틀 게임쇼가 더 활발히 진행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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