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소셜펀딩 1,500만 원 돌파! 또 하나의 TRPG '던전월드'를 만나다

인터뷰 | 이종훈 기자 | 댓글: 5개 |
벌써 10년도 더 된 이야기입니다.

중학교 1학년 시절이었죠. 당시 흠뻑 빠져있었던 모 게임의 세계관에 매료되어 심심풀이로 간이 게임을 만든 적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운영자라 칭하며 관심을 보이던 친구들에게 함께 플레이해보자고 꼬드기던 기억들. 정말이지 지금 되돌아보면 그야말로 '손발이 오그라드는' 일이었습니다.

콘솔 게임은 이미 성행하고 있었고, 온라인 게임의 개념도 보편화되어있던 때였음에도 그런 아날로그적인 방식의 게임에 재미를 느꼈던 이유는 지금 생각해보면 '친구들과 함께 하는 것' 자체가 즐거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흔하지 않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 날의 만남에는 좀 더 특별함이 있었습니다. 철부지 시절 재미삼아 만들었던 조잡하고 허점투성이의 게임이 사실은 'TRPG'라 불리는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장르의 일종이었다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도 여전히 그 방식이 맥을 이어나가고 있고, 적지 않은 유저들이 즐긴다는 점이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TRPG 룰북 출판에만 15년 여를 매진해온 도서출판 초여명의 김성일 편집장. 그와 마주앉은 아담한 카페에서 새로 출간되는 TRPG '던전월드'에 관한 설명을 들었고, TRPG만이 가지는 매력을 논했습니다. 게다가 '제대로 갖춰진 TRPG'가 무엇인지 직접 맛까지 봤으니, 이만하면 정말 알찬 만남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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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출판 초여명의 김성일 편집장은 TRPG에만 15년의 애정을 쏟은 사람




지난 6일 출간이 확정된 이후에도 빠른 속도로 모금액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벌써 1,500만 원을 넘어섰는데, 소감이 어떠신가요?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빨리 모이다보니 아직도 얼떨떨합니다. 후원해주신 분들에게 드릴 특전 한 가지를 고민하다보면 어느새 다음단계 목표액수를 넘어서는 일이 몇 번 반복됐는데요. 그러다보니 동시에 고민해야할 문제도 많습니다. 출간으로 인한 손익을 맞춰보기 어렵다는 건 그것들을 해결한 다음 문제죠.




모금액이 많아질수록 책의 퀄리티가 더 높아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금액이 많이 모이는 것에 따른 부담감도 없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책 퀄리티를 어떻게 더 높일까를 정하는 것은 물론 책 외에 제공될 별도의 보너스를 정하는 것도 고민입니다. 행복한 고민이죠. 그만큼 '던전월드'의 출간을 기대하고 지지해주는 분들이 많다는 의미니 말입니다.

텀블벅에서 제공하는 인기 프로젝트 순위에서도 첫 페이지에 올라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과입니다. (12일 인터뷰 당시 인기순위 9위) 널리 알려진 유명 프로젝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영광스럽고 고무적인 일입니다.



▲ 인터뷰 당시 인기순위 9위, 16일 현재는 3위까지 올라섰다





TRPG 룰북 출판에만 굉장히 오랜 시간을 몸담아 오셨습니다. 한 분야에 이토록 오랫동안 애정을 쏟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 일을 처음 시작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을까요?

대학 시절 '서울대 RPG 연구회'와 같은 교내 동호회도 있었고, 통신을 기반으로 한 동호회 활동도 많이 했었습니다. 전반적으로 TRPG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끼리 교류가 많던 시기였거든요. 무엇보다도 TRPG를 통해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됐으니 정말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저는 사법시험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정말 하기 싫더라고요(웃음). 그래서 좋아하는 TRPG를 놓고 이해타산을 계산해봤습니다. 쉽게 말해 이걸 가지고 먹고 살 수 있을지를 생각해본 거죠.

겁스(GURPS)를 가지고 이래저래 계산을 해보니 어느 정도 가능할 것 같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번역을 하고 천상 안해봤던 인쇄소 출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이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집안 형편도 그럭적 괜찮았고, 무엇보다 프리랜서 번역으로 버는 수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시행착오도 꽤 있었던 때라서 만약 큰 기업들이 이 분야에 손을 댔다면 아마 포기하거나 그 흐름에 편승했을지도 모르겠네요.




긴 시간동안 TRPG를 놓지 않았던 것은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TRPG하면 대표적인 예로 언급되는 작품이 던전 앤 드래곤(이하 D&D)인데요. 사실 D&D 안에는 컴퓨터를 통해 즐겼던 '파이널판타지'라든가 '툼레이더' 같은 게임들의 모든 요소가 존재합니다. 몬스터를 사냥해 아이템을 얻고 레벨을 올린다는 개념을 비롯한 RPG의 모든 요소가 담겨있다는 겁니다. 사실상 컴퓨터나 비디오 게임들의 발전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한 셈이죠.

컴퓨터 게임이 고도로 진화함에 따라 TRPG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됐습니다. 이를테면, 게임을 진행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장르는 이것 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플레이어 자신이 배우, 작가, 관객 등 모든 시각에서 바라보면서 게임을 직접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겁니다. 바로 그 부분을 포착해 이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음,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는 의미를 예를 들어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최근에 플레이했던 '바이오쇼크 인피니트'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정말 흠잡을 곳 없이 훌륭하고 잘 만들어진 게임이라는 점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미 만들어진 프레임 안에 플레이어가 초대받는다'는 것은 변하지 않지요. 그건 게임의 완성도와 예술성과는 별개의 문제거든요.

TRPG에서 이야기를 만들어간다는 것은 룰북을 기반으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이 직접 게임의 커다란 틀부터 세세한 구성요소까지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룰에서는 게임의 재미를 위한 최소한의 틀만 제공하고, 나머지는 유저들의 상식과 서로 간의 합의로 채워가는 것이 TRPG에서 말하는 자유도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세부적인 예를 들자면, 땅을 파고들어 공격하는 몬스터가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컴퓨터 게임에서는 '땅을 파는데 걸리는 시간', '어느 경로', '어느 정도의 데미지를 입히는지'를 모두 공식적으로 정해둡니다. 하지만 던전월드에서는 '땅에 들어갑니다' '나와서 공격합니다'가 끝입니다. 중간 과정은 모두 플레이어들이 만들어가도록 자유롭게 풀어둔 것이죠.

예를 들어, 땅 속으로 들어간 몬스터가 플레이어를 공격하려고 할 때, '성공-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성공-약간의 피해를 입습니다', '실패-세 마리의 몬스터가 튀어나와 플레이어를 공격합니다'라는 식으로 세세하게 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의 경우 제가 생각한 지극히 일부의 예일 뿐이고, 실제 플레이를 하게 되면 그때마다 훨씬 다양한 상황이 연출될 수 있을 겁니다.




굉장히 복잡하고 심오한 개념이네요. 그렇다면 게이머들 사이에 흔히 사용하는 '자유도'라는 말로 이해하면 될까요?

음, 그렇게 생각하시면 조금 곤란합니다. 통상적으로 말하는 자유도 개념과는 차이가 있어요.

흔히 자유도가 높다고 표현하는 게임인 'GTA' 시리즈를 놓고 보겠습니다. GTA에서는 플레이어가 무엇을 하든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무고한 시민에게 위해를 끼쳐도 상관없고, 차를 타고 길거리를 폭주해도 됩니다. 게임 상의 경찰에게 붙잡히지만 않는다면요.

그런 식의 자유도는 TRPG에 도입하기가 힘듭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대화와 합의를 전제로 만들어나가는 게임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마음대로 할 수는 없습니다. 규정을 무시하고 '어떤 유저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하겠다'라고 한다면 다른 플레이어들이 수긍할 리가 없겠죠.

즉, 플레이하는 세계와 그 안의 구성요소는 만들어갈 수 있되,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고려해야한다는 조건이 붙게됩니다.






▲ TRPG에서 만들어지는 이야기는 GTA에서와 같은 '자유도'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D&D나 GURPS의 사례를 보면 룰북을 기반으로 정해진 어느 정도의 규칙이 있는데, 그렇게 자유롭게 게임을 만들어가도 되는 건가요?

룰북은 단어 그대로 보면 '규칙을 적어놓은 책'이지만, 룰북에 적힌 세부적인 게임의 룰을 통상적인 '규칙'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봅니다. 수많은 세부 룰 중 하나를 뺀다고 해서 게임의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으니까요.

예를 들어 볼까요. 축구 경기에서 오프사이드 룰을 뺀다고 하면 그것은 축구라고 볼 수 없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D&D 룰북에서 세계관의 핵심이 되는 룰을 빼버린다면 그것은 다른 게임이 되어버리겠지요. 하지만 그 안에 존재하는 세부적인 룰 중에는 TRPG로서 D&D의 본질을 해치지 않는 수준의 룰들이 있습니다. 그 중 몇 가지를 적용하지 않거나 바꿔서 적용하더라도 게임에는 큰 지장이 없는 셈이죠.




그런 특징들을 감안할 때 '던전월드'는 어떤 게임인지, 다른 게임들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설명해주신다면요

D&D와 GURPS와 같은 TRPG에서 게임의 마스터가 마치 '신'과 같은 역할이었다면, '던전월드'에서의 마스터는 조금 다른 위치에 있는 '플레이어'의 한 사람이라고 보는 편이 적절합니다. 마스터조차도 앞으로 게임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플레이를 지켜보면서 알아내야하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던전월드'에서는 마스터로 하여금 이야기를 미리 준비하지 말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동안의 TRPG는 마스터가 게임을 시작하기 전 이야기를 어떻게 진행해나갈지를 어느 정도 미리 준비해오는 경향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던전월드'는 정해진 룰만으로도 충분히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으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전에 RPG 이론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마스터가 이야기를 만들어서 배포하는 것은 TRPG에서는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적었었습니다. 그것은 컴퓨터 기반으로 만들어진 게임들이 훨씬 잘해줄 수 있으니까요. 사람들이 둘러앉은 테이블 위에서 모두가 참여하는 상황으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 TRPG에 더 적합하지 않겠냐는 내용이었지요.

사실, 플레이할 때마다 서로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진다는 특징이 '던전월드'에서 처음 시도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기존의 모든 시도를 깔끔하게 정리해서 내놓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TRPG에서 '엔진'이라고 하면 게임의 핵심적인 룰을 지칭하는데요. '아포칼립스 월드 엔진'이라 불리는 룰을 기반으로 파생된 인디 RPG 중 제가 알고 있는 것만 해도 10종류 정도 됩니다. 그 중에서 가장 성공적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면에서는 아포칼립스 월드 원작보다 더 잘 만들어지지 않았나 생각하는 것이 '던전월드'입니다.

한 편의 이야기를 볼 때, 사건과 사건 사이의 중간과정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큽니다. 바로 그 중간과정을 자유롭게 만들어갈 수 있게 한다는 점이 '던전월드'의 강한 매력입니다. 룰북을 토대로 큰 붓으로 밑그림을 그려놓고, 그 안의 세세한 디자인은 플레이 자체에 맡긴다고 할까요.

'영화를 찍는다'고 생각하시면 좀 더 빨리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영화를 찍을 때 어떤 이야기를 보여줄지가 정해지고나면, 그것을 어떻게 풀어갈지는 감독의 재량입니다. 즉, '이 게임을 어떻게 연출할 것인가'를 마스터와 플레이어들이 직접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 아포칼립스 월드 엔진을 기반으로 만든 '던전월드'
아포칼립스 월드 홈페이지에도 명시되어 있다





프로젝트 페이지 FAQ를 통해 '회사의 형편과 이상에 맞는 후보'를 언급하신 적이 있는데요. 그렇다면 던전월드는 그 조건에 부합한다는 의미가 되는데요.

일단 형편에 부합한다는 것은, 라이선스를 따로 받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공개 라이선스기 때문에 로열티를 따로 지불할 필요가 없거든요. 실제 원작자분과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한국어로 출간된다는 사실에 매우 흡족해하셨습니다.

또한, 제 입장에서 생각하는 'TRPG가 갖춰야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상'에 들어맞습니다. 앞서도 계속 설명드렸지만, 누구든지 같이 플레이할 사람만 있다면 자신들의 취향에 맞춰 게임을 만들어나갈 수 있으니까요.

영어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다양한 철학과 다양한 개념을 한국에 전할 수 있는 매력적인 RPG가 지금까지는 없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만, '던전월드'는 그 부분에 딱 부합하는 작품입니다.




D&D와 GURPS 외에 국내에 출판된 다른 TRPG가 있나요?

물론입니다. 최초로 정식출판된 '라콘도리아'라는 국산 TRPG가 있습니다. 98년도 쯤이었을 겁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학생이 초기 버전을 혼자 만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학생의 아버님이 서울로 올라오셔서 함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아버님 말씀에 의하면 다른 어떤 게임의 영향도 받지 않고 혼자서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겨울가족 출판사라는 이름으로 서점에 출간된 적이 있었고, 지금은 절판됐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국내 서점에서 아직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아마추어 작품이긴 합니다만, '국내 최초의 TRPG'라는 타이틀을 쥐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작품입니다. 원작자가 지금은 뭘 하고 있는지 전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 안타깝네요.



▲ 최초의 순수 국산 TRPG, '라콘도리아'





기존에 없던 소재로 TRPG 룰북을 직접 만들어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이를테면 무협 소재의 TRPG 같은 것 말이죠.

제가 무협 마니아라고 자처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닙니다만, 무협 관련 이야기를 많이 읽긴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무협작가도 꽤 되고요. 하지만 독단으로 만드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이 분야를 더 잘 아는 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사실상 TRPG 룰북 출판이라는 분야의 형편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는 입장이다보니 쉽지 않습니다. 돈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선뜻 함께 해줄 사람을 섭외하는 것도 어렵지만, 순수하게 의욕을 갖고 하고자 하는 분이 있다 해도 그 분에게 이런 상황을 곧이곧대로 말씀드리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도 고민이고요.

욕심은 있지만 이런저런 상황을 고려할 때 여의치 않은 입장이라고 할까요.




TRPG 장르 자체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추가적으로 궁금해하는 부분이 있을 것도 같은데요. 비공개적 루트로 접수된 문의사항이 있었나요?

하나도 없었습니다(웃음). 아, 혹시 출판된 뒤에 책을 받아보시고 나면 내용에 관한 문의사항이 있을 수는 있겠네요. 이를테면, '책에 이런 내용이 있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혹은 '책에 없는 내용이 있는데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할까요'와 같은 의문 말입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던전월드'는 앞서도 계속 설명했듯 큰 그림을 그려놓고 플레이어들이 알아서 하는 방식입니다. 때문에 그런 문의가 많지는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혹여 그런 부분에서 문의하신다면 저희는 '이렇게 해야한다'는 원칙이 아니라 '이런 방식을 취할 수 있다'라는 식의 아이디어 정도는 드릴 수 있을 겁니다.




프로젝트 기간이 아직 40일이 넘게 남았습니다. 후원 총액이 현재 예상하시는 것 이상으로 모금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어보이는데, 특전을 기획하시는 것도 만만치 않겠습니다.

다행히 몇 가지 더 생각해둔 것이 있습니다. 다른 필진을 좀 더 섭외해서 책의 내용적 퀄리티를 높일 수도 있고, 특전으로 드리는 한정판 자료집을 좀 더 보강해 제본 질을 높일 수도 있습니다.

아이디어는 많지만 어느 정도가 적절한지에 대해서 수많은 의견을 교환하고 있습니다. 이건 가끔 드는 생각인데요. 후원해주시는 분들이 목표액을 넘기는 것을 일종의 단계별 던전 공략하듯 즐기고 계신다는 느낌도 없잖아 있습니다(웃음).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으로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요

던전월드의 공개판 내용이 웹페이지에 있으니 그것을 더 많은 분들이 보고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이번 후원을 통해 TRPG를 오랫동안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음을 보여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네요.





▲ '마스터'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며 만들어본 '던전월드' 캐릭터


인터뷰를 마친 뒤 현장에서 직접 '던전월드' 캐릭터를 만들어봤습니다. 성기사와 도적, 두 개의 캐릭터를 만들었는데요. "캐릭터 세팅에서 설정된 내용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자유롭게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 TRPG의 매력"이라는 것이 김성일 편집장의 설명입니다.

아래는 만들어진 캐릭터 세팅을 이용해 기자가 작성해본 가상의 이야기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캐릭터 설정에 들어있는 내용은 굵은 폰트로 표시했습니다.

그 둘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마치 개와 고양이가 함께 다니듯 데면데면한 사이 같다고 할까.

"일행 아니오?"

가죽옷 차림의 하플링 남자는 손에 든 술잔을 한 모금 들이키더니 퉁명스레 대꾸한다.

"뭐 그렇다고 해두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찌됐든 일단 같이 움직이고는 있으니."

그는 술잔을 든 손목을 까딱거리며 나란히 앉아 눈을 감고 있는 갑옷차림의 사내를 흘겨본다. 그러고는 기분이 나쁘다는 듯 얼굴을 묘하게 일그러뜨리며 남은 술잔을 마저 비운다.

술집이라는 곳을 오랫동안 운영하다보면 별의별 길손들을 다 만나게 되고, 그러다보면 사람을 보는 직관이라는 놈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 중에서 이따금씩 보이는 그야말로 '속을 알 수 없는' 부류가 있다. 바로 오늘, 이런 손님들처럼 말이다.

조금 전 툴툴거리던 하플링 남자는 후드를 눌러쓰고 검은색 가죽옷을 입은 깡마른 체형이다. 허리춤에 몇 자루의 짧은 단검과 조그마한 약병을 매달고 있는 행색으로 보아 도적인 듯 하다.

그와 함께 앉아있는 사내는, 십자가 형태의 화려한 표식을 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교단 사람이다. 깨끗하게 손질된 미늘갑옷과 성표로 보아 성기사라고 보는 쪽이 옳을 게다.

자, 벌써부터 이상한 조합이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상식 선에서, 도적과 성기사는 상극이다. 굳은 도덕적 신념으로 무장한 채 자신이 모시는 신의 의지를 대행하는 성기사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교활함의 상징 도적.

개인의 성격이 어떤가는 둘째치고, 하는 일의 가치관부터가 판이하게 다르다. 대체 이 괴상한 파티(Party)는 어떻게 결성된 것일까.

"쳇, 오늘도 허탕이군. 이봐, 비스바덴. 난 먼저 올라가 쉬겠어. 내일 보자구."

틈틈이 눈을 굴리며 뭔가를 노리는 듯한 눈치의 하플링 남자는 불쾌하다는 기색을 잔뜩 내비친 채 방으로 올라가버렸다.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남자, 비스바덴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주인장. 버그 녀석과는 도무지 말을 섞고 싶지 않아서요."

그의 이름이 버그인가보다. 하플링의 네이밍 센스는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들다. 물론 이 남자의 이름도 매우 낯설게 느껴지긴 하다. 아마도 교단에서 내린 세례명을 본명처럼 쓰고 다니는 것이리라. 하긴,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신경쓰지 마쇼. 이 일을 하다보면 종종 있는 일이라오. 거 이야기나 들어봅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단둘이 다니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거든. 대관절 무슨 곡절로 엮인 사이요?"

비스바덴은 내가 내어준 음료를 받아 한 모금 마신 뒤 입을 열었다.

"약점을 잡고 있다고 할까요. 저 녀석이 값진 물건 하나를 훔쳤는데, 멍청하게도 그걸 예배당에 숨겼더군요. 마침 여행 중이던 제가 묵고 있던 교회의 예배당이었지요. 새벽에 기도를 드리러 갔다가 발견해 가지고 있었는데, 어디서 들었는지 저를 찾아와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더군요."

"허허, 거참 괴상한 인연이로군. 헌데, 어떻게 같이 다니게 된 거지?"

"훔친 물건임을 알게 됐으니 당연히 주인에게 돌려주려고 했지요. 그런데 버그 녀석이 그를 죽이고 다시 뺏어올 거라 협박하더군요. '남의 물건임을 알고서도 돌려주지 않은 죄'와 '누군가의 죽음을 방조하는 죄'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적어도 제 상식 선에서의 답은 뻔합니다. 버그 녀석 몰래 주인에게 전후 사정을 전하는 전갈을 띄우고 그대로 마을을 떴습니다만 반나절도 안 되서 따라오더군요. 같이 다닌지도 벌써 수십여 일입니다."

"수십여 일? 몰래 훔쳐서 도망가기엔 충분한 시간이지 않소?"

"맞습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충분히 그럴테지요. 하지만 저는 모시고 있는 신으로부터 좀 특별한 축복을 하나 받았습니다. 먹고 마시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고, 잠을 안 자도 피로를 느끼지 않지요."

흥미로운 케이스다. 아니, 그 도적의 입장에서 보자면 문자 그대로 '개같은' 경우겠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는다니, 이미 인간의 범위를 초월한 것이 아닌가.

"그래도 혹여 신변에 위협이 되기 전에 떼어내야하지 않겠소?"

"그러고 싶어도 딱히 그럴 방법이 없습니다. 게다가 이상한 건, 제가 일부러 무방비 상태를 보여줘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겁니다. 뭐, 이건 저 혼자 추측해본 것입니다만, 만약 녀석의 본심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면 언젠가는 바른 길을 찾도록 인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교화라? 도적을 신의 품으로 받아들이다니, 재미있는 발상이구만."

흥미로운 만남, 흥미로운 이야기. 이 두 사람의 이야기가 당분간 궁금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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