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기고] 페이커를 만든 사람들 - ③ ‘푸만두’ 이정현이 남긴 유산

기획기사 | John Popko,장다솔 기자 | 댓글: 38개 |
본 시리즈는 인벤 글로벌 기자 존 팝코(John Popko)가 작성한 페이커 특집 기획기사입니다. 기사는 총 8부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번 편은 '푸만두' 이정현 편입니다.




괜히 대한민국에서 ‘페이커’ 이상혁이 나온 것이 아니다. 다른 분야를 보더라도 강한 지역에서 뒤어난 인재가 나온다. 마찬가지로 페이커는 이스포츠가 가장 강한 지역에서 나왔다. 물론 애초에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재능을 꽃피우기 위해 단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애초에 한국이 리그오브레전드를 지배하게 된 것은 신기한 일이다. 고작 5천만 인구의 나라가 지구상에서 가장 인기있는 게임의 메카가 됐다. 다른 나라들은 더 많은 선수와 자본이 있었지만 한국 팀들은 정말 오랜 기간동안 무적에 가까웠다.

이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이유는 오래 전 국민게임이었던 ‘스타크래프트: 브루드워’다. 이 게임을 통해서 한국 국민들은 한 발 앞서 시작할 수 있었다. 능숙한 매니지먼트, 통찰력 있는 코치들, 그리고 스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어마어마한 게이머 군단 등이 십여년 간 구축된 인프라를 통해 발전했다. 이런 시스템이 페이커와 같은 원석을 더더욱 빛나게 갈고 닦았다.



▲ 스타크래프트 e스포츠 발전에 이바지한 'iloveoov' 최연성

한국이 리그오브레전드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이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무시했다. 스타크래프트에서의 성공적인 행보가 리그오브레전드와 관련이 없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다른 나라들은 더 오랜 기간동안 MOBA 장르를 플레이했고, 리그오브레전드 이전에는 ‘디펜스 오브 디 에인션트(DOTA)’라는 게임도 있었다. 일부 한국인들은 초기부터 북미 서버를 통해 리그오브레전드를 즐겼지만,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한국이 어떻게 이 새로운 장르의 게임을 빠른 속도로 장악했는지 의아해한다.

이들이 잘 몰랐던 것은 한국에서 MOBA 장르가 그렇게까지 새로운 장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수천의 직관팬들 앞에서 스타크래프트 대결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다른 게이머 무리는 카오스라는 게임을 즐겼다. 사실 프로는 거의 없었고, 상금이나 명예도 크지 않았다. 하지만 이 게임에 대한 경쟁심 하나만큼은 최강이었다. 그리고 그 소소한 현장은 이후 다가올 새 바람에 가속도를 붙였다. ‘스코어’ 고동빈, ‘마린’ 장경환이나 페이커 본인 등, 수많은 1세대 리그오브레전드 프로 선수들은 카오스를 즐기며 MOBA 장르에 대한 예열을 마친 상태였다.

리그오브레전드로 넘어간 카오스 선수들이 모두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페이커의 경우, 아직 십대 초반의 나이였고 공식 카오스 대회에 출장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SKT T1 팀원 중 한명은 역대 최고의 카오스 선수였다. 페이커의 첫 롤챔스 우승과 첫 롤드컵 우승을 팀의 주장으로서 함께한 사람. 이스포츠 역사상 가장 저평가된 선수. 바로 ‘푸만두’ 이정현이다.




걸맞는 이름

카오스는 디펜스 오브 더 에인션트의 변형이었다. 사실 두 게임은 꽤 다른 게임이었다. 가장 큰 차이점은 게임의 속도였고, 한글로 먼저 번역된 것은 카오스였다. 2000년대 당시에 카오스는 수많은 유저가 있었고 사람들은 클랜을 만들어 대결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정식 대회가 열리기 시작했고, 나이스게임TV의 카오스 클랜 배틀(CCB)이라는 중심축이 되는 대회가 생겼다.


저명한 방송국과 작은 스폰서가 몇몇 있었지만 전반적인 인프라는 소소했다. 제대로 된 지원을 받는 팀은 없다시피 했고, 대부분의 경기는 온라인으로 치러졌다. 대회들은 이름처럼 전체적으로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 진행됐다. 하지만 이 혼돈의 폭풍 속에서 한국 이스포츠를 영원히 바꿀 여러 마스터마인드가 등장했다.

푸만두의 성향은 카오스로 설명을 할 수가 있다. 방송 중 때로는 세 개의 게임을 동시에 플레이 하기도 했다. 카오스, 테트리스나 판타지 마스터즈, 그리고 윈도우 카드놀이. 아이리스(iRis)나 씨맥스(CMaX)소속으로 코치(Coach)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활동한 푸만두는 이 게임의 최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세 개의 CCB 대회 우승과 MVP를 거머쥐었고, 이 게임에 대한 특유의 이해도와 플레이스타일이 주목받았다.




2010년대 들어 리그오브레전드로 전향하자, 팬들은 카오스의 전설이 새 MOBA 장르 게임에 적응하는 것을 기대했다. 과거 감전 사고로 인한 지병이 있음에도 군 문제를 해결해야 했던 푸만두는 다소 늦게 리그오브레전드 씬에 등장했다. 2012년 제대 이후 GSG 소속으로 2012-2013 OGN 챔피언스 윈터에 처음 등장한 푸만두는, 곧바로 카오스에서의 야성적이고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플레이를 리그오브레전드에서 재현해냈다.

변화에 대한 익숙함

푸만두가 카오스에서 이룩한 명성은 그의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리스크를 감수하는 플레이었다. 그는 메타를 따르지 않았다. 그는 다양한 원포인트 캐릭터를 가지고 다른 방향으로 맹활약을 하는 모습을 보였고, 팬들은 그의 변형 전략들이 효과적이지만 해당 캐릭터의 너프를 불러오는 주범이라고 농담하곤 했다.

운영 전략이나 아이템 빌드 등과 같은 요소들은 푸만두에게는 재미있는 실험실과도 같았다. 그는 게임에 있는 갬블 요소의 아이템들을 최대한 활용했다. 카오스에서 갬블은 강력한 아이템을 얻을 수 있지만 단순히 골드를 낭비하게 될 수 있는 리스크도 있었기에 많이 사용되지 않았지만 푸만두는 반대로 자주 구매를 했다. 일례로, 기지의 대부분이 파괴되고 온전히 지고 있던 게임에 재차 갬블을 시도하고 기적의 역전극을 펼친 바 있다.




카오스에서처럼 GSG 시절 초반, 푸만두는 럭스나 르블랑 같은 챔피언들을 서포터 포지션에서 선보였다. 당시에는 말 그대로 미친 짓. 경기가 잘 풀리지는 않았지만 푸만두가 카오스에서 보였던 스타일리쉬함을 잠시 맛볼 수 있었다. 그의 획기적인 챔피언픽과 전략들은 2012-2013 NLB 결승에서 진가가 드러났다. 한국의 보조리그 격인 NLB에는 KT 롤스터나 CJ 엔투스같은 엘리트 팀들도 참여했다. 결승에서 CJ 엔투스를 만난 푸만두는 경기를 5세트까지 끌고가는 이변을 단행했고, 해당 5세트는 아직까지도 리그오브레전드 이스포츠 역사상 가장 특이했던 경기 중 하나로 남아있다.

GSG, 광주 산성 골프장의 이니셜을 딴 이 팀은 이스포츠씬에서 가장 큰 팀 중 하나를 이기게 된다. 아직까지도 이와 같은 이변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푸만두는 당시 잉어킹 정도의 성능을 가졌던 하이머딩거를 플레이하며 빠르게 CJ 엔투스의 미드라인을 밀었고, 경기 개시 10분만에 CJ 엔투스의 억제기를 부수는데 성공한다.


이 경기는 단순한 솔랭이나 친선경기도 아니었고, 소위 ‘즐겜’ 매치도 아니었다. 이 경기는 세계 최고 지역의 두 번째로 권위있는 대회 결승의 최종 결정전이었고 이것이 바로 푸만두의 플레이 방식이었다. 다니엘 “디곤” 곤잘레스는, “이 경기를 보며 믿을 수 없었다”고 말하며 “이 경기를 본 모두는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를 생각하며 최종전인 5세트에서 이런 전략을 펼칠 수 있는 자신감에 찬사를 보냈다”고 설명했다. 이것이 바로 푸만두가 플레이했던 방식이다.

같은 카오스 출신이었던 SKT T1의 감독, ‘꼬마’ 김정균은 푸만두를 팀의 서포터로 영입하기 위해 눈여겨보고 있었다. 푸만두가 리그오브레전드 경력은 짧았지만 그의 카오스 실력을 감안했던 ‘꼬마’ 김정균에게는 승산 높은 도박이었다. 사실 푸만두의 잠재력을 가장 의심했던 것은 페이커였다.




사실 SKT T1 소속으로 플레이했던 푸만두의 첫 시즌은 지각변동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의 특이한 ‘사파’ 플레이에 대한 명성은 이어갔다. 서포터 포지션에서 푸만두는 모데카이저같은 픽들을 선보였고 피들스틱을 정상적인 픽으로 탈바꿈시키거나, 경기 중에는 챔피언들의 성향을 바꿔버리는 유니크한 아이템빌드를 채택했다. SKT T1에서 첫 데뷔 시즌은 3위로 마감했고 이륙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화려함보다는 안정감

카오스에서 푸만두에게는 유니크함만큼 중요했던 것이 팀원들과의 시너지였다. 그는 최고의 선수 이상이었다. ‘말퓨리온’ 윤도경과 함께 푸만두는 카오스 최강의 원투펀치를 만들어냈다. 당시 12개의 CCB 대회를 한 팀으로 출장했고 세 개의 우승을 차지했으며 카오스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면들을 함께 만들어냈다. 팀워크는 푸만두 DNA에 각인되어 있었다.

푸만두는 자기 팀이 이기기 위해선 어떠한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카오스에는 리그오브레전드와 같은 전통적인 포지션이 없지만, 되려 카오스에서 더욱 서포터적인 플레이를 했다. 때에 따라서 필요하다면 캐리가 필요한 데미지딜러 역할도 수행했다. 푸만두는 빛나는 활약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출중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경기에서 팀의 활약에 중점을 뒀다.




리그오브레전드에서는 ‘매드라이프’ 홍민기나 ‘마타’ 조세형과 같은 화려한 선수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푸만두는 카오스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본인의 스타일로 조용히 빛났다. 푸만두가 당시 기여했던 것에 대해 물었을 때, 페이커는 푸만두가 “다양한 방법으로 팀을 도왔다”고 말했다.

인벤 글로벌과의 대화에서 ‘DoA’ 에릭 론퀴스트는 푸만두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푸만두는 자기 역할에 충실한 선수였고, 서폿이 해야만 하는 것들을 했다. 그는 플레이메이커가 돼야 할 정확한 순간을 알고 있었고, 자제해야할 때를 알고 있었다. 보통 푸만두 정도의 능력이 되는 선수가 리그에 존재한다면 슈퍼플레이를 자주 만들어낸다. 대표적인 예는 매드라이프다. 매드라이프는 슈퍼플레이를 정말 자주 보였고, 그런 만큼 멋졌다. 그런 슈퍼플레이들은 가끔 리스크가 있었지만, 사실 그런 리스크가 더 대단하게 만든다. 반면에 푸만두는 그런 플레이를 만들어낼 능력이 있었지만 팀원들이 빛날 수 있도록 돕는 것에 더욱 집중했다. 분명 푸만두도 그런 슈퍼플레이를 할 수 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지만 그는 항상 그런 기회들을 팀원에게 양보하여 더 확실한 승리를 가져오는것에 능했다.”

푸만두도 하이머딩거로 기습하거나 쓰레쉬의 훅에 자석이 달린것처럼 플레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항상 팀이 더 잘 하도록 돕는 것에 집중했다. 특히 ‘피글렛’ 채광진이 활약하도록 돕는 것이 핵심이었다. 페이커가 첫 대회에서 3위로 마무리한 것은 사실 그의 탓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팀들은 페이커를 걸어잠그려 노력했다. 4강전에서 SKT T1을 이긴 상대의 경우 사이드라인을 집중공략했고, 푸만두는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확실히 하는것이 중요했다.




푸만두와 피글렛은 해외 캐스터들에게 ‘백 평짜리 라인(곰돌이 푸의 고향)’이라 불리며 이내 세계 최고의 봇듀오가 됐다. 푸만두는 리스키한 플레이를 시도하기보단 항상 피글렛이 성공할 수 있는 포지션을 만들었다. 공격적인 라인전을 통해 상성을 이겨냈고 한타에서 피글렛을 가이드하여 확실히 죽는 상황도 면하게 만들었다. ‘벵기’ 배성웅과의 시야를 확보하는 능력을 통해 어떠한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을 만들기도 했다. 행여나 페이커가 부진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피글렛이 세계 최고의 무기였고, 푸만두는 더욱 압박하기 위해 바로 뒤에서 보조했다.

“푸만두의 자이라는 인상깊었다”고 말한 전 서폿 ‘타베’ 웡박칸은 2013 롤드컵 결승을 회상했다. “피글렛과 푸만두가 나와 우지를 라인전에서 계속 이겼던 것이 기억난다. 당시에 나는 쓰레쉬, 애니, 소나를 이용해 이니시를 시도했지만 그들을 상대할 때 포킹이라는 스타일을 처음 알게 됐다. 그당시에 우리는 포킹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푸만두는 팬들이 잘 보지 못하는 방향으로도 팀에 기여를 했다. ‘사파’ 픽들을 즐겨 했지만, 나미 같은 메타 픽 숙련도를 갈고 닦아 밴이 나오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인게임 보이스에서도 중요한 존재였다. 인게임에서 팀의 리더 역할을 했던 푸만두는 게임 밖에서도 리더의 모습을 보여줬다.

DoA는 이에 "그는 팀 내에서 평온함의 주체였다. 간혹 긴장이 쌓이는 상황에서도 그는 팀원들의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푸만두는 팀의 맏형임에도 동생들을 편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었다. ‘임팩트’ 정언영은 푸만두를 “착한 형 같은 사람”이라 표현하며 주변 동생들과 함께 스스럼없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가까이하는 모습을 칭찬했다. 이런 방식으로도 푸만두는 팀에 필요한 부분을 채워줬다.




이러한 동료애는 SKT T1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게 한 기반이었다. 엘리트 봇듀오, 정교한 콜, 그리고 친근한 팀 환경. SKT T1은 전례없는 지배력을 보였다. 2013 OGN 챔피언스 서머와 시즌 3 롤드컵을 우승했으며 2013-2014 OGN 챔피언스 윈터에서는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다. 이미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플레이를 보여주고 있던 페이커의 명성은 세계 최고의 팀을 이끌고 있다는 사실에 기반하기도 했는데, 이 세계 최고의 팀의 한 축을 담당한건 푸만두였다. 불과 제대한지 1년도 안된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고난 속의 위대함

푸만두는 어려운 환경에서 더욱 강했다. 카오스에서 그의 성공은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제 8회 CCB가 대표적인 케이스. 8강전 당시 수업으로 인해 학교에서 플레이를 해야만 했다. 경기가 시작해야 할 시간이었지만 학교 IP에서는 게임에 접속할 수 없었다. 경기가 임박하자 카오스 팬이었던 한 교수님이 접속이 가능한 컴퓨터를 빌려줬고, 푸만두는 그 컴퓨터로 승리를 하게 된다. 이 때, 감사한 마음에 채팅창에 “별바람 교수님 감사합니다”라고 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또 다른 예는 제 3회 CCB 결승이다. 그의 첫 결승이었고, 초창기 CCB의 몇 안되는 오프라인 경기였다. 그렇게 의미있는 대회는 사실 당시의 말도 안되는 상황으로 더욱 기억된다. 시작 전부터 야외 경기장에 비가 오면서 경기 여부가 불투명했다. 다행히 비가 멎고 시작된 경기에서 푸만두의 팀은 2회 우승을 한 팀을 상대로 첫 세트를 이기고 2세트도 이기기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바로 그 때, 셧다운이 일어났다. 말 그대로 컴퓨터가 갑자기 꺼진 것이다. 정전 사태로 인해 재경기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리고 그 재경기는 상대방이 가져갔다. 요즘 이스포츠 선수들은 핑과 버그에 대해 불평불만을 하지만 그들은 전기 문제와 싸웠다. 하지만 푸만두의 클랜은 버텨냈다. 비와 정전이 있는 극악의 환경에도 불구하고 일어서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는 잘 훈련된 병사 같았다. 가혹한 조건 속에서도 영광을 쫓았다. 푸만두의 끈기는 만성적인 건강 문제 속에서 더욱 돋보였다. 어린 시절 당했던 감전 사고로 인해 가슴에 물이 차오르는 듯한 답답한 느낌이 나는 현상이 있었다고 밝혔던 푸만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그오브레전드 씬을 지배했다. 심할 때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고. 군 시절에는 이 증상이 없었지만 선수 생활을 재개했을 때는 돌아왔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팀을 위해 감내했다.

푸만두의 창의성, 우승, 그리고 환상적인 플레이는 가혹한 건강 문제에 고생하는 상태에서 나온 것이다. 마이클 조던이 결승전에서 독감에 시달리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듯이 푸만두도 안좋은 건강상태에서 팀을 위해 헌신했다.




SKT T1의 무패행진이 끝나자 푸만두는 그제서야 내려놓고 건강에 신경쓸 때라고 생각했다. 여러 우승, KDA 수상 등 최고의 위치에 있을 때였다. 그 당시 푸만두는 세계 최고의 서포터였다. 이런 위치에서 물러나는 것은 쉽지 않았겠지만 그의 대체선수가 잘 한다면 은퇴를 할 것이라 언급했다.

다만, 그 기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팀의 부진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푸만두는 예상보다 훨씬 일찍 다음 대회에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이전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짧디짧은 휴식 후에 다시 전력질주를 시작한 선수에게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지만 그의 실력은 빠르게 퇴보했다. 이내 리그에서 가장 안좋은 서포터로 몰락했고 이전에 번뜩이는 플레이나 그가 잘하던 모든 것은 온데간데 없었다. 페이커를 제외하고 팀의 대부분이 푸만두의 하락세에 편승했다. 그리고 SKT T1은 일 년 내내 실망스러운 성적을 거두고 롤드컵 진출에 실패한다. 한 때 페이커를 뒷받치는 든든한 아군이었던 푸만두는 이 시점에서는 오히려 걸림돌이 된 듯 했고, 곧 은퇴를 결정했다.




최고의 자리에서 빠른 속도로 떨어졌지만 그것이 푸만두의 업적을 가리지는 않는다. 리그오브레전드와 페이커 팬들에 의해 자주 잊혀지는 존재지만 푸만두가 이스포츠에 기여한 업적은 너무나도 저평가되어 있다.

잃어버린 유산

누가 뭐래도 우승자다. 안타깝게도 건강 이슈와 늦은 나이에 시작했다는 점이 푸만두가 더 많은 것을 이루지 못하게 막았지만 그 정도의 재능이었다면 역대 최고의 서폿이 될 수 있을 만 했다. 반짝하고 사라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반짝였던 빛은 전 세계를 밝게 비추었다. 그 짧지만 빛나는 경력은 농구의 빌 월튼이나 미식축구의 보 잭슨과 견줄만하다.

더욱이, 푸만두가 국내 리그오브레전드씬에 카오스를 통해 기여한 것은 영원히 찬양받아 마땅하다. 한국 이스포츠가 세계를 호령하게 한 가장 큰 요인이 스타크래프트였지만 최고의 리그오브레전드 선수들이 스타크래프트에서 전향해온 선수들이 아니라 카오스 출신이라는 점이 주목할 만 하다. 최전선의 푸만두와 함께 이들이 있었기에 페이커와 같은 전설적인 선수들이 떠오르고 빛날 수 있었다. 푸만두와 같은 개척자들이 카오스에서 한계를 실험하고 경험있는 선수층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리그오브레전드가 한국에서 그렇게 빠른 속도로 인기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스타들이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고, 혜성같이 나타났던 페이커도 더 늦게 발견됐을 가능성이 높다. 푸만두의 유산은 한국 이스포츠 역사에 이미 깊이 새겨졌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추측일 뿐이다. 카오스씬이 없었을 경우의 한국 리그오브레전드씬이 어떻게 형성됐을지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중요한 근거가 2013년 8월 31일에 일어났다. 2013 OGN 핫식스 챔피언스 서머 결승전이 열렸던 이 날은, 페이커 커리어에 있어 가장 중요한 날 중 하나였고, 우승을 통해 그가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된 날이다. 모든 리그오브레전드 팬들은 5세트에 벌어진 세계를 뒤흔든 환상적인 제드 맞대결을 기억한다. 다들 그 장면은 기억하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푸만두가 아니었다면 그런 플레이가 일어날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SKT T1은 이 시리즈에서 패배하기 직전까지 갔었다. KT 롤스터 불리츠는 전략적이고 강한 중후반 운영을 하는 팀이었고, 이를 이용해 첫 두 세트에서 SKT T1을 박살낸다. 3세트부터는 SKT T1이 최대한 빠른 경기로 불리츠를 넘어뜨리는 작전을 사용했다.

사실 악몽과도 같았다. 이론상 작전은 스마트했지만 그 누구라도 실수를 하면 패배하게 되는 것이었다. 당연히 페이커가 유일한 캐리가 되면 안됐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전략적인 팀에게 0-2로 뒤져있었고 패배를 면하려면 모두가 활약해야 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푸만두에게는 최고의 상황이었다.

3세트는 푸만두 스페셜이었다. 카오스 시절 알려졌던 그의 능력들이 모두 나왔다. 카오스에서 했던 것처럼, 푸만두의 자이라 플레이는 지배적이었고 혁신적이었다. 그는 시야를 완벽하게 장악했고 피글렛이 초반에 큰 이득을 얻게 함으로서 남은 시간동안 맹활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카오스에서 수없이 많이 했던 것처럼 팀이 한 방을 날리는 데 필요했던 모든 것을 했다. 퍼스트 블러드, 이른 용스택, 그리고 2대3 갱킹에서 기적적인 트리플 킬을 얻어내는 것까지.

그리고 카오스에서 했듯이 폭풍이 잠잠해지자 푸만두는 그 안에서 승리를 가지고 나왔다.

푸만두보다 조금이라도 못하는 어떤 선수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그 5세트는 존재하지 않았다. 푸만두가 있었기에 페이커는 그 날 우승을 했고, 매일같이 회자되는 전설적인 제드 맞대결을 만들어냈고, 시즌3 소환사컵도 들어올렸다. 푸만두의 역할은 게임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팀 중 하나에 필수불가결한 존재였다. 그가 없었더라도 페이커는 결국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됐을 가능성도 높지만, 푸만두는 그 날을 앞당겼다.




카오스씬이 있었기에 한국이 이렇게 빠르게 리그오브레전드씬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재능과 겸손, 인내로 똘똘 뭉친 푸만두가 있었기에 페이커가 그토록 빠르게 떠오를 수 있었다. 이것이 그가 남긴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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