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탑 솔러 명가 한국, 아직 '기인'이라는 모범 답안이 있다

칼럼 | 장민영 기자 | 댓글: 58개 |



오래전부터 한국팀은 세계를 제패했던 탑 라이너를 자랑해왔다. '샤이' 박상면이 시즌2에서 롤드컵 준우승과 함께 세계에 한국 탑 솔러의 강함을 알리기 시작했고, '임팩트-루퍼-마린-듀크-큐베' 등이 당시 롤드컵 우승팀에 어울릴 만한 기량을 발휘해왔다. 롤드컵에 참가한 다른 한국의 탑 솔러들 역시 외국인 선수들보다 뚜렷한 존재감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

시대가 바뀌면서 어느덧 LPL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탑 솔러가 세계를 제패하게 됐다. IG의 '더샤이' 강승록과 FPX '김군' 김한샘이 최근 2년 간 롤드컵 우승을 휩쓸었다. 그 흐름에 맞춰 작년 한국의 1번 시드 T1의 탑 라이너였던 '칸' 김동하마저 LPL로 넘어간 상황. 올해 첫 국내 무대였던 KeSPA컵에서 작년 롤드컵에 출전했던 팀들의 탑 라이너 활약을 거의 볼 수 없었다. 담원의 '너구리' 장하권마저 한 경기 만에 탈락하면서 한국에 남아있는 탑 라이너들의 힘이 많이 빠진 듯했다.

하지만 이번 KeSPA컵에서 다시 존재감을 드러낸 탑 라이너가 있다. 팀이 하위권에서 부진할 때도 최고의 탑 솔러 후보로 꾸준히 거론 됐던 '기인' 김기인이 첫 우승과 함께 다시 떠오른 것이다. 자신이 2018 아시안 게임의 국가대표에 아프리카 프릭스를 롤드컵까지 올려놨던 선수임을 다시 한 번 떠오르게 하는 경기력이었다.




2018년 당시 '기인'은 이제 막 아프리카 프릭스에 합류한 특급 신예였지만, 이제는 팀과 3년 계약을 체결한 프렌차이즈 스타로 거듭나고 있었다. 인터뷰를 통해 "한 팀에 오래 있는 것 자체에 큰 이점이 있다"고 다년 계약에 대해 언급한 '기인'은 자신의 말을 어느 정도 증명했다. 아프리카 프릭스에 오래 머물렀던 정글러 '스피릿' 이다윤과 함께 말이다. 노련한 두 선수는 4강-결승에서 연이은 3:0 완승을 이끌 정도로 확연히 눈에 들어오는 경기력을 자랑했다.

특히, '기인'의 기량은 탑 라이너에 관한 이미지와 한계를 넘어선 것처럼 보였다. 상대를 힘으로 제압하고 사이드 라인을 지배하는 것이 강한 탑 솔러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보통의 탑 솔러 이미지를 넘어 '기인'은 맵 전반, 아군의 한타에 큰 영향을 주면서 게임 전반을 자신의 손으로 풀어갔다. 아껴둔 순간 이동을 활용해 봇으로, 먼저 내려와 빠르게 합류하는 그의 속도는 상대 입장에서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기인'이 보여준 플레이는 소환사 주문인 순간 이동을 아낀 게 전부는 아니었다. 자신의 손으로 초반 라인전 단계부터 먼저 합류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놓았기에 가능한 플레이였다. 먼저 상대를 압박해 라인을 밀어낸 뒤, 귀환 후 걸어서 먼저 복귀한다는 전제 조건부터 시작한다. '기인'은 매판 라인전 단계부터 꼼꼼하게 자신의 목표를 달성했기에 가능했다.



▲ 적 정글에 설치한 '기인'의 와드, 사냥 중인 리 신 동선 파악

그사이에 상대 시야까지 확보하는 플레이로 정글러 '스피릿'의 플레이를 편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4강 DRX전에서 성장이 말린 '스피릿'의 키아나와 2:2 교전을 한다면, 더 큰 손해를 볼 수도 있는 상황에서 '기인'은 와드를 칼 같이 활용했다. 먼저 라인을 밀고 와드로 상대 정글러의 위치를 파악한 것이다. 정글 동선이 말렸던 '스피릿'에게 상대 정글 리 신의 위치에 대한 정보는 중요했다. 이를 바탕으로 '스피릿' 역시 탑 갱킹 설계로 자신의 흐름을 바꿔나갈 수 있었다.

더 놀라운 건 미드-봇까지 내려오는 '기인'의 과감한 움직임이 더 큰 실효를 거둔다는 점이다. 라인을 먼저 밀어놓았다고 하더라도 오랜 시간 동안 자리를 비우면 포탑이 밀리거나 상대와 성장 격차가 크게 벌어질 수도 있는 법. 하지만 '기인'은 마치 미래를 내다본 듯한 합류로 더 큰 이득을 보는 그림을 완성했다. 팀 게임에 관한 이해도와 정확한 콜이 없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플레이다. 취소할 수 없는 그의 순간 이동 합류는 탑 라인전에서 거둘 수 있는 성과를 매번 넘어서는 모습이었다. 상대 역시 그런 '기인'을 의식해 순간 이동을 아끼고 또 아꼈지만, 특유의 노련한 팀합과 감각으로 무장한 '기인'의 선택을 넘어서진 못하곤 했다. '기인'이었기에, '기인'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장면들의 연속이었다.



▲ 탑에서 날아와 휩쓸고 지나가는 '기인'(출처 : eSports KBS)

이런 '기인'의 모습은 프로게이머에게도 귀감이 되고 있다. KeSPA컵 8강에 오른 스피어 게이밍의 탑 라이너 '디스트로이' 윤정민은 "많은 탑 라이너를 본 받고 싶지만, 한 명을 뽑아보자면 '기인'이다. 모든 능력치가 완벽한 탑 솔러이지 않은가"며 '기인'을 자신의 롤모델이라고 말하곤 했다. 어느덧 '기인'은 선수의 존경을 받는 프로게이머의 위치까지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이제 '기인'은 첫 우승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 우승의 경험이 '기인'을 어디까지 끌고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번 KeSPA컵은 어떤 팀에겐 LCK 시즌 전 경험을 쌓는, 새롭게 팀을 정비하는 시간 정도일 수 있다. 아프리카 프릭스와 '기인'에겐 첫 우승을 경험하게 해준 대회로 또다른 출발을 의미한다. 규모와 중요성을 떠나서 최고의 자리의 기쁨을 누리고 자신감을 찾게 해주는 대회로 말이다.

'기인' 역시 2020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점을 우승과 함께 새롭게 다짐했다. 우승 후에도 "우승했을 때 내가 기대하는 그림이 아직은 안나왔다. 실감이 안난다. 오늘로 안주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해서 롤드컵까지 노려보겠다"고 말하면서 올해의 후반을 기약했다. '한 팀에서 오래 있는 것 자체에 이점이 있다'는 말을 KeSPA컵을 통해 증명했듯이, 올해도 성장을 다짐한 그의 마지막 역시 기대할 수밖에 없다.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팀을 승리로 이끌었던 경험이 있는 에이스, 이젠 확실히 한국을 대표할 만한 탑 솔러이기에 그에게는 이런 기대를 걸어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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