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봄의 '룰러'와 여름의 '룰러', 무엇이 달라졌나

기획기사 | 신연재 기자 | 댓글: 22개 |
LCK는 변화가 필요하다. LCK의 장기집권 시대가 끝나고, LPL과 LEC가 국제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가장 많이 언급된 문장이다. '로우 리스크 로우 리턴', '기본에 충실한 정석적인 운영', '우리 실수 줄이기' 등 기존 LCK의 승리 패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말이다.

LCK 팀들도 이러한 변화의 필요성을 꾸준히 느껴왔다. 어쩌면 대회에서 직접 몸으로 부딪히는 그들이 가장 많이 느끼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미 몸에 익은 습관을 단번에 벗어내기란 쉽지 않았고, 비판이 더욱더 거세질 무렵. 2020 시즌에 들어, 특히 이번 섬머 스플릿부터는 LCK에도 점점 눈에 보이는 변화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사실 젠지 e스포츠는 이와 관련해 쓴소리를 가장 많이 들은 팀 중 하나다. 재미없다는 수식어가 늘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호성적을 내던 시절부터 이어져 온 강력한 원거리딜러 '룰러' 박재혁을 중심으로 한 후반 운영을 꾀하는 팀, 그래서 경기를 지루하게 만드는 팀이라는 이미지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현재 정규 시즌의 반환점을 돌고 있는 섬머 스플릿에서 젠지 e스포츠는 확실히 달라졌다. 경기 시간은 더 빨라졌고(스프링 33분 34초, 섬머 31분 11초), 경기당 평균 킬 역시 증가했다(스프링 12.3킬, 섬머 14.4킬). 경기 시간은 패배 지분이 높은 설해원 프린스를 제외하면 사실상 담원게이밍의 뒤를 잇는 2위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룰러' 박재혁이다. 안정성 대신 공격성, 최후의 보루 대신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추구하며 젠지 e스포츠의 운영에 속도를 더해주고 있다.




지표로 보는 '룰러'의 변화
킬-데스-어시스트 모두 늘어, 라인전 지표는 최강

'룰러' 박재혁의 변화는 각종 지표에서부터 뚜렷하게 드러난다. KDA부터 살펴보면, 킬과 어시스트, 데스가 모두 늘었다. KDA로 모든 것을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그가 보여주고 있는 퍼포먼스를 대조해 봤을 때 공격적인 움직임으로 킬과 어시스트가 늘어난 대신 잦은 교전이나 하이 리스크로 인해 데스도 늘었다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룰러' 박재혁의 정규 시즌 KDA
스프링 스플릿 - 3.9킬 1.2데스 4.4어시스트
섬머 스플릿 - 5킬 1.7데스 5.3어시스트 (7월 17일 기준)

라인전 수행 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15분 지표도 괄목할만한 성장세를 보였다. 스프링 스플릿에서 단식 세나를 플레이한 경기를 제외한 '룰러' 박재혁의 15분 골드, CS, 경험치 차이는 각각 393, 9, 289였다. 마이너스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미 이상적인 숫자이긴 하다.

그러나 섬머에서는 모든 수치가 하늘을 찌른다. 세 가지 지표 모두에서 원거리딜러 1위에 이름을 올렸다. 특히, 골드 차이는 700으로 압도적인 숫자를 기록하고 있고(2위 '데프트' 376), CS와 경험치도 15와 572로 굉장히 높아졌다. 이는 후술할 챔피언 풀의 변화를 담고 있는 기록이기도 하다.

놓쳐서는 안될 지표 중 하나는 솔로 킬이다. 원거리딜러는 특성상 다른 라인에 비해 솔로 킬이 자주 나오지 않는 포지션이다. '룰러' 역시 지난 스프링 스플릿에서는 정규 시즌 내내 단 4번의 솔로 킬을 맛봤다. 그런데 이번 스플릿에선 아직 9경기밖에 치르지 않았음에도 벌써 다섯 번째 솔로 킬을 터트렸다.


'룰러'의 사랑 독차지한 애쉬
라인전-플레이메이킹 가능한 픽

이렇듯 '룰러'가 공격성과 라인전 능력을 주무기로 장착하며 폼을 끌어올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챔피언 풀의 변화다. 우선, 섬머 스플릿의 '룰러'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챔피언은 바로 애쉬다.

스프링 스플릿부터 꾸준히 좋은 평가받던 여러 원거리딜러 챔피언이 하향을 당하면서 애쉬도 LCK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유독 '룰러'는 애쉬를 매우 선호했다. 지금까지 애쉬는 총 20번 사용됐는데, 그 중 '룰러'의 부름을 받은 게 7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애쉬는 여러모로 젠지 e스포츠와 잘 맞았다. 애쉬는 600이라는 긴 평타 사거리와 W '일제 사격'을 바탕으로 라인전에 강점을 가지고 있다. 더불어 E '매 날리기'로 팀적인 도움을 줄 수 있으며, 궁극기 '마법의 수정 화살'로 이니시에이팅을 비롯한 플레이메이킹이 가능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미드-정글이 강력한 젠지 e스포츠에게 애쉬는 봇의 주도권을 가져와 미드-정글의 발을 풀어주고, 지원 스킬로 상체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매우 좋은 챔피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룰러' 자체의 애쉬 활용도가 굉장히 뛰어나다. 현재까지 '룰러'의 애쉬는 7전 전승이다.

애쉬와 더불어 주목해볼만 한 건 바루스다. 젠지 e스포츠는 '포킹 바루스'가 대세 중의 대세가 되었던 스프링 스플릿 막바지와 미드 시즌 컵(이하 MSC)서 유독 바루스를 기피하는 모습을 보이며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룰러'가 바루스를 다룰 줄 모르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하지만, 섬머 스플릿에 들어 '룰러'는 그런 평가를 뒤집는데 성공했다. 밴률이 워낙 높아 자주 등장하지는 못했지만, 두 번 등장해 두 번 모두 승리와 POG(플레이어 오브 더 게임)을 동시에 손에 넣었다. 이제 바루스는 젠지 e스포츠에게 또하나의 필승 카드가 됐다.


주영달 감독대행, "넘어져도 괜찮아"
코칭스태프의 적극적인 지원과 믿음

기대치가 워낙 높기도 했지만, 냉정하게 말해 스프링의 '룰러'는 그가 가진 이름값에 비해 존재감이 미비했다. 오히려 무리한 플레이나 치명적인 실수로 그 존재감을 드러내 아쉬움을 사곤 했다. 그러나, 공격성을 더 날카롭게 다듬어온 섬머의 '룰러'는 확실히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물론, 소위 '레고 먹는 어린 아이'에 비유되는 실책은 여전히 '룰러'의 숙제로 남아있다. 하지만, 젠지 e스포츠의 코칭스태프는 이 또한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지금의 '룰러'에게는 실수를 걱정하는 것보다 뒤돌아보지 않는 공격적인 플레이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영달 감독대행은 "'룰러' 같은 경우는 생각이 너무 많아지면 제 플레이가 나오지 않는 스타일이다"며 "실수하더라도 상관없으니 과감하게 하라는 이야기를 늘 해줬다"고 전했다. 실제로 이런 피드백 이후 '룰러'의 폼이 많이 좋아졌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어 주영달 감독대행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죽어도 괜찮으니까 뭐든 시도를 하는 게 좋다"고 생각을 밝혔다. 솔로 랭크에서나 통할 법한 '상대 갱킹에 당해 죽어도 상관없다. 2대 3으로 싸워도 이긴다는 마인드로 공격적으로 하라'는 이야기도 감독대행인 그가 직접 '룰러'에게 한 이야기다.




'룰러' 역시 여러 인터뷰를 통해 교전 중심의 적극적인 플레이를 추구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상대가 보이면 싸우는 식으로 연습을 해왔고, 대회에서도 연습 때의 경기력이 나오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코칭스태프의 전폭적인 지지가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지금까지만 놓고 보면, 젠지 e스포츠와 '룰러'는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대로 밑그림을 잘 그려나가고 있다. 이제 남은 건 목표한 그림을 완성하는 일, 즉 우승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격의 고삐를 더욱더 당겨야 한다. 천적 T1, 1위 DRX 등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남았기 때문이다. 가속도가 붙어야 가파른 경사도 오를 수 있는 법이다.

새로운 플레이스타일로 탈바꿈하고 있는 젠지 e스포츠. 그들은 과연 이 변화의 과정을 완성해 그토록 염원하던 우승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젠지 e스포츠와 '룰러'에게 이른 가을이 찾아올 것인지, 그 결과가 궁금해진다.


영상 출처 : LCK 공식 유튜브 채널

댓글

새로고침
새로고침

기사 목록

1 2 3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