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블리자드의 정신과 '테세우스의 배'

칼럼 | 정재훈 기자 | 댓글: 38개 |
커다란 배에서 겨우 판자 조각 하나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이 배가 테세우스가 타고 왔던 "그 배"라는 것은 당연하다. 한 번 수리한 배에서 다시 다른 판자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낡은 판자를 갈아 끼우다 보면 어느 시점부터는 테세우스가 있었던 원래의 배의 조각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는가?




오늘날의 블리자드를 말하며, 많은 이들이 이 '테세우스의 배'를 인용한다. 블리자드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스타 개발자들과 주요 임원들이 몽땅 빠져나간 지금의 블리자드를 두고 말하기엔 퍽 적합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블리자드는 여전히 블리자드다. 절이 싫어 중이 떠난다 한들, 절이 이름을 바꾸는 법은 없다. 하지만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게이머들의 뇌리에 새겨진 '블리자드의 정신'이 남아있는지는 보다 진지한 태도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들의 퇴사만으로 블리자드가 다른 회사가 되었다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다. 아직도 수백, 수천 명의 개발자가 블리자드에 몸을 담고 있으며, 모두가 알다시피 게임은 한두 사람의 손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퇴사한 스타 개발자들이 아무리 큰 역할을 했다고 해도, 이들이 없으니 블리자드가 망할 거란 주장은 비약일 뿐이다. 하지만 이들의 행보는 단순한 퇴사가 아니다. 블리자드라는 기업의 이미지, 그리고 어쩌면 블리자드의 기조와 정신까지 들고 나왔을지도 모르고, 많은 이들이 그럴 거라 여기기 때문이다.

"'Embrace your inner 'Geek'"

블리자드의 초기 개발 기조는 꽤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으며, 이 슬로건 자체로 블리자드는 많은 게이머의 지지를 받았다. 개발자적, 그리고 사업가적 시선으로만 게임을 바라보지 않고, 게이머의 마음을 품은 채 게임을 파고드는 '괴짜'의 마음가짐을 유지하라는 이 기조는 곧 '블리자드의 정신'이 되어 게임 내 여러 곳에 드러났다. 모두의 입맛을 맞추는 만능의 개발사는 아니었으나, 전성기의 블리자드는 게이머가 원하는 부분을 빠르게 찾아내 만들었고, 게이머가 기대조차 못 했던 놀라운 요소를 게임 내에 심어두기도 했다.

그러나 영원히 그렇지는 않았다. '조시 모스케이라'가 제이 윌슨이 뿌려둔 디아블로3의 병폐를 척결하고, 지금의 디아블로3로 다시 만들어냈을 때만 해도 게이머들은 '역시 블리자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히어로즈오브더스톰'의 리그가 갑작스럽게 취소되고, '하스스톤'의 대회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으며, '오버워치'와 '스타크래프트2'의 업데이트가 끝났음이 발표되고, 디아블로 임모탈이 블리즈컨의 메인타이틀로 등장하는 상황들은 절대 게이머의 기대 속엔 없었다.

이렇게 점점 게이머와의 공감대를 잃어가는 블리자드의 행보가 상황이 되었고, 이는 곧 게이머들에게 '블리자드에 더는 블리자드의 정신'은 없다.라는 인식을 만들었다. 이 인식의 흐름은 곧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하나는 기사의 제목과 같다. 블리자드를 향한 '테세우스의 배'라는 멸칭.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퇴사한 이들이 세운 새로운 스튜디오에 대한 엄청난 기대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블리자드의 정신'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퇴사자들이 주가 되어 설립된 '본파이어 스튜디오'나 '드림헤이븐'에 많은 기대가 걸려 있지만, 드림헤이븐이나 프로스트 자이언트 스튜디오는 설립 이후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뭔가를 보여줄 시간이 없었고, 본파이어 스튜디오는 설립 이후 5년째 게임 장르와 요란한 직원 소개 외 무언가를 보여준 적이 없다.

반대로, 'J. 알랜 브랙'이 지휘봉을 잡은 지금의 블리자드가 다시금 과거의 유산을 캐낼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오버워치2'와 '디아블로4'라는 이미 공개된 신작을 통해, 블리자드의 정신은 블리자드 그 자체의 이름에 있는 것이지 퇴사한 몇몇 개발자들이 가져갈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줄 수도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지금 이 순간에도 블리자드를 표현하면서 줄기차게 언급되는 '테세우스의 배'를 말하자면 일견 적합해 보이는 비유이지만 아직 단언하긴 이르다고 말하고 싶다. 블리자드가 허울뿐인 가짜 테세우스의 배가 되려면, 어딘가엔 진짜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그 어느 배도 자신이 정통임을 증명하지 못했다. 진짜 테세우스의 배에는 테세우스가 타고 있어야 하며, 지금의 상황에서 테세우스는 곧 블리자드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블리자드의 정신'이다. 삼단 노선이든, 증기선이든, 거북선이든 배의 종류와 관계없이 테세우스만 타고 있다면 그건 곧 테세우스의 배가 되듯, 그 시절 블리자드의 정신을 게임으로 보여주는 스튜디오가 등장해야만 블리자드를 향한 지금의 멸칭이 합당한지를 판단할 수 있을 거다.

어쩌면, 블리자드로서는 조금 억울할 수도 있겠다. 본래 자신들이 지니던 것을 두고 아직도 가졌는지, 혹은 빼앗겼는지를 검증받아야 하는 때가 왔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최악의 결말은, 그 어떤 개발사도 이전의 블리자드다운 게임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그 반대 상황을 바란다. 하나의 문화에서 여러 새로움이 꽃피듯, 모두가 게이머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작품을 내놓는 결말도 작게나마 기대할 법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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