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생존 게임', 어디까지 해 봤어요?

기획기사 | 정재훈 기자 | 댓글: 11개 |



2010년대 중반에 이르러, 게임계를 강타한 키워드가 있다면 바로 '생존'입니다. 게임의 의미 중에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대한 간접 체험이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생존 게임의 대두는 우리가 얼마나 평화로운 시기를 살아가는지에 대한 반증이 될 수도 있겠죠.

오늘날, 생존 게임은 게임 산업의 한 축을 담당하는 거대 장르가 되었습니다. 마인크래프트의 오픈월드 크래프트에 이런 저런 위협 요소를 가미해 만들어진 '생존 오픈월트 크래프팅' 게임들은 등장 시점부터 게이머들의 주의를 끌었습니다. 이후 약간은 결이 다르지만, 어찌됐건 생존의 키워드를 지닌 '배틀그라운드'가 신화적 성공을 거두면서 '생존'이라는 키워드에 대한 게이머층의 관심이 대폭 커졌고, 오늘날의 상황이 만들어졌죠.

생존 장르의 시발점인 2010년대 초중반의 생존 게임들은 다들 어딘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인기를 끌고 있는 '러스트'나 '더 포레스트'와 같은 게임들의 경우, 조금씩 배경 설정은 다르지만 어쨌거나 황량한 벌판에서 시작해 자원을 모아 건물을 짓고, 더 나은 삶의 질을 찾아가는 과정은 동일했습니다. 돌도끼로 시작해 일단 냅다 나무부터 찍고 보는 생존 게임의 시작 구도는 이쯤부터 시작되었죠.



▲ 캐고 만들고 버티고의 반복

하지만, 201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이런 클래식한 생존 게임들의 인기는 점점 떨어졌습니다. 비슷한 장르가 너무 많이 나왔고, 어설픈 카피캣이 수도 없이 쏟아져나왔죠. 이에 대한 반동으로, 생존 게임들은 조금 더 특이한 소재, 조금 더 독특한 설정을 배경으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생존 게임의 전통적 시스템 흐름을 구닥다리로 취급할 정도는 아닙니다. 당장 현재 스팀을 평정해버린 '발헤임(Valheim)'의 경우 허들을 대폭 낮췄지만 기본적으로는 전통적 생존 게임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가는 게임이니까요. 하지만, 가끔은 별식처럼 다른 게임이 당길 때도 있지요. 오늘 소개해드릴 게임들이 그렇습니다. 생존 게임으로서의 자아를 지키면서도, 독특한 설정과 컨셉을 지닌 '별종'들입니다.


1. 브레스엣지(Breathedge)
할아버지 장례식인줄 알았는데 잘못하면 내 장례식


장례식을 위해 할아버지의 관을 싣고 우주 영구차를 운행하던 중 의도치않게 우주선이 박살나버린 중년 남성의 외로운 생존기입니다. 단순 사고도 아닌, 이상한 음모에 휘말려 버려 골치가 더 아파졌죠. 그 와중 할아버지의 관은 우주 공간으로 쓸쓸히 날아가 버려 스타쉽트루퍼스식 우주장이 되어버렸고 주인공의 곁에 남은 건 온갖 우주 쓰레기와 죽지 않는 닭 뿐입니다.

설정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지는데, 게임 시작부터 펼쳐지는 화려한 말장난을 보고 있으면 안그래도 아득해진 정신이 은하계 저 너머로 날아가는 기분입니다. 브레스엣지의 게임 감성은 전형적인 B급 개그와 맞물려 있습니다. 영화 '데드풀'의 그 감성이죠. 개발사가 제4의 벽을 넘나들며 게이머와 말장난을 하거든요.



▲ 번역만 읽어도 피식거리게 됩니다

하지만, 그 감성으로만 승부하는 게임은 또 아닙니다. 우주선으로부터 떨어져나와 둥둥 떠다니는 박살난 화장실에서 오줌을 모을 때까진 대체 이게 뭔 상황이지 싶겠지만 소파에 널부러진 효자손과 변기 배수구에 끼어 있는 고무 패킹을 뜯어 야매 공학으로 이런저런 도구들을 만들기 시작하면 이 게임만의 묘한 쓰레기같은 매력에 빠져들게 됩니다.

단순 생존 뿐만 아니라 시나리오도 꽤 튼실히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도대체 다음엔 또 무슨 XX같은 일이 펼쳐질까'하는 원초적 플레이 동기를 충분히 부여하는 것도 장점입니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인 줄 알았는데 본인의 장례식이 될 위기에 처한 주인공의 이야기. 게임이 너무 매력적인 관계로, 본래 기획에서만 다루려 했으나 차후 별도의 리뷰 작성을 심히 고민하고 있는 게임입니다.



▲ 의외로 튼실한 크래프팅 요소까지


2. 그라운디드(Grounded)
애들이 줄었어요!


지난해 7월 등장한, 꽤 최근에 등장한 작품입니다. 게임 테마를 요약하면, 1989년작 코미디 명작인 '애들이 줄었어요'의 게임 판이라 볼 수 있죠. 벌써 30년이 넘은 영화인지라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요약해드리자면, 축소 빔을 맞고 6mm로 줄어버린 아이들이 죽자고 고생해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영화 내내 고생하는 그 집으로 가는 길이 사실은 몇 걸음도 안 되는 짧은 거리이지만요.

하여튼, '그라운디드'의 게이머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관리가 귀찮을 뿐이었던 뒷마당이 사바나가 되어 버린 상황에서, 포식자가 되어 버린 금붕어와 벌레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머리를 쥐어 짜야 하죠. 아동 친화적인 게임이라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엄청나게 거대한 벌레들은 생각 이상으로 참기 어렵거든요.



▲ 벽을 잘 세워야 합니다. 안 그러면...

장르가 고착화된 이후 나온 게임인 만큼, 플레이 편의성 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건설이나 제작에서 소요되는 클릭 수를 최대한 줄이려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고, 사실성을 다소 포기했지만 눈은 편한 둥글둥글한 그래픽도 꽤 괜찮습니다. 벌레들이 다수 나오는 게임인 만큼, 사실적 그래픽을 추구했다면 아마 끔찍한 결과물이 나왔을 테지만요.

얼리 억세스 단계에 놓여 있기에 버그도 심심찮게 보이고, 아직 스토리 관련 콘텐츠도 부족한 면이 없잖아 있지만, 친구들과 함께 하면 굉장히 재미있는 깔끔한 생존 크래프팅 게임입니다. 물론, 벌레는 깔끔하지 않습니다. 이 게임의 유일한 장벽이라면 바로 저 거대한 벌레들이겠죠.



▲ 아! 제발! 아!!! 좀!!!!


3. 그린 헬(Green Hell)
암 인어 정글! 후! 암 인어 정글! 악!!


아마존 밀림을 배경으로 삼은 생존 크래프팅 게임입니다. 여타 게임들이 한정된 맵 안에 최대한 많은 자연 환경을 우겨넣으려 노력한 것과 달리, 그린 헬은 정글 그 자체에 심히 집중한 게임이라 볼 수 있죠. 겉보기엔 더 포레스트와 같은 전통적 오픈월드 크래프팅 게임과 유사해 보이고, 실제로도 꽤 많은 부분에서 유사하긴 합니다.

다만, 그린 헬은 그 정도를 다소 심할 정도로 높여 두었습니다. 업데이트를 통해 꽤 편한 게임으로 많이 바꿔놓긴 했지만, 그럼에도 다른 생존 게임들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난도를 보여주죠. 말 그대로 정글이 녹색 지옥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물론, 매우 쉬운 난이도인 '관광객' 모드도 있으니 우리 미리 너무 겁먹진 말자구요?



▲ 비주얼에서부터 느껴지는 습함

높은 난도의 원인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먼저 게임 주인공의 신체 스펙이 게임 주인공이라기보단, 현실의 사람에 가깝습니다. 제대로 처치하지 않으면 감염으로 이어지는 찰과상과 열상부터 기생충, 발진, 중독 등 다양한 부상부터 탄단지 3대 영양소를 다 챙겨먹어야 해결되는 영양실조, 열병, 식중독, 불면증까지 겪는 주인공을 정신 건강까지 챙겨주어야 하죠. 실수로 인육을 착각해 먹거나 하면 정신상태가 아주 메롱해집니다. 정신 상태가 황폐해지면 게임 오버로 이어지죠.

두 번째는 정말 정글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적대적 환경입니다. 원주민도 원주민이지만, 악어, 재규어를 위시한 맹수들과 게이머들의 사망 제1원인인 되는 풀숲의 뱀들은 정말 사람을 환장하게 만듭니다. 어쩌면 오늘 소개드릴 게임 중 '생존'이라는 키워드에 가장 가까운 게임이 그린 헬이 아닐까 싶군요.



▲ 사는게 참 쉽지가 않아요.


4. 래프트(Raft)
캐빈 코스트너도 울고 갈 워터월드 오디세이


비교적 이른 시기 공개되어 아직도 얼리 억세스 단계에 머물고 있는 생존/크래프팅 게임입니다. 비슷한 컨셉의 '서브노티카'가 아예 물 속 세계를 컨셉으로 잡았다면 'RAFT'는 고전 영화 '워터월드'와 비슷한, 온통 물바다로 변한 세상을 배경으로 삼은 게임입니다. 도입부부터 작은 뗏목에서 시작하게 되죠.

RAFT의 특징이라면, 오픈월드기는 하지만 제한된 오픈월드에서 플레이 영역이 점진적으로 늘어난다는 겁니다. 처음엔 뗏목 위에 갇혀 간혹 떠밀려오는 부유물에서 재료를 얻을 수 밖에 없고, 천신만고 끝에 도착하는 첫 섬도 플레이어를 상어의 아가리로 인도하는 그럴싸한 미끼일 뿐(파티 플레이라면 어떻게 상륙할 수 있지만...)이지만, 뗏목이 점점 커지고 큰 섬에 상륙하게 되는 시기가 오면 플레이가 꽤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 수상인들의 주요 채집 활동: 갈고리질

하지만, 그 제한적인 상황에서도 굉장히 바쁩니다. 온통 바다밖에 없으니 물을 얻을 정수기와 컵도 있어야지... 낚시해서 밥도 먹어야지, 물고기를 구워야 하니 그릴도 만들어야 하고 가끔 나타나는 상어를 격퇴할 꼬챙이도 만들어 놓는 등 정말 '생존'을 위해 바쁘게 움직어야 합니다. 그러다 큰 섬에 상륙하게 되면, 이제 라디오 타워를 수리하고 뗏목 대신 엔진 추진 배를 만들어 항해를 나서는 등 플레이의 결이 달라집니다.

전체적으로, 다른 생존 게임들이 '뭐 부터 해야 하지?'라는 고민을 준다면 RAFT는 그런 것 없이 일단 지금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게임에 적응할 수 있는 구조의 게임입니다. 오픈월드를 기본으로 삼는 만큼 콘텐츠 플로우를 유도하기 힘든 생존 크래프팅 게임 치곤 꽤 치밀하다 볼 수 있죠. 물론, 태생이 크래프팅인 만큼 의외로 할 게 많습니다. 저난이도에선 아예 바다 위 대도시를 만들 수도 있으니 말이죠.



▲ 놀랍게도 같은 게임의 스크린샷입니다.


5. 에코(ECO)
30일만에 지구를 지켜라


아마 오늘 소개할 게임 중에서 ECO는 가장 독특한 방식으로 장르에 접근한 게임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기본 베이스는 여타 생존 크래프팅 게임과 완전히 동일하지만, 목적이 아예 다른 지점에 있습니다. 다른 게임들이 일반적으로 적대적인 환경에 대응해 테크를 올리는 형태로 이뤄진다면, ECO는 환경 자체가 적대적이지 않지만 게임 내 시간으로 30일이 지나면 서버에 운석이 떨어집니다. ECO는 그 30일의 시간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쓰냐에 따라 생존 유무가 결정되는 셈이죠.

그리고 그 30일 간, 게이머는 다른 게임과 비교를 거부하는 복잡한 시스템 속에서 생존을 위한 노력을 이어가야 합니다. ECO의 시스템은 굉장히 복잡하고 또 정밀하게 얽혀 있으며, 일부는 과하게 현실적인 면도 있습니다. 흙이나 나무같은 기본 재료도 인벤토리에 보관되는게 아니라 손수레에 싣거나 직접 들고 가야 하며, 땅을 하고 나오는 폐기물을 제때 처리하지 않으면 주변 환경이 오염되어 점차 황무지가 되어가는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와중, 탄단지와 비타민도 잘 챙겨 먹어야 하고요.



▲ 서버 하나가 하나의 별입니다.

스킬포인트가 한정되어 있고, 특화된 캐릭터의 작업 효율이 그렇지 않은 캐릭터와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높기 때문에 분업은 필수입니다. 혼자서 이것저것 다 할 수는 없는 게임이죠. 그렇다 보니, 여러 게이머와의 협동이 자연스럽게 요구되고, 이 과정에서 필요한 경제, 정치 콘텐츠도 도입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버티는 것이 아닌, '30일의 시간 동안 운석 충돌을 막을 공동체를 수립할 수 있느냐?'가 ECO의 최종 목표인 셈입니다.

협동이 필수인 만큼 그만큼 어마어마한 노가다가 필요하기 때문에 혼자 플레이하는 게이머들에게는 분명 버거운 게임입니다. 하지만, 야생이나 적대적 환경과는 또 다른 결의 위협이 존재하고, 이를 위해 협동이 필수라는 점 때문에 여러 사람이 모인 그룹에게는 굉장히 도전적이면서도 매력적인 게임으로 다가오는 게임이 바로 ECO입니다.



▲ 산업화 역군이 되어 나쁜 운석을 혼내줍시다


6. 앤세스터 휴먼카인드 오디세이
도대체 인류는 어떻게 멸종하지 않고 버텼을까...?


2019년에 첫 출시 이후, 작년 8월 스팀에 진출한 비교적 따끈따끈한 생존 게임입니다. 국내에 잘 알려진 게임은 아니지만, 이 게임 또한 다른 게임들과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독특한 컨셉으로 출시 당시 화제를 몰고 온 게임이죠. 먼저, 주인공이 사람이 아닙니다. 아니 사람인가? 여튼 이 시대 사람이 아닙니다. 무려 천만 년 전, 아직 사람의 모습을 하지 않은 침팬지에서 시작하는 게임이죠.

특이한 점은, '생존'의 명제가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개체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게임을 하며 끊임없이 번식을 하고, 무리를 불리고, 게이머가 조종하던 개체가 사망하면 같은 그룹 내 다른 개체로 옮겨 게임을 계속 하면서 말 그대로 '대가 끊길 때'까지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인간은 멸종하는게 정상 아니었을까?'할 정도로 어려운 게임이죠.



▲ 진화와 동시에 굽은 허리가 펴지기도 하고

높게 평가되는 부분은 '탐험'의 욕구를 자극하는 세계 구성입니다. 시작 시점의 주인공 침팬지는 굉장히 나약하고, 계속 배가 고픈 밥벌레에 가깝기 때문에 말 그대로 보이는 건 죄다 먹고 씹어넘겨야 하죠. 그렇게 세계를 하나씩 배우고, 세대를 이어가며 조금씩 진화를 거듭하다 보면 어느샌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원숭이에서 사이어인 파괴원숭이가 되어 있는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나뭇가지 창만 들고 코끼리를 잡는 조상님을 보면 경외감이 들 정도입니다.

당연히, 이 과정에 이르는 길은 지극히 험난합니다.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정글 속을 무리를 이끌고 주파해야 하며 그날그날 잠을 잘 보금자리를 마련하며 생태계 최약체가 어떤 기분으로 세상을 살아가는지 느껴야 하죠. 이렇게 진화와 생존을 이어가 언어를 구사하는 원시 인류인 '호모 에르가스테르'에 이르면 게임은 끝이 납니다. 인류의 진화 시기를 다뤘다는 특징 때문이겠지만, 생존 자체보다도 참 여러가지로 느껴지는게 많은 독특한 게임이 '앤세스터 휴먼카인드 오디세이' 입니다.



▲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도 대를 잇기가 참 힘들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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