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기] 기다림의 우주, '스타 시티즌'

기획기사 | 정재훈 기자 | 댓글: 34개 |

때로는, 긴 세월만이 깊은 맛과 향기를 더한다. 숙성 년수에 따라 가격대가 급격하게 치솟는 위스키가 그렇고, 쿱쿱함 속 산미가 일품인 묵은지가 그렇다. 요리사 임지호 선생님이 10년 묵은 어된장을 꺼낼 때, 시청자들은 '10년이나 묵혔으면 도대체 얼마나 깊은 맛이 날까?'하고 궁금해한다. 하지만, 요리니까 통하는 말이다. 하나의 게임이 10년째 개발 중이란 말을 들으면 게이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도대체 뭘 어쩌고 있길래 10년째 게임이 안 나오지?"

2011년 기획 시작, 2012년 펀딩, 2013년 첫 알파 테스트. 그리고 2021년인 지금 아직도 알파 테스트. '스타 시티즌'의 상황이다. 10년이면, 웬만한 게임은 기획 단계부터 황혼기를 맞이하기까지 모자람이 없는 시간이다. 그 긴 시간을 스타 시티즌은 기대작으로 지내 왔다. 오죽하면, 테스트를 플레이하는 게이머들조차도 게임의 출시가 너무나 멀게만 느껴진다고 말할까.

그럼에도 스타 시티즌이 기대작의 반열에서 내려오지 않는 이유는 개발사인 '클라우드 임페리움 게임즈'의 대표인 '크리스 로버츠'의 원대한 기획이 게이머들에게 너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우주'라는 거대한 무대를 배경으로, 매스 이펙트의 미시적 세계와 이브 온라인의 거시적 세계를 통합하겠다는 포부. 말 그대로 '찐 우주'를 만들겠다는 그의 주장은 게이머들에게 신뢰도와 상관 없이 너무나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구매와는 사뭇 다른, '후원' 버튼에 마우스를 올리며 생각했다. '지금쯤이면 그래도 확인은 가능하지 않을까?' 몇 년 전부터 확인차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지만, 괜시리 실망할까봐 누르지 못했었다. 그래도 지금은 꽤 할만한 게임이 되었겠지. 70GB의 베이스 파일을 모두 다운로드받고, 게임 시작을 눌렀다. 그리고, 침대에서 눈을 떴다.



게임명: 스타 시티즌(Star Citizen)
장르: 오픈월드, 시뮬레이터, 스페이스 오페라
출시일 : 미정(후원자 한정 알파 테스트 진행)
개발 : Cloud Imperium Games
플랫폼: PC
태그: #오픈월드 #우주 #시뮬레이터 #탐험



하드 투 런, 쏘 머치 하드 투 마스터




낯선 천장이다.

침대에서 꿈틀대다가 겨우 키를 알아내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기웃거리니 온갖 오브젝트에 상호작용이 뜬다. 접이식 변기도 한 번 펼쳐 보고, 서랍도 열고 닫아 보고 어찌어찌 방 안을 벗어났는데, 이제부터 뭘 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창 밖으론 아직 어두운 스탠턴 항성계의 일면이 보였다. 점등하는 건물의 불빛,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우주 공항의 네온 사인. 그 땐 몰랐다. 뭐라도 하려면 그 멀리 있는 우주 공항까지 직접 찾아가야 한다는 것을.




한 시간. 우주 한켠에 내동댕이쳐져 뭐라도 할 수 있는 실마리를 잡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어찌어찌 메뉴를 뒤져 배달 임무를 수주하고, 공항으로 오는 셔틀 열차를 겨우 찾아내 공항에 도착하기까지가 45분, 그리고 이륙 절차를 배우는 과정이 10분. 겨우겨우 격납고에 배를 꺼내 엔진을 켜고 이륙준비까지가 10분, 이륙관제 없이 날았다가 천장에 머리통을 박고 추락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데 5분. 그렇게 청운의 꿈을 안고 날아간 우주에서, 난 내 비행기에 화물칸이 구현되지 않았다는 것만 확인하고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익숙해지면 딱히 어렵지 않지만, 익숙해지기까지가 너무나 어렵다. 글로는 단 한 문장임에도 굉장히 프로세스가 많았다. 콕핏을 열고, 엔진 시동을 켜고, 실수로 사출 버튼을 누를뻔하다 식은땀을 흘리고, 콕핏을 닫고 잠그고, 대기권 돌파에 퀀텀드라이브에... 그나마 SF를 좋아해 웬만한 설정은 이미 머릿속에 들어 있어서 다행이지, 아마 문외한이었다면 지금도 해메고 있을 거다.







▲ 함선 부르고 격납고 찾고... 할 게 많다.

물론, 이 어려움을 스타 시티즌의 단점이라 할 수는 없다. 게임을 못 할 정도로 어렵다면 문제가 되지만, 스타 시티즌의 경우는 어렵다기보단 디테일을 갖추다 보니 복잡한 것에 가까우니까. '레드데드리뎀션2'와 비슷한 맥락이지만, 스타 시티즌은 조금 더 심하다. 양손에 짐을 가득 지고 배로 향하는 와중, 누군가 총으로 내 배의 콕핏 잠금장치를 따고 배를 훔쳐가는걸 보면 할 말을 잃게 된다. 세상에 어떤 게임이 잠금장치를 부수고 차를 훔쳐가나. 모르면 당하는 거다.

'이브 온라인'에서 맛본것 같다.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뭘 해야 좋을지도 모르겠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막막함. 핵심 정보라도 더 알아내려고 커뮤니티를 뒤져 보았는데, 웬만한 정보글들도 초심자에겐 논문 수준이다. 한편으론 '요즘 너무 쉽고 편한 게임만 해서 방만해졌나' 싶을 정도였다. 어쨌든 우당탕탕 첫 배달을 끝내고 나니, 약간 자신이 붙었다. 다음 미션을 수주하고 다시 배에 올랐다. 처음과 달리 이젠 여유가 좀 있다.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고, 카메라를 살짝 돌려 보았다.



▲ 우주 지도 다루는데도 한참 걸렸다.(사실 지금도 잘 모른다)



'이것이 우주다' 희망편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세계의 일부라도 한 눈에 담을 때, 내가 너무나 초라하고 작게 느껴지는 기분. UI에 집중하던 시선을 잠시 뒤로 빼 창 밖을 바라보자 우주가 눈에 들어왔다. 스페이스 오페라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다들 공감할 거다. 면과 지평선으로만 보이던 행성이 거대한 구형으로 눈에 들어오고, 반대로 동그랗게만 보이던 행성이 너무나 거대한 무언가로 눈 앞에 화할때 느껴지는 카타르시스. 거대한 세계를 바라보면서 내가 마치 미물이 된 것 같다는 기분에서 쾌감을 느끼는 미물가즘. 복잡함과 어려움을 지나쳐 여유를 갖게 되자 비로소 이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저 아름답다는 말로만 표현하긴 부족하다. 스타 시티즌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행성들이 존재하며, 각 행성의 지표까지 구현되어 있다. 식생이나 자연 현상, 문명까지는 아직이지만, 둘러보기에 부족함은 없다. 스타 시티즌의 매력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매력적인 포인트를 꼽으라면 우주 그 자체를 말할 이들이 적지 않을 거다.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게임은 퍽 많이 플레이했지만, 이만큼 막연하면서도 장엄한 감정을 일으키는 광경은 드물었다.



▲ 그냥 이렇게만 봐도 가슴이 뛰는데



▲ 아무 곳에나 착륙도 할 수 있다.(너무 추워서 얼어죽을뻔)

'우주 감성'만으로도 스타 시티즌을 해볼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본격적인 '게임'으로서의 뭔가를 바라기엔 분명 부족한 지금이지만, 유로 트럭이나 플라이트 시뮬레이터처럼 멍하니 창 밖을 보며 힐링하는 게임을 찾는 게이머들에게는 전혀 모자람이 없다. 기름 지린내의 틈바구니에서 싸구려 배양육 핫도그를 팔 것 같은 우주 정거장부터, 영하의 눈폭풍이 몰아치는 행성, 건물로 뒤덮인 도시 행성에 이르기까지, 스타 시티즌의 세계는 아직 덜 만들어졌을지언정 '우주'를 원하는 게이머들에게 정확히 원하는 것을 안겨준다.



▲ 착륙 전 높은 곳에서 바라본 도시를



▲ 같은 높이에서 바라볼 때의 느낌은 참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물론, 이런 배경만이 스타 시티즌의 전부는 아니다. 알파 빌드인 지금도 온갖 SF 영화에 나온 장면들을 게임 상에서 직접 연출할 수 있다. 우주 유영을 통해 멈춰 있는 함선에 침투한다던가 거대 함선 내부에서 백병전을 벌이고 적대 함선을 탈취하는가 하면,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보던 소형 전투기들의 도그파이트까지 가능하다. 아직 알파 단계인만큼 이 모든 구석이 완벽하게 시스템화되어있진 않지만 어쨌든 가능한 건 사실이다.

정리하면, 스타 시티즌은 게이머가 게임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상상하는 그대로의 게임이다. 우주를 위한, 우주에 의한, 우주 게임. 알파 단계에서도, 적어도 그것 하나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 '우주 갬성' 하나만으로도 먹어주는 게임



충분한 잠재력, 머나먼 갈 길



▲ 정거장 내부도 충실히 구현되어 있다.

여기서, 논점을 살짝 바꿔 보자. 스페이스 오페라 SF 미디어로서 스타 시티즌이 훌륭하냐고 물어보면, 나는 그렇다고 말하겠다. 하지만, 게임으로서 스타 시티즌이 훌륭하냐 묻는다면, 고개를 한 번쯤은 내젓게 된다. 앞서 몇 번이나 언급한 대목이지만, 스타 시티즌은 아직 게임으로서는 한참 멀었다. 오죽하면, 스타 시티즌을 열심히 플레이하고 있는 후원 유저들조차 "아직은 게임이라고 하긴 어렵다"라고 말할까.

게임 내 각종 시스템은 그냥 '있는 수준'이다. 채굴을 통해 광석을 채집하고, 이를 정제해 파는 과정까지는 구현되어 있지만 이 광석을 통해 뭔가 할 수 있는건 딱히 없다. 그렇다고 경제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우주 테러리스트 진압이나 현상금 사냥도 두어번은 재미있지만, 그 이후는 반복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 볼 때마다 멋지지만, 지금으로선 감성이 최고의 장점이다.

분명 단점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아직 덜 만든 거니까. 게임을 하다 보면 곳곳에 '아 나중에 이런 콘텐츠가 여기 추가되겠구나'싶은 부분이 계속 눈에 띄고, 언젠가 그 부분들이 실제로 구현된다면 정말 대단한, 어쩌면 게임사에 한 획을 그을 게임이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 정도다.

문제는, 이게 언제 될 지 알수가 없다는 거다. 이미 8년차에 돌입한 알파 테스트에서도, 콘텐츠 수가 적당하단 느낌은 받을 수 없었고, 콘텐츠의 사이클 또한 윤곽만 겨우 잡힌 수준이다. 크리스 로버츠의 포부는 이해가 되지만, 그 계획이 모두 실체화되려면 얼마나 걸릴 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 본인도 모를 거다.



▲ 분명 좋을 테지만, 출시는 가늠조차 안 되는 상황.


정리하면, 스타 시티즌은 알파 버전인 지금으로서도 충분히 해볼 만 한 게임이고, 우주를 좋아하는 게이머라면 상당한 뽕맛을 느낄 수 있는 게임이다. 다만, 게임의 개발자와 게임을 즐기는 이들 모두 아직 상용화는 멀고 먼 일이라는 생각에 공감한다. 오죽하면 커뮤니티에서는 스타 시티즌의 완성보다 실제로 우주 시대가 열리는게 더 빠를 지도 모른다고 할까.

온라인상에 가끔 올라오는 잘생겼지만 뚱뚱한 인물을 두고 네티즌들은 '긁지 않은 당첨 복권'이라고들 한다. 언젠가 살을 빼면 분명 잘생겼을 사람들한테 붙는 표현이다. 스타 시티즌도 비슷하다. 차이라면, 긁고 싶은데 너무 멀리 있어서 손이 닿지 않는 복권이랄까. 게임을 즐기는 모두가 완성되면 대단한 게임이 될 것이란 주장에 공감한다. 그게 언제가 될 지 알 수 없을 뿐이지.

그러니, 결국 답은 기다림 뿐이다. 혼자 하게 될지, 아들과 함께 하게 될지, 혹은 손자와 함께 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다. 스타 시티즌의 게이머들이 그 어떤 게이머보다도 느긋하고 기다림에 강하다는 사실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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