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다 죽여버리는 게임

리뷰 | 박태학 기자 | 댓글: 23개 |



확신 없이는 불가능한 행보.

이드 소프트웨어는 '둠 이터널' 출시도 전에 10개가 훌쩍 넘는 게임플레이 영상을 공개했다. 개발 과정을 생중계하는 수준이었다. 아마 그들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지금 우리가 만들고 있는 거, 전작 이상의 괴물이라고. 미리 영상 뿌려도 기대감 높아지면 높아졌지, 반사적 불이익은 없을 거라고.

한편으론 '둠'이기에 가능한 행보였다. 둠은 원래 그런 게임이고, 이드 소프트웨어도 원래 그런 게임사다. 우직한 남성미를 우직한 그릇에 담아 우직하게 내놓는 게임사다. 어줍잖게 트렌드 쫒는 건 그들 방식이 아니다. 청바지에 리바이스가, 워크웨어에 칼하트가 있듯 FPS엔 '둠'이 있다는 게 그들의 논리다. 거기에 뭘 끼얻든 한낱 곁다리일 뿐, 그 이상을 넘볼 수 없다. 그건 둠이 아니니까.

결론이다. 둠은 둠이고, '둠 이터널'은 둠답게 완성됐다. 그래픽이 어쩌고 시스템이 어쩌고 다 필요 없다. 여전히 찢고 죽인다. 정말 죽여준다. 그게 둠이다.





더 높이, 더 멀리 가는 둠가이
드디어 지평선이 보이는 전장



▲ 드디어 탁 트인 전장.

딱 서문까지만 쓰고 기사 올려야 '둠'스러운 리뷰지만, 기자는 둠가이가 아니니까 조금 더 소감을 붙이겠다. 먼저 맵 디자인부터.

이건 전작 '둠 2016(혹은 둠 리부트)'도 충분히 좋았다. 제대로 싸울 '판'이 갖춰졌고, 이 판을 한 눈에 담는 미니맵도 시인성이 뛰어났다. '둠 이터널'에선 이런 GUI의 편의성이 더욱 강조됐는데, 전작 대비 훨씬 넓어진 전장 덕분이 아닌가 싶다.

전작의 무대는 단순했다. 장소의 차이만 있었을 뿐, 시작부터 엔딩 볼 때까지 건물 내부가 주요 전장이었다. 반면, '둠 이터널'은 실외 전장이 상대적으로 많고, 전반적인 무대 크기도 확장됐다. 세로폭이 높아졌기에 몬스터와의 전투 양상도 입체적으로 머릿속에 그려야 한다. 원래 '둠'은 쉬지않고 이동하며 싸우는 게임이었는데, 이번 작품에서 Y축이 좀 더 강조되었다고 보면 된다.

뇌까지 근육으로 짜여진 둠가이가 벽에 착 달라붙어 엉금엉금 기어오르고, 올림픽 체조선수마냥 철봉에 몸을 휘감은 뒤 재도약하는 모습이 쉽게 상상되지 않았지만, 실제 게임을 해보니 그리 걱정할 건 아니었다. 터질듯한 악력에 절륜한 효과음이 어우러지며, 지금 벽에 붙은 게 사람인지 탱크인지 모를 만큼 박력이 넘치니 안심해도 좋다.

▲ 갈 수 있다. 둠가이는.

다만, 1인칭 플랫포머 어드벤처 게임에서나 볼 법한 파쿠르 맵 구조를 클래식 둠 팬들이 반길지는 확언하기 어렵다. 구석구석 맵을 탐색하며 눈앞의 적을 다 때려잡는거야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둠 2016까지 유지됐던 시리즈 특유의 묵직함은 다소 떨어진다. '둠은 둠이지, 하이퍼 FPS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유저라면 조금 섭섭한 변화가 아닐까 싶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둠가이 역시 더블 대시 능력을 장착하며 이러한 전장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했다는 점에 있다. 상식 밖의 거리에 있는 아이템이라도 더블 대시와 함께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덕분에 전작 대비 맵이 커졌음에도 낭비되는 구간은 거의 나오지 않았고, 이동 시스템만으로 전투에 입체감을 더했다는 점은 칭찬할 만 하다.

한 가지 더, '둠 2016'은 전체적으로 붉은 톤 위주의 실내 배경으로 고정됐지만, '둠 이터널'은 매우 다채로운 지형 변화를 보여준다. 황폐화된 지구는 물론 디아블로 한 마리 살 것만 같은 고성, 아파트만한 거대 괴수의 내장 속까지 예외는 없다. '이런 데서 싸우는 거, 상상해봤어?'라고 말하듯, 둠가이는 무대 선정부터 우리의 상식과 편견을 깨부수고 있다.


"더이상 무적이 아니군."
"총알이 필요하다. 겁나게 많은 총알이."

슬프게도 이번 작품에서 우리의 둠가이는 더이상 무적이 아니다. 단순 총알받이라 생각했던 녀석들조차 몸과 마음을 바쳐 진심으로 둠가이를 죽이기 위해 달려든다. 굳이 전작과 비교해보자면 2배 쯤 어려워졌다.

먹이사슬 최하층의 좀비조차도 야금야금 둠가이의 체력을 갉아먹고, 어느 정도 싸울 줄 아는 중형급 몬스터들은 1:1 상황조차 버거울 때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둠 이터널'이 어려운 이유는 전투 플롯이 단순히 '쏘고 죽인다'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언제 쏘고 어떻게 죽인다'는 전제가 붙기 때문이다. 둠가이의 모든 화력을 이끌어내려면 게임 내 모든 총기와 장착 파츠에 익숙해져야 하며, 수류탄, 전기톱, 화염방사기도 틈날 때마다 사용해야 한다. 타 FPS 게임들과 비교하면 몬스터들의 평균 체력이 매우 높은데다 역대 둠 시리즈 중 탄약 수급량이 가장 적기에, 이전처럼 슈퍼 샷건 하나로 엔딩까지 달리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 마무리는 손으로 하자. 총알 아까우니까

전투의 퍼즐 기믹은 탄약 부족에서만 비롯되는 게 아니다. 중형급 이상 몬스터들은 각자 명확한 약점을 보유하고 있다. 아라크노트론은 정수리에 박힌 포탑부터 일찌감치 부숴야 하고, 카코데몬은 수류탄이든 점착 폭탄이든 일단 입 속에 폭발물 하나 집어 넣어야 글로리 킬이 가능하다. 즉, 특정 몬스터 공략에 최적화된 총이 어느 정도 지정된 셈이고, 무기 및 모듈 교체가 손에 익지 않는다면 난이도는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개인적으로 '둠 이터널'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도 바로 여기에 있다. 플레이어의 숙련도는 대다수 FPS 게임도 레벨 디자인을 위해 똑같이 요구하는 점이니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 방법을 탄약 보급량 제한과 몬스터의 퍼즐 기믹으로 둔 이유가 뭘까. 전투의 깊이를 위해 '둠'만의 호쾌함을 일정 부분 희생시킨 셈인데... 글쎄, 내 기억 속 둠가이는 탄약 하나하나 세어가며 싸우진 않았다.

물론, 전기톱으로 적을 썰 때마다 소량의 탄약이 충전되기는 하나, 일반 몬스터 다 잡고 톱날 안 박히는 중형급 몬스터만 남았을 땐 아무 소용 없다. 즉, 전투 시작하자마 탄약 활용 방안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클래식 둠에 익숙한 유저가 이런 두뇌플레이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탄약만큼은 여유있게 제공했다면, 조금 더 게임 플레이의 폭이 넓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탄약 쪼들리는 문제만 뺀다면 나머지는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번 작품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대시'는 필요할 때 언제든 쓸 수 있을 만큼 빠르게 충전되니까. 게임플레이가 어느 정도 적응된다면, 머리를 거치지 않고 본능에 따라 회피 버튼을 누르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쯤 되면 당신의 둠가이는 더이상 약하지 않다.






▲ 둠가이가 약한 게 아니다. 당신이 약할 뿐.


"아, 키마! 훌륭한 대화 수단이지."
"이봐, 키마! 겁나 좋군?"

둠가이는 키보드, 마우스로 조작해야만 그 터프함을 100% 뿜어낸다. "아니, 샷건과 전기톱이 있는데 키마로 손맛이 나겠어?" 라고 반문할 수 있겠다.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기자 역시 진동의 손맛을 위해 패드로 시작했으니까.

기자가 둘 다 플레이해봤으니 할 수 있는 말이다. 패드로 조작하는 둠가이는 소녀처럼 싸운다. 꺼내봐요 내장의 숲이 뭔지 진정으로 느끼고 싶다면, 키마 외에는 대안이 없다. 좀 싸울 줄 아는 몬스터들은 패드로 깨작깨작 움직이는 둠가이보다 훨씬 빠르다. 심지어 조준보정도 거의 없다. 그런데도 이놈들을 패드로 잡는다고? 난이도를 최하로 낮춰서 하던가 면벽수행을 권장한다. 국가대표 빙상 선수처럼 쫙쫙 미끄러지는 마우스질 없이는 녀석들을 지옥으로 돌려보내기 어렵다.

전기톱 진동에서 오는 쾌감이 짜릿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극한의 속도감을 유지한 채 명부마도를 피로 물들이는 둠가이가 훨씬 멋지고 강렬할 뿐이다. 참고로 기자는 열렬한 패드 신봉자다. 하지만, '둠'만큼은 키보드 마우스가 낫다.

▲ 둠가이답게 싸우려면 키마를 추천한다.


데스매치 아쉽다고요? 그래서 빼버렸습니다.
아니, 잠깐만... 이보시오 이드 양반.

전작 '둠 2016'의 멀티플레이는 게임의 평가를 깎아먹는 주 원인이었다. 떼어놓고 보면 데스매치 기반의 평범한 멀티플레이 모드였지만, 문제는 '둠'이란 게임의 싱글플레이가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었다. 싱글플레이의 강렬한 경험이 싹둑 잘려나간 데스매치 모드는 기존 둠 팬은 물론, 하이퍼 FPS 팬들에게도 모두 외면받는 결과를 낳았다.

'둠 이터널'의 멀티플레이는 전작의 문제를 답습하지 않겠다는 개발팀의 고심이 그대로 묻어나 있었다. 핵심 콘텐츠인 '배틀모드'는 둠가이 1명과 특수 몬스터 2명의 대결을 그린다. 몬스터 팀 플레이어들의 협력 수준, 혹은 둠가이 플레이어의 숙련도에 따라 승부가 갈리는 구조다.

싱글플레이에서 느꼈던 그 경파한 분위기와 심리전을 모두 잡겠단 의도는 좋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 vs 괴물' 모드만 남겨둔 채 '인간 vs 인간'의 싸움을 아예 폐기한 개발팀의 선택은 동의하기 어렵다. 팬들은 특색없는 데스매치가 아쉽다 이말이지, '데스매치' 자체가 싫다는 게 아니었으니까.

최근 FPS 게임의 흐름을 보면, 꼭 배틀로얄 모드까진 아니더라도 몇 가지 추가 룰을 적용해 세부적인 게임플레이에 개성을 담으려는 시도가 여럿 있었다. 싱글플레이가 클래식 전투복, 사운드트랙, 몬스터 디자인 등으로 이미 선대 둠 시리즈에 대한 존중을 보여줬기에, 멀티플레이만큼은 좀 더 도전적인 포지션을 취해도 괜찮지 않았을까. 추후 업데이트를 통해서라도 새로운 멀티플레이 모드가 등장하길 기대해본다.



▲ '둠가이 VS 둠가이'는 아직 볼 수 없다.


'둠 이터널?' 둠 같아요.
둠 같은 건 둠 뿐이고요.

다소 '둠'스럽지 않은 몇몇 부분을 지적하긴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토록 총과 폭력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게임은 현재로선 '둠 이터널'이 유일하다. 아울러, 기사에서 언급한 단점은 '둠'의 현대화를 기다려온 팬들에겐 충분히 납득 가능한 변화이며, 심지어 장점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굳이 '둠' 답지 않은 점 하나를 더 꼽으라면, 은근히 잘 짜여진 네러티브가 있겠는데 이건 가산점 줬으면 줬지, 문제될 건 없으니까. 그외에 착 감기는 조작감, 직관적인 UI는 플레이어의 가슴 속 전투 본능을 끝까지 끌어올리는 데 부족함이 없다.

'둠 이터널'이 시리즈 최초로 한국어화가 적용된 작품이란 점도 상기할 만 하다. 번역의 질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지만, 모니터 속 글자까지 한국어로 출력하는 등 꼼꼼한 부분까지 챙긴 점은 분명 칭찬할 요소다.

다른 엔터테인먼트와 마찬가지로 게임 역시 플레이어에게 '어떤 경험을 주느냐'가 중요하다. 그리고 이 경험에 담긴 가치는 그 게임의 평가로 이어진다. '둠 이터널'에 높은 평가를 줄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른 어떤 게임과도 안 겹치니까.
둠의 감각은 오직 둠가이의 헬멧 안에서만 느낄 수 있으니까.


■ '둠 이터널' 게임플레이 영상
* 잔혹한 표현이 있으니 청취에 유의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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