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전민희', 그리고 그녀가 탄생시킨 세계

인터뷰 | 김수진 기자 | 댓글: 44개 |



한창 예민하고 감수성 넘쳤던 10대 시절, 학교 맞은편에 있던 책방에서 그녀의 소설을 만났습니다. 책을 읽으며 머리가 아플 정도로 울어본 것도 처음이었고, 감격에 벅찬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리뷰를 써 본 것도 처음이었죠.

홀린듯 밤을 새우며 읽었던 '세월의 돌', 눈물범벅이 된 채로 탐독했던 '태양의 탑',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일명 '최애소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룬의 아이들 '윈터러'와 '데모닉'까지. 그렇게 물 흐르듯 작가 '전민희'의 팬이 되었고, 그녀의 소설로 책장 한 켠을 채우고 뿌듯해하는 흔한 열혈 독자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6년, 전민희 작가가 게임 '아키에이지'와 손잡고 원작 스토리 창작과 함께 세계관을 설정할 거라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 이후는 어떻게 보면 뻔했어요. 게임 출시와 소설 발간만을 뜬눈으로 기다렸고, 단박에 읽어내려갔고, 게임을 플레이했죠. 그렇게 마주했던 하얀 숲과 황금 평원, 마리아노플, 그리고 원대륙. 모두 그녀가 탄생시킨 세계였습니다.

이후에도 상속자들, 2015년까지 연재되었던 루키우스의 기록을 통해 전민희 작가가 생각한, 그리고 만들어낸 아키에이지 세계의 일부를 함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설로도, 설정으로도 공개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너무나 많았기에 그녀가 써내려갈 아키에이지 연대기에 대한 기다림과 기대감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습니다.

그래서, 전민희 작가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스스로가 1차적 독자이며 팬들이 창작의 길로 들어섰다는 소식이 가장 기쁘다고 했는데요. 그동안의 근황과 함께 향후 아키에이지 연대기 및 설정에 대한 생각도 들어볼 수 있었습니다. 아참, 룬의 아이들 3부 및 윈터러와 데모닉에 관련된 이야기들도 함께요!








김수진 기자(이하 김수진) | 작가님 안녕하세요. 이번에 룬의 아이들 3부 출간 소식 발표로 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는데,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전민희 작가(이하 전민희) | 안녕하세요. 저는 최근 룬의 아이들 3부 '블러디드' 집필, 그리고 '윈터러'와 '데모닉'의 교정을 하느라 바빴습니다. 윈터러는 현재 카카오페이지에서 만나보실 수 있고, 데모닉은 곧 올라갈 예정입니다. 다른 플랫폼 및 종이책 출간 등은 고려하는 중이고요.

그리고 룬의 아이들 블러디드는 연내 출간을 목표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김수진 | 데모닉 교정은 어디까지 진행되셨는지.

전민희 | 데모닉의 경우 아직 연재 시작은 못 했고 5권 정도를 작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데모닉이 많이 바뀌었어요. 분량도 늘어났고요. 윈터러는 서사적으로 바뀐 부분은 없고 묘사나 약간의 설명이 더해지거나 덜해지는 정도의 변화였었는데요. 데모닉은 특히 1권의 추가 분량이 많아진 편이에요.



김수진 | 혹시 그럼 3부에서 기존 인물들 비중은 어느 정도 되는지 알 수 있나요?

전민희 | 아무래도 초반부는 학교에서 진행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꽤 나올 것 같아요. 물론 비중으로 볼 것 같으면 당연히 주인공만큼은 아니겠죠. 그래도 이번 작품의 경우 인물 여럿이 등장하는 파트가 많이 있을 것 같아요.

윈터러 같은 경우에는 다른 인물들이 거의 카메오 등장하듯 지나가고, 데모닉은 두 명이 쭉 진행하다가 뒷부분에서는 다른 인물들도 많이 나오는데요. 3부의 경우 그들이 많이 만난 타이밍에서 시작을 하기 때문에 기존 책들보다는 여러 인물의 비중이 좀 더 높아질 것 같습니다.




▲ 룬의 아이들 데모닉 일본판 양장본 표지 (출처 : 나카가와 유케이 픽시브)


김수진 | 최근 일러스트레이터를 모집하셨어요. 확정된 분들은 어떤 작업을 하게 되나요.

전민희 | 이번 일러스트레이터 모집에 뛰어난 분들이 너무나 많이 연락해 주셔서 선정에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관계자분들과 함께 고심한 끝에 '윈터러' 이북의 표지에 수빈님, '블러디드'의 표지에 예전 일본판 양장본 표지 일러스트를 그리셨던 '나카가와 유케이' 님이 확정되었고요.

우선 수빈님이 작업한 윈터러 이북 표지는 이미 완료되었어요. 그런데 윈터러의 경우 카카오에서 한 달 넘게 공개된 상태이다 보니, 독점 기간이 끝나고 다른 곳에 낼 때 함께 사용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입니다.

나카가와 유케이님 같은 경우에는 블러디드 종이책 표지를 담당하세요. 이미 시안을 여러 개 보내오셨는데 정말 화려하게 잘 그리셨어요. 사실 이분과는 따로 연락하던 사이가 아니라, 작업을 함께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3부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한테 연락을 주셨어요. 한국어를 못하시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신기해요(웃음). 원래 이분은 출판사가 컨택했던 분이라서, 만난 적도 없고 전혀 모르던 사이였어요. 그러다가 일본판이 나오던 시절에 출판사를 통해서 '잘 읽었다'는 짧은 감상을 보내주신 적이 있어요. 그래서 아 이분이 재미있게 보셨구나까지만 알고 있었거든요. 알고 보니 그 이후에도 팬아트를 계속 그리고 계셨어요. 저는 이번에 처음 봤는데, 정말 매년 그려오셨더라고요.



김수진 | 그 외에도 정말 많은 팬분들이 지원한 걸로 알고 있어요.

전민희 | 네, 그리고 정말 그분들에게 일일이 답장을 쓰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때 윈터러 작업을 하느라, 그리고 테일즈위버 쇼케이스를 맞추느라 바빠서 그러지 못한 게 너무 마음에 많이 걸려요. 정말 너무 답장을 쓰고 싶었는데 못했어요.

본인이 어떻게 해서 이 작품을 접했고, 이런 일을 하게 되었고와 같은 내용을 포함해서 정성스럽게 메일을 보내주신 독자분들이 정말 많았어요. 그래서 한 두 줄 짜리 답신을 쓰는 게 더 성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한 분 한 분께 정성스럽게 써야 할 상황인데, 도저히 그럴 시간을 낼 수가 없어서 너무 죄송했어요.

그리고 다른 분들의 그림도 너무나 훌륭했기 때문에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또 다른 작업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김수진 | 혹시 작품들과 관련해서 웹툰화는 생각이 있으신지.

전민희 | 이전에 관련해서 블로그에 가볍게 쓴 적이 있긴 해요. 하지만 제가 그림 그리는 분들을 잘 알지 못해서, 어디에 알아봐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사실 웹툰을 원하시는 독자분들이 많이 있어요. 웹툰이 지금과 같이 대중화되기 전에는 만화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셨고요. 그런데 제가 아는 분이 딱히 없다 보니 제대로 알아보기가 힘들었어요. 그리고 반대로 웹툰에 관심 있는 분이 있어도 그분은 제가 관련해서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다 보니 먼저 제안을 하기가 좀 그렇잖아요.

그래서 관심 있는 분이 계시면 얘기를 한번 해보고 싶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워낙 양이 많다 보니 작업을 시작하면 한 두 해짜리 프로젝트로 끝날 일이 아니라, 아마 이런 부분이 부담스럽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합니다.




▲ 룬의 아이들 윈터러 대만판 표지 (출처 : 나카가와 유케이 픽시브)


김수진 | 작년에 3월에 손목 때문에 치료 중이셨다는 글을 봤습니다. 아룬드 연대기, 룬의 아이들, 거기에 아키에이지 연대기까지 동시에 많은 작품을 집필하고 계시는 만큼 작가님의 건강을 걱정하는 팬들이 많은데요.

전민희 | 20여년 간 출간된 수십 권의 책들 외에도 많은 설정 문서를 작업한지라 관절 문제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현재도 좋지는 않습니다만, 이제는 저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관리하며 계속 나아가야겠지요. 일단 집필에 열중할 때 타이핑이 점점 강해지는 버릇을 고쳐야 하는데 워낙 오래되어서 쉽지가 않네요.


김수진 | 요즘도 많이 안 좋으신 건가요.

전민희 | 네, 아무래도 괜찮지는 않아요. 손목보호대 같은 걸 끼고 일을 하는데, 이상하게도 책상 높이가 약간만 달라지면 아픈 데가 또 달라지고 그렇더라고요. 그림 그리시는 분들은 어깨가 항상 아프시잖아요. 저는 이상하게 왼쪽이 많이 아픈 편입니다. 아기를 항상 왼쪽으로 지탱했었는데, 그때부터 팔꿈치가 안 좋아진 것 같아요. 당시에는 몰랐었는데, 요즘 왼쪽 팔꿈치가 아프다 보니 '아 너무 많이 썼나' 이런 생각도 들어요.


김수진 | 사인회 같은 오프라인 행사도 힘드실 것 같아요.

전민희 | 사인회를 하면 보통 세 시간 정도를 연달아서 진행하는 편이에요. 그리고 여름에 책이 나올 경우에는 독자분들이 밖에 줄을 서 계시다가 혹시라도 탈진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한 마음에 엄청 빨리 사인을 하게 돼요. 특히 이전에 전나무와 매가 나왔을 때, 밖에 서 있는 분들이 나중에는 너무 힘들어하시는 걸 봤어요. 7월인가 정말 더운 날이었거든요. 그래서 급하게 하다 보니 이후에 손목이 많이 아프더라고요.





김수진 | 작가님의 작품은 고정 팬층이 정말 많고, 팬들의 충성도도 매우 높아요. 혹시 본인이 보시기에 자신의 어떤 부분, 소설의 어떤 부분이 그렇게 독자들을 매료시키는 것 같나요?

전민희 | 그걸 정말 모르겠습니다!

사실 제 글은 저 자신이 1차적 독자거든요. 그래서 저와 같은 것을 좋아하는 분이 이렇게 많다는 것이 정말 기쁘고 신기합니다. 독자 여러분은 모두 저와 몇 퍼센트씩 겹쳐지는 부분이 있으신 것입니다(웃음).



김수진 | 그럼 혹시 작가님이 생각하셨던 것보다 인기가 많아서 의외였던 등장인물이 있나요?

전민희 | 글쎄요. 보리스가 아닐까 싶어요. 제가 글을 쓸 때는 보리스라는 인물이 전형적인 영웅의 타입이 아니다 보니, 이 인물을 이렇게 많이 좋아해 주실 줄 몰랐어요. 보리스는 속으로 생각이 엄청 많잖아요. 그리고 처음 포립에 나왔을 때도 어찌 보면 어두운 뭔가를 감추고 있는 아이니까 언뜻 클리셰처럼 보이기도 했고요.

보리스의 이야기는 풀어가는 과정 자체가 좀 어둡기도 하고, 영웅으로서 특별하거나 엄청난 일을 성취하는 내용이 아니에요. 그런데 독자분들이 뭐랄까, 동생처럼 생각하면서 걱정을 하시더라고요.



김수진 | 작가님의 초반 작품들을 10대 시절에 접했던 팬들이 이제 20대 후반, 30대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프로 작가가 된 팬들도 있을 텐데요. 팬들이 창작의 길로 들어섰다는 연락을 받으시면 어떤 생각이 가장 먼저 드는지.

전민희 | 제가 가장 좋아하는 피드백입니다(웃음). 특히 학창 시절에 제 책을 읽고 진로에 영향을 받아 현재 프로가 되셨다는 분들의 말씀이 가장 기뻐요.

저는 전 인류가 다들 조금씩이라도 창작을 해본다면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독자분들도 제 글을 읽으셨다 해서 반드시 글을 쓰시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향으로 나아갔거든요. 그런 점이 더 기쁘고 재미있습니다. 이번만 하더라도, 제가 일러스트의 목적을 밝히지 않았다 보니 일러스트 하시는 분들 외에도 만화, 웹툰, 컨셉아트 등 다양한 계열의 분들이 연락을 주셨어요.



김수진 | 혹시 팬분들이 전달했던 선물 중에 기억에 남는 게 있으신가요.

전민희 | 제일 최근에 받았던 선물이 아무래도(웃음). 젤리삐 인형도 기억나고, 그전에는 직접 만든 윈터러 페이퍼나이프를 보내주신 분도 있어요. 페이퍼나이프는 정말 윈터러의 그림에 맞춰서 잘 만드셨는데, 그런 걸 어떻게 하시는지 너무 신기하더라고요.



▲ 전민희 작가의 인스타그램


김수진 | SNS로 팬분들과 소통을 꾸준히 하시는 편이에요.

전민희 | 활발하게 하기 시작한 시기가 2012년? 13년? 이 무렵인 것 같아요. 그전에는 사실 그런 걸 안 했거든요. 처음에는 되게 뭐랄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소설을 쓰는 것도 아닌데 싶어서 저도 많이 부담스러웠어요. 독자분들에게 말할 때 존댓말을 써야 하나 반말을 써야 하나 이런 생각도 한참 했고요.

지금은 되도록이면 SNS를 제 마음속에서 용도를 나누어서 생각하고, 사용하고 있어요. 인스타그램은 사진 한 장만 올려도 되다 보니 일상생활에 좀 더 가까운 내용을 가볍게 표현하고, 블로그는 제가 할 말이 있을 때 포스팅하는 그런 느낌으로 구별해서 쓰려고 하고 있죠. 그리고 페이스북은 실제로 아는 사람들과의 커넥션이 이어지잖아요. 추천이 오거나, 그래서 사용하기에 제일 부담스럽긴 해요.



김수진 | 2013년과 2015년에 블로그를 통해서 팬들과 FAQ를 진행하셨죠. 반응이 폭발적이었는데, 혹시 추후에도 이런 이벤트를 진행하실 생각은 없나요?

전민희 | 첫 번째는 그럭저럭 마무리했는데 두 번째는 질문 기한을 이틀이나 잡았더니 그만 답변에 1년이 걸렸습니다. 질문 양이 많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깊이 생각하고 꼼꼼한 질문을 주신 분들이 많아서 저도 많이 생각하며 답변을 드려야 했어요. 그래서 쉽사리 다시 시도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김수진 | 이제 자녀분이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어요. 육아와 업무를 함께한다는 건 아무리 적응해도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혹시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감정들이 작품에도 영향이 있을까요?

전민희 | 일단 일을 하는 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했고, 이것이 의외로 글 자체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다소 스냅사진 같은 특징이 커진 느낌이 들어요. 현존성, 동시대성이 커진 느낌이랄까요.

그리고 소설 속 인물들의 나이를 훨씬 구체적으로 느끼게 되기도 했습니다. 3살, 4살, 5살의 차이 같은 걸 예전엔 잘 몰랐거든요.









김수진 | 아키에이지에 대해 여쭤볼게요. 우선 가장 궁금했던 점이에요. 이전에 블로그를 통해서 진은 미친 적도, 배신한 적도 없다고 하셨어요. 그럼 그는 어쩌다가 친구였던 이들과 대립하고, 대륙을 파괴한 건가요?

전민희 | 그와 관련해서는 제가 소설로 길게 풀어내야 독자분들이 납득하실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한두 마디 말로 정리하기엔 어려운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 과정을 소설을 통해 보시면 좋은데, 제가 내지 못하고 있어서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최초의 원정대가 떠나기 전까지의 에피소드 역시 많이 생각했었어요. 그들이 델피나드를 떠나기 전까지의 이야기 말이에요. 그들이 같이 모여 살면서 나름 재미있게 지내는, 그런 에피소드들이 있는데 공개하지 못하고 있는 게 너무 아깝고 안타까워요.



김수진 | 그럼 혹시 루키우스의 기록을 재연재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전민희 |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당시 연재할 때, 루키우스의 기록을 위해 한해를 오롯이 다 썼었어요. 매주, 처음에는 주 2회 이런 식으로 연재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필요했어요.

루키우스의 기록에 있는 내용은 제가 미리 써놨던 글을 올린 것이 아니에요. 어느 정도 정리해 둔 부분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써놓지는 않았거든요. 특히 파비트라 여제의 경우 대강의 얼개는 있었는데 연재분에서 등장했던 인물들의 경우 주요 인물을 제외하면 거의 새로 만들어내다시피 했었어요.

그리고 루키우스의 기록은 빠르게 쓰느라 요약된 글들이에요. 예전 아키에이지 개발 작업을 할 때 그런 방식으로 했었어요. 아무래도 소설로 써서 개발진에게 드리려면 너무 시간이 걸리니까, 요약해서 드린 것들을 위주로 보셨어요.



김수진 | 아키에이지 소설과 관련된 이야기로 넘어가 볼게요. 주인공 중 한 명인 키프로사의 경우, '어머니에게 가장 가까이 간 자'라는 호칭이 있어요. 어떤 의미인가요.

전민희 | 키프로사는 지금 정원의 문지기가 되었어요. 하지만 그 전에 이미, 가장 처음 정원에 들어갔을 때 그녀는 어머니에게 가까이 갔던 거죠. '어머니에 가까이 간 자'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바로 이후 신과 맞선 영웅들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키프로사가 제일 가까이 간 거에요.

반대로 권능의 의자에 앉았던 자들은 신이 되었고, 그들은 대립하는 길을 가게 됩니다. 추가로 당시에 신의 의자에 앉은 자들은 대부분이 죽었어요. 에안나와 이녹을 포함해서요.






김수진 | 에안나와 이녹, 누이와 하제의 신격을 입었던 둘은 완전히 죽은 건가요?

전민희 | 네. 에안나와 이녹은 죽은 게 맞습니다. 아키에이지 세계에서 신과 신이 된 인물의 관계는 다소 특이한데요. 신이란 마치 특별한 의상과 같은 존재입니다. 어떤 인물이 '예언의 신'이라는 의상을 입으면 그 신이 되지만, 한동안은 인간으로서의 성격도 그대로 지니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신이지만 인간 같은, 즉 그리스 신화의 신들 같은 그런 충동적 행동도 하게 되지요.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인간성이 신격에 흡수되고, 마침내 신은 일반적 종교 속의 신들처럼 현신하지 않고 침묵하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나타난다거나, 그들과 대화한다거나 하는 그런 신의 요소가 없어지는 거죠. 그런 채로 세월이 흐르면 신격을 다시 누군가가 입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녹은 신이 된 후에 인격을 유지하고 있던 단계에서 죽음을 맞았는데, 이것은 누이 여신이 된 에안나와도 비슷하다 하겠습니다. 이 둘은 신으로서의 모습만 남게 되기 전, 이미 인간으로서의 그들이 죽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섬기기는 하지만 그리스신화 적 요소가 있는 신으로는 현신할 수 없어요.



김수진 | 하제 신이 된 이녹의 경우 파괴신 진을 봉인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했다고 알려졌어요. 이녹과 하제, 둘에 대해 설명해 주신다면.

전민희 | 신으로서의 하제보다는 아스트라인 '이녹'을 설명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이녹은 세계의 중심과 가까운 히라마칸드에서 태어난 히라마 족이었지만, 몸에서 날개가 돋아나는 바람에 고향에서 쫓겨나 델피나드로 가게 됩니다. 날개는 히라마 족뿐 아니라 대륙의 어떤 종족에게서도 돋아날 수가 있으며, 그런 자들은 모두 아스트라라고 불립니다. 아스트라는 델피나드에서 신관으로 살아가지만 이녹은 그곳에서도 줄곧 히라마 족이 '어머니'라고 부르는 존재가 자신에게 이런 운명을 내린 까닭을 알고 싶어했어요.

그러던 중, 루키우스가 만든 연극 '배덕자'를 보고 그 이야기에 의문의 해답이 있다고 생각해서 관여한 끝에, 결국 신성 모독죄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 일로 12명으로 이뤄진 '최초의 원정대'가 델피나드에서 도망쳐 '세계의 중심'으로 가게 되며, 이후 그들이 신이 되거나 영웅이 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이녹은 신이 된 후에도 자신이 신이라는 사실을 납득하지 않고 줄곧 최초의 의문을 탐구했어요. 그는 최후의 전쟁을 예언하고 고향의 히라마 족을 잠재워 전쟁에 대비하고자 했죠. 그리고 그 자신이 위기를 막는 봉인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일찍 죽음을 맞게 됩니다.




▲ 이녹은 신이 된 후 인격을 유지하고 있던 단계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김수진 | 사실 그동안 작가님은 소설에서 신을 다루신 적이 없어요. 그런데 아키에이지에서 신이라는 요소가 등장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전민희 | 판타지 세계관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신을 등장시킬 경우 그들은 대부분 그리스 신화적인 '신'이라고 볼 수 있어요. 뭐랄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신성하거나 정의로운 느낌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행동하는 신들인 거죠. 그런데 저는 거기서 약간 위화감을 느꼈어요. 그들은 사실상 인간이나 다름없이 행동하는데, 그에 대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 같았거든요.

아키에이지 세계에서 어머니 신이라고 불리는 신격의 경우 현신하거나 인간처럼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신의 의지가 완전히 없다고 볼 수는 없죠. 즉, 우리가 해석하기에 따라 달라지는 종교적인 의미의 신인 거에요. 그런데 인간이 신격을 입었을 때는 달라요. 신과 같은 그 모습을 하고 권능을 가질 수는 있지만 신격 자체를 인간이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에안나의 경우 자신의 인격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죽는 것에 대해 오히려 만족하죠. 어차피 '에안나'라는 인격은 소멸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아키에이지 속 '신'은 저 나름대로 신의 존재 의미에 대해 해석해보려 했던 결과물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김수진 | 혹시 세계관과 관련해서, 앞으로 기대해 볼 만한 강력한 존재가 있을까요?

전민희 | 이런 것을 다 밝혀도 되는 것인가요(웃음)?

우선 악마 전쟁 당시에 현신해서 이즈나 대학살을 일으켰던 '지배자', '흙인형', '공작', '육식자' 등의 악마들이 있겠습니다. 그리고 물론 나차쉬가 있겠지요.

원대륙으로 간다면 '빌린'들이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원의 문이 열린다면, 온 세상을 파괴할 만한 존재가 나타납니다.



김수진 | 이즈나 대학살이 바로 오키드나가 워본의 여왕이 되어 일으킨 '악마 전쟁'인가요.

전민희 | 네, 맞아요. 그 계기가 되는 게 바로 불탄 성이라고 불리는, 예전 시차일드 백작의 성이에요. 오키드나는 정원에서 탈출한 뒤 시차일드 성의 지하에 있었어요. 불탄 성의 지하 어딘가에서 굉장히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거에요. 그리고 원래는 친구였던 시차일드 백작과 티베리온 3세의 사이가 벌어지면서, 백작이 자신의 성 지하에 있었던 '그것'을 발견하고 파내게 됩니다. 그 결과 악마 전쟁이 발발하고, 이즈나 대학살까지 이르게 된 거에요. 악마의 군대 워본이 등장한 거죠.

지금 유저들의 시대로부터 가장 가까운 전쟁이 바로 워본들로 인해 벌어진 이 악마 전쟁이에요. 그래서 아직도 워본에게 편견이 많은 거고요. 전쟁이 일어났던 그 시기는 아직 게임 내에서 그렇게 오래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백 년도 안 된 이야기에요.






김수진 | 2천 년이라는 역사를 지닌 만큼 아키에이지에는 수많은 인물이 등장했고, 사라졌어요. 혹시 그들 중 앞으로의 게임 내 이야기나 세계관에 영향을 줄, 혹은 주목할만한 인물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전민희 | 현재 살아 있는 존재로는 이니스의 여왕과 클로니드 공주, 악마의 아들 다미안, 리턴드 지도자 나단, 황태자 이샤마 등이 있겠습니다.

원대륙으로 건너간다면 니키아스를 비롯한 이프나 영웅들, 오스트의 왕 기가스 등도 등장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김수진 | 발간된 전나무와 매, 상속자들에서는 아직 최초의 원정대에 대한 이야기가 모두 풀리지 않았어요. 공식 홈페이지의 루키우스의 기록만 보더라도 앞으로 할 이야기가 무궁무진할 것 같은데 추가 소설 계획은 있으신가요?

전민희 | 물론 있습니다만, 언제라고 말씀드리기는 어렵네요. 상속자들 이후에 12명이 원정대가 되어 떠나게 되는 부분은 언젠가 쓰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키에이지 같은 경우는 얼개를 써서 공유를 해야 개발이 되다 보니, 굉장히 많이 지어져 있어요. 그렇다고 모든 시대가 꽉 차 있는 것은 아니고요. 예를 들어 제가 쓰다가 놔둔 이야기 중 오키드나의 아들 다미안에 대한 내용. 아무래도 이런 식으로 특정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그 시대에 관한 내용이 짜여 있더라도 얼개가 다 있진 않죠. 다미안의 이야기도 현재로서는 분량이 가장 많아서 약 반 권 정도 됩니다만, 장편 예정이라 출간 예정은 미정입니다.



김수진 | 그럼 다음 아키에이지 연대기는 상속자들과 연결되는 내용인가요? 아니면 다미안의 이야기인가요?

전민희 | 아마도 상속자들과 연결되는 이야기가 먼저 아니까 생각합니다. 그 내용 같은 경우는 사실 사이사이 디테일이 없을 뿐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짜여 있어요. 그들은 인생이 다 결정되어 있으니까요.





김수진 | 앞으로의 아키에이지 스토리나 설정에 작가님이 어느 정도 참여하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전민희 | 현재 게임상에서 스토리를 풀어주시는 분은 따로 계십니다만, 큰 설정적 추가는 제가 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개발 중에 만들어 놓은 설정 중에서도 아직 게임으로 나오지 않은 부분이 꽤 많습니다. 워낙 크게 작업해 놓아서요(웃음).

테일즈위버의 사례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제가 한 번 관여한 프로젝트에서 언제까지나 현역이라고 생각하며 업데이트를 해나갑니다. 아키에이지도 처음에 30년 갈 게임으로 만들자고 웃으며 이야기했던 프로젝트였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제 역할도 어느 시점에 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김수진 | 끝으로 아키에이지 연대기를 포함해 작가님의 소설을 기대하는 독자분들에게 한마디 부탁합니다.

전민희 | 아키에이지는 개발 기간이 긴 만큼 대단히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어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유저 여러분께서 만들어나가시는 부분도 중요하고요. 현재까지 소설화되어 나온 부분은 전체 설정의 백 분의 일도 안되기 때문에 앞으로 차근차근 풀어나가려 생각합니다.

가끔은 이미 머릿속에서 다 만들어진 이야기를 왜 그냥 풀어놓지 못하는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소설로 써놓고 보면 결국 생각하던 것과 완전히 같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되므로 이렇게 시간이 걸리는 것 같습니다. 꾸준히 게임과 소설을 사랑해주시는 분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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