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기]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 꼭 이렇게 만들었어야 했나?

리뷰 | 정재훈 기자 | 댓글: 108개 |




어쌔신 크리드.

한때는 서슴없이 남들 앞에서 인생 게임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리고 몇 년 후, 수없이 욕을 먹는 프렌차이즈 신작이 나왔을 때는 조심스럽게 변호하면서 남몰래 게임을 즐기곤 했다. 아무리 별로다 구리다 해도 '어쌔신 크리드'는 나에게 늘 각별한 작품이었다. 솔직히 남들이 "유비소프트는 믿을 수 없다", "또 속냐?"라고 말할 때도 적당히 맞장구쳐주면서 속으로는 딱히 공감하지 않았다. 누가 뭐라든 나는 재미있었으니까.

그렇다. 어떻게 보면 답도 안 나오는 '빠'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말해도 뭐라 할 수 없는데, 실제로 난 그 정도로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팬이다. 여태까지 나온 모든 미디어믹스를 보유 중이고, 심지어 암살단 마크가 새겨진 모자도 수년간 쓰고 다녔다. 얼마 전 개봉했던 실사 영화 빼곤 죄다 사랑스럽게 갖고 있다.

왜 굳이 이 시리즈의 팬임을 이렇게 강조하는지 궁금할 거다. 이유인즉, 이 기사가 나간 이후 날아올 욕을 조금이나마 덜 듣고 싶어서다.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 이 게임 진짜 심각하게 잘못되었다.


어떤 점이 좋아졌나?
일단 좋은 점은 알아보고...



단점을 들추기 전에 좋아진 부분을 먼저 살펴보자. 일단 '그래픽'하나는 진짜 끝내준다. 데모를 처음 시작하게 되면 말을 타고 나일 강 유역의 사막을 가로질러 마을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볼 수 있는 그래픽 수준은 '위쳐3'의 수준을 웃돈다. 나일 강 유역에 드리워진 대추야자 나무의 녹음, 나일 강 강물의 움직임, 그리고 바람에 흩날리는 모래까지, 솔직히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를 하면서 그래픽이 밀린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지만, 이번 작품은 전작들과 비교해서도 독보적이다.

그리고 이렇게 좋은 영상미를 느낄 수 있는 게임 속 세계도 너무나 넓다. 매번 신작이 나올 때마다 나오는 이야기지만, 이번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월드는 그간 등장한 전작들과 비교할 수 없이 넓다. 고대 이집트와 근방의 도시국가들을 폭넓게 다루니 당연한 결과일 거다.



▲ 때깔은 정말 좋다. 감탄 나올 정도로

또한 오픈 월드 게임으로서의 기능이 더 좋아졌다. 사실 전작들은 오픈 월드 게임이었지만, 그 넓은 세계가 게임 플레이에 주는 영향은 미미했다. 그저 무대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탐험'이라는 행위에도 게임의 목적을 부여할 수 있을 정도다. 실제로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살펴본 게임 속 세계는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다 돌아다닐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사실 단순한 '게임'으로서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은 또 다른 '위쳐3'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뭐가 문제냐고? 이 게임이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라는 것이 문제다.


주인공은 암살자인가? 전사인가?
'어쌔신 크리드'만의 매력은 어디에...



솔직히 말하자면,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에서 딱 드러나는 문제점은 하나뿐이다. 그런데 그 하나의 문제점이 말 덩굴 뿌리처럼 퍼져 나가 게임 전체를 이상하게 만들어버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의 문제는 이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인공이 '암살자'같지 않다.



▲ 흰색 천쪼가리좀 두른다고 되는게 아니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가 다른 오픈 월드 액션 게임과 다른 가장 큰 점은 바로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가 그간 구축해온 '암살자'라는 매력적인 주인공이다. 알테어부터 프라이 남매에 이르기까지,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주인공들은 다들 각자 다른 삶을 살았지만, 암살자라는 공통분모로 묶여 있었다.

우아하게 건물 사이를 달리고, 예상하지 못하는 사이에 적의 목숨을 앗아간다. 다대일 전투를 벌여도 적의 공격을 모조리 받아친 후 전부 처치해 버린다. 판타지에 가까운 설정이고, 실제로 존재했던 암살자들과도 전혀 거리가 멀지만, 그런 건 전혀 상관없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가 즐거웠던 이유이자,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를 플레이하는 이유가 바로 저 반 초인에 가까운 주인공에 이입해 세계를 누비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작품의 주인공에게선 이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전투 시스템 개편 때문인지 무기 시스템은 피해량과 속성이 붙은 여러 종류의 장비로 바뀌었고, 전투에서 적을 타격하면 피해량이 숫자 폰트로 화면에 뜬다. 모바일 게임인 줄 알았다. 심지어 장비에는 등급조차 있어 사실상 무기 등급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던 전작들과 달리 이제 '파밍'까지 해야 한다.



▲ 대미지 폰트는 대체 왜 넣었는지 지금도 이해가 힘들다

단적으로 말하면, 그전까지 보았던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전투는 이제 없다. 위쳐 시리즈. 어쩌면 다크 소울 시리즈에 가깝다는 생각만 든다. 적의 공격을 방어 버튼으로 흘려내고, 역습을 가해 한 방에 처치하던 모습은 볼 수 없고, 오로지 적의 공격을 피하려고 뛰고 구르는 주인공만 보인다. 그렇다고 공격 동작이 굉장히 날렵하고 우아한 것도 아니다. 하긴 양손 망치와 전쟁 도끼도 들고 싸우는 판국에 참 날렵하기도 하겠다.

결국 플레이가 이어질수록, 어쌔신 크리드보다는 그냥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액션 RPG를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게임이 "이집트: 피라미드의 황혼"이나 "갓 오브 스핑크스"같은 제목이라면 차라리 멋지다고 하겠다. 하지만 어쌔신 크리드 아닌가. 아무리 주인공이 암살자라는 것을 이해해 보려 해도 어떻게 하얗게 염색했는지 답도 안 나오는 아마포 후드 민소매만 가지고는 설득이 안 된다.



▲ 독수리의 눈도 진짜 독수리로 대체했다. 그래봐야 드론 카메라 신세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
게임을 다 본 건 아니니까...



물론 내가 시연할 수 있었던 부분이 지나치게 제한적이었기에 그런 느낌을 받은 걸지도 모른다. 그나마 희망을 품고 있는 건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이라는 게임 제목이다. '오리진'이라는 말뜻대로 암살단이라는 단체가 생기기 전엔 첫 창시자가 그냥 전사이건 농민이건 혹은 재의 귀인이건 상관 없는 것 아닌가.

하지만 시연 단계에서 본 모습만 가지고는 이 게임에 큰 희망을 걸 수가 없다. '암살자'라는 컨셉에서 우러나는 시리즈 최고의 어필 포인트는 거세되었고, 게임은 그럴싸한 인디케이터와 맵 전역을 수놓는 '물음표'만 남아 어디서 많이 본 액션 RPG로 바뀌어 버렸다.



▲ 간혹 암살자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긴 해서 그나마 다행이다.

어쌔신 크리드의 본질은 캐릭터를 성장시키는 것도, 적의 공격을 모조리 피해야 어떻게든 비벼보는 스릴이 아니다. 주인공이 암살자로서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적을 무찌르면서 암살단을 이어가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위기를 맞이하고, 어떻게 해결하는지. 이 매력적인 세계관 속에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는지 직접 보는 것이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매력이다.

그렇기에 아이템을 모으고, 캐릭터 레벨을 올리고, 암살자보다는 전사라고 해야 어울릴 것 같은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적잖이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에 와서는 시연 가능 구간 이면에 감춰진 이 게임의 본질이 내 생각보다 훨씬 기존의 어쌔신 크리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기만을 바란다. 나는 또 다른 암살자를 경험하고 싶은 것이지 이집트의 위쳐가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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