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모바일로 돌아온 다원우주의 방랑자: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 향상판

리뷰 | 장호준 기자 | 댓글: 25개 |




⊙개발사: 빔독 ⊙장르: 롤플레잉
⊙플랫폼: PC, 안드로이드, iOS ⊙출시: 2017년 4월 11일




1999년에 발매된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Planescape: Torment) 는 당시 최고의 RPG로 칭송을 받은 타이틀이었다. 기자도 어느 PC 게임 잡지에서 번들로 제공된 CD를 입수해 플레이해 본 경험이 있다. 솔직히 말해 즐거운 경험은 아니었다. 느린 게임 진행과 전투는 둘째 치고라도 게임에 수록된 대사량이 어마어마한 게임인지라, 대사를 읽고 마우스를 클릭하느라 며칠간 눈과 손목에 통증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이름 없는 자'의 여정에 빠져드는 자신을 느꼈다. 흉측한 외모의 불사자가 된 주인공이 잃어버린 과거를 찾아 나서는 음울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캐릭터들은 시종일관 유쾌한 농담을 내뱉고 있는지라 기묘한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또한 게임 진행 중에 아이템을 못 챙기거나 대화를 잘못 선택하면 게임 진행이 꼬이는지라 긴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20여년의 시간이 흘러 2017년 4월 11일,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 향상판(Enhanced Edition, 이하 향상판)이 PC와 모바일용으로 발매되었다. 이 게임이 모바일용 버전으로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개인적으로 의아한 감정이 들었다. 텍스트 위주의 정통 RPG가 화려하고 간략화된 진행 방식을 택하는 모바일 게임 시장에서 주목받을 수 있을까?

기자의 걱정은 기우였다. PC용 RPG 게임의 걸작 중 하나로서 20여 년에 걸쳐 찬사를 받아 온 원작의 영향력과는 별도로, 2017년의 토먼트는 접근은 쉽지 않지만 좀처럼 손을 놓을 수 없는 게임이었다. 신속과 편의와는 거리가 먼 인터페이스에도 불구하고 사소한 요소가 게임 진행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정교한 시스템과 스토리에 이끌려 손을 놓지 못했다.




▲ 시체 안치소에 끌려오는 주인공을 클로즈업하며 게임이 시작된다.



*이 기사는 게임의 Android용 버전을 위주로 작성되었습니다.



■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는 어떤 게임인가


1999년에 블랙 아일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는 AD&D(Advanced Dungeon & Dragons)의 여러 캠페인 세팅, 다시 말해 세계관들 중 하나인 플레인스케이프(Planescape)를 무대로 '이름 없는 자' 의 여정을 그린 게임이다. 발매 당시의 판매량은 좋지 못했지만 게임의 완성도는 호평을 받았기에, PC용 RPG의 명작 중 하나로 입에 오르내리는 작품이 되었다.

2012년부터 빔독(Beamdog)에서 발더스 게이트나 아이스윈드 데일을 비롯한 과거의 명작 RPG들을 개량한 향상판(Enhanced Edition)을 발매하기 시작했다. 발더스 게이트 1과 2, 아이스윈드 데일의 향상판 이후 토먼트의 향상판 제작 계획이 발표되었고, 한글 인터페이스를 포함한 게임이 발매되었다.

모든 기억을 잃고 시체 안치소에서 깨어난 '이름 없는 자'는 여러 지역과 인물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이 누구였는가, 그리고 과거 자신과 함께했던 동료들에 대한 단서를 찾는다. 플레이어는 여러 차원으로 구성된 세계를 배경으로 대화를 통해 주인공이 살아온 흔적을 찾으며 이름 없는 자와 얽힌 각종 인물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정통 RPG의 틀을 수용하면서도 대화가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어드벤처 게임을 연상시키는 진행 방식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온 몸이 문신으로 뒤덮인 파격적인 스타일의 주인공, 자신을 찾는다는 심오한 스토리라인에 유쾌한 농담이 절묘하게 섞인 분위기로 많은 게이머들의 찬사를 받았다.









▲ 1999년에 발매된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의 인터페이스이다.




■ 게임은 그대로이지만, 편리해진 인터페이스


PC로 발매된 향상판에서 가장 크게 강조된 사항은 4K 해상도를 지원할 정도로 개선된 그래픽과 리마스터된 사운드였다. 모바일 버전도 향상판의 개선점이 그대로 반영되었기 때문에 세부 그래픽 묘사가 향상되고 화면의 확대 및 축소도 가능해졌다.

향상판은 원작의 인터페이스를 최대한 반영하면서도, 모바일 환경에서 플레이하는 유저층을 고려한 흔적이 엿보인다. 가장 눈에 띄는 점으로, 터치로 대부분의 작업을 해결하는 모바일 환경에 맞추어 화면의 오른쪽과 왼쪽에 별도의 탭이 생겼다. 탭에는 게임 중 자주 쓰는 옵션들이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PC판과 달리 온갖 단축키를 숙지할 필요가 없어졌다.

추가된 기능 중 눈에 띄는 것은 '빠른 전리품'과 '세부사항 표시'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빠른 전리품' 버튼을 활용해 플레이어는 일일이 땅에 떨어진 아이템을 누르지 않고도 화면에 보이는 아이템을 확인할 수 있다. '세부사항 표시' 기능은 게임 화면에서 상호작용 가능한 오브젝트들을 표시한다. 이 기능 덕분에 화면 안에서 캐릭터가 건드릴 수 있는 NPC, 문, 상자 등을 쉽게 구분할 수 있어 목표 대상을 찾기가 수월해졌다.

또한 전투 기록을 확인하는 기능이 추가되어, 아군과 적군이 주고받은 피해량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일지에서 특정 키워드를 검색하는 기능 역시 추가되었다. 이 게임은 특정 인물이나 아이템을 찾는 과제가 진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아이템 수집이나 기록 확인을 돕는 기능이 개선된 것은 플레이할 때의 편의성을 상당히 높여 준다.




▲ 양 측면에 버튼들이 추가되어 터치 한 번으로 편의 기능들을 실행할 수 있다.





▲ '빠른 전리품' 기능을 활용하면 화면의 아이템 전체가 표시된다.





▲ '세부사항 표시' 기능은 주목해야 할 오브젝트들을 구분해 준다.





▲ 검색어에 특정 키워드를 입력하면 붉은 색으로 일지에 표시된다.



아쉬운 점도 있다. 작은 버튼 십여 개가 모인 인터페이스에서 필요한 버튼이나 대상을 누르기가 쉽지 않기에 화면이 작은 스마트폰으로 진행하기에는 답답한 감이 있다. 이를테면 공격하려는 대상을 터치해야 하는데 쥐 같은 작은 크기의 적을 터치하기 어렵다. 기자가 사용하는 5.5인치 규모의 스마트폰으로도 버튼 누르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태블릿 같은 넓은 화면의 기기를 활용한다면 더욱 쾌적한 진행을 할 수 있다.

공격, 주문 시전 및 아이템 사용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해당 기능의 버튼을 터치한 후 슬롯에 따로 지정된 항목, 대상 순으로 터치해야 캐릭터가 지시한 기능을 발휘한다. 일시정지 기능을 활용해 전투나 주문을 지정하는 원작 특유의 시스템을 그대로 반영했기에 잘 활용하면 전략적으로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다. 다만 모바일 환경에서는 수동으로 터치를 반복해야 하므로 번거로울 수 있다.

방대한 양의 대화를 표시하는 게임인 만큼, 대화를 표시하는 인터페이스가 무척 중요해진다. 사소한 영역일 수 있지만, 모바일판에서는 좌측 상단에 대화 번호를 터치할 수 있는 기능이 추가되었다. 대화의 선택지가 대책 없이 늘어날 경우에 잘 활용하면 신속한 진행이 가능하다. 다만 터치 한 번에 대화가 넘어가므로 실수에 유의할 필요는 있겠다.

문제가 있다면 10개 정도의 대화 선택지가 등장할 경우 좌측 상단의 버튼이 9개까지만 표기된다. 대화창에서 10번 선택지를 터치하면 대화가 진행되며, 게임 진행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사소한 문제이지만 마무리에서 아쉬움이 느껴졌다.




▲ 가뜩이나 버튼도 많은데 적조차 작으면 터치하기 매우 힘들다.





▲ 대화 선택지는 10개인데 그에 해당하는 버튼은 9개뿐이다.




■ 여러 방향으로 열린 게임 진행


향상판의 주요 줄거리와 게임 진행 방식은 원작과 동일하다. 대부분의 퀘스트는 게임 진행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게임 세계를 돌아다니는 NPC들은 대사를 어떻게 선택하는지에 따라 주인공의 손에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다. 대화 선택지와 퀘스트에 따라 주인공의 성향과 이야기 전개가 달라진다. 주인공의 직업은 언제든지 변경 가능하기 때문에 다양한 전투 방식을 경험할 수 있다.

충분히 참신해 보이는 시스템이지만, 이로 인해 게임 진행이 느려지고 긴장감 넘치는 전투를 구현하기 위한 여러 요소가 희생되었기 때문에 시스템에 대한 비판 또한 만만치 않았다. 쓸모 있는 직업은 정해져 있었고, 마법은 복잡한 습득 과정에도 불구하고 후반부에나 가야 효과를 볼 수 있었다. 회복 아이템이 충분하다면 직업이 '파이터'로 설정된 캐릭터들로 대부분의 전투를 해결할 수 있었다. RPG에서 기대되는 전투를 토먼트에서는 확인하기 힘들다는 비판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하지만 토먼트는 일반적인 RPG와 진행 방식이 다르다고 봐야 한다. 이 게임은 방대한 대화와 선택지를 제공하고,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세부적 전개가 바뀌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심지어 주인공과 동료들에게는 죽음에 대한 페널티도 없다. 이름 없는 자가 사망하면 즉시 부활하고, 동료가 사망하면 이름 없는 자의 스킬을 활용해 즉시 소생시킬 수 있다. 죽어도 경험치나 아이템에서 손해를 보지 않는다. 주인공이 육체적으로 죽지 않는다는 설정이 긴장감을 떨군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끊임없는 죽음을 경험하며 단서를 찾는 이 게임의 목적에 걸맞은 설정이라 느껴진다.




▲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주인공은 죽어도 되살아난다.





▲ 대화 선택에 따라 NPC와 싸울 수도, 대화로 해결할 수도 있다.





▲ 연애 시뮬레이션 아닙니다.




■ 한 권의 책처럼 느껴지는 심오한 스토리


'철학적'이라는 표현은 이 게임의 소개 글에서 가장 흔히 발견되는 수식어이다. 이 게임이 왜 철학적인지를 나름대로 풀어 본다면, 토먼트는 개인과 개인이 몸담고 있는 사회, 우주의 관계에 대한 심오한 성찰을 담고 있다. 주인공과 과거에 함께했던 동료들은 누구였으며, 서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알아내는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인생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죽음과 부활을 반복해 온 주인공이 삶의 단서들을 찾으며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은 어떤 순간이었으며, 그것을 따지는 것은 가능한가를 고민하는 과정은 게이머들 역시 고민하게 만들기 충분한 이야기이다.

비단 스토리의 측면에서만 철학적일 뿐만 아니라 대화, 전투, 아이템 습득 등 게임 진행의 요소들도 플레이어의 사고를 이끌어낸다. 이름 없는 자가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단서를 탐색하면서 게임이 진행된다. 그러므로 대화 중에 드러나는 사소한 단서나 아이템이 전체 진행 방향에 영향을 주는 경우가 많다. 게임 진행을 위해서는 꼼꼼히 대화를 확인해야 하는 셈이다. 이렇게 많은 생각을 요구하는 게임 방식이기에 플레이어들은 자연히 무작정 진행하기 전에 게임에서 지나쳤던 것들을 다시 보게 된다.

이렇게 방대한 대사량 덕분에 이 게임의 진가를 느끼려면 언어의 장벽을 넘는 것이 필수였다. 향상판은 한글 인터페이스를 지원하기 때문에, 언어로 인한 걱정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 오래 전 영어사전과 공략집을 찾으며 텍스트를 해석했던 게이머들의 일화는 추억 속의 이야기가 되었다.

빔독에서 발매했던 일부 향상판에서 한글화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점을 못내 아쉬워하던 팬들에게는 가뭄의 단비 같은 일이 아닐까. 간혹 오타가 발견되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파괴할 정도로 치명적이지 않으므로 번역을 믿고 게임을 진행하기에 무리가 없다.




▲ 번역이 있기에 이런 심오한 대화들과





▲ 각종 수수께끼들의 의미가 손쉽게 이해된다.




■ '읽었다' 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게임


토먼트의 향상판은 원작 그대로를 모바일로 옮겨 왔다. 편의 기능의 추가와 약간의 인터페이스 변경을 제외하면 과거 PC 모니터 앞에서 게이머들에게 고통을 안겨 주었던 게임 방식이 모바일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단순한 조작으로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게임과는 거리가 멀기에 이 게임은 자투리 시간에 짬짬이 즐기기에는 쉽지 않다. 수십 시간을 투자해 긴 호흡을 가진 스토리를 읽고 단서를 찾는 게임이기에 짧은 시간에 즐길 수 있는 게임을 선호한다면 이것은 적합한 선택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들여 생각하고 헤매는 RPG의 묘미를 아는 사람들에게, 혹은 느끼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십수 년 전 PC 게임 시장을 뒤흔들었던 걸작이라는 점도 있겠지만, 그만큼 이 게임은 시간을 들여 즐길 가치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위에서 인터페이스와 진행 방식에 대한 불편을 약간 토로했지만, 이렇게 답답할 정도로 수동적인 진행 방식 덕분에 플레이어가 텍스트를 꼼꼼히 읽고 신중한 선택을 하도록 유도한다.

이 게임을 구매한다면 "무엇이 인간의 본성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구글 플레이 스토어의 소개 페이지부터 게임 내내 등장하며 플레이어들을 어리둥절하게 할 것이다. 여러 차원의 우주를 헤매며 이름 없는 자의 일지를 채워 넣는 작업에 동참한다면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설령 답을 찾지 못하더라도, 혹은 찾은 답이 의미가 없을지라도 이름 없는 자의 여정을 바라보는 게이머들은 현재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기회를 얻을 것이다.




▲ 레벨업할 때의 체력이 1부터 10 사이에서 무작위로 정해진다는 설정도 여전하다.





▲ 게임을 관통하는 중요한 질문이다. 답은 플레이하면서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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