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최악의 적은 나다" 잘 만든 단편 영화 같은 게임, '에코'

리뷰 | 허재민 기자 | 댓글: 23개 |

패턴을 파악한다는 것은 게임을 플레이할 때 중요한 부분이다. 이렇게 말하면 우스워 보이지만, 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하지 않는가. 다른 유저와 겨룰 때도 그 사람 특유의 행동 패턴을 파악하게 되고, AI는 그 패턴을 파악하는 것 자체가 공략법이 되는 거니까. 그런데,

만약 그 상대가 나라면?

지난 9월 19일 출시된 인디게임 '에코(Echo)'는 '내 행동을 적이 따라한다'는 매력적인 설정을 가진 게임이다. 인디게임 맞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게임 스크린 샷도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덴마크 코펜하겐에 있는 개발사 Ultra Ultra는 구성원 대부분이 히트맨 개발진으로 이루어진 인디게임 스튜디오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첫 작품, '에코'의 트레일러에는 잠입과 숨어 움직이는 히트맨에서 볼 수 있었던 특징들이 담겨있다. 적이 눈치채지 못하면 정말 쉽게 지나갈 수도 있고, 몰래 뒤에서 기습을 하고.

이거 한번 해볼 만 하겠다, 하고 게임을 켰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메뉴에 웬 거대한 눈이 등장한 것. 공포게임은 아닐 텐데. 아니어야 할 텐데. 살벌한 분위기가 인상적인 '에코', 어떤 게임이었을까?

▲공포게임이 아니라고 말해!


내가 살려낸 것은 나 자신이었다
궁금증을 자아내는 스토리와 설정





"알려지지 않은 경이로움으로 가득한 궁전, 하지만 그곳은 가치있는 자들만을 위한 곳. 우리는 간절히 우리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했다. 다만, 나는 절대 가고 싶지 않았어. "

메뉴 화면만큼이나 인상적인 'Echo'의 오프닝 영상은 영화 타이틀장면을 보는 것처럼 시작된다. 미지의 공간에서 깨어난 En은 그녀의 할아버지, 포스터를 살려내고자 궁전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야기는 En과 우주선의 AI인 런던 간의 대화로 진행된다. 목소리가 익숙해 찾아보니 '왕좌의 게임'의 이그리트 배우, 로즈 레슬리가 연기했으며, AI 런던은 매스 이펙트와 헬블레이드 등에서도 참여한 닉콜라스 볼튼이 맡았다. 로즈 레슬리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매력적.

사실 플레이 타임이 길지는 않은 만큼 스토리도 간결하다. 큐브화된 포스터를 살려내고자 하는 En, 그녀를 저지하는 궁전, 그리고 그녀와 포스터에 대한 이야기. 하지만 특유의 설정과 분위기가 충분히 궁금증을 갖고 게임을 플레이하도록 해준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연출, 게임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



전체적으로 인상 깊었던 것은 연출 부분이었다. 앞서 언급한 게임의 오프닝 영상도 인상적이지만, 사실 가장 먼저 등장해 우리를 긴장시키는 거대한 눈알 메뉴부터가 시작. "장난 아니니까, 정신 차려!" 하고 외치는 듯한 메인 메뉴 화면이 긴장감과 게임 내의 미묘한 이질감을 전달한다.

이후에 게임 플레이에서 언급하겠지만 게임 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정전, 블랙아웃 현상이다. 불이 꺼졌다가 켜지면서 적의 상태가 진화 및 리셋이 되는 현상인데, 전체적으로 게임의 긴장감을 조성하는 일등 공신 역할을 한다. 시야가 한순간에 사라졌다가 다시 보이게 되면서 무엇이 달라졌을까 두려워하게 되는 것. 특히 클론들이 점점 자라나는 연출은 정말 인상적이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다음엔 다리가 생겼다!

공포게임에서도 연출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빛'이다. 불이 꺼지면 당연히 무서울 수밖에 없다. 내 시야가 한정되고, 시야의 사각지대에서 무슨 일이,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거니까. 볼 수 없다는 것 자체가 공포다. 'Echo'는 게임 설정이라는 간편한 방법으로 인위적인 빛 차단을 가능하게 한다. 어떻게 보면 살아 움직이는 듯한 '궁전' 자체가 게임을 지배하는 게 당연할지도. 마치 귀신의 집에 온 듯이.



그래도 중반부터는 게임 세이브도 가능하게 해준다.
저 투명한 장막을 지나가면 된다. 근데 왠지 지나가면 죽을 것 같다.


메아리치듯 울려 퍼지는 나의 전략
나의 플레이를 배우는 적, 게임 플레이


게임의 궁극적인 목표는 궁전에서 포스터를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며, 빛 구슬을 모으거나 길이나 열쇠를 찾는 등, 행동의 목적은 간단한 편이다. AI 런던이 알려주기도 하고 찾아가야 할 길의 방향도 알려주며, 몇 개의 빛 구슬을 찾아야 하는 지도 명시되어 있으니까. 게다가 적인 클론들도 그렇게 무서운 적은 아니다.

중요한 점은 적들이 모두 나의 클론이라는 것. 내가 하는 행동을 보고 클론들이 배워나간다는 점이다. 가령 내가 총을 쏜다면 적들도 총을 쏘기 시작하고, 전까지는 물에 다가가지 못했던 적들이 내가 물을 밟기 시작하면 똑같이 물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쉽게 갈 수도,

▲어렵게 갈 수도 있다

그럼 처음부터 엔딩을 볼 때까지 총을 안 쏴야 하는가, 그건 아니다. '궁전'은 중간중간 텀을 두고 리부트를 한다. 내가 특정 행동을 할 때마다 얼음과 같은 잔상이 생기는데, 이를 통해 다음 정전 후에는 클론들이 이 행동을 배울 것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리부트가 일어날 때마다 적들은 전 사이클에서 내가 행동을 배우는 동시에 내가 하지 않은 행동은 다시 잊게 된다. 리셋과 진화가 함께 일어나는 것이다.



▲이 클론은 당신의 행동을 기억할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내 행동 및 전략을 되돌아 볼 수 있다는 점이 주요하게 작용한다. 전 사이클에서 적들이 뛸수 있다는 점이 치명적으로 작용했다면 다음 사이클에서는 뛰는 걸 지양하는 식으로. 클론에게 어떤 능력을 주고 어떤 능력을 주지 않을지 생각해볼 수 있다. 아, 대신 불이 꺼지고 후레쉬로 진행할 때는 행동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마구 뛰고 쏴도 된다.

게임 타이틀인 '에코', 메아리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설정이다. 소리가 점점 작아지면서 사라지고, 다시 소리가 나면 새로운 울림이 생기니까.


큰 맵과 나 하나, 그리고 단조로움
아쉬운 점


장점이 확실한 만큼 단점도 확실하게 보이는 게임이다. 먼저 다소 지루한 초반 플레이. 이야기 대부분은 대화로 진행되며, 특히 궁전 밖으로 나왔을 때 길을 찾는 '쉬어가는 타임'때 진행된다. 이때는 해야하는 것이 정말 길찾기 밖에 없는데 여유롭게 대화를 한다고 생각하면서 진행하면 되고 오래 걸리는 부분은 아니지만 다소 게임 페이스가 늘어지는 게 사실이다.



▲대화를 하면서 스토리가 진행되는 부분이지만, 단조로운 것이 사실이다

또한, 게임 방식을 익히는 튜토리얼이라고 할 수 있는 초반 부분이 너무 길다는 점이다. 총을 쏘는 법, 에너지를 사용하는 법, 길을 찾는 법을 익혀가는데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한참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게임에 익숙해지는 단계, 튜토리얼같은 스테이지였다. 물론 En과 함께 '클론'에 대해 알아가는 점이 주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초반에는 걷기 시뮬레이터인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이런 부분이 길어지는 이유에는 맵이 정말, 크고, 크고, 크기 때문이라는 점도 있다. 거대한 궁전은 아름답고 압도감을 주지만 아무것도 등장하지 않는 초반에는 정말 그냥 '큰 맵'에 불과하다. 뒤로 갈수록 조금씩 분위기나 색감이 달라지지만, 전체적인 디자인 부분은 비슷하다는 점도 아쉬운 부분. 심지어 등장인물도 나(와 나랑 똑같이 생긴 애들)밖에 없는데 말이다!

▲달리고, 달리고, 달려야한다

마지막으로 좀 더 창의적으로 플레이할 수 있는 요소가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공격방식에는 총을 쏘거나 밀치거나(대부분 밀치기만 하지만), 뒤를 잡아 목조르기, 나중에야 가능한 빛 구슬로 머리치기 정도가 있는데 다양하지 않아 아쉬울 수밖에 없다. 물론 클론을 쉽게 죽일 수 없다는 점이 게임을 어렵게 만들고 긴장감을 주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액션을 기대하고 게임을 시작하면 실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다.


하나의 주제로 관통되는 '에코'의 설계
리뷰를 마무리하며


'Echo'는 간단한 게임이다. 트레일러를 보면 마치 복잡한 잠입, 암살 게임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조금 다르다. 조금 실망할 게이머들도 있겠지만, 개발진은 주제와 스토리를 전달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부분에 집중했다. 이건 게임 설명에도 하나의 문장으로 나와 있으며, 거의 공략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다.

"최악의 적은 나다."

단순한 스토리와 게임 플레이. 단점으로 꼽은 부분이기도 하지만 사실 '에코'를 통해 감탄한 부분이기도 했다. '에코'는 단순함을 통해 게임 전체를 관통하는 설정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다. 게임의 요소들이 모두 하나로 관통된다. 게임 플레이를 그대로 담은 제목 '에코'가 그러하고 클론들을 상대하는 데에 액션보다는 설정 자체가 중요하다는 점이 그러하다.

게임을 플레이하고 나서 느낀점은 '잘 만든 단편 영화 같다'는 것이다. 물론 이건 게임이라기보다는 영화야! 이런 말이 아니라, 잘 만든 단편 영화가 보여주는 감상을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단편 영화에는 많은 것을 담을 수 없다. 짧은 만큼 많은 사건이 들어가기 어렵고, 주제도 다양한 주제를 전달하기에는 부적합하다. 그만큼 단편 영화는 한두개의 중요한 주제를 제대로 전달하는게 중요하다.

게임 '에코'도 그랬다. 엔딩을 보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으며, 스토리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 En의 목적도 단순하다. 중요한 것은 이 주제를 게임 플레이를 통해 제대로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타이틀부터 스토리, 설정이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있다. '에코'를 플레이하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이다.

분명 호불호가 갈릴 수 있고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점도 많은 게임이었다. 하지만 잘 만든 단편영화들이 그러하듯, '에코'가 준 짧고 간결한 여운은 꽤 오래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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