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전: 회색의 잔영 리뷰

수렁에서 반보 벗어난 IP 부활의 첫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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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전. 이 단어만큼 90년대~2000년대 초반 국산 패키지 게임을 추억하던 유저에게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단어는 많지 않을 거다.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캐릭터와 필살기, 그리고 비장함과 애틋함이 아련히 남는 비극 그리고 희망의 이야기는 20년이 넘어서도 아련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세기전3 파트2 이후의 IP의 행보는 솔직히 말해 좋지 못했다. 그때 그시절의 SRPG를 기억하며 접근하던 팬들에게 색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곤 했지만, 그 시도들이 거진 호응을 얻지 못했다. 팬들은 추억과 감성을 느낄 수 있는 리마스터, 리메이크를 원했지만 그런 작품은 쉽게 나오지 않았고, 결국 반쯤 포기 상태에 있었다.

그랬던 차에 혜성 같이 발표됐던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이 지난 22일, 드디어 정식 출시가 됐다. 솔직히 '드디어'라고 말한 이유는 다들 알 것이다. 지난 지스타 시기에 공개했던 체험판이, 정말 이런 말을 하기 그렇지만 '독이 든 와인'이 아니라 그냥 '독' 그 자체였다. 지난 2월 빌드라고는 하지만 그래픽, 전투 속도, 연출, 컷신, 로딩, 모든 것이 정식 출시 버전이 제대로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인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체험판이 공개됐을 무렵 지스타에 가지 못하고 유나이트 암스테르담 취재하러 갔다가 복귀하는 비행기편에서 체험판을 한 뒤 바로 좌절해서 졸도해버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처음 공개됐을 때부터 창세기전이 이제야 3D여도 고전의 느낌을 살리는 방향으로 리메이크되는구나 기대했던 만큼, 팬들의 충격은 너무도 컸다. 그 여파에 라인게임즈는 지스타 끝난 후에 또 인터뷰를 진행, 정식 출시판은 다를 것이라고 약속했다. 어쨌거나 공개한 영상을 비교해보니 정식 출시 버전에서 확실히 개선된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희망의 끈과 의심을 놓지 않은 채 계속 기다려왔고, 드디어 '창세기전'이 나오자마자 바로 플레이에 돌입했다. 그러면서 '창세기전'이 더 이상 망각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한 마지막 두 다리 중 하나가 어떻게 될지 팬으로서 지켜봐야 한다는 의무감과 약간의 안도감, 그리고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복잠한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다.



게임명: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
장르명: SRPG
출시일: 2023. 12. 22.
리뷰판: 1.1.0 버전
개발사: 레그스튜디오
서비스: 라인게임즈
플랫폼: Switch
플레이: Switch


계속 이야기를 보게 만드는 '창세기전'의 추억의 가닥은 살렸다




체험판이 너무도 충격적이었던 만큼, 과연 정식 출시 버전은 어느 정도일지 팬들의 관심사가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정식 출시 버전은 나쁘지 않았다. 최악을 상정했다가 그게 아니라서 안도의 한숨을 쉰 그 느낌에 더 가깝지만, 어쨌든 나락의 구렁텅이로 100% 떨어지는 것이 확정됐던 상황에서 반 발짝이라도 앞으로 딛고 나온 게 어디인가 싶었다.

체험판은 체험판일 뿐이지 정식 출시 버전과의 비교는 크게 의미가 없긴 하다. 그렇지만 계속 그걸 돌아보게 만드는 건 아무래도 여전히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이 현시대에 내세운 기준에 못미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이미 처음에 게임을 보는 순간 그 생각이 들기 싫어도 들게 된다. 당장 게임을 켤 때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그래픽부터 성에 차지 않는다. 체험판에서 입도 뻥긋 안 하고 표정도 어눌하고 이펙트도 살살 날아가서 무게감이 떨어졌던 것을 생각해보면 다시 보니 선녀 같긴 하다. 전투 장면에서 초필살기류를 쓸 때 아니면 크게 모난 부분도 없다. 전체적인 배경이나 컷신 연출도 좋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고전의 느낌은 살리면서 무난하게 넘어갈 수준까지는 끌어올렸다.

▲ 저 체험판을 출장 복귀 비행기에서 했을 때 충격과 공포란 ㅂㄷㅂㄷ 그래도 당형 미인은 꽃과 같 읍읍....

그렇지만 마이너스로 지적받은 부분을 고친 것이지 전반적인 퀄리티를 현세대 기준까지 맞췄다고 보기엔 애매했다. 다만 닌텐도 스위치라는 플랫폼의 한계 그리고 개발진의 경험치 부족인 것을 감안하면 '창세기전'이라는 이름값으로 넘어갈 법한 수준까지는 맞췄다고 할까.

그리고 그 커트라인을 넘어간 순간,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은 왜 창세기전이 지금까지 팬들에게 회자되는 IP인지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그간 추억 속에 남아있던 스토리들이 하나둘씩 퍼즐처럼 맞춰지고, 당시에는 스크립트로 넘어갈 수밖에 없던 장면들을 리메이크된 BGM과 함께 감상하다 보면 감회가 새로웠다. 100% 완벽하게 만족할 수는 없더라도, 그간 창세기전 IP가 보여준 참담한 행보에서 이제야 조금은 방향을 잡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 원작 팬이라면 아는 그 빌드업 장면부터






▲ 무도회의 그 장면까지 느우우우우우웃 포에트!!! 조금 아쉬운 구석은 있지만 그게 뭐가 대수랴!!!

특히 원작에서 다소 산만하게 전개되던 중반부 스토리를 연대기대로 흐름에 맞춰 재구성하면서 스토리의 텐션과 몰입도가 쭉 이어졌다. 원작은 안타리아 대륙 곳곳을 오가면서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는 군상극이 조명될 때 다소 갑작스런 면이 있었지만, 과거와 현재를 여러 차례 오가면서 다소 헷갈렸던 원작과 달리 과거부터의 맥락을 앞에서 짧게 설명하고 시간 순서대로 짜맞췄기 때문에 명료하게 '창세기전'의 이야기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면 갈수록 후속작 및 외전과의 미싱링크를 채워가고 있어서 창세기전은 못해봤어도 서풍의 광시곡, 창세기전3로 접한 유저들의 향수와 기대감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아울러 플레이하면서 창세기전의 전투 구도의 핵심은 잘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저찌 전선을 유지하면서 초필살기를 쓸 조건을 마련해 강력한 초필살기로 일발역전했을 때의 카타르시스가 창세기전의 묘미이지 않나. 그리고 마장기 전투는 마장기의 강력함은 살리면서도 초필살기급은 아닌 절묘한 밸런스가 맞춰졌다. 연출에서 여러 가지로 모호하다는 평을 받고 있지만, 적어도 마장기의 디자인이나 모션 그리고 스킬의 박력은 상당히 인상 깊었다. 마장기 그리고 대형 유닛의 제약 등으로 전략성을 살리면서도, 그걸 감안하고도 어쨌거나 쓰고 싶게 만드는 그런 매력이 있다고 할까. 초필살기와 마장기를 키로 해서 풀어나가는 메인스토리의 전투만큼은, "이게 창세기전이지"라는 말이 나오기엔 충분했다.



▲ 챕터마다 이야기의 흐름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하고



▲ 원작의 공백이나 허술했던 부분을 보완하면서 스토리의 짜임새를 다져갔다






▲ 마장기가 동원되는 전투에서 그 위력을 실감할 수 있지만



▲ 그만큼 어렵사리 모아둔 기력으로 초필살기를 시전, 한 방에 소탕할 때의 쾌감이 크다


조금 나아졌지만,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아쉬움




그런 평가는 그런데 초필살기들이 더 다양하게 해금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현재 팬들에게 크게 지탄 받는 부분이 원본의 초필살기 설정과 괴리감이 느껴진다는 점과 박력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전자의 경우는 여러 가지로 양보해서 '리메이크'인 만큼 창세기전 스토리와 설정을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이전과 조금 다르게 연출했다고 해줄 수도 있겠다.

그보다는 근본적으로 초필살기라는 위상에 걸맞는 연출을 완벽히 보여주지 못한 게 문제다. 원작 '창세기전'도 돌이켜보면 추억 속에서 재생된 것처럼 완벽한 작품은 아니다. 당대의 명작 RPG들과 비교했을 때 시스템이든 설정이든 정련되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그렇지만 그런 것은 신경도 쓰이지 않을 만큼 화끈하고 멋진 초필살기 연출, 그 박력에 뒤지지 않는 비장함과 비극을 담아낸 장대한 스토리가 '창세기전'이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주요 동력이었다.



▲ 프로미넌스, 문라이트, 파워썬더 3개가 연달아 나가는 마법일 텐데 이렇게 허술한 건 도대체



▲ 그런 걸 생각하면 초반에 보였던 천지파열무는 그나마 양호할지도

당시 창세기전을 안 했지만 게임을 조금 했다 하는 친구들도 어디서 아수라파천무, 천지파열무 등 유명 기술은 들어서 써먹었을 정도로 무언가 뜨거운 로망을 자극하는 것이 창세기전의 초필살기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현재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은 그 로망을 자극한다고 보기엔 애매하다. 창세기전의 초필살기는 설정으로나 인게임으로나 전황을 한 번에 뒤집을 정도로 강력한 스킬이다. 그래서 과거부터 상당히 과장을 섞고 스케일을 키워서 그 위력을 바로 확실히 알 수 있게 보여줬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보다는 그걸 연출하는 캐릭터, 그리고 그 인근에 포커스를 맞추는 경향이 있었다. 각 캐릭터마다 자신을 상징하는 초필살기가 있으니 이런 방향도 크게 문제는 안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 캐릭터에 초점을 맞췄다면 그만큼 캐릭터의 박력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텐데, 더빙이나 연출에서 그 역동감과 박력을 온전히 실었다고 보긴 애매했다.




▲ 주요 포인트에 힘을 싣는 건 잊지 않았지만

▲ 초필살기 연기는 박력이 있다고 하기엔 2% 부족한 느낌

그리고 이 부분은 성우 더빙에 대해서 여러 의견이 나오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평상시의 더빙은 무난한 것 같다가도, 감정이 동해야 하는 장면에서도 대부분 절제가 된 느낌이었다. 더빙 디렉팅이라는 개념이 희박했던 그 당시 국산 게임들의 추억이 떠오르긴 하지만, 그 뒤로 계속 발전해온 국내 게임계의 흐름과 비교하자면 괴리감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처음에는 다소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이올린의 더빙을 개발진의 의도를 듣고 나니까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던 것처럼, 개발진의 의도가 무엇일지 좀 더 고심하고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긴 했다. 그렇지만 게임을 할 때 일일이 그 모든 의도를 생각하며 플레이하는 건 힘든 일 아닌가. 특히 창세기전처럼 볼륨이 큰 게임을 매번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면 어지간해서는 끝까지 지켜보기가 힘들다.

실제로 개발진이 플레이타임 80시간 이상 된다고 자랑한 것이 허언은 아니었다. 창세기전을 돌이켜보면 정말 장대한 이야기가 펼쳐지지 않던가. 처음에는 팬드래건 왕국과 실버애로우 대 게이시르 제국과 다크아머의 양대 갈등 구조로 시작했지만, 사이사이에 다른 이야기들이 병렬적으로 전개되면서 끝내 세계의 운명을 건 결전까지 대서사시를 완성해나가는 스크립트만 해도 어마어마한 분량이다.



▲ 불필요한 전투는 최대한 피하고 스토리만 밀었는데 중간까지만 해도 31시간 넘게 소요된다

그 사이사이에 이어지는 캐릭터 육성과 모험에서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은 아쉽게도 고전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일부러 플레이타임을 늘리기 위해 동선을 꼬아두고 길게 늘려둔 던전과 필드맵, 체크포인트가 듬성듬성 있어서 게임오버되면 꽤 앞쪽까지 가서 다시 해야 하는 구성, 인벤토리창에서 각 파트를 일일이 다 찍고 스틱과 버튼을 한참 누르고 돌리면서 장비를 찾아서 장착해야 하는 인터페이스까지. 그나마 체험판에서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고전적인 RPG를 현대에 재구성한 다른 사례를 보면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은 편의성이 너무 뒤떨어진다.

게다가 그래픽 퀄리티도 썩 좋지 않은데 전투에 진입할 때마다 잔로딩 시간도 길고 모험 모드에서 인카운터 전투를 해도 캐릭터 배치도 무작위로 나와서 종종 빠르게 잡몹처리할 때 사거리 문제로 꼬이기도 한다. 그리고 대규모 스킬을 난사해서 빨리 끝내기에는 전투 한 번 한 번의 규모도 작고, 무엇보다도 몹을 직접 때리거나 죽인 캐릭터에게만 경험치가 가기 때문에 설계도 번거롭다. 그마저도 자칫 몹한테 선공을 내주면 큰 피해는 각오해야 하는데, 몹의 경계 표시나 오브젝트 경계 표시나 다 똑같고 맵도 직관적이지 않아서 사소한 것에도 자꾸 신경을 써야 하는 게 피곤했다.



▲ 맵 곳곳에 좋은 아이템이 숨어있을 수도 있으니 안 찾아볼 수도 없는데



▲ 초중반부에 안 키웠던 캐릭터들이 주역이 되는 에피소드도 있고



▲ 칸도 명확히 안 나눠져있고 인카운터에서는 포지션도 랜덤하게 지정된다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은 원작과 달리 모험 모드로 탐색하고 인카운터 전투를 펼치는 요소를 강조한 상황이다. 이렇게 구성한 이유는 창세기전의 이야기를 좀 더 몰입감 있고 자연스럽게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느린 전투 템포에 조작법 그리고 잘 안 보이는 필드의 그리드 등등 여러 가지가 추가로 겹쳐지면서 모험의 밀도는 낮아지고 피로도는 쌓여서 창세기전의 이야기에 몰입하기도 전에 지쳐버리는 악재가 발생해버렸다. 그리고 그 모험 전투도 결국 보상도 별로 없고, 캐릭터를 여럿 키워서 전직 조건을 만족하기 위한 조건도 빠졌으니 굳이 그걸 해야 하는 의문도 든다.

어쨌든 스토리마다 못 쓰는 캐릭터들이 있으니 대체 캐릭터들도 마련해둬야 하는 걸 '창세기전'을 한 유저라면 알고 있긴 하다. 창세기전을 이전에 안 해봤더라도 스토리를 진행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체득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캐릭터가 강해지는 게 체감된다거나 혹은 빠르게 육성한다던가 그런 요소는 거의 없다. 챕터 단위를 뛰어넘어야 그게 체감이 되는데, 그때까지 지난한 전투를 단순 노동식으로 계속 하기란 쉽지 않다. 기껏 승급명령서 찾아서 전직을 시키면 나아지나 싶지만, 그것도 없으니 좀 심하게말해서 탐색해서 좋은 아이템 발견할 수 있다는 희망 외에 왜 이런 걸 넣어서 시간과 동선을 낭비하게 만드나 싶었다. 그나마 중후반부 지나면 모험 모드에서 잡몹 처리하는 시간들이 드라마틱하게 줄고 스킬도 많아져서 그럭저럭 괜찮아지지만 그 시점까지 버티기엔 전투가 상당히 단조롭고, 보는 맛이 덜해서 그런 생각이 자꾸 들 수밖에 없다. 하다못해 디테일이라도 좋았다면 일부러 그랬다는 생각을 하며 조금은 다른 자세로 받아들이겠지만, 디테일이 받쳐주지 않으니 그러기가 어렵다.



▲ 전술 전투 모드는 그래도 거대한 타일식 전장 위에서 광역기 쓰고 신중하게 전략적으로 움직이는 맛이 있지만



▲ 모험 모드 전투는 필드도 좁고 몹 수도 적은 데다가 경험치 배분 문제 때문에 전투를 계속 하기가 귀찮아진다






▲ 해전 파트는 분위기를 살리려고 하긴 했지만, 조작감이 불편하다는 한계는 극복하지 못했다


가까스로 수렁에서 벗어난 '창세기전', 조금 더 분발해서 완전 부활하기를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은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창세기전'의 강점이었던 스토리 그리고 카타르시스는 살려냈지만, 나머지 파트에서 어중간한 느낌이었다. 비주얼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전투 템포나 편의성, 그리고 나머지 디테일에서도 하나둘씩 가시가 돋힌 듯 껄끄럽다.

그래도 그간 창세기전의 행보를 떠올리면 이만큼 발전한 것이 어딘가 싶긴 하다. 적어도 '창세기전'의 핵심인 카타르시스는 확고히 담아냈으니 말이다. 물론 그 '확고히'라는 말이 그래픽이라던가 여러 가지 디테일에서 부족한 부분들 때문에 다소 밟히긴 하겠다. 그렇지만 정말 길게 잡아도 피처폰 시대 이후에 나왔던 창세기전 IP 관련작들은 그마저도 못해내서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거나 크게 어필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러다가 이제야 미흡한 점이 보여도 원전을 풀로, 그리고 그 감성을 온전히 넣고자 하는 시도가 이전 대비 오차율이 비교적 적게 나오고 있으니 말은 매몰차게 해도 속으로는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한정판의 빈약한 구성이나, 올해에 나온 풀프라이스 걸작과의 비교까지 하면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처럼 느껴질지 모르겠다. 오래도록 유저들의 기억 속에 자리잡은 '창세기전'의 이름값을 충족할 만한, 적어도 수작급을 바란 사람들에게는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정도를 바라지 않았더라도 목에 걸릴 만한 요소들은 곳곳에 포진해있긴 하다. 원작과는 달리 유명무실해진 전직 시스템에 밀도도 낮고 중간중간 시간만 잡아먹게 설계된 모험모드까지 더해져서 '창세기전'의 템포를 완전히 담아냈다고 보기도 애매하다.



▲ 장비 관리할 캐릭터가 한두 명도 아닌데 일일이 갈아끼우기 불편하게 되어있고



▲ 대부분의 모험모드가 경로 중간이 아닌 처음부터 반대방향 갈림길이 많아 동선 낭비도 심한데 이속은 느리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은 '창세기전'의 그 카타르시스를 어떻게든 살려냈다는 것만으로도 높게 치고 싶다. 기자이자 리뷰어로서 단점을 계속 살펴볼 수밖에 없었지만, 한 번 컨트롤러를 손에 쥐고 플레이하기 시작했을 때는 그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끝까지 완독하고 싶다는 생각이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다가도 어줍잖게 분량 늘리기를 하려고 질질 끄는 모험 모드의 어눌한 부분이나 잊을만하면 자꾸 보이는 비주얼적인 결함을 보면서 한숨이 푹푹 나오기는 했다. 그래도 엔딩을 향해 달려가자는 마음을 다잡을 정도의 구성은 보여줬다. 체험판으로 예방접종을 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 진입장벽을 한 번 넘고 난 뒤에는 연휴 동안 창세기전의 이야기를 쭉쭉 밀고 나가기에 바빴다. 옛날에 밤새면서 읽던 소설이 개정판이 나와서 밤새며 다시 읽던 그 감각이라고 할까.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은 '창세기전'이 그저 추억 속에 가만히 있어달라는 말로 묻어버리기엔 너무도 큰 존재라는 것을 증명한 게임이다. 현세대의 흐름을 타지 못해 아쉽기도 하고 갑갑하지만, 그래서 더 그 옛날의 추억이 느껴지고 그 감성이 전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행복회로가 가끔씩 돌아갈 정도로 그 카타르시스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몇몇 초필살기 연출에서 김이 좀 빠지겠지만, 이올린과 G.S의 무도회 장면이나 흑태자의 귀환 등등 고난 끝에 그 명장면을 보는 맛, 그리고 역경 끝에 초필살기로 화끈하게 쓸어버리는 강자들의 비장하고도 비극적인 대서사시의 코어는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렵게 불씨를 살린 만큼, 이어지는 후속작과 외전에서는 전반적으로 개선해서 '창세기전'의 이름을 올드팬뿐만 아니라 다시 국내 게임계에 널리 알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이 뒤에 나올 후속작은 추억 보정이라는 필터 없이도 그 감정이 온전히 전해지기를
  • 명료하게 정리된 명불허전의 스토리
  •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강력한 스킬 표현
  • 갈수록 팬심을 자극하는 연결고리들의 발견
  • 원작보다 더 생략된 성장, 육성의 재미
  • 잔로딩, 느린 이속, 그리고 꼬인 동선
  • 위력은 표현해도 박력은 넣지 못한 연출
  • 현세대에 맞지 않는 부족한 디테일과 편의성

리뷰 플랫폼: Switch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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