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16년 간의 고민이 들어간 세계, '디스코 엘리시움'

리뷰 | 허재민 기자 | 댓글: 14개 |


뇌: 전날에 마신 술의 아주 고약한 냄새가 당신 입으로부터 올라오고 있어요.

대뇌변연계: 냄새와 함께 끔찍한 두통도 오고 있다고요! 우웨엑!

깨진 유리창: 취해서 주변을 난장판으로 만든 것도 기억 못 하지?

거울: 정말인가? 거울을 보려고? 마음의 준비를 하게나! 으악, 못생겼다.

으으... 정말이다. 깨질 것 같은 머리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눈을 뜨고 눈앞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수많은 술병이 굴러다니는 난장판. 심지어 깨진 창문에서는 짭조름한 바다 냄새를 머금은 눅눅한 바람이 불어 들어오고 있다. 내가 누구더라. 인간이긴 하던가. 내려다보니 팔과 다리가 보인다. 인간이긴 했군. 하지만 팬티에 양말만 신은 꼬락서니는 끔찍했다.

일어나서 주변에 쓰레기처럼 떨어져 있는 옷가지를 주워입고 다시 보니 화장실 문짝까지 부서져 있다. 내가 그랬던가? 얼마나 막장인 인생을 살아온 거지? 일단 누구라도 찾아서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에 나가니 피곤해 보이는 금발의 여성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내가 담배를 피웠던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상황에 망연자실하게 떨어져 가는 담뱃재를 보고 있으니, 여자가 무심하게 말한다. "안녕하세요, 형사님."

내가 형사였어?!





기억은 안 나지만 주변에서 말하길 형사로서도 꽝이고 인간으로서도 실격인 주인공. 지난 10월 16일 출시된 인디게임, '디스코 엘리시움(Disco Elysium)'은 기억을 잃은 형사의 이야기다. 2016년 처음 개발을 알렸을 때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던 작품인데, 그때는 제목이 'No Truce with the Furies'로 소개됐었다. 대충 번역해보자면... 복수의 여신들과의 타협은 없다... 정도 되겠다.

인디게임이라고 하기에는 방대한 분량의 스토리와 텍스트, 그리고 유화 느낌이 매력적인 그래픽까지, 인디 개발사 ZA/UM이 '디스코 엘리시움'을 개발하기까지는 무려 16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본격적인 게임 개발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약 13년 동안은 순수하게 게임 내 세계관을 개발하는 과정이었고, 이후 종이와 펜으로 TRPG 형식으로 여러 번 테스트하면서 게임의 윤곽을 잡아갔다고 한다.



▲ 개발 초기 단계 일러스트. 그때부터 주인공은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개발사 ZA/UM 자체가 던전 앤 드래곤을 위해 모인 친구들로부터 시작된 스튜디오인데다가,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에 영감을 받아 개발됐다고 밝힌 만큼, 게임은 방대한 세계관과 텍스트 위주로 진행되는 게임플레이를 담고 있다. 꼼꼼하게 플레이해나갈 경우 플레이타임이 약 90시간이라는 것을 고려해보면, 텍스트 양이 어마 무시하다.

'디스코 엘리시움'은 출시 이후 메타크리틱 90점대, 현재 89점을 기록하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다만 문제점은 한국어화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 '디비니티 오리지널 씬2'과 비교해보면 영어 단어나 문장들이 어려운 편은 아니나, 텍스트 양이 방대한데다가 문학적인 표현도 들어있어서 오래 플레이하다 보면 조금 피로해진다.


YOU KNOW NOTHING, 형사님
형사님의 잃어버린 기억 찾기, '디스코 엘리시움'의 게임플레이




내가 형사였다니... 그... 그랬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애써 아는 척을 하며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아침이라 그런지 한산한 로비 바. 뭔가 성격이 나빠 보이는 바텐더와 널브러져 있는 취객, 그리고 몇몇 사람들만이 조용하게 웅성거리고 있다. 바텐더라면 내가 누군지 알겠지. 저기요?
바텐더: 아, 형사님. 전 바텐더는 아니고, 카페테리아 매.니.저.입니다. 그리고 제게 130레알을 지불해야 하시는 거 아시죠?

1. "무엇 때문에 130레알을 내야 하는 거죠?"
2. "레알... 이 뭐죠? 돈 같은 건가? 철학적이네요, 돈이란 무엇일까요?"
3. "난 빚 같은 거 안 졌다. 새끼야." (주먹으로 친다) -> 무력: 0 / 확률: 매우 낮음 3%
4. "됐고, 당신을 체포합니다."

바텐더아니고 매니저: 어디 보자, 먼저 하루에 숙박비가 각각 20레알씩 3일이니, 60레알이고, 아, 보셨겠죠? 창문 깨진 거, 그거 40레알이고. 바에서 난리 치신 거 생각하면 더 나오는데, 30레알만 받기로 했거든요. 형사님 열일 하셔야 하니까^^ 그거까지 합해서 총 130레알입니다. 아, 그리고 레알은 돈 맞아요.


게임 방식은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와 흡사하다. 다만 전투 요소가 거의 없고, 완전히 탐험과 텍스트로만 진행된다고 보면 된다. 중요한 것은 능력치와, 플레이어가 선택해나가는 요소다. '디스코 엘리시움'에서는 주변 인물들과의 대화뿐만 아니라, 사물을 관찰하면서 진행되는 선택지들, 그리고 각 '능력'들이 직접 말을 건다.

그중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능력인데, 실체가 존재하는 것처럼 '얼굴'과 같은 아이콘들이 부여되어 있고, 말투나 성격도 제각각이다. 정신 나간 극배우같은 성격의 'Drama'나 파시스트같은 'Endurance' 등. 중간마다 계속 말을 걸어대는 능력들 때문에, 기억은 완전히 잃었지만, 형사님의 머릿속은 매우 시끄럽다. 게임 내 제약이 되기도 하고, 어떤 상황인지 이해시켜주는 가이드가 되기도 하면서 능력들의 수다는 끊임없이 진행된다. 성격이 제각각인데다가 내용이 재밌어서 읽는 재미는 있다.



▲텍스트가 화면 오른쪽에 세로로 나와 있어서 보기에 편하다

이 능력들은 게임을 어떻게 진행할지를 결정하는 요소기도 하다. 게임을 시작하면 가장 먼저 어떤 '형사'로 플레이할지를 결정하게 되는데, 어떤 능력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에 따라서 힘 좋은 형사가 되기도 하고, 똑똑한 형사가 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각 능력치는 네 가지 분야로, 분야마다 6개의 세부 능력이 있어 총 24개의 능력이 구현되어 있다.

좀더 다양한 정보를 알아차릴 수 있고, 주변을 파악하고 추리하기에 용이한 지능 분야가 있으며, 상대방과의 대화에서 많은 것을 간파할 수 있고, 대화를 끌어나가기를 잘할 수 있는 감각/심리적 부분, 그리고 힘으로 시원하게 해결하게 해주는 능력분야와, 빠른 대처가 가능한 분야도 있다.

가지고 있는 능력이 무엇인지, 수치가 얼마인지에 따라서 게임내에 선택할 수 있는 요소가 달라진다. 사건 현장을 얼마나 관찰하고 추리할 수 있는지, 상대와의 대화에서 그 사람의 의도를 간파할 수 있는지, 싸움을 해서 이길 수 있는지까지. 중요한 결정은 특히 주사위를 굴려서 성공의 여부를 결정하게 되는데, 특정 능력 수치에 따라서 성공 확률이 높게는 80 ~ 90%, 낮게는 한 자릿수까지 떨어지기도 한다.



▲ 24가지의 능력들. 공통점은 다들 시끄럽다는 점.



▲ 끄악 실패.

개인적으로는 섬세한 형사를 콘셉트로 감정적인 부분을 주로 체크했는데, 확실히 게임 플레이에 많은 영향을 주기는 한다. 예를 들어 항구에 진입할 때 덩치 큰 가드 뒤에 있는 스위치를 작동시켜야 하는데, 힘을 위주로 체크한 동료 기자는 싸워서 때려눕히고 지나갔지만, 나의 감수성 넘치는 형사님은 주먹질을 해봐도 기별도 안가더라. 열심히 시키는 대로 가드의 이론을 배우고 익혀서 검사를 받고 비굴하게 항구로 진입할 수 있었다.

능력치에 따라서 퀘스트가 열리기도 하고, 해결되기도 하고, '디스코 엘리시움'의 매력은 외적으로 이루어지는 대화 외에 형사님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내적인 갈등과 대화에서 드러난다. 이는 ZA/UM의 개발 의도와도 연관되어있다. '디스코 엘리시움'의 스토리와 디자인 부분을 이끈 로베르트 쿠르비츠(Robert Kurvitz) 개발자는 '디스코 엘리시움'은 스스로 퀘스트를 부여하는 방식의 RPG를 목표로 개발됐다고 설명했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게 퀘스트를 주는 방식의 RPG를 만들고 싶었다. 사실 나는 퀘스트를 주는 NPC라는 콘셉트 자체를 싫어했는데, 이는 꼭 내가 세계 뒤편으로 밀려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임 내에서 나는 대단한 영웅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가서 이거 좀 해'라고 시키는 존재는 꼭 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 로베르트 쿠르비츠 개발자

물론 '디스코 엘리시움'에서도 게임 시스템상 퀘스트가 주어지기는 하지만, 설정을 통해 많은 퀘스트들이 주인공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진다. 퀘스트 발동 조건도 제각각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신의 플레이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한다. 능력이라는 요소를 통해 게임에 대한 설명과 상황 판단을 도울 뿐만 아니라, 보다 자율적인 스토리 진행을 가능하게 한다.


16년 간의 고민이 들어간 세계
곳곳에 숨겨진 탐험 요소와 텍스트, 텍스트, 텍스트들




'디스코 엘리시움'은 레바숄(Revachol)이라는 도시에서 이루어진다. 격렬했지만 실패한 사회주의 혁명운동이 이루어졌던 장소로, 곳곳에 전쟁의 흔적이 남아있다. 현재는 극심한 빈부격차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인종차별, 노동자 계급의 분노가 극심하게 치닫고 있는 도시다.

세계관에 대한 내용은 게임을 진행하면서 다양한 설명을 들어볼 수 있다. 물론 원치 않으면 넘겨도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마을 한구석에서 볼을 치고 있는 할아버지들에게 질문해서 이야기를 들어볼 수도 있고, 항구 앞 시위현장에서는 도시의 상황에 대해서 토론을 해볼 수도 있다.

세계관 탐방과 메인 스토리 외에도 할 수 있는 요소는 곳곳에 숨겨져 있다. 책을 찾아서 읽으면서 새로운 퀘스트나 스토리를 진행할 수도 있으며, 곳곳에 숨겨진 장소를 찾아내는 재미도 있다. 능력을 통해 문을 열 수 있을 때도 있고, 특정 인물과 대화해서 열쇠를 얻기도 하고, 힘으로 열 수 있는 곳도 있다. 또한, 'The Pale'이라는 미지의 현상까지, 찾아갈만한 미스터리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유화 느낌 나는 아트풍으로 구현된 세계를 돌아다니는 재미도 있다. 인물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가 붓으로 쓱쓱 칠한 듯 미술작품처럼 만들어져있는데다가, 시간에 따라서 분위기가 바뀌어서 눈이 즐겁다.

물론, 앞서 이야기했듯이 형사님의 빚 갚기 프로젝트도 있다. 거리에서 봉투를 주우면, 주변에 있는 병을 모아 돈으로 바꿀 수 있는데, 조금 처량하긴 하지만 쏠쏠하다. 탐험을 하다가 찾을 수 있는 물품들도 팔아서 새로운 아이템을 사거나 의상을 사서 장착할 수도 있다. 특히 의상에는 능력치가 부여되어있어서, 필요한 능력치가 있을때 쏠쏠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아아, 주울 빈병이 이렇게나 많다니, 행복해라.



▲ 패셔니스타 형사도 될 수 있다.

그외에도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다든가, 담배를 찾아서 피운다든가, 여러 가지 퀘스트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의미 없는 퀘스트 같지만, 각 사이드 퀘스트에도 수많은 텍스트가 들어가 있어서, 천천히 읽어보면 재밌다. '디스코 엘리시움'은 분명 텍스트 자체에 매력과 TRPG의 재미가 주요한 게임이고, 진득하게, 천천히 읽으면서 진행할수록 빠져들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방대한 양의 텍스트를 읽으면서 진행하는 만큼 피로도는 높은 편이다. 특히 한국어화가 안되어있는 상황이라 더욱 그렇다. 중간마다 선택에 따라서 행동과 애니메이션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많지는 않은 편이다.

또한, 게임 내 시간이 대화가 이루어질 때만 흘러간다는 점도 피로도를 높이는 요인 중 하나다. 기본적으로 '디스코 엘리시움'은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하루를 진행하면서 이루어지는데, 9시가 되면 동행하던 킴 카소라기 경위와 하루를 마무리하고, 자러 들어갈 수 있다. 이때 카소라기 경위가 자러 갈 때 몰래 나와서 혼자 진행할 수도 있는데, 밤에는 많은 장소가 닫히기 때문에, 진행할 수 있는 부분은 제한적이다.




문제는 시간이 형사 머릿속의 대화든, 외부 인물과의 대화든, 책을 읽든, 대화창이 활성화 됐을 때만 지나간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물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넉넉하다는 점에서 만족스럽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진행이 느려진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특히, 수요일부터만 들어갈 수 있는 장소라던가, 몇 시에 맞춰서 방문해야 하는 곳이라던가, 이런 퀘스트도 있어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책을 읽거나 대화를 계속 진행해야 한다. 정말 알차게 시간을 보냈다는 뿌듯함은 있다.

이는 다소 느린 캐릭터의 이동속도와 더불어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피로함을 느끼게 한다. 퀘스트가 다양하고 많아서 선택의 여지는 많지만, 스킵하려고 했던 퀘스트를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다시 장소를 방문하고, 대화하고, 수많은 텍스트를 마주하고... 오랜만에 책을 읽는 느낌이라, 익숙해지기에 조금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오랜만에 책을 읽듯이, '디스코 엘리시움'




각각 다른 인격을 가진 24개의 능력과 함께하는 기억잃은 형사의 추리수사 게임, '디스코 엘리시움'. 게임 진행에 따라서 앞서 나오는 능력도 달라지고, 진행방향도 달라지고, 그에 따른 방대한 텍스트를 보고 있으면, 돋보기 하나 들고 세계를 탐구해나가는 재미가 있다. 개인적으로 재미있는 책을 읽어나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디스코 엘리시움'을 플레이하면서 스토리, 아니 게임에서 나오는 '글'이란 글은 자연스럽게 스킵해왔던 평소의 습관을 완전히 버려야 했다. 느리고 천천히, 대사 하나하나의 의미를 곱씹어보면서 플레이하는 재미를 오랜만에 느끼게 해준 게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즐거움이었다.

게임 내에서도 많이 들어가 있지만, 개발자 블로그를 보면 세계관이 정말 자세하게 짜여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계의 모습부터 각 지역이 왜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사람들의 생활부터 사상, 생각, 경제 및 문화까지 모두 얽혀있다.

오랜만에 책을 읽듯이, 롤플레잉을 하듯이 즐길 수 있었던 '디스코 엘리시움'. 한국어화가 이루어져서 좀 더 완전하게 세계를 즐길 수 있을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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