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비행의 모든 것,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2020'

리뷰 | 정재훈 기자 | 댓글: 11개 |


⊙개발사: 아소보 스튜디오 ⊙장르: 비행 시뮬레이션
⊙플랫폼: PC, XBOX One, 시리즈 X ⊙발매일: 2020년 8월 18일

작년 6월,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2020(이하 플심)'의 출시가 발표된 이후, 오늘 이 날까지 기다렸습니다. 딱히 플심 시리즈의 팬도 아니며, 전작을 인상깊게 한 것도 아니고, 하드코어 시뮬레이터를 즐기는 편도 아니지만, '지구'를 게임으로 가져왔다는 바로 그 하나는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오픈월드' 게임들이 어떻게든 맵 좀 넓혀보겠다고 발악하며 개발하는 것을 비웃듯, 이 게임은 세계 최초의 오픈월드이자 유일한 현실 오픈월드를 가져왔습니다. 그것도 스케일 다운 없이 그 크기 그대로 가져왔죠.

'노 맨즈 스카이'가 처음 공개되었을때 내세운 캐치프레이즈가 현실의 우주에 비견될 크기의 우주를 게임 속에 넣어둔 것이었습니다. 실은 몇 가지 변수와 무작위성으로 만들어지는 가짜 우주에 가깝습니다만, 그 장대한 스케일만으로도 노 맨즈 스카이는 최고의 기대작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출시 시점에서야 속 빈 우주라는게 밝혀져 혹평받았지만 말이죠.

쉽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과거 '팔콘 4.0'이 그랬듯, 비행 시뮬레이션은 언제나 시뮬레이터 게임의 끝판왕 포지션을 차지했으니까요. 한때는 파일럿이 꿈이었지만, 항공운항과 진학이 좌절된 이후 비행과는 전혀 연이 없었습니다. 탈 줄만 알지 몬다는 건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가끔 사진으로 보는 여객기 콕핏을 보면 비행기를 몰아보겠다는 생각은 또 사라지죠. 그 수많은 버튼들을 외우는 것부터 막막할 겁니다.

그럼에도 플심을 해보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아마 100년도 더 전, 라이트 형제의 이유와 비슷할 겁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비행을 갈망한다고 하던가요? 어렵든 쉽든, 일단 날아 보고 싶었습니다. 제가 발을 딛고, 여러분이 살아가는 이 행성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구경하고 싶었죠. 그 마음으로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2020'을 실행했습니다.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어떤 게임인가?

이 게임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 먼저 게임에 대해 설명을 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시리즈는 첫 편 이후 무려 40년 가까이 된 시리즈로, 오랜 기간 시뮬레이터 장르의 축 중 하나로 자리했습니다. 전통의 비행 시뮬레이션이죠.


다만, 쉽지 않습니다. '배틀필드' 시리즈나 GTA 등에서 항공기를 몰아보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그 게임들의 비행마저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꽤 걸립니다. 현실과 비교하면 굉장히 쉽게 만들어진 비행 체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하지만 플심 시리즈는 현실의 비행을 100% 게임 속으로 옮겨 두었습니다.

앞서 말한 다른 게임에서의 아케이드성 비행과는 존재하는 차원이 다릅니다. 뭐가 다른지는 추후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지만, 짧게 설명드리면 GTA 항공학교 수석에 빛나는 저조차도 첫 비행에서 착륙을 못했습니다.

게임의 목적 또한 비행 그 자체에 한정됩니다. '에이스 컴뱃'처럼 비행 와중 도그파이트를 벌일 필요도 없고, 상대 항공기와 자웅을 가린다거나 공중 레이스를 할 필요 따위는 없습니다. 그쪽이야 버튼 하나로 이륙하고 느낌따라 착륙하지만, 이쪽은 이륙부터가 난관이니까요.



▲ 게임 내 가장 다루기 쉬운 항공기의 계기판

대신 '비행' 그 자체에 대한 부분은 그 어떤 게임보다도 디테일하게 구현되어 있습니다. 게임 속에서 보이는 하늘은 현재 현실의 하늘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날씨는 시작일 뿐입니다. 지금 하늘에 양떼구름이 보인다면, 게임 속에서 현재 위치 위에도 양떼구름이 펼쳐져 있죠.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조절할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현실에 맞춰져 있죠.

심지어 항공 스케쥴도 반영됩니다. 혼자 하는 게임이라고 뭣모르고 아무 활주로나 잡고 이륙하다간 해당 활주로로 착륙하는 비행기와 찐하게 마주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시간에 맞춰 게임 속에서도 비행기가 뜨고 내리거든요. 안전하게 이륙하려면 관제탑에게 이륙 허가를 묻고 관제탑이 유도해주는 활주로를 이용해야 합니다.



▲ 날씨, 시간, 교통 상황은 현실을 반영할 수 있다.

여기에, 앞서 말씀드린 '지구'가 있습니다. 위성 사진 데이터를 받아 3D로 구현하는 형태이다 보니 그리 디테일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비행중에 집 위로 날아가는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더군요. 앉은 자리에서 세계를 구경할 정도의 수준은 됩니다.



▲ 내친김에 집 위로도 날아가 보고

여기서, 시뮬레이터 게임의 딜레마가 옵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시뮬레이터'라는 단어와 '게임'이라는 단어 사이에서 마찰이 생기죠.


시뮬레이터에 기운 무게추, 재미는 있을까?

모든 시뮬레이터 게임이 그렇지만, 개발자는 게임으로서의 재미와 시뮬레이터로서의 현실성 사이에 저울을 놓습니다. 게임에 무게추가 놓이면 캐주얼해지지만 현실성이 죽어버리고, 반대로 시뮬레이터에 중점을 두면 현실성이 살아나지만 너무 어려워서 재미가 없어지죠. 때문에 대부분의 시뮬레이터 게임들은 어렵고 힘든 부분은 자동으로 하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부분만 살리는 방향으로 개발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플라이트 시뮬레이터는 타협이 없습니다. 프로펠러로 가동되는 세스나기로 기본적인 조작을 익히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쓰로틀을 올리고 내리는 법, 요크를 조작하는 법, 러더, 플랩, 에일러론을 조작하는 법 외에도 족히 10개 남짓 늘어진 계기판을 살펴보는 법을 배워야 하죠.



▲ 보는 순간 비명 나오던 조작 체계. 저 모든 버튼 다 조작 가능합니다.

어찌어찌 튜토리얼을 끝낸 후, 실제 여객기로 쓰이는 항공기를 몰게 되면 더 정신이 없어집니다. 더 복잡해진 계기판도 계기판이지만, 콕핏 천장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수십개의 버튼은 보는 순간 기가 질립니다.

천신만고 끝에 조작을 익히고 이륙에 성공하면 그 때부터는 기나긴 비행에 들어갑니다. 장거리 비행을 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닙니다. 영화를 연달아 보고 꾸벅꾸벅 졸아도 비행이 좀처럼 끝나지 않죠. 플심의 비행 또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보잉 787 항공기로 인천공항에서 제주공항까지 가는 항공편을 짜 직접 운행해 보았는데, 진짜로 1시간 가까이 걸립니다. 뉴욕에서 LA로 가는 항공편은 가다가 포기했습니다. 너무 오래 걸려서요.



▲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는 여정. 한 시간 걸립니다. 빨간 원 안은 인천공항 근처의 작은 섬 실미도

게임의 컨셉과 기본 시스템부터가 진입 장벽입니다. 일반적인 시뮬레이터 게임은 어떻게든 게이머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을 쟁여 놓기 마련이지만, 플심은 그런 것 없습니다. 최대한 현실을 게임 속에 쑤셔넣은 후 재미는 알아서 찾으라는 식이죠.

그런데 말이죠. 정말 놀랍게도 그게 재미있습니다.

장거리든 단거리든,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게 되면 우리가 늘 하는 상상이 있습니다. '비행기란 틀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자유롭게 이 높이에서 밑을 내려다 보면 어떤 기분일까?', '조그마한 강화 창문 말고 콕핏에서 전면 창으로 보는 하늘은 어떤 모습일까?'. 비행기가 이륙하거나 착륙할 때, 자동차가 개미만한 크기로 보일 때면 누구나 창 밖을 내다 봅니다. 작은 크기의 창문 너머의 세상이 왜 그리 궁금해지는지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밖의 모습을 더 눈에 담고 싶어 하죠.



▲ 송도 센트럴파크도 지나가면서 보고

비행기가 3만피트 상공을 넘어 구름 위로 올라가도 상황은 똑같습니다. 늘 구름 밑에서 살아오던 우리가 구름을 내려다보는 순간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은 스튜어디스의 권고를 무시하고 살짝 창문을 열어 밖을 엿보곤 합니다. 어떤 모습일지 너무 궁금하거든요.



▲ 내친 김에 잠실 롯데타워도 한번 들렀다 갑니다.

'플라이트 시뮬레이터'가 주는 단 하나의 재미이자, 가장 강력한 쾌락입니다. 이 게임을 하면서, 저는 라이트 형제가 왜 그리 하늘을 날고 싶어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수천 미터 상공에서 이뤄지는 세상 구경. 그것 하나만으로 플심의 재미가 완성되죠. 지구를 그대로 게임 내에 넣어둔 건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고 봅니다. 덕분에 늘 사진이나 영상으로만 보던 세계 곳곳을 직접 찾아갈 수 있었거든요.



▲ 매일 출근하는 정자역 인벤 사무실도 한번 찍고



▲ 이거 보는 맛에 하는 게임입니다.

시뮬레이터로서 '플라이트 시뮬레이터'는 두말할 필요 없이 굉장한 작품입니다. 조석 간만의 차 정도를 제외하면 자연 현상을 거의 완벽하게 반영했고, 실제 지구와 같은 크기의 배경에서 실제 비행기만큼 디테일한 기계를 다룹니다. 시뮬레이터로서 줄 수 있는 재미마저 양껏 담았죠. 이제 조금은 다른 측면에서 살펴볼 시간입니다. 저울의 두 접시 중 하나인 '시뮬레이터'를 보았으니, '게임'으로서의 플심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최고 수준의 시뮬레이터이긴 한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게임'으로서의 플라이트 시뮬레이터는 그냥 평범한 수준입니다. 이 게임을 구매하고 플레이할 분들이라면 게이머이면서 동시에 항공기와 비행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분들일 테니 큰 문제는 아닐 테지만, '게임'으로서 이 작품을 바라보면 아쉬운 점들이 조금씩은 눈에 들어오죠.

가장 먼저 눈을 거슬리게 하는 건 엄청난 요구사양입니다. i7-7700k, GTX 1080 8gb, 램 16GB에 삼성의 SSD. 제가 시연에 사용한 컴퓨터의 사양입니다. 4년 전에 맞춘 사양이다 보니 현재 하이엔드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웬만한 게임은 원활하게 구동할 수 있는 사양이죠.



▲ 지상에서 택싱 시의 프레임 드랍은 난감할 정도

이 정도 사양으로 비행을 시작하면 공항에서부터 프레임 드랍이 굉장합니다. 저희 집 모니터가 꽤 특이한 편(32:9)이라 그런가 싶어 해상도를 낮춰 보았지만 마찬가지입니다. 비행이 시작되고 순항 고도에 오르면 프레임이 안정되는 편이지만, 지상에서는 꽤 심하게 버벅거리는 편이죠. 그래픽 옵션 수준은 '보통'이었습니다.

또한, 작품의 초점 자체가 비행에 맞춰져 있다 보니 비행 외 게임 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른 부분은 굉장히 대충 처리되어 있습니다. 착륙 중 고도 조절에 실패해 바다에 먼저 닿게 되었는데, 물수제비를 튀기듯 바닷물에 튕기고 다시 날아오르더군요. 땅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덕분에 제주 공항에 내리려다 전복김밥집 앞에 착륙했습니다. '보잉 787'이요. 현실이었으면 대참사가 날 일이었지만, 비행기는 아주 멀쩡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비행기는 비행을 위한 것이지 항공 사고를 위한 것이 아니거든요.



▲ 얼떨결에 방문한 제주도 전복김밥집. 그래픽 수준 '보통'의 텍스쳐는 이 정도입니다.

또 한가지 걸리는 점은 조작 체계의 불편함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키보드와 마우스만으로 비행기를 조작하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엄청나게 복잡하고 많은 단축키야 어떻게든 한다 해도, 누른다에 안 누른다 사이의 중간이 없는 키보드로는 섬세한 조종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륙 시에는 기수를 서서히 들어 주어야 하고, 착륙 시에는 완만한 하강 곡선을 그려야 하는데 키보드와 마우스만으로는 영 꿀렁거려서 할 수가 없죠. 가장 좋은 방법은 비행 시뮬레이터용 조작 체계를 구입하는 것이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XBOX 패드 정도는 필수입니다.



▲ 단축키만 봐도 한숨나오는 키보드

언어의 문제나, 생각보다 썩 좋지 않은 텍스쳐, 엄청난 용량 등의 자잘한 단점이 있지만, 그 외의 부분은 대부분 만족스럽게 구현된 편입니다. 특히, 게임 내에서 짤 수 있는 항공편과 비행 경로의 자유도는 굉장한 수준입니다. 게임 소개 등을 찾아보면 공항이 40개 정도 만들어져 있다고 하는데, 이는 말 그대로 완성된 공항일 뿐, 실제로 존재하는 공항이나 비행장이라면 어디서나 뜨고 내릴 수 있습니다. 슬쩍 보니 한국에만 해도 10여개의 공항과 비행장이 존재하더군요.



▲ 한국만 해도 공항 수가 꽤 되는 편입니다.


'비행 덕후'에게 주어진 이 시대의 선물

이쯤 되면, 한 번쯤 고민하실 겁니다. '그래서 사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간편하게 정리해드리겠습니다. 플라이트 시뮬레이터는 비행에 관련된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게임이자 시뮬레이터입니다. 게임이라기엔 다소 심심한 면이 있지만, 비행 그 자체를 즐기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최고의 선물이 될 수 있는 게임이죠. 본인이 비행덕후라면 일단 사시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호기심에 한 번 사 볼까 하신다면, 일단 겁을 내지 마세요. 앞서 비행이 엄청나게 어렵다고 말씀드렸지만, 이는 본인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할 때 어려운 것일 뿐, 원한다면 부조종사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경치 구경이나 해도 됩니다. 부조종사도 가끔 실수를 하긴 합니다만, 어지간해서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게임을 즐길 수 있습니다.



▲ 비행은 맡겨놓고 구경하기? 가능.

저 또한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부조종사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계기판 구경, 경치 구경이나 하다가 하나씩 직접 손으로 잡고 만지다 보니 어느새 관제탑과 교신하고 이착륙을 손수 하고 있더군요. 아직은 프롭기 정도나 모는 수준이지만, 계속 연습한다면 대형 여객기도 어렵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원래 게임은 조금씩 실력이 늘어가는게 재미 아니겠습니까?

고사양의 컴퓨터와 최소한의 컨트롤러. 이 정도만 갖춰져 있다면, 비행은 여러분 앞에 열려 있습니다. 기내에 갇혀 기내식을 받아먹고 영화나 보다 퉁퉁 부은 얼굴로 입국장에 들어서는 비행이 아닌, 말 그대로 '세계를 누비는' 비행을 하고 싶으신 분들에게,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2020'은 충분히 도전할 수 있는 무대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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