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2년을 넘어 돌아온 고전, 하프라이프 리메이크 '블랙 메사'

리뷰 | 강승진 기자 | 댓글: 5개 |
게임 하나가 업계 역사를 바꿨다는 말은 분명 멋들어진 표현이다. 하지만 이는 이야기의 맛을 살리기 위해 조미료를 좀 쳤다던가 사탕발림하는 것에 그치는 게 대부분이다. 수없이 쏟아지는 게임들 속에서 단 하나가 전체의 변화를 이끌기는 어려우니 말이다. 그럼에도 시대를 앞서 혁신을 만들어낸 게임은 항상 존재하고 더 가치를 가지며 두고두고 회자된다. FPS라는 장르에서 하프라이프는 그런 게임이다.

울펜슈타인, 둠, 퀘이크 등 이드 소프트웨어의 파괴 본능을 간지럽히는 슈터쯤으로 대표되던 FPS에서 스토리는 덤 수준이었다. 기기의 성능은 제한적이었으니 슈터 특유의 맛을 살리려면 스토리보다는 그래픽, 액션 연출에 집중하겠다는 계산이었다. 존 카멕이 게임의 스토리를 포르노에 빗대며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취급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제는 반쯤 비하 섞인 의도로 인용되기 일쑤지만.

하프라이프는 액션성에 주안을 둔 레벨 디자인 대신 이야기 흐름에 따른 거대한 챕터 구성을 큰 틀로 잡았다. 연구에 지각한 27살 물리학자 고든 프리맨이 인류의 영웅이 되는 이야기는 자잘한 설정들과 더해지며 깊은 맛을 냈다. 적들은 주인공에게 터져나가는 허수아비가 아니라 주인공을 죽이고 생존까지 바라는 영리한 지능을 가지게 됐다.




그렇게 하프라이프는 FPS를 바꿨다. 이제 스토리는 FPS에도 기본이 됐다. 오죽하면 그냥 때려 부수는 리부트 둠이 특이한 게임이 됐을까.

그런데 호들갑 떨며 흐름을 바꿨다 설명한 이 게임도 지금 와서는 그저 낡은 게임이다. 투박한 그래픽이나 연출은 요즘 그래픽에 길든 두 눈이 제발 게임을 꺼달라며 비명 지를 정도다. 밸브도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하프라이프2에 쓰인 소스 엔진으로 게임을 다시 만들기도 했다. 다만 그저 엔진 변경 정도에 그쳤다. 그래픽은 2004년 출시 당시에 보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리메이크 작품인 하프라이프: 소스의 밋밋한 변화에 팬들은 직접 게임을 다듬기 시작했다. 2012년 하프라이프2의 모드로 선보인 게임은 밸브의 판매 승인을 받고 2015년 유료 전환됐다. 이후 본격적으로 팀을 꾸려 게임 제작을 이어나간 팬들의 노력은 2020년 3월 정식 출시로 결실을 보았다.

리메이크 움직임이 처음 일었던 2004년 이후 무려 16년 만에 하프라이프는 완벽히 재탄생했다. 바로 오늘 다룰 게임 '블랙 메사'의 이야기다.


게임의 큰 틀은 하프라이프2 제작에 쓰인 소스 엔진을 제대로 활용하여 하프라이프를 재구축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에 전체적인 구성은 원작과 동일하다.

블랙 메사 연구소로 향하는 트레인. 그리고 연구 당일 지각한 고든 프리맨을 맞이하는 경비원들과 연구원. 하프라이프를 자주 즐긴 플레이어, 혹은 그 명성에 이끌려 게임에 도전해본 이라면 익숙한 장면으로 블랙 메사는 시작한다.

하지만 다시 찾은 연구소는 장면의 익숙함만큼이나 호기심을 자극한다. 잘 빚어진 모델링과 빛을 반사하는 광원은 강화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진화했다. 단순히 그래픽을 다듬는 데에서 끝내진 않았는데 투박하게 그려진 원작 세계에 이것저것 더해 꼼꼼해진 디테일로 볼거리도 풍성해졌다.

이런 시각적인 향상은 소스 엔진이 자랑하는 물리 엔진을 바탕으로 오브젝트 수 자체가 많아졌고 상호 작용할 수 있는 것들도 한층 늘어난 덕분이다. 물론 소스 엔진이 오늘날의 게임 엔진은 아니니 그래픽 효과를 앞세운 AAA 게임에 비견할 바는 안되지만 하프라이프라는 시리즈에 몰입하기 충분한 연출이라고 평할 만하다.



▲ 원작(좌)과 오브젝트 추가가 눈에 띄는 블랙 메사



▲ 때깔부터 다른 HEV 보호복

원작의 현대적 구현이라는 목표를 생각하면 블랙 메사가 원작 하프라이프를 다듬은 정도로 느낄 수 있다. 대신 시리즈의 열성적인 팬이라면 새롭게 느껴지는 부분도 더러 존재한다. 블랙 메사가 원작을 고스란히 옮겨낸 대칭 리메이크는 아니기 때문이다.

머리 속에 보스전이나 스토리 틀 정도만 기억하는 플레이어라면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게임의 세부적인 레벨 디자인이나 해결 방법 수준에서 개발팀 나름의 적당한 가감이 이루어졌다. '빠루왕' 프리맨의 단짝이라고 상징인 크로우바 획득만 봐도 이를 체감할 수 있다.

원작에서는 이상 현상이 일어난 후 연구실 바닥에 널브러진 쇠 지렛대를 주워 사용한다. 이게 블랙 메사에서는 좀 더 게임을 진행한 후 문을 틀어막은 용도로 쓰인 쇠지렛대를 뺀 후에야 쓸 수 있다. 막힌 길을 뚫는 동시에 무기 획득이라는 극적인 상황을 연출했고 그동안 좀비도 꽤 만나며 긴장감도 높이는 변화가 생긴 셈이다. 그렇다고 이게 게임 전체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오진 않는다.



▲ 굴러다니던 '빠루'는 길을 뚫으며 얻는 방식으로 나름 그럴듯 하게 바뀌었다



▲ 초반에 빨리 총 내놓고 죽길 바라던 경비의 역할도 커졌고

길찾기도 꽤 달라졌는데 지역의 색감 대비를 더 뚜렷하게 줘 진행 방향을 조금 더 직관적으로 깨닫게 했다. 대신 퍼즐 자체는 적정 난이도를 유지해 어느 정도 머리를 굴리며 다음을 생각하고 고민하는 수준을 지키고 있다. 또 반복적이고 지루한 '레인 위에서' 챕터는 짧게 압축하기도 했다.

사실 하프라이프의 길 찾기나 디자인은 당시에는 혁명적이었고 지금도 고전적인 멋을 지녔지만, 시간이 지나며 세련보다는 불편에 가까워졌다. 블랙 메사의 변화는 게임을 현대적으로 다듬으면서 작품 색은 유지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제한적인 개발 기간과 성능적인 한계 탓에 구멍 뚫린 채칼처럼 숭숭 비었던 스토리 부분도 이런저런 방식으로 채워졌다. 시리즈 주요 인물이지만 첫 작품에서는 설정으로만 존재했던 아이잭 클라이너가 직접 등장하고 일라이 밴스는 한층 매끈해진 외모로 만날 수 있다. 특히 아이잭 클라이너가 진공관 안에 담긴 해드클랩을 보며 경이로워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하프라이프2로 이어지는 애완 해드클랩 라마르와의 첫만남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처럼 게임 플레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소는 맵 곳곳에 이스터 에그 형태로 숨겨놓으며 후속작과의 연관성을 강조했다. 물론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요소들도 곳곳에 담겼다. '예측하지 못한 결과' 챕터에서 늙은 연구원이 모니터로 해드클랩을 박살 내는 장면이 담겼고 '표면 장력' 챕터에서 구한 경비원을 알아보는 사람이 등장하기도 한다.



▲ 아이잭과 귀여운 라마르의 첫만남도 구현

리메이크와 리마스터 사이에서 적당한 줄타기를 선보인 블랙 메사지만 적어도 이세계 젠(Xen) 만큼은 완벽히 새롭게 그려졌다. 블랙 메사의 얼리 액세스부터 정식 출시까지의 일정은 젠 개발 일정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게임의 핵심으로 소개된 장소다.

기억하는 팬들도 있겠지만, 하프라이프의 챕터 15 이후 넘어간 젠의 모습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황사 자욱한 하늘처럼 공허한 황색 공간에 크고 작은 바위 몇만이 둥둥 떠다닐 뿐이다. 우주의 경계와 중간 이계라는 거창한 표현이 민망해질 수준이다.

밸브의 게이브 뉴웰은 2017년 하프라이프 개발 과정에서 출시를 위해 포기해야 하는 부분이 많았다며 젠을 꼽았다. 구상한 부분을 어느 하나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는 거다. 개발팀은 이렇게 설정만이 존재하는 젠 개발에 집중했다. 단순한 지형 더미를 넘어 외계인들의 거대한 생태계를 구성했다.



▲ 정말 이게 다였던 젠은



▲ 규모로는 비교도 안 되는 거대한 이계로 재탄생됐다

암청빛이 감도는 세계는 거대한 행성처럼 꾸며졌으며 크기 자체도 수십 배로 넓어졌다. 원작 요소를 꾸준하게 담아낸 블랙 메사답게 원작 젠의 바위 더미 구성도 맵 구석에 담아 넣는 재기도 선보였다.

젠을 시작으로 이어지는 보스전도 큰 변화가 이루어졌다. 탐험 요소 없이 전투만이 이루어지는 '고나크의 둥지'는 3개의 맵으로 이루어진 챕터로 변경되며 플레이 타임도 급격하게 증가했다. 그저 공중에 떠다니며 두들겨 맞는 아기쯤으로 놀림당하던 니힐란스는 맵 전체를 무대로 공격을 퍼부으며 최종 보스다운 위상을 뽐낸다.

탄탄한 구성에 비해 조금은 허술했던 중후반부가 블랙 메사를 통해 드디어 채워졌다고 평할 수 있다.



▲ 그저 맞기만 하던 니힐란스는 이제 없다, 보스 위용 뿜뿜



▲ 젠 레벨은 플랫폼 요소를 버무려 색다른 느낌을 냈다

워크래프트나 코만도스 등 최근 이어진 리마스터, 리메이크 실패작들의 단점은 또렷했다. 원작의 감성은 지워지고 껍데기만 덧입히며 팬들의 기대에서 엇나간 결과물이 나왔다. 그래서 오랜 기간 오롯이 팬들로 꾸려진 스튜디오가 이뤄낸 하프라이프의 새로운 세계는 더 빛을 낸다.

하프라이프3의 개발은 여전히 기약이 없지만, 하프라이프: 알릭스로 잠들어있던 시리즈 팬들의 기대감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프라이프의 광신자든, 전설을 접하고자 하는 일반 게임 팬이든 블랙 메사로부터 이어지는 하프라이프 이야기를 경험하기에 지금보다 더 적합한 시기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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