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이 게임은 뻔하지 않다

칼럼 | 정재훈 기자 | 댓글: 12개 |



최근, 세계 게임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는 '이스케이프 프롬 타르코프(Escape from Tarkov, 이하 EFT)'의 약진일 것이다. 스트리밍 플랫폼 '트위치' 기준으로 늘 상위권에 위치하는 게임. 대형 스트리머들이 줄지어 방송을 하고, 시청자 지표상으로도 최상위권에 있는 게임이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소위 '잘 나가는' 게임은 아니었다.

처음 내가 이 게임에 대해 알게 된 게 클로즈 베타를 하던 2017년이었다. 클로즈 알파는 그보다 1년 전에 시작했으니, 이미 대중을 상대로 라이브 서비스를 시작하고 수 년이 지난 게임이다. 한창 '배틀그라운드'가 잘 나가던 시점이었고, 동료 기자의 영업에 당해 게임을 구매했으나 웬걸, 당시엔 채 다섯 판을 플레이하지 못하고 놔버렸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다른 게임에 비해 너무 리얼했고, 이 때문에 어려웠을 뿐이다.


음식을 먹을때도 직접 캔을 따서 숟가락으로 퍼먹고, 크로스헤어는 당연히 없으며 팀 인디케이터도 없다, 심각한 멀미를 일으키는 헤드보빙을 과감하게 도입하는가 하면, 사람이 몬스터 헌터의 몬스터도 아닐진데 부위 파괴가 일어난다. 팔을 다치면 무기를 다루기 힘들어지고, 다리를 다치면 달릴 때 체력이 소모된다. 당연히 머리나 흉부가 파괴되면 즉사한다.

이 정도면 명실상부 리얼리즘을 표방한 게임이다. 하지만, 리얼리즘은 언제나 게임에 있어 양날의 검과 같다. 게임은 언제나 현실을 향해 발전해가지만, 동시에 현실에 너무 가까워지지 않도록 일정 선을 유지한다. 그래야 게임이 게임다울 수 있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너무 과한 현실감은 오히려 게임 진입의 장벽이 되기 쉽다.

'ARMA 3'나 '인서전시: 샌드스톰' 등 리얼리즘에 중점을 둔 게임들은 모두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1티어급 흥행 대열, 이른바 '국민게임'에 합류하기엔 부족했다. 현실성을 살리면서도 대중적 성공을 이룬 '레드 데드 리뎀션2'의 경우 다른 부분이 워낙 좋기에 귀찮아도 참고 하는 정도지, 지금도 수많은 게이머들이 어떻게든 가죽 벗기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편법을 찾고 있다. 그마저도 몰입을 위한 제한된 리얼리즘일 뿐, 이를 내세웠다기엔 무리가 있다.



▲ 여러모로 전설인 '팔콘 4.0'의 매뉴얼. 모두가 좋아하진 않았다.

오늘날, 리얼리즘을 표방한 게임의 현실이 그렇다. 마치 '예술영화'같다고 해야 할까? 평론가나 게이머 모두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만, 실제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현실을 잊고자 하는 게임에서까지 현실성을 즐기는 건, 생각보다 꽤 피곤한 일이기 때문이다. 몰입이 강할수록, 그 뒤에 따라오는 피로는 큰 법이다.

하지만, EFT는 리얼리즘을 표방하면서도 당당히 '주류 게임'의 자리에 올라섰다. 반짝 떠오른 것도 아니다. 무려 3년이 넘는 세월동안, EFT는 빛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우연찮게 스트리머에 의해 '발굴'된 게임일 뿐이라면 며칠의 유행만 탈 뿐 지금처럼 가파른 성장세는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EFT라는 게임은 시간 문제였을 뿐 언젠가 성공했을 게임이란 뜻이다.



▲ 현재(2월 19일 오전) 기준 '트위치' 시청자 수

EFT는 벽을 뚫었다. 개발자라면 누구나 동경하지만, 현실의 사정으로 넘어서기 힘들다 생각하는 '리얼리즘'을 넘어서 흥행을 만들었다. 예술 영화로 천만 관객을 돌파한 셈이며, 범인은 이해하기 힘든 추상화로 대중에게 감동을 준 셈이다. 의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대체 어떻게 EFT는 리얼리즘이란 벽을 넘어 성공을 쟁취할 수 있었나?


이스케이프 프롬 타르코프, 배틀로얄이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고 시작하자면, EFT는 매우 영리하게 디자인된 게임이다. 처음부터 고안한 디자인인지, 혹은 서비스 중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한 결과인지는 모르겠으나, 전반적인 게임 시스템이 유기적으로 하나의 목표를 향하도록 짜여 있다. 그리고 그 목표는 바로 '생존'이다.

흔히 '배틀그라운드'나 '포트나이트', '에이팩스 레전드'를 생각하고 게임을 시작한 게이머들이 가장 난해해하는 부분이 바로 이 점이다. EFT는 최후의 생존자를 가리지 않는다. 몇 명이 남았건간에, 정해진 탈출 구역에 도달하는 순간 탈출에 성공하고 승리할 수 있다.

당연히, 상대를 죽이는 것 보다는 자신의 생존에 더 주력해야 한다. 맵을 훑으며 보급품과 쓸만한 물건을 건지고, 최대한 조용히 전장을 가로질러 탈출 지역으로 향해야 한다. 정 피할 수 없을 경우를 제외하면 전투는 최소한으로 하되, 확실히 승리할 수 없으면 전투를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전장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전투도 수반하지만, 목적은 어디까지나 탈출이다.

다른 배틀로얄 장르에는 생소한 NPC가 존재하는 이유다. 게임 상에서 'SCAV(스캐브)'로 분류되는 이들은 게이머들을 적대하며, 간혹 스캐브 간 분쟁이 일어날 때도 있는데, 이들이 게임의 순환을 만드는 기름이 된다. 이들이 없을 경우, 각자 알아서 떨어진 아이템만 줍고 싸움 없이 탈출구로 달리는 무언의 합의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게이머가 참여하는 게임에서 편함을 위해 적대 관계의 게이머들끼리 무언의 합의가 일어나는 일은 수도 없이 많다. 쉽게 생각해 MMORPG에서 레이드 던전 입구에서 대기하는 양 진영의 게이머들이 특별히 싸움을 하지 않았던 이유도 이와 같다. 싸우는 것 보다 빨리 던전에 들어가는게 더 가치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배틀로얄 장르의 경우 시스템이 게이머 간 전투를 강요하지만, EFT는 그렇지 않다. 때문에 스캐브는 전투의 도화선 역할을 하며, 이조차도 게이머들이 합심해 스캐브만 잡고 다닐 것을 우려해서인지, 게이머가 직접 스캐브 진영으로 게임에 참여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사망 리스크 없이 게임 플레이가 가능하며, 다른 게이머와 마찬가지로 탈출을 통해 전리품을 수거할 수 있다.



▲ SCAV가 되어 게임에 난입할 수도 있다.

이보다 앞서, 애초에 EFT는 배틀그라운드의 일종이라 볼 수가 없다. 배틀그라운드가 붐을 일으키기 이전부터 EFT는 개발되어 왔고, 2016년 처음 알파 테스트를 시작할 당시엔 배틀로얄이라는 장르 자체가 따로 구분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형태의 비슷함은 있지만, 근본적 부분에서 EFT는 '배틀그라운드'를 위시한 배틀로얄 장르의 일종이라기보단 상위 단계에서 떨어져 나온 친척인 셈이다.


무엇이 이 게임을 하게 만드는가?

여기에 한 가지 더 시스템적 장치가 더해진다. 일반적으로 많은 배틀로얄 장르에서 게임 한 판은 독립된 한 판이다. 말인즉, 게임이 끝난다 해도 몇 가지 보상(외형 스킨 및 진행도 등)을 제외하면, 얻는 건 순전히 감정적인 보상이다. 아무리 잘 하는 플레이어라 해도 처음부터 강한 무기를 들고 갈 수는 없고, 모두가 평등한 상태로 게임을 시작한다. 그 평등이야말로 배틀로얄이란 장르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EFT는 그렇지 않다. 게임이 끝난 후 전리품을 정산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무장을 갖추거나 은신처를 꾸밀 수 있다. 게임을 판 단위로 끊지 않고 길게 가져가기 위한 디자인이다. 하지만, 게임 내에서 상대를 아무리 많이 처치한다고 해도 전리품을 얻을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성장을 위해 물자를 확보하는 방법은 하나. 탈출까지의 생존이다.



▲ 상인 평판도 관리해줘야 하고... 생각보다 할 게 많다.

이런 긴 템포의 게임 시스템이 다시 한 번 게이머의 플레이 성향을 보정한다. 물론, EFT에서도 소위 말하는 '여포' 플레이가 불가능한 건 아니며, 이를 즐기는 게이머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게이머는 타 배틀로얄 게임보다 소극적이며, 회피지향적인 플레이를 유지한다. 결국, 여기서도 개발사인 배틀스테이트 게임즈의 의도가 보인다. 제한된 공간에 게이머를 가둬놓고 계속해서 싸우게 만드는 것이 아닌, 생존 그 자체에 골몰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게임 외적 디자인은 한 가지 효과를 더 가지고 있다. 게임 속에서 게이머는 한 명의 PMC 군인이 되어 도시의 곳곳을 헤치며 물자를 확보하고, 전리품을 얻는 과정을 거치며 서서히 성장한다. 여기서 차이가 생긴다. 한 판 한 판의 전투로 승패를 가리는 일반적인 배틀로얄 장르와 달리, EFT는 게이머의 캐릭터에 스토리를 부여한다. 한 번에 시작과 결과가 정해지는 게임이 아니기에 더 애착을 쏟게 되고, 게임 플레이 근간인 '생존'에 더 몰입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 전리품으로 마련할 수 있는 은신처. 비트코인 채굴도 된다.


그들이 '생존'이라는 코드에 집착하는 이유


이렇듯, EFT의 모든 시스템은 오로지 게이머가 생존에 집중하도록, 다른 어떤 것보다 생존에 높은 가치를 두도록 유도하게끔 설계되어 있다. 생존은 숨막히는 전투 상황만큼이나 게이머의 집중력과 아드레날린을 끌어올릴 수 있는 코드이며, 강한 몰입을 주기 때문이다.

글의 처음에서 언급했던 '리얼리즘'을 포기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전투가 아닌 생존이 중점이 되는 상황에서, 인디케이터와 같은 HUD 없이 현실적으로 구현된 시계는 그 무엇보다 강한 몰입을 준다. 크로스헤어조차 없고, 작은 부상도 큰 장애가 될 수 있는 디자인은 전투 결정을 더 신중하게 하도록 돕는다.



▲ 잘못 맞아서 팔 하나라도 날아가면 내내 고통스럽다.

당장, '배틀그라운드'에서 게이머들은 의료품만 충분하면 큰 고민 없이 전투를 시작한다. 어느 정도 피해를 보더라도 구급약 좀 쓰고 붕대 좀 감아주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EFT에서는 잘못 맞아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지혈제가 없을 경우 죽음으로 직행하기 때문에 전투 결정이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경우, 과한 리얼리즘은 재미와 동시에 피로를 유발한다. '요리' 게임에서 게이머가 직접 칼질의 깊이와 불의 강약, 양념의 그램 수까지 조절해야 한다면 생각만 해도 피곤할 것이다. 하지만, '몰입'이 필요한 제한된 부분에서 리얼리즘은 그 무엇보다 어울린다. 그리고, 그 제한된 몇 가지의 예가 공포와 생존 등이다.

결국, EFT가 '리얼리즘'을 무기로 내세우면서도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반적인 게임 디자인이 모두 리얼리즘과 가장 잘 어울리는 '생존'을 중심으로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게임 목표도 생존이며, 전리품을 얻으려면 생존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게임이 루틴화되지 않도록 변수가 될 스캐브 모드와 재화 순환을 위한 상인 시스템 등을 게임 곳곳에 섞어두었다.



▲ 몰입하지 않기가 더 힘든 분위기

태국 요리에 자주 보이는 고수는 잘 쓰면 좋지만, 특유의 향이 강해 모두의 사랑을 받을 수는 없는 향신료다. 하지만, 고수를 넣어야 가장 맛있는 요리를 이 맛을 살려주기 위한 사이드 디쉬와 함께 서빙하면 적어도 더 많은 이들의 사랑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배틀스테이트 게임즈가 그렇다. 이들은 '리얼리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가장 잘 어울리는 '생존'에 주안점을 두었고, 게임 디자인 모두를 생존에 맞춰두었다.


'리얼리즘'이란 한계 돌파의 의미


EFT의 성공은 그저 또 다른 한 게임의 신데렐라 스토리로 끝이 아니다. 이 성공 스토리에는 '한계의 돌파'라는 또다른 의미가 있다. 우리는 그간 수많은 게임들을 살펴보며 성공과 실패 사례를 보아왔고, 이 과정에서 성공 요인과 실패 요소를 정의내려왔다. '이건 무조건 성공한다', '이건 절대 먹히지 않는다'와 같은 말은, 게임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숱하게 내뱉었을 말이다.

그러나, EFT는 기존의 성공요인이 아니었던 리얼리즘을 성공의 주춧돌 중 하나로 세웠다. 모든 게임 디자인을 하나의 목적인 생존에 맞춰 설계했고, 여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리얼리즘을 양념으로 끼얹었다. 매니아들만 좋아하는 양념을, 대중적인 맛으로 끌어낸 셈이다.



▲ 저 계기판을 다 다뤄야 한다면 생각만으로 피곤하다.

그리고 이는, 게임 산업이 정체되지 않고 꾸준히 전진하고 있다는 방증이자, 넥스트 신데렐라가 되고자 하는 수많은 개발자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부분이다. 애매하게만 보이는 시스템이나 구성 요소일지라도, 이와 딱 맞는 게임 디자인을 해낼 수 있다면 충분히 그 매력을 온전히 살려낼 수 있음을 EFT가 보여주었다.

동시에, 게이머층의 소화 바운더리도 늘어났다. 리얼리즘 지향 게임은 너무 어렵고 피곤하다는 생각을 가졌던 많은 게이머들이 EFT를 플레이하면서 리얼리즘만의 매력을 느꼈다. 이 점 또한, 게임 산업에게는 큰 한 걸음이다. 아무리 많은 게임을 만든다 해도, 주류 게이머층이 수용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그저 시대를 앞서간 작품으로 남을 뿐이다.

남들 다 하는 걸 해야 성공한다는 말이 있고, 남들이 안하는걸 해야 성공한다는 말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게임산업에서는 이 두 문장이 모두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개발사가 '남들도 다 하는 걸 하는 이유'는 매우 현실적인 부분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한 편의 개발에 몇 년의 세월과 막대한 돈이 드는 이 산업에서, 남들이 안하는 걸 하는 건 보통 용기로는 힘든 일이다. 아무도 하지 않는 만큼 기본적 가이드라인조차 없기 때문이다.



▲ 다른 많은 게임의 '개발 동기'가 될 수 있길

EFT의 흥행이 가치있는 이유다. 리얼리즘의 대중적 흥행은, 그간 오랜 시간 쌓여온 정의에 의해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 여겨졌던 수많은 게임 구성요소들의 잠재성을 시험대에 올렸다. '이거로는 할 수 없다'로 여겨지던 많은 게임 요소들이 이제는 '이거로도 어떻게 되지 않을까?'라고 여겨지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EFT도 결국 게임을 넘어선 무언가는 아니다. 각종 버그나 가격 정책 등으로 질책받기도 하며, 리얼리즘에 공을 들였지만 완전하지 않고, 그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에서 노력했을 뿐이다. 그러나 잘 짜인 디자인 덕에 기존의 게임 씬이 보여주던 '뻔함'을 탈피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또 어느 곳의 어떤 개발사는 그간 주류가 되지 못했던 게임 구성요소를 내세워 시장을 돌파할 것이다. 게임의 발전이자, 산업의 발전이다. 제목으로 쓰인 명제는 어디까지나 지금의 상황에서만 적용될 뿐이다. EFT의 뻔하지 않은 비범함에 영향을 받아 새로운 무언가를 내놓을 것이고, 그 때가 된다면, 지금의 뻔함은 그저 다양함의 하나로 받아들여질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많은 게이머들은 아마 그렇게 되길 바라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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