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그' 하프라이프가 나왔는데도

칼럼 | 강승진 기자 | 댓글: 34개 |
머리에 눌러쓴 VR 기기를 양손으로 뽑아 올렸다.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땀방울이 미적지근한 걸 보니 더워서 흘리는 땀은 분명 아니었다. 아마 식은땀이었을 거다. 더위보다는 눈앞이 먼저 감감해졌으니까.

'이거 준비했던 기사 내용을 다 뒤집어야겠구나'

아차 싶었다. 이 정도로 완벽한 게임이 나오리라 생각지 못했다. 하프라이프: 알릭스를 하고난 뒤 계속 이 게임만 생각났다. 더 하고 싶다고. 그리고 글을 새로 썼다. 거의 다 준비했던 기사 내용은 원래 이랬다.




2020년에 들어서며 VR 게임 시장은 희망적인 이야기들로 가득해 보였다. 미래를 본다는 분석 업체들은 아라비아 숫자의 나열로 VR 시장의 밝은 미래를 예찬했다. 그 중심에는 페이스북의 오큘러스와 밸브의 인덱스가 있었다.

오큘러스는 양질의 품질에 저렴한 가격대로 재정비한 기기들로 시장 선두에 섰다. 기존 유선 시리즈를 잇는 리프트S에 PC 없이 실행되는 독립형 기기 퀘스트까지 꺼냈다. '성능 우선'이라는 깃발을 걸고 출시된 밸브의 인덱스는 거대 게임 플랫폼, 스팀을 등에 업었다. 게임으로서의 VR 가치가 드디어 빛을 볼 수 있다는 추측도 나왔다.

말 그대로 보이는 숫자와 상황이 그랬다는 거다. 조금 뒤를 들여다보면 마냥 좋게만 볼 수 없었다는 게 문제지.

꾸준히 증가하는 VR 시장 매출은 오롯이 게임의 몫이 아니다. 시장 조사 업체 ARtillery Intelligence에 따르면 2019년 VR 글로벌 매출에서 가정용 소비자 비중은 50% 언저리다. 재무, 부동산, 헬스케어 등 다양한 분야는 물론 건축, 건설 등에서 VR 활용도가 높았다.

VR 시장의 핵심 영역을 LBVR(Location-Based Virtual Reality)로 보는 시각도 많다. LBVR은 VR 카페와 같이 사업자가 대규모 공간을 설비해 일반 관람객이 영상, 어트랙션, 게임 VR을 체험하도록 하는 시장을 말한다. 흔히 대작이라 불리는 게임보다는 잠깐의 경험이 주를 이루는, 아케이드성 짙은 콘텐츠가 시장을 이끌어간다는 의미다.

이는 성공한 게임의 특징에서도 드러난다. 100만 고지를 찍은 비트 세이버는 리듬 액션이다. VR 게임의 가능성을 보인 본 웍스는 체감적인 부분에서 강점을 보였지 게임 자체로서의 재미가 크다고 단언하기 쉽지 않다.



출처: AR Insider

그런 와중에 등장한 하프라이프: 알릭스는 쩍쩍 갈라진 VR 게임 시장을 적셔줄 단비와도 같았다. 게임을 즐기기 위해 VR을 써본 사람은 알 거다. 진짜 게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은 몇이나 될까? 이 작품은 VR에 없던 AAA 게임 경험을 구축했다. 언차티드, 젤다, 헤일로가 플레이스테이션, 스위치, 엑스박스 판매를 이끌었듯, 이 게임도 VR 기기를 사도록 부추기는 킬러 타이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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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게임의 높은 완성도는 되려 VR이 당장 지닌 한계를 더 부각했다.

밸브는 이번 작품에 가장 많은 개발 코스트가 들었다고 설명했다. 2004년 개발된 하프라이프2가 4,000만 달러의 개발비가 들었다.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면 5,400만 달러까지 오른다. 660억 원이다. 적어도 이것 이상의 개발 비용이 들었단 말이며 소스2 엔진 개발과정까지 더하면 자릿수를 하나 더해야 할 판이다.

결과는 어떤가. 최고의 게임이라는 전문가들의 평가가 연일 나왔고 VR 보유자라면 무조건 살 타이틀이 됐다. 하지만 첫날 동시 접속자 42,858명을 기록한 후 게임은 1만명 단위의 이용자를 기록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 출시된 타이틀과 비교하면 확연히 비교된다.



다른 개발사들도 이 수치를 만족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출처: steamdb)

둠 이터널은 콘솔 강세인 해외에서는 PS4, 엑박으로도 엄청나게 팔리고 베데스다에서 자체 서비스도 이루어진다. 그러면서도 스팀에서만 최대 동접자 10만 명을 기록했다. 스팀 스파이 추산 구매자 100~200만 수준이다. 인디 게임으로 분류되는 오리 도깨비 불도 스팀에서만 50~100만 명 기록을 가지고 있다.

오직 스팀에서만 판매된 하프라이프: 알릭스는 50만~100만 명이 구매한 것으로 추산된다.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게임이 없을 독보적인 만듦새. 10년 넘게 기다린 하프라이프라는 이름값. 그런데도 이 정도 판매량이다. 매출이 최고가치인 기업이 마땅한 수익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어디까지 투자할 수 있을까. 여기에 타 개발사들은 밸브야 낼 필요가 없는 스팀 입점 수수료까지 생각해야 한다.

기기 판매 견인이라는 효과도 당장은 거두기 어렵다. 오큘러스의 VR 기기는 연말 특수로 재고가 바닥을 드러냈다. 코로나19에 중국 생산 라인이 가동을 멈추며 공급도 차질을 겪었다. 가격은 70%가량 부풀었다.

국내 상황도 녹록지 않다. 게임 내 텍스처에 동해가 일본해(Sea of Japan)로 표기되며 게임에 대한 기대감이 차갑게 식었다. 게임 자체의 만듦새와는 관계없겠지만 정서상 쉽게 넘기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정식 발매된 VR 기기는 한정적이다 보니 자신에 맞는 HMD를 쉽고 저렴하게 구하기도 어렵다.




너무 오래 기다려 VR 게임이 대중의 입에 담기는 모습을 보기 힘들 거로 여겼지만 기회는 찾아왔다. 하프라이프: 알릭스는 분명 VR 게임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래서 불안감은 커졌고 앞으로가 더 중요했다.

소니나 MS가 콘솔 시장에서 그랬듯 페이스북, HTC, 밸브 등이 플랫폼 홀더로서 시장을 구축하고 투자해야 한다. 오큘러스 스튜디오가 하듯 다수의 개발사를 퍼스트, 서드파티로 두는 것도 좋다. 대형 개발사는 IP를 어떻게 VR에 녹여낼지 고민이 필요하다. 복사-붙여넣기 대신 비트세이버, 론 에코처럼 VR만이 가진 독창적이고 새로운 경험을 선사할 아이디어도 중요하다. VR이 아니더라도 재미로 인정받을 게임까지 필요하다. 설명만으로도 쉽지 않은 임무다.

각 부문에서 이런 어려운 목표 달성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면 하프라이프: 알릭스는 VR의 새 시대를 연 기념비적 작품이자 VR 게임의 거룩한 마침표를 찍는 작품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기사가 몇 번이나 뒤집혔지만, 글은 언제든 새로 써도 된다. 그러니 부디 비싼 내 VR 기기가 알릭스 전용 게임기가 되지 않길. 할만한 게임이 잔뜩 나와 긍정적인 미래를 전망하는 글을 적을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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