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낡은 게임쇼, 변해야 산다

칼럼 | 강승진 기자 | 댓글: 31개 |
'E3 2020 취소'
'주관사 ESA, 디지털 E3도 패스'

뉴스 게임란 상단을 채운 이런 문구들이 영 낯선 게 당연하다. 으레 게임쇼의 대표이자 큰형님쯤으로 모셔졌던 E3다. 하지만 E3의 낯선 행보가 꼭 코로나19의 유행이라는 재난 상황 때문일까? 어쩌면 외부적인 요인은 이 거대 게임쇼의 쇠퇴를 조금 앞당겼을 뿐일지도 모른다. 행사는 이미 여기저기 구멍 뚫린 배와도 같았으니까.




개발자가 직접 나와 환호를 유도하고, 현장에 모인 게임광들은 목청껏 소리 지른다. 신작 공개나 쇼케이스의 이런 장면은 흔히 E3, TGS 등 대형 게임쇼를 통해 공개된다. 하지만 현장에 모인 사람들이 전부는 아니다. 쇼의 주요 대상은 온라인을 통해 이 장면을 함께하는 수백, 수천의 시청자다. 그리고 이런 시청자의 입맛에 맞춰 등장한 게 닌텐도 다이렉트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온라인을 통해 신작을 공개하는 닌텐도 다이렉트는 사실 특별할 게 없어 보이는 프레젠테이션 방송이다. 게임 소개 등이 담긴 내용을 미리 녹화해두고 정해진 시간이 되면 생방송에서 틀 뿐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관중도 없고 그들의 목소리도 없다. 그저 채팅창에 도배되는 검정 문자와 이모티콘만이 유저 반응을 가늠케 할 뿐이다. 이른바 현장감이란 게 없다.

닌텐도는 이 부족한 현장감 대신 게임 정보 자체를 강조했다. 행사는 잘 짜인 일자 진행에 NG 장면도 깔끔하게 없앴다. 발표자가 나왔다가 들어가고 팬들의 호응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 신작 발표에 정해진 내용만 소개하면 된다. 그 덕에 짧은 시간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한다.

발표 내용의 밀도도 높다. 행사는 보여주기식 트레일러보다는 게임 세부 정보를 소개한다. 주요 신작 설명은 실무 개발진들이 직접 이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행사 당장에는 흥이 덜 할지 모르지만 곱씹어볼 만한 세세한 내용이 넘쳐난다. 커뮤니티며 SNS며 닌텐도 다이렉트 이야기를 쉴새 없이 쏟아내는 것도 이런 깊이 있는 정보에서 시작된다.

▲ 2011년 처음 시작돼 지금까지 이어져 온 온라인 게임 프레젠테이션 닌텐도 다이렉트

코로나19에 현장 행사가 어려워진 게임사와 컨퍼런스 주관사는 닌텐도 다이렉트식 디지털 행사로 방향키를 틀었다. 라이브 방송 경험이 많은 게임스컴은 행사 취소 전부터 일찌감치 디지털 쇼로의 집중을 선언했다. 콘솔 3대장 소니는 이미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State of Play)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행사를 진행해왔다. 마이크로소프트 역시 인사이드 Xbox(Inside Xbox)로 게임 알리기에 나서고 있다.

이런 모습이 마냥 달갑지 않은 건 E3다. E3 주최 측은 그간 개발사 각자가 준비하는 컨퍼런스 중계와 현장 부스 운영에 집중했다. 그만큼 디지털 쇼로의 움직임이 더뎠다. 그리고 코로나19가 유행하며 문제가 터졌다.

지난 3월 E3의 현장 행사 취소를 발표한 ESA는 E3 2020을 디지털 행사로 진행하리라 예고했다. 하지만 한 달 후 ESA는 개별 전시업체와 협력을 통해 진행할 것을 밝히며 자체적인 행사에는 사실상 손을 뗐음을 시인했다. 그사이 MS, EA 등은 자체적인 온라인 게임 쇼 진행을 발표했다. PC게이머와 IGN 등 대형 게임 매체는 주요 퍼블리셔와 진행되는 온라인 게임 행사를 예고하기도 했다.



▲ E3 2019에서 에픽게임즈와 신작 컨퍼런스를 진행했던 PC게이머

더 큰 문제는 E3가 취소된 올해, 그다음이다.

세계적 불황 속에서 아마존은 현 상황을 '전에 없던 기회'로 삼았다. 코로나19에 집콕 문화가 퍼지며 호황을 누리는 언택트(비대면) 사업의 일시적 특수만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그간 일반 소비자가 온라인 물류, 배송에 가졌던 불신을 이번 기회를 통해 경험하며 크게 해소했다는 게 더 큰 이유다. 상황이 정상화 된 후에도 편리했던 기억에 꾸준히 언택트 서비스를 이용한다는 말이다.

일부 기업을 중심으로 진행됐던 언택트 게임 컨퍼런스가 이번 기회에 자리를 잡는다면 E3의 가치는 더 떨어질지 모른다. 잘만 이루어지면 기업은 굳이 E3가 아니어도 게임을 충분히 알릴 수 있다. 게임 팬 역시 수백 달러에 달하는 입장료를 내고 줄을 서다 한 두 게임만 체험하느니 당일 온라인으로 공개되는 데모로 게임을 더 깊이 있게 즐길 수 있다.

먼저 심상찮은 움직임을 보였던 건 소니다. 라스트 오브 어스2, 고스트 오브 쓰시마 등 독점작 다수를 손에 쥔 소니는 E3 2020이 취소되기 전인 올해 초 일찌감치 2년 연속 행사 불참을 선언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신형 콘솔 PS5 출시 일정이었다. 하지만 첫 불참 당시 소니 수장이었던 숀 레이든은 유튜브 등 온라인 플랫폼을 활용한 프레젠테이션만으로 홍보가 충분하다는 견해를 여러 차례 에둘러 드러낸 바 있다.

그의 주장대로 이대로 E3 없는 한 해가 큰 무리 없이 지나간다면? 2020년은 '온라인으로도 충분하다'라는 가정이 참으로 증명되는 한 해가 될 거다.



▲ E3 2019 불참 발표 당시 온라인 프레젠테이션의 강력한 효과를 주장했던 숀 레이든

유저와 거리가 먼 행사라는 점도 E3의 발목을 잡는다. ESA가 조금씩 일반 관람객에 행사의 문을 열었지만, 핵심인 컨퍼런스는 행사장 뒤편에서 미디어와 인플루언서를 대상으로 진행된다. 온라인을 통해 실시간으로 신작을 알릴 수 있는데 막대한 비용을 투자해가며 부스를 설치하고 한정된 관람객을 맞을 이유를 찾기란 쉽지 않은 셈이다.

게임 팬에게 직접 다가가고자 한다면 PAX나 게임스컴 같은 시연 위주의 행사를 참여하는 게 낫다는 말도 나온다. 이는 소니의 빈자리를 행사 시작까지 끝내 못 채운 E3 2019에서 이미 나왔던 말이다.

세계 최고 중 하나라 불리던 게임쇼. 하지만 거대한 시대의 흐름에 부서져 버릴지도 모르는 낡은 배가 됐다. 변화가 필요하다. 코믹콘 같은 팬 페스티벌로의 변화도 좋다. 넥슨, 블리자드, 소니, 엔씨소프트 등 주요 게임사가 빠진 자리를 e스포츠와 인플루언서들로 채우며 '보는 행사'로의 변화를 이룬 지스타의 생존 전략도 분석해봄 직하다.

어찌됐든 E3가 마냥 미디어 위주의 컨퍼런스라는 구닥다리 포지션 고수하다간 소니만이 아니라 다른 게임사까지 잃을지 모른다.



▲ PAX처럼 행사의 뿌리를 프레젠테이션 대신 유저의 참여에 둔 많은 행사들이 더 주목받고 있다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을 지닌 게임쇼들. 내년, 그다음 해에도 그 이름을 잇기 위해서는 변해야 한다.

코멘트

새로고침
새로고침

기사 목록

1 2 3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