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주 칼럼] 게임과 심리학 (3) - '건전한 게임'이라는 오래된 유령에 대해

칼럼 | 이장주 박사 기자 | 댓글: 33개 |




인벤에서는 '게임하기의 심리학적 고찰'을 키워드로 한 사회문화심리학자 이장주 박사님의 기고를 소개해드립니다. 이번 기고의 주제는 '건전한 게임'에 대한 재해석입니다.

이장주 박사님은 현재 이락 디지털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사회문화심리 분야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디지털시대, 기술을 넘어선 사람의 행복'을 테마로 게임과 e스포츠를 비롯해 디지털 문화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로 심리학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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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건전가요'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다. 아마 30대 중반 안팎의 독자들이라면 어렴풋이 멜로디가 떠오를 듯하다. '깨끗한 웃음으로 바르게 팔고~'하던 '시장에 가면'이나, 아이유의 리메이크 앨범에도 들어간 '어허야 둥기둥기'라는 노래가 대표적인 사례다. 심지어 똑순이로 유명한 김민희라는 당시 인기 아역배우가 발매한 캐롤송의 건전가요는 '공군가'라는 군가가 들어가기도 했다. 군가가 건전가요가 되었다면 대략 어떤 시대에 어떤 사람들이 이런 제도를 만들었는지 아마 감을 잡았으리라 믿는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건전가요는 1970~80년대에 음반 맨 마지막 트랙에 의무적으로 넣어야만 했던 대한민국 음악 장르 중 하나다. 정말 예술과 도덕이 결합된 기가 막힌 신생 장르가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인 부분은 건전가요라는 것이 등장한 시대적 배경은 전혀 건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정통성과 통치 방식에 문제가 있던 시절이다 보니, 이를 만회하기 위해 건전함, 즉 정당성을 널리 홍보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또한, 정치적인 이슈를 다루는, 혹은 연상시킬 수 있는 노래들에 대해서는 불건전함을 이유로 금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도 가끔 유머란에 올라오는 예전 노래들의 금지 사유를 보았던 사람들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것들은 1987년 민주화 이후 점차 사라지게 된다.



이제는 과거의 한 단편이 된 건전가요

그럼 건전가요가 사라지고 나서 가요가 불건전해졌는가? 이런 질문을 해놓고 나니 그냥 웃음만 나온다. 그 웃음의 실체는, 사람들이 흥얼거리는 노래를 건전함과 불건전함으로 나누는 발상 자체가 너무 뜬금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1980년대 국내 대중가요 시장은 마이클잭슨, 마돈나를 위시한 팝송이 대세를 이뤘었다. 이때 다양한 장르의 노래와 함께 서태지와 아이들로 대표되는 국내 가수들이 주류로 등장하면서 우리 가요의 꽃을 피운 때가 있었다. 이 시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건전가요의 퇴출과 함께 시작됐다. 그리고 이런 흐름은 K-POP이란 이름으로 세계 문화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진출하는 저력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건전가요가 위세를 떨쳤다면, K-POP과 같은 콘텐츠가 나올 수 있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근대 흑(黑)역사의 흔적이, 스마트 시대의 최첨단 산업이자 문화인 게임 분야에 여전히 잔존하고 있음을 나는 최근에 깨닫게 됐다. '건전한 게임'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결론부터 밝히자면, '건전한 게임'은 건전가요와 판박이 쌍둥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건전한 게임은 실체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유로운 창작과 소비를 가로막는 검열의 역기능만 양산하기 때문이다. 건전가요가 그랬듯이 말이다. 이 무슨 리신이 길 묻는 소리냐고?



실체 없는 건전한 게임 - "무엇을 기준으로 건전하다 말하는가"


먼저 '건전한 게임'이란 실체가 없는 말이다. 그 이유는 '건전함'이라는 용어를 정의하는데서 찾아볼 수 있다. 네이버 사전에서 '건전(建全)'을 찾아보면, '사상이나 사물 따위의 상태가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정상적이며 위태롭지 않음'이라고 나와있다. 말은 참 좋은 뜻인데, 여기에는 함정이 숨어 있다. 건전함의 기준을 어디로 삼느냐, 혹은 누가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고무줄 같은 잣대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속담을 보겠다. 새의 입장에서 보면 일찍 일어나는 것은 건전하다. 하지만 벌레의 입장에서 보면 일찍 일어나는 것은 불건전하다 못해 끔찍한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비유가 좀 적절하지 않은 감이 있기는 하지만, 게임도 비슷하다. 게임을 하는 사람과 이를 지켜보는 사람 간에 먼 간극은 누구의 입장이냐에 따라 건전함이 달라지게 되며, 대체로 지켜보는 기성세대의 입장에서 건전함이 규정된다. 진짜 건전함을 만들어 내려면 최소한 양자가 합의할 수 있는 합리적 절충점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합리성을 원천적으로 막는 권력의 차이는 이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래서 건전함은 이것을 정의하는 사람의 권력에 의존하는 개념, 즉 폭력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기준을 어디로 삼느냐에 따라 '건전함'의 정의는 달라진다

건전한 게임에 실체가 없는 두 번째 이유는, 게임 자체의 속성을 부정해야 존재할 수 있는 '현실 불가능한 상태'라는 점이다. 건전게임을 선두에서 이끄는 여성부의 기준을 보면 이런 점이 명확해진다. 여러 사람이 역할을 분담해 오랫동안 임무를 수행하고 결과적으로 뿌듯한 느낌을 주면 '강박적 상호작용'이라 땡. 오랫동안 노력해서 좋은 결과를 얻으면 '과도한 보상구조'이기 때문에 탈락.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강하거나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느낌을 주면 '우월감이나 경쟁심 유발'이라서 불합격이다.

한 마디로, 시간이 들어가고 실력 차이가 생기는 집단 경쟁 놀이라는 것은 원천적으로 건전할 수 없는 대상이 되어버린다.

'건전한 게임' 담론의 구조에서 게이머와 게임은 시작부터 들어설 공간이 없다. 게임이나 게이머 자체를 이미 '정상으로부터 한 쪽으로 치우쳐 조치가 필요한 대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옮겨야 하는 반대쪽에는 무엇이 있나? '건전한 게임'이라고 내세우는 것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기능성 게임(Serious Game)'이 있다. 기능성 게임이란, 게임을 통해 학습이나 치료, 훈련 등의 목적을 달성하도록 고안된 프로그램을 말한다.

이것은 기존의 '일'에 게임을 삽입한, 즉 새로운 방법의 '일'인 것이다. 결국 건전한 게임이란 '노동 이데올로기'의 다른 이름인 셈이다. 이솝우화의 '개미와 배짱이'에서도 드러난 것처럼, 일(공부)는 바람직하고 좋은 것이고, 일을 하지 않는 것(노는 것)은 나쁘다는 걸 다른 식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먹고 사는데 도움 안 되는 게임 하지 마! 그리고 왜 그래야 하는지는 묻지 마! 나중에 가면 다 고마워할 날이 올 거야. 그러니 게임하지 말고 공부 해. 그게 싫으면 운동을 하든 잠을 자든, 아무튼 게임은 하지 마!' 이 긴 말을 다섯 글자로 줄이면 '건전한 게임'이 된다.






■ '건전함'은 정말 해피엔딩을 보장할까? - "잘못하면 뚜껑 열립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다. 건전함이 행복한 결말을 이끌어 낸다면, 탐탁치는 않을지언정 그런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과거 '건전함'을 추구한 사례들의 결말이 어땠는지를 살펴봤다.

건전함의 개념적 뿌리를 살펴보면 계몽사상과 맞닿아 있다. 계몽사상의 기본적인 골격은 이렇다. 이성적으로 가르쳐주고 깨우쳐주어야 동물적인 본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그래야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계몽사상에서는 사람의 원초적인 욕망을 억제하는 금욕과 절제를 가장 중요한 미덕으로 삼아왔다. 자, 그래서 유토피아가 왔을까? 역사적으로 보면 그 반대의 결과가 나타났다.

대표적인 사례로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들 수 있다. 이 시기의 성적인 정숙함(건전함)은 상상 이상이었던 듯하다. 예를 들면, 그 시대에는 다리(leg)라는 말도 외설적이라 하여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음악회에서 그랜드 피아노의 다리에도 스커트를 입혀야 했다고 한다. 사람이 아닌 피아노일지라도 맨다리를 대중에게 내보이는 것을 사회적 분위기가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도서관의 책들도 남녀로 구분했다고 한다. 남자가 지은 책과 여자가 지은 책이 표지를 맞대고 있는 것은 민망한 일이고 얼굴이 화끈거릴 일이라고 본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여자들을 정숙하게 만들었지만, 대신 히스테리를 증가시키는 부작용을 가져왔다. 잠을 오랫동안 못 자거나, 배고픈 상태로 오랫동안 있을 때 별다른 이유 없이 짜증과 신경질이 나는 것과 매우 비슷한 구조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만들어 내는 중요한 토대가 됐다. 즉, 의식적으로 과도한 통제를 할 때 예상과는 다른 심각한 부작용이 무의식적으로 나타난다는 이론적 정립이다. 말이 좋아 건전함이지, 자칫 사람을 미치게 만들 수도 있는 것. 바로 건전함을 과도하게 강조할 때 나타나는 그림자라고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법을 강조하는 법가주의 사상들 또한 건전함이 과도하게 강조된 사례들이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법을 만들고, 강하게 적용해 세상을 공명정대하게 만들자는 움직임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반복적으로 있어왔다. 그런데 다 실패했다. 왜 그랬을까? 앞서 히스테리와 유사한 현상으로, 불안과 초조함이 집단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처럼 오래 가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이러한 예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렵지 않게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내 다리가 어때서!"



■ 건전함의 다른 이름: 스트레스 해소와 순기능


'실체가 없다'는 말과 '효과가 없다'는 말이 같은 뜻은 아니다. 귀신이 없다고 믿더라도 밤길은 두렵지 않던가. 이는 '실체가 없는 것'에도 효과가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오히려 실체가 없을수록 효과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건전한 게임에 대해 똑부러진 목표나 이미지를 제시하는 사람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을 나는 만나본 적이 없다. 게이머들 역시 '건전한 게임'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말이 있다. 셋이 모이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1969년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과 그 동료들이 심리학적으로 비슷한 실험을 한 바 있다. '아무 것도 없는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행위'에 대한 실험이다.

한 사람이 가리킬 때와 두 사람이 가리킬 때는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하지만 세 사람 이상이 동시에 하늘을 가리키며 쳐다보면 주변 사람들이 몰려들어 함께 올려다보기 시작한다. 모여든 사람들은 'UFO(실제로 존재하지 않는)가 저기 있다'고 서로 가르쳐주며, '맞아맞아' 혹은 '나도 보여'라는 식으로 외친다. 없는 것을 보이도록 만드는 심리적 효과는 이런 방식으로 나타난다.



"저기 나왔다!"
"나도 보여!"

게임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발생한다. 정부 기관과 여러 사람들이 '건전한 게임'이라는 실체가 모호한 것을 반복적으로 지칭함으로써, 그 말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심리적인 실체를 형성하게 만든다. 있지도 않은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 '스트레스 해소'와 '게임의 순기능' 논리다.

우선 스트레스 해소부터 보자. 게임을 하면 스트레스가 해소되는가? 차라리 '게임을 하면 두뇌개발이 된다'고 주장하는 편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 번 생각해보자. 게임을 한다고 해야 할 공부가 줄어드나? 아니면 취직자리가 늘어나나? 그도 아니면 없는 돈이 생겨나는가?

게임을 하든 하지 않든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상황에 아무 것도 변하는 것은 없다. 그런데 스트레스가 해소된다니? 정말로 게임이 스트레스 해소에 기여한다면, 건강보험공단에서는 게임사에 보험금을 지급해야 할 것이다. 공중 보건 향상에 기여한다는 이유로 말이다.

물론 게임이 기분을 전환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는 있다. 무엇인가를 오래 하다 보면 감각이 무뎌지는 현상이 발생하는데, 이것은 잠시 다른 활동을 함으로써 상쇄되는 효과를 발휘한다. 가장 효과적인 기분 전환은 잠을 잔다거나 산책을 하는 정도가 있다. 다만, 이러한 활동들은 스트레스를 잠시 유예시키는 정도이지, 해소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시험공부에 지쳐 기분을 전환하겠다고 게임을 시작했다가 몇 시간 동안 공부를 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 적 혹시 없으신가?

나는 '스트레스 해소라는 말은 게임을 할 때 관용적으로 하는 표현일 뿐'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재미라는 것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요소들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기 때문이다. 언제나 이기게 되는 쉬운 게임은 잘 하지 않게 된다. 역설적으로, 긴장(Stress)을 전혀 유발하지 않으니까.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잡기 어려운 보스 몬스터에 도전한다. 그것을 이겨냈을 때의 성취감을 느끼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는가? 마우스를 집어던지고 싶고, 잠도 오지 않을 만큼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계속 도전했던 적이 없는가? 솔직히 고백컨대, 나는 많이 그랬다.



속에서 분노가 끓어오름에도 계속 도전하게 되는 게임, 분명 있다

순기능도 마찬가지다. 혹시 '범죄의 순기능'에 대해 들어본 바가 있는가? 범죄는 사회구성원들로 하여금 '용납될 수 있는 행동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알려주고, 범죄 피해 집단 간의 결속을 강화시켜준다. 이것이 바로 '범죄의 순기능'이다. 그리고 경찰이나 검사와 같은 직업을 존속시키는 기능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바탕으로 '범죄는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며, 사회적 필요악'이라고 말한다면, 범죄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효과가 있을까? 단언컨대, 없다. '좋은 점도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사람들은 그 역기능을 더 강하게 떠올릴 것이다.

좋다. 몇 걸음 더 양보해서, 그렇게 따져볼 것이라면 '우리는 일상을 구성하는 중요한 모든 것들을 기능적으로 분석하며 살고 있는가?'라고 의문을 던질 수 있다. 한 가지 예로, 요즘 여러 모로 문제가 되곤 하는 사교육을 보자. 여러 가지 역기능이 제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기능이 엄청나게 큰가? 그래서 집집마다 큰 부담을 느끼면서도 사교육에 열을 올리는가? 또 다른 예는 얼마든지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인들을 욕하면서도 이들을 몇 해마다 정기적으로 뽑는다. 여기에는 어떤 순기능이 존재하기 때문인가? 이런 것들에 왜 그런 비용과 노력을 들이는가에 대해 나는 들어본 바가 없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정치나 사교육처럼 일상의 중요한 것들에 대해 우리는 순기능 역기능을 분석하며 살지 않는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찍소리도 하지 않으면서, 왜 유독 게임에만 건전함이니 순기능이니 하는 고약한 잣대를 들이대는가. 그것도 다른 사람들도 아닌 게임산업과 문화를 진흥하고 연구한다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말이다.



■ 검열과 심의: 없는 실체가 제도화된 결과


건전함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개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검열이다. '건전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반대 세력, 즉 '건전하지 않은 것'을 제압할 수 있는 경찰이나 군대가 필요하다. '건전한 게임'이라는 말도 같은 맥락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 안에 이미 건전하지 않은 것들을 규정하고 있으며, 그것들을 다루기 위한 제도(경찰이나 군대와 같은)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게 바로 검열 혹은 심의다. 대부분의 문화, 특히 대중문화라고 불리는 것에는 항상 검열이 존재한다. 대중은 우매하며, 그냥 놔두면 군중심리에 휩쓸려 사회의 질서가 무너진다는 논리로 말이다.

백 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하자. 그럼 그 우매한 군중에게 내릴 '현명한 판단'을 하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들은 과연 그런 능력과 자격을 가지고 있는가?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군중으로 분류된 무리의 일원으로 살고 있다. 그런 나보다 더 잘 구분할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을 가진 이가 검열을 해준다면 나는 기꺼이 그 결과를 수용하겠다. 허나 반대로 이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나를 포함한 수많은 시민들을 우롱했다는 것밖에는 안 된다.

앞서 장황하게 설명한 대로, 검열의 기본 토대는 건전함이다. 게임 내용을 검토하는 것 역시 '건전한 게임'이라는 기준을 근간에 두고 있다. 그런데 '건전한 게임'이라는 것의 실체가 없으니, 검열 역시 매우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도대체 어떤 근거로 12금, 15금, 19금을 나누는가? 화면 상의 빨간 피를 파란색으로 바꾸면 도대체 무슨 효과가 있는가? 무엇 때문에 그것이 등급에 영향을 주는가? 혹시 냉정하고 차가운 파란색 대신, 안전을 뜻하는 초록색으로 피를 표현하면 전체 이용가를 줄 작정인가? 예측컨대 늦어도 십수 년 후, 이런 식의 등급분류는 그 옛날 영국에서 피아노 다리에 스커트를 입혔던 사례보다 더욱 우스운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누가, 어떤 기준을 토대로 심의하는가?

실체가 없는 것을 실행하려다보니, 그것을 맡은 기관의 역할과 위상 역시도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최근 게임 심의기관에서 문제가 자주 보도된 바 있다. 이는 소속된 직원의 개인적 인성이나 기관장의 리더십 문제라기보다, 검열기관의 본질적 기능에서 파생된 문제로 보여진다. '상대가 없는 링 위에서 허공과 열심히 권투를 하는 선수'를 기대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기왕에 있는 제도를 어떻게 할 수는 없다. 그러니 실체가 있고 필요한 역할을 찾아 수행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대안을 생각해보자. 우선 제도의 존립이 무엇을 전제로 하고 있는지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대중은 더 이상 무식한 사람들이 아니다. 배울만큼 배우고, 우리 사회의 한 영역을 책임지고 있는 건전한 시민들이다. 그리고 게임 심의기관들은 이들이 낸 세금으로 운영된다. 즉, 폭압 기관이 아닌 서비스 기관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서비스 기관으로서, 시민들의 상식을 믿고 이들에게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는 방향으로 하루빨리 성격이 바뀌어야 한다. 물론 제공되는 정보의 중심은 선정성, 사행성, 폭력성 같은 것들이 아니다. 얼마나 재미가 있는지, 어떤 것들이 재미 요소인지, 이런 재미를 느끼기 위해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내용이 되어야 한다. 게임이 출시되면 이용자들이 제일 먼저 찾아보게 되는 그런 기관으로서 기능을 개편해야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 '건전한 게임'의 대안 프레임 모색 - "흑과 백 사이에 회색도 존재함을 기억하라"


건전가요가 사라지고 가요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듯, 건전한 게임이라는 캠페인과 용어가 사라져야 현재 빈사상태에 있는 게임산업과 문화가 활성화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럼 여기서 '그렇다면 불건전한 게임이 나오든 말든 그냥 두자는 말이냐'라고 반론을 제기할 사람들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대체로 이런 경향이 있는데, 그렇다면 바꾸어 질문해 보자. 세상의 '좋은 사람들' 이외의 사람들은 모두 '나쁜 사람들'인가? 당연히 아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사람들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굳이 '남들이 보기에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와 가족,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함께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그 결과 좋은 사람으로 평가 받는다면 다행이고, 간혹 반대로 좋지 않은 사람으로 평가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이 잘못 살고 있다고 판정하거나 훈계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임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게임사들이 모두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게임, 즉 건전한 게임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니며, 그럴 의무도 없다. 대부분의 게임사들은 '게이머들에게 더 재미있는 게임'을 제공함으로써 영리를 추구하고자 한다.

공부를 잘 하게 만들거나, 약속을 잘 지키게 하거나, 반듯한 인성을 소유하게끔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게임을 만들 의무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지도 않는 의무'를 앞세워 이들이 만든 게임을 '건전함'이라는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사업하지 마!'라는 메시지와 별반 다름이 없어 보인다.

한 번 더 반복하지만, '건전한 게임을 만들 의무가 없다'고 해서 '불건전한 게임을 만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스스로의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심각하게 느껴야 한다. 건전함과 불건전함의 프레임 대신, 요즘 사회를 평가하는 '삶의 질(Quality of Life)'로 접근하면 훨씬 다양하고 건설적인 프레임이 펼쳐진다. 노동을 중심으로 한 건전함에서, 개인의 여가를 중심으로 한 행복의 프레임으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여가의 개념 중 '진지한 여가(Serious Leisure)'라는 개념을 전근대적인 건전함 프레임의 대안으로 강력 추천하고 싶다.



좋은 것 or 나쁜 것, 이제 이런 이분법적인 프레임은 벗어나야

진지한 여가란, 캐나다 캘거리대학교의 로버트 스테빈스(Robert A. Stebbins) 교수가 1982년도에 최초로 주장한 개념이다. 여가는 그냥 여가가 아니라, 일상적인 여가(Casual Leisure)와 진지한 여가로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상적 여가가 잠시 동안의 기분전환용 여가라면, 진지한 여가는 장기간의 시간과 많은 노력 및 비용이 투자되어야 하는 여가를 말한다. 암벽 등반이나 마라톤 같은 것들을 대표적인 진지한 여가로 볼 수 있다. 단순히 노동을 잘하기 위한 들러리가 아니라, 사람들이 행복감을 맛보기 위해 스스로 부과한 일의 성격을 가지는 여가. 이것이 '진지한 여가'라는 개념이 삶의 질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먼저 등장하게 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형태의 여가를 통해 사람들은 높은 수준의 몰입을 하게 되고, 그 결과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 대체적인 요지다.

그렇다. 게임은 개인과 가정의 경제를 박살내는 도박이나, 몽롱한 정신으로 착란을 일으키는 정신병과 같은 불건전 모델이 아니다. 암벽 등반이나 마라톤처럼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위험과 모험을 기꺼이 감수하려는 태도와 더 유사하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사람들은 극도의 성취감과 행복감을 맛보게 되고, 삶의 충만한 에너지를 느끼게 된다. 암벽 등반이나 마라톤을 하다가 간혹 목숨을 잃는 경우도 생기지만, 그것을 이유로 이것들을 불건전한 여가로 보는 사람은 없다.

모름지기 고귀한 것을 성취하려면 대가도 만만치 않은 법이다. 진지한 여가를 추구하는 이들은 분명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개인적 비용이나 위험 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복감을 위해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을 소외시킬 수도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치료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이 느끼는 행복을 가족들과 함께 느낄 수 있도록 고안된 새로운 프로그램의 교육과 학습이 필요하다. 평생교육 차원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게임은 술이나 담배를 취급하듯 '건전'의 프레임으로 접근하는 대신, 마라톤이나 암벽 등반을 다루듯 행복 추구의 프레임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렇게 했을 때 최고의 무언가를 기대할 수 있으리라. 그것이 게이머들의 행복이 됐든, 최첨단의 문화콘텐츠가 됐든, 아니면 다른 사회가 부러워할만한 사회적 역동성이 됐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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