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운발 게임'에 대한 진지한 담론

칼럼 | 박태균, 남기백 기자 | 댓글: 115개 |



"나는 여기 있을 실력이 아닌데, 운이 없어서 티어를 못 올려!"

어느 순간부터 PVP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이 자신의 실력을 탓하기보다 운을 탓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게이머들 사이에 '운발 망겜'이란 단어가 보편적으로 통용된 지는 수년이 흘렀고, 특히 수집용 카드 게임(ex. 하스스톤)이나 오토 배틀러(ex. 전략적 팀 전투) 등의 게임을 할 때 이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하지만, 소위 '운발 게임'이라고 일컬어지는 게임들에도 랭크 점수와 등급은 반드시 존재한다. 운으로만 승부가 결정되는 게임이라면 어째서 등급이 나뉘고, 최하위 플레이어와 최상위 플레이어의 구분이 존재하는 것인가? 해당 게임의 프로게이머들은 모두 세상에서 운이 가장 좋은 사람인 것인가? 무엇이 '운발 게임'이고, 무엇이 '실력 게임'인가? 본 글은 위 물음들에 답하기 위한 진지한 담론이다.


왜 '운발 게임'인가
통제 불가능한 변수의 차이

특정 게임이 '운발 게임' 이야기를 듣게 되는 이유는 당연히 운 요소가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통제 불가능한 변수의 크기로 설명할 수 있다. 플레이어가 인게임에서 통제 불가능한 변수가 적으면 '실력 게임', 많으면 '운발 게임'으로 불리게 된다. 플레이어가 판단하고 결정할 수 없는 것들이 플레이와 결과에 많은 영향을 미칠수록 '운발 게임' 논란에 휩싸이기 좋은 것이다.



▲ 인게임의 모든 상황을 플레이어가 통제할 수 있는 철권

예를 들어 결코 '운발 게임'이라고 불리지 않는 철권은 모든 행위를 스스로 결정한다. 캐릭터 선택과 공격, 가드, 회피를 플레이어가 직접 해야하는 건 당연하다. 이와 함께 세부적으로 상-중-하단 기술을 사용하는 것, 상황에 맞는 적절한 딜레이 캐치, 횡이동 및 구르기 방향 선택, 이득과 손해 프레임을 바탕으로 한 심리전, 맵과 상황에 따른 콤보 선택 등 플레이어가 취할 수 있는 수많은 행동이 본인의 손에 달려 있다.



▲ 플레이어가 통제할 수 없는 무작위 요소가 많은 하스스톤

반면 언제나 '운발 게임' 이야기를 듣는 하스스톤에는 플레이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들이 많다. 영웅과 덱 선택은 스스로 한다고 치자. 그러나 본 게임 시작부터 행운 테스트가 시작된다. 멀리건을 시작으로 매 턴 어떤 카드가 오른쪽에서 주어질지 알 수 없고, 무작위 대상에게 영향을 주거나 다른 무작위 카드를 생성하는 기능을 가진 카드도 상당수다.

이렇게 상반된 게임 특성으로 인해 각 게임의 진행 과정과 결과에 따라 다른 반응이 나타난다. 철권을 플레이하다가 상대의 같은 공격에 계속 당하고, 딜레이 캐치를 실수하고, 심리전에서 밀려 패배했다고 치자. 인게임에서의 모든 행동은 플레이어 본인이 선택한 것이고, 그 결과로 진 거다. 이때는 패배의 요인을 자신에게서 찾으며 '운 때문에 졌다'라고 느끼거나 이야기하지 않는다.

반대로 하스스톤을 플레이한다고 가정해보자. 영웅과 덱이 같은 적을 만났는데, 상대가 매 턴 하수인을 전개하는 동안 나는 영웅 능력만 줄곧 누르다가 허무하게 패배했다. 이외에도 영웅에게 들어가야 할 대미지가 하수인에 들어가서 진다거나, 다 이긴 게임을 무작위로 생성된 카드에 의해 역전당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처럼 플레이어의 의지가 아닌 외부 요인에 의해 패배할 때마다 플레이어는 '운발 게임'을 외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스포츠
'운발 게임' 논란의 가장 큰 요소




'운발 게임' 논란은 e스포츠로 인해 더욱 커진다. 스타크래프트의 이영호, 철권의 '무릎' 배재민, 카트라이더의 문호준처럼 대부분의 e스포츠는 해당 종목을 대표하는 인물이 있다. 하지만, 하스스톤을 비롯해 '운발 게임'으로 불리는 종목의 경우엔 이러한 독보적인 일인자가 없으며 앞으로도 절대 나올 수 없다.

이번엔 최상위 프로게이머와 상위 5% 일반 유저의 대결을 예로 들겠다. 철권이나 스타크래프트 등 '실력 게임' 종목에서는 특별한 페널티가 없다면 일반 유저가 프로게이머를 절대 이길 수 없다. 결과는 오직 양 플레이어의 손끝에서 나오기 때문에 수천 번, 수만 번을 대결한다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심지어 프로 간의 대결에서도 일부 초일류 선수는 다른 선수들과 꽤 큰 차이를 보인다.

반면 '운발 게임'에서는 매우 작긴 해도 일반 유저가 프로게이머를 이길 확률이 분명 존재한다. 제아무리 프로게이머라도 통제 불가능한 요소, 운을 피해갈 순 없으니까. 이러한 문제는 프로게이머 간의 대결에서 더욱 심화된다. '운발 게임'은 게이머들의 수준이 비슷할수록 단판 대결에선 실력보다 운에 의해 승부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이에 매 대회 우승자가 바뀌는 것은 물론 지난 대회 우승자가 다음 대회 예선에서 조기 탈락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경기 과정에서의 차이도 논란의 여지를 준다. 위기 상황에서 철권 프로게이머는 집중력을 발휘해 심리전을 걸거나 강수를 던져 슈퍼 플레이를 해낸다. 하지만, 위기 상황의 하스스톤 프로게이머가 할 수 있는 건 다음 턴에 적절한 카드가 나오거나 무작위 효과를 발휘하는 카드가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내길 기도하는 것밖에 없다. 전자의 성공은 프로게이머에 대한 경외감을 들게 하지만, 후자의 성공은 그저 '운발 좋다'에 그칠 뿐이다.



▲ 하스스톤 대회에서 심심치 않게 확인할 수 있는 '기도 메타'


최선의 수
'운발 게임'의 실력과 프로게이머

그렇다면 '운발 게임'에 프로게이머는 존재 의미가 없는가? 일반 유저도 대회에 출전해 운이 좋으면 입상할 수 있는 것인가? 이 두 물음에 대한 대답은 모두 '아니오'다. 아무리 통제 불가능한 변수가 많은 '운발 게임'이라도 확실한 실력의 영역이 있다. 행운은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지만 그 행운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플레이어의 몫이기 때문이다.

다시 하스스톤을 예로 들어보자. 하스스톤에서의 실력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는 데 있다. 다음 턴에 받을 카드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지만 현재 턴과 마나, 필드 상황, 서로의 손패 상황 등을 고려해 내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 카드 카운팅을 통해 나와 상대의 남은 카드를 어느 정도 예측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러한 정보들을 바탕으로 카드를 사용하거나 아끼는 것, 내 하수인들로 상대의 명치를 치거나 적 하수인을 정리하는 것은 전적으로 플레이어의 판단에 달려 있다. 세부적으로 제한 시간 내에 대미지나 효과를 계산해 카드 사용 순서나 하수인 공격 순서 등을 결정하는 것도 실력 요소라고 할 수 있겠다. 승률을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도록 유리한 상황에선 무난한 수를, 불리한 상황에선 강수를 던지는 것 또한 실력이다.

▲ T1 '서렌더' 김정수가 선보인 하스스톤에서의 실력 요소

전략적 팀 전투로 대표되는 오토 배틀러 게임들도 마찬가지다. 구매판에 등장하는 유닛과 크립 라운드에서 주어지는 아이템과 골드, 다음 라운드에 만날 적은 플레이어가 결정할 수 없다. 하지만 제시된 유닛 중 어떤 유닛을 구매할지, 유닛 배치를 어떻게 할지, 돈을 사용할지 아낄지, 획득한 아이템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모두 내가 직접 판단하고 결정하는 부분이다. 다른 사람들과 겹치지 않도록 조합을 정하는 것, 지금까지 만난 상대들을 바탕으로 다음 상대를 예측하는 것도 분명한 실력 요소다.

물론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을 하더라도 패배할 수 있다. 그 선택에 앞서 통제할 수 없었던 수많은 요소들이 존재했고, 후에도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력의 영역은 게임이 반복될수록 선명하게 드러난다. 수백, 수천, 수만 판을 플레이하면 운으로 인한 결과보다 실력으로 인한 결과가 더욱 중요해진다. 모든 유저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통제 불가능한 변수들 속에서 줄곧 최선의 선택을 하는 행위가 결국 실력과 등급을 나누는 것이다.

이에 앞서 밝힌 것처럼 '운발 게임'의 단판 대결에선 일반 유저도 프로게이머를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지역 예선부터 월드 챔피언십까지 5판 3선승, 7판 4선승 등의 수많은 경기가 쌓인다면,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참가자는 결국 어느 수준 이상의 실력을 지닌 프로게이머들이다. 물론 그들 간의 절대적인 실력 차이가 타 게임보단 크지 않더라도 운발만으로 플레이하는 게임은 없다는 건 똑똑히 보여준다.


마치며
'운발 게임'도 '실력 게임'도 맞다




현대인이 즐기는 대부분의 게임에는 실력과 운이 양립한다. 다만 비중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또한 단순히 100% 운으로만 결과가 결정되는 게임은 없으며 크든 작든 엄연한 실력 요소가 존재한다. 이에 개인의 관점이나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따라 특정 게임을 '운발 게임'이라고 칭하는 것도, '실력 게임'이라고 칭하는 것도 정상이다.

하지만,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할 때 두 가지는 지양해야 한다. 먼저, 자신과 다른 생각이나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배척하거나 비난해선 안 된다. 내가 '운발 게임'이라 느끼는 게임을 누군가 '실력 게임'이라 하는 것과 내가 '실력 게임'이라 느끼는 게임을 누군가 '운발 게임'이라고 하는 건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다. 서로의 입장이 다르더라도 상대의 생각을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다른 한 가지는 어떤 게임이든 프로게이머들이나 최상위 랭커들의 실력과 노력을 폄하해선 안 된다는 점이다. 아무리 운 요소가 큰 게임이라도 말이다. 단 0.1%라도 승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수천, 수만 판의 경험을 쌓으며 정진하는 유저들이다. 비록 대회 무대에서의 결과가 운으로 결정된다 하더라도, 그들이 가진 본연의 실력과 그곳에 오를 때까지 지나쳐온 과정을 간과하지 말자.

사진 및 영상 출처 : 반다이남코, 블리자드 공식 홈페이지 및 유튜브

댓글

새로고침
새로고침

기사 목록

1 2 3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