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라그나로크: 제로', 추억은 창의력이 없다고 하던데...

칼럼 | 이현수 기자 | 댓글: 91개 |



기대가 컸다. 옛 향수에 젖어 많은 이들이 기다렸다. 분홍분홍하고 말랑말랑한 추억을 가진 이들에게 ‘라그나로크: 제로’는 훌륭한 연말 아이템이었다. 2차 전직 등 추가된 다양한 콘텐츠는 추억에 흥미를 더하기에 충분했다. 처음 접하는 사용자들의 허들을 낮추기 위한 UI 변경도 있었다.

‘라그나로크R’에서도 보았듯 그라비티는 이번에도 추억을 자극하고자 했고 이는 12월 6일 전까지는 제법 잘 먹혔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추억은 창의력이 없다는 것을. 그 당시 라그나로크를 하던 그 순간이 좋았던 것뿐이라는 것을.

2017년 12월 6일 ‘라그나로크: 제로’는 닻을 올렸다. 그라비티에서 공식 루트로 말한 ‘정식 서비스’였다. 오늘(1월 3일)까지 오픈 이벤트도 진행하려고 했다. 라그나로크 온라인 성기철 개발 총괄 본부장은 “게임 완성도에 심혈을 기울였다”라고 말했다. 돛을 활짝 피고 순항할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정식 서비스’ 첫날 정식 오픈 시간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애초 예정된 14시 30분을 앞둔 14시 20분, 공지를 통해 한 시간의 연장 점검을 알렸다. 오픈이 한 시간이 지연됐다. 그래도 예전 모습을 추억하는 사용자들은 개선된 ‘라그나로크: 제로’를 기다렸다.

막상 16시가 되도 게임 플레이는 원활하지 않았다. 그라비티는 접속자 폭주로 발생한 현상이라 설명했다. 통상 PC MMORPG 오픈일에 으레 일어나는 현상이기에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오히려 ‘대박’의 기운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라그나로크: 제로'의 문제는 업계 통념상의 희망적인 신고식은 아니었다.

인증서버 연동 오류로 인해 계정정보가 정상적으로 출력되지 않았고, 퀘스트 정보가 정상적으로 저장되지 않았다. 그라비티는 다시 점검에 들어가 서비스 오픈 시점인 15시 30분으로 서버를 롤백했다. 23시까지의 연장 점검. 일정에도 없던 점검을 7시간가량 진행했다.

그라비티는 서비스 정상화를 위해 초반 유입지역의 추가와 존 서버 인원수를 증가시켰으며 7일 오전 1시 30분까지 추가 경험치를 보상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보상이 사용자들에게 제공되는 일은 없었다. 8일 오전까지 게임을 내려버렸으니까.

일반적으로 라이브서비스 중인 게임은 무슨 일이 있어도 게임을 내리지 않기 위해 온갖 부서가 악전고투를 펼친다. 임시방편이라도 좋으니 어떻게든 살려놓고 원인을 찾는 데 반해 ‘라그나로크: 제로’는 서비스를 일시 중단해 버렸다.

오죽하면 ‘라그나로크 온라인’과 ‘트리오브세이비어’를 개발한 김학규 IMC게임즈 대표가 트위터에다가 측은한 마음을 내비쳤을까.



▲ 이OO씨 제보 발췌, 21일까지의 상황을 정리했다.

그렇다고 8일부터 정상적인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계속된 접속 오류와 버그가 산재했다. 단적으로 ‘라그나로크: 제로’ 홈페이지의 공지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다. 12월 28일 상용화 서비스 안내 이전 공지는 대부분 이렇다.

오픈 및 다운로드 안내(시간변경), 홈페이지 및 게임 접속 관련 안내, 임시점검 안내(연장), 접속 불가 현상 안내, 오픈 시간 지연 안내, 서버연결 실패 오류 관련 안내, 접속 오류 해결을 위한 서비스 일시 중단 안내, 접속 불안정 현상 수정을 위한 테스트 안내. 공지 작성자는 몇 년 전 QPR에서 강제 전성기를 맞이한 세자르 골키퍼의 심정을 오롯이 이해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최근 상용 서버가 고도로 발달하여 서버 프로그래머가 있는 인디 개발팀도 이렇게 자주 점검하는 경우가 드문데, ‘라그나로크: 제로’ 팀은 이를 실로 해내고 있으니 실로 2017년인가 싶다. 심지어 27일에는 이벤트 처리에 오류가 발생하기도 했다. 사용자들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게 라이브 서비스에 도움이 될 것 같다”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쯤되면 억울해서라도 디렉터 등이 직접 나서서 “이래저래 해서 이래 됐습니다”라고 변명이라도 할 법한데 그럴 기미도 없다. 게이트 자체를 PM으로 일원화한 모양새다.

어쩌면 비겁하게 변명하지 않고 정상화시키려는 대인군자다운 자세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변명 거리도 없는 완벽한 실패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파악하기가 너무 어려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팀 개발자들의 실력이 형편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라그나로크는 굉장히 오래된 게임이다. 아주 오래된 코드와 주석 없는 코드들이 주렁주렁 달려있을지도 모르겠다. 오랜 시간 동안 대단히 많은 개발자가 들어오고 나갔으니 개성 있는 구문들이 많을 것이라는 예상도 해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말인즉슨 제대로 된 테스트조차 안 해봤다는 이야기다. 묘하게 ‘라그나로크2’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2012년 서비스를 진행한 ‘라그나로크2’는 45만 명에 육박하는 접속자 수로 인해 접속불가, 지연이 발생했으며 후일 유지보수의 실패로 서버 다운과 게임 머니 복사 버그 등이 터지고는 했다. 20년 가까이 온라인 게임 서비스를 해왔음에도 그라비티의 고질적인 ‘운영 미숙’은 그때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 이OO씨 제보 발췌

그라비티 기술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운영에 있어도 추억을 떠올리게 할 심산인 것 같다. 사실 사용자 모두를 만족하게 할 운영을 한다는 건 확률 0%에 가까운 꿈같은 이야기다. 수많은 사람의 비위를 어떻게 맞출 것이며, 상상 이상의 진상 사용자들이 어디 한두 명인가? 게다가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고객센터를 괴롭히고 이슈를 침소봉대하는 그룹이 있으니 완벽한 운영과 고객응대는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다행이도 사용자들은 그라비티에게 완벽한 운영을 바라고 있지 않다. 다만, 정상적인, 상식적인, 이해할 수 있는 행보를 원하는 것이다. 내부 방침이 있다면, 설사 그것을 공개하지 못할지언정 이해할 수 있는 움직임을 보여달라는 것이다.

잦은 임시 점검이 있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게임이 안정화에 들어간 21일에는 내부 테스터에 의한 이슈가 발생했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2차 스킬을 사용하여 사냥하고, 드랍템을 사용자에게 주는 이른바 ‘한 번 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라비티는 이에 대해 “내부 테스트 인원으로 확인되며, 21일 임시 점검시 일시적으로 외부에서 접속이 가능한 상태였다”며 “습득한 클립과 촌촌인형을 회수 진행했다”고 밝혔다.

사용자들 사이에서 상당히 이슈가 된 문제임에도 공지하나 없이 고객 답변으로만 넘어가려고 했다. 이런 문제는 실수를 인정하기만 한다면 상당 부분 봉합할 수 있는 문제다. 하지만 그라비티는 그러지 않았다. 오죽하면 사측의 공식 답변에도 ’핵 사용자’임을 감추기 위한 답변이라는 루머까지 돌았을까. 다 신뢰의 문제다.



▲ 내부 테스터의 채팅으로 생긴 '한 번 더 ' 이슈 대응으로 신뢰마저 잃었다

연말에 발생한 계정 도용과 해킹 이슈도 운영 잡음을 일으켰다. 계정도용에 대해 그라비티는 계정 및 게임정보보안에 사용자가 온갖 노력을 하라는 듯한 공지로 대응했다. 정확하게는 ‘스스로 계정 및 게임정보 보안 강화에 힘써주시기 바랍니다’다. 금융업체 못지않은, 실로 온라인 게임 서비스의 중견 기업다운 자세라고 할 수 있겠다.

해킹은 해당 공지도 없었다. 커뮤니티에서 사용자들이 아우성을 치는데도 확실한 움직임조차 없다. 물론 정확히 확인된 건 없다. 다만, 그라비티에서 요구한 '스스로 보안 강화 항목'인 ‘motp’를 사용했음에도 해킹을 당했다는 사례가 속속 올라오고 있으며 커뮤니티에서는 동일한 카지노 광고 문자를 수신한 사람들이 다수 나타나고 있어 개인 정보 자체가 해킹당한 것 아니겠느냐는 정황도 있다. 그라비티 측에 입장을 물어봤지만, 그라비티는 침묵만 지키고 있다.

(2017.1.3 22:00 추가)

그라비티는 계정도용에 대해 "오픈 이후 접수되는 건이 있으며, 이에 대해 담당자의 확인을 통해 순차적으로 조치가 되고 있다"며 "계정도용 전담팀이 구성되어 있으며, 관련 팀에서 접수된 건들을 순차적으로 확인하여 조치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계정도용에 대한 처리는 게임내 약관 및 운영정책에 의거하여 진행되며, 모든 데이터의 확인을 진행하여 처리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답변 및 조치에 시간이 걸리는 점 양해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아직 라그나로크 제로의 경우 접속 불안정 현상이 해결되지 않아, 계정도용 문의를 포함한 고객문의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걸리고 있으며 MOTP와 게임내 2차비번 시스템을 통한 보안을 강화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개발이 같이 진행 되어야하는 만큼, 약간의 시간이 소요될 수 있음을 알렸다.


그런 가운데 27일 정기 점검 이후 ‘정식 상용 서비스’라는 이름으로 Ro Shop을 오픈하여 더욱더 빈축을 사고 있다. 12월 6일 ‘정식 서비스’를 시작했던 게임은 어디 가고 28일부터 ‘정식 상용 서비스’를 시작한다는 말에 사용자들은 소위, 한 번 더 벙쪘다. 이해는 간다. 그라비티 측에서는 뭔가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간청하고 싶었을 테니.

사실 이걸로 그라비티를 나쁘게 볼 수 없다. 게임은 수익을 내야 하는 제품이니까, 제 역할을 하게 만든 것뿐이다. 다만, 그전까지 온갖 점검과 장애 안내문으로 일관하고 유쾌하지 않은 경험을 제공해놓고서는 이제와서 '짜잔~'하는 행동에 사용자들이 실소를 보내는 것이다.

그라비티는 2017년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2017년 상반기 매출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77.6% 오른 503억 8,000만 원으로 그라비티 역대 최대 반기 매출액을 기록할 정도였다. 또한, 2분기에만 270억 2,800만 원을 벌어들이며 4분기 연속 흑자를 달성하는데도 성공했다.

주요 증대 원인은 역시 ‘라그나로크’IP였다. ‘라그나로크R’을 비롯해 한국, 대만, 태국 등지에서 모바일 게임 수익이 전체 매출의 약 45%를 차지하며 전년동기대비 290%의 성장을 이끌어 냈다. 별다른 성장이 기대되지 않았던 2016년에 ‘라그나로크’를 동남아시아 지역에 재출시하여 3분기부터 급등에 성공했다.

더구나 중국 드림스퀘어, 심동네트워크가 합작해 개발한 ‘라그나로크 모바일 MMORPG’가 국내에서 상당한 기대를 받는 것을 보면 확실히 그라비티에게 있어 ‘라그나로크’는 PC 부분 최고의 카드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가장 큰 형님격인 '라그나로크 온라인'의 후신인 '라그나로크: 제로'가 스스로 이미지를 깎아 먹고 있다.



▲12월 6일 '정식 서비스'에 들어가고 12월 28일 '정식 상용 서비스'에 들어갔다

혹자는 '라그나로크: 제로'의 각종 이슈를 보면서 추억팔이의 종말이라고 이야기한다. 추억팔이라는 단어 자체가 약간 부정적인 어감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지 이 복고 마케팅은 전 세계적인 추세다. 확실한 고객층을 담보해준다는 어마어마한 이점을 가지고 있다.

현재 3040세대가 기억하는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시기에 대한 일종의 '추억보정'이 원동력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97년을 기점으로 경제성장을 꾸준히 이어왔지만, 오히려 3040에게는 더욱더 빡빡한 현실이 되었기에 더 그렇다. 과거 따뜻하고 즐거웠던 추억을 꺼내보며 위로받고 싶은 욕구다. 97년 외환위기 때의 '아버지', 09년 금융위기 때 '엄마를 부탁해' 등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과 같은 맥락이다.

‘라그나로크: 제로’는 사용자들의 추억이 없었다면 존재하지도 못했을 게임이다. 분홍분홍한 ‘그때 그 시절’을 다시 경험하고 싶은 사용자들의 욕구를 건드렸다. 그런데 이 행위가 단순 '추억팔이'에 머물러서는 과거의 온라인도, 지금의 제로에게도 둘 다 좋아질게 하나도 없다. 그 누구보다도 그라비티가 제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직 기회는 남았다. '라그나로크: 제로'는 아직 장래가 있는 게임이다. 게임도 슬슬 안정되고 있으며, 급한 불을 끄면서 거대 업데이트도 진행하고 있다. PC방 사용시간집계 업체 게임트릭스가 ‘라그나로크: 제로’를 ‘라그나로크 온라인’과 구분하기 시작한 12월 3주차에는 ‘라그나로크: 제로’가 인벤게임순위 기준 26위를 차지했으며 잇달아 29위, 27위를 기록하는 등 30위 권에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라그나로크: 제로'가 제대로 돌아갔으면 오늘까지 오픈 이벤트가 진행됐을 터다. 이 게임에 단순 추억의 힘이 아닌, 실로 게임으로서 또 그와 맞닿아 있는 운영으로서 제대로 설 수 있기를 원하는 게 그렇게 허황한 주문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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