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독점작'이 사라지고 있다

칼럼 | 강승진 기자 | 댓글: 67개 |



1월, 개발사 너티 독이 올린 채용 공고문이 예상치 않은 관심을 끌었다. 지금까지와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그래픽 프로그래머 채용문에는 신작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의 그래픽 렌더링에 대한 안내와 요구 사항들이 적혀있었다. 화제가 된 것은 필요 스킬에 적힌 몇 개의 문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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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 및 C++ 프로그래밍 언어에 대한 높은 지식
- 현재 GPU 아키텍쳐에 대한 이해(AMD GCN, NVIDIA CUDA)
- 다이렉트 X 12, 벌칸 또는 다른 현대 크래픽 및 컴퓨터 API에 대한 경험
- HLSL/GLSL이나 다른 동급의 셰이더 언어에 대한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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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의 게임 부문인 소니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Sony Interactive Entertainment, SIE)는 현세대 콘솔은 물론 차세대 기종인 PS5 역시 AMD 그래픽 칩셋을 활용해 제작한다. 언차티드 시리즈로 SIE 산하 스튜디오의 대표격인 너티 독이 엔비디아 등 이미 정해진 런칭 기종과는 다른 PC 고유 기술을 언급한 것이다. 팬들의 손가락은 자연스레 다음 단계를 가리켰다.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의 PC 버전 준비.

그간 SIE의 행보라면 이번 공고 문구에 그다지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독점작으로 쏠쏠한 재미를 본 SIE 가 무슨 이득을 위해 자사 대표 작품을 타 플랫폼으로 선보이겠느냐는 이야기다.

일부 전문가들 역시 그저 더 다양한 경험을 가진 개발자를 채용하기 위한 공고 전략이었을 뿐이라며 PC 출시 가능성을 일축했다. 실제로 SIE 월드와이드 스튜디오의 핵심 테크니컬 그룹 아이스 팀은 기존과 같은 수준의 지식을 요하는 공고문을 올려놓았을 뿐이다.

하지만 들려오는 여러 루머와 게임 업계의 흐름을 함께 두고 보면 이번 발표 시기와 의중이 영 묘한 것도 사실이다.




업계 저명 저널리스트 제이슨 슈라이어는 너티 독의 채용 공고에 사흘 앞선 16일, '호라이즌: 제로 던'의 PC 출시를 보도했다. 슈라이어는 익명의 내부 소식통을 빌려 해당 소식을 전한 후 더 많은 독점 게임이 PC로 선보일 것이라 밝혔다. 비슷한 시기 유로게이머의 톰 필립스 역시 '드림즈'의 PC 이식을 암시하는 글을 남기며 슈라이어의 주장에 무게를 더했다.

산하 스튜디오에 직접 속하진 않았지만, SIE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퀀틱 드림과 코지마 프로덕션의 행보도 독점작의 PC 이식 루머 신빙성에 힘을 싣는다. 넷이즈의 투자와 함께 PS 독점 계약을 끝낸 퀀틱 드림은 그간 PS3와 PS4로 출시된 '헤비 레인', '비욘드 투 소울즈',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을 에픽 게임즈 스토어를 통해 2019년 서비스했다.

코지마 프로덕션의 움직임은 더 큰 반향을 불렀다. 코지마 히데오는 코나미 퇴사 후 SIE(당시 SCE)의 투자와 함께 코지마 프로덕션을 설립했다. 개발사 첫 작품인 '데스 스트랜딩' 개발은 월드와이드 스튜디오 중 하나이자 '호라이즌: 제로 던' 개발사인 게릴라 게임즈의 데시마 엔진으로 만들어졌다. SIE의 집중 케어를 받은 격이다. 그런데 코지마 프로덕션은 게임 출시 한 달을 남기고 돌연 '데스 스트랜딩'의 기간 독점 후 505 게임즈를 통한 PC 버전 후발매를 발표했다.

두 개발사 모두 SIE의 손으로 PC 유통이 진행되는 바는 아니지만, 추후 PS 콘솔 기기 게임 개발을 열어두고 서로 긍정적인 관계 유지 의사를 표명했다. 그간 PS 시리즈가 철저한 독점작 관리 아래 서비스됐음을 떠올리면 친 SIE 기업의 독점 해지와 PC 이식 루머가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생각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서 나온다.



▲ SCE(현 SIE) 앤드류 하우스 전 대표가 직접 코지마 프로덕션과의 파트너십을 발표하기도 했다

SIE가 최근까지 PC 이식에 부정적인 자세를 취하는 가장 큰 바탕에는 XBOX360과의 콘솔 점유율 전쟁에서 경험했던 독점작의 무게에 있다. PS3는 한동안 '헤일로','기어스 오브 워' 등 강력한 독점 작품을 무기로 한 마이크로소프트(MS)의 엑스박스 진영에 크게 밀리는 모양새였다. SIE는 해법으로 PS3 전용 게임을 개발하는 개발사를 다수 끌어들이는 식으로 맞불을 놓았고 몇몇 국가를 시작으로 콘솔 점유율을 뒤집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약 10년이 흐른 시점에서 콘솔 시장 우위에 선 SIE가 PC 이식의 모델로 꼽을만한 대상은 다시 한 번 MS다.

MS 자회사 엑스박스 게임 스튜디오(Xbox Game Studio)는 기기 판매 선봉장이라는 독점작들을 자사의 플랫폼인 마이크로소프트 스토어를 통해 PC에서도 즐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레이싱 장르에서는 적수가 없다는 포르자 시리즈는 그렇게 윈도우 10 유저들이 콘솔 없이도 즐길 수 있는 게임이 됐다.

한발 더 나아가 상기한 헤일로와 기어스 시리즈는 밸브의 플랫폼인 스팀으로도 출시됐다. 산하 스튜디오 닌자 시어리의 '헬블레이드'와 협력 투자가 이루어진 '컵헤드'는 닌텐도 스위치 유통라인을 타기도 했다.



▲ Xbox 시리즈 X 등 콘솔 사업에도 끊임 없는 투자가 이뤄지고 있다

앞선 우려대로라면 플랫폼 확장은 엑스박스 게임 스튜디오에 악영향을 끼치는 게 맞는 셈법이 나온다. 콘솔, 게임 산업이 메인인 회사가 독점작을 줄줄이 내주는 모양새니 말이다. 하지만 엑스박스 진영의 수장으로 불리는 브랜드 책임자 필 스펜서의 생각은 판이했고 원하는 결과도 달랐다.

스펜서는 E3 2019 당시 진행된 인터뷰에서 스팀이나 에픽게임즈, GOG 등의 다른 마켓을 통한 출시를 거론하며 '선택권'을 이야기했다. 플레이하는 유저가 게임을 경험하는 데 있어 선택권을 부여하겠다는 뜻이다. Xbox가 없어 자신들의 게임을 즐기지 못하는 수를 줄이겠다고도 덧붙였다.

클라우드 게이밍 서비스에서는 먼저 대규모 발표회를 진행한 구글 스태디아가 선두에 서는 듯했지만 사실 엑스박스도 '프로젝트 엑스클라우드(Project xCloud)'를 준비하고 있었다. 스마트폰은 물론 PC에서 엑스박스 게임을 즐기도록 한 기능인데 이 역시 Xbox 기기에서만 즐길 수 있는 독점작에 집중하는 대신 타깃 규모를 더 넓힌다는 계획의 일환이다. 실제로 MS 캐서린 글루스틴 사업 총괄은 엑스클라우드 이용자의 3/4이 전에 하지 않았던 새로운 게임을 즐겼고 이용자 절반은 콘솔 게임 시간 감소 없이 전체 게임 이용 시간이 늘었다고 발표했다.

일련의 움직임은 엑스박스가 자신들의 콘솔 판매만큼이나 퍼스트파티. 즉, 개발 게임을 선보이는 데에 큰 의미를 두고 있음을 뜻한다. 스펜서는 이를 '콘솔이나 고사양 PC를 가진 2억 명이 아니라 20억 명의 모든 게이머에게 도달하는 방법'으로 빗대 설명했다.



▲ 더욱 많은 게이머, 더 큰 파이를 바라보는 엑스박스의 전략

스펜서가 업계에서도 손에 꼽는 혁신가이기에 이런 결정이 가능했다라고 믿는다면 이번에는 반대편에 선 닌텐도를 보자.

닌텐도 스위치가 이끄는 성과 탓에 가려진 감이 없잖지만, 2017년 출시된 '파이어 엠블렘 히어로즈'는 지금까지 약 7,780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3년 여간 6개의 모바일 게임 매출을 모두 따지면 1조 2천억 원에 이른다.

마리오, 동물의 숲 등 이름값에 견주면 영 부족한 금액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부분 유료화, 유료 게임 등 다양한 과금 모델과 장르를 테스트하는 예열과정에서 얻어낸 성과임을 고려하면 마냥 적다고는 못할 수치다.

닌텐도가 SIE 이상으로 자사 플랫폼에 대한 관리에 철저해왔던 점. 그리고 모바일 게임은 생각하지 않는다던 발언들 역시 닌텐도가 역으로 플랫폼 확장에 고심하고 있는지 체감할 수 있는 근거다.



▲ '파이어 엠블렘 히어로즈'는 역대 시리즈 캐릭터를 뽑기 요소로 더해 매출 1, 2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시대가 흐르고 구독경제와 클라우드 서비스가 대두하며 시장은 디지털 콘텐츠라는 한 덩어리로 모이고 있다. 콘텐츠 공룡으로 불리는 유튜브가 유저 손에서 만들어지는 영상들로 점유율을 늘리고 DVD 유통 시대에 종말을 선언한 OTT 넷플릭스는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 여기에 디즈니, 애플 등도 스트리밍 시장에 발을 들이고 음원 시장은 이들 플랫폼사와 연계해 상생을 노리고 있다.

시장 조사 업체 스태티스타(Statista)가 전망한 2020년 디지털 미디어 매출 규모는 194조 8천억 원이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분야는 단연 게임이다. 하지만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미국은 이미 VOD 서비스와 전자출판, 디지털 음원 시장의 합이 게임을 넘어선 지 오래다. 이런 현상은 북미, 유럽 지역에서 특히 도드라진다. 게임 비중이 압도적인 아시아권도 점점 게임 외 디지털 미디어의 매출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전체적인 매출 기대량은 높아졌지만, 시간과 자금의 제한 탓에 한 사람이 즐길 수 있는 콘텐츠 소비량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 여기저기 쏟아지는 콘텐츠가 플랫폼을 등에 메고 물고 물리는 형태의 경쟁이 시작됐다. 단순히 소니와 MS, 닌텐도가 서로 TV 한 대를 두고 싸우는 게임기 전쟁 시절과는 체급이 다른 싸움이 벌어진 셈이다.

스펜서가 최근 프로톨과 닌텐도와 SIE를 존중하며 크래스 플랫폼을 원하지만 경쟁 회사로 아마존과 구글을 꼽은 것은 이런 변화의 분위기가 담겨있다.

게임 부문은 TV, 가전 등의 홈 엔터테인먼트 사업과 함께 소니 매출을 이끄는 쌍두마차다. 특히 매출이 실적 기대치를 기준으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불안정안 상황에서 SIE가 언제까지고 콘솔 판매에 목을 매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계산에 따라 여러 가능성이 나온다. SIE가 닌텐도처럼 탄탄한 퍼스트파티로 메인 시장을 노리며 다른 플랫폼으로 캐시카우 확보에 나서거나 엑스박스처럼 쌓아둔 벽을 일부 허물고 더 많은 플레이어 확보에 나설 수도 있다. 그간 자체 콘솔인 PS4에 집중해 제한되어 있던 스트리밍 서비스 플레이스테이션 나우의 PC 버전 품질 상승도 기대해봄 직하다.



▲ 엑스박스의 변화에는 필 스펜서가 있지만, 그를 이 자리에 올린건 변화하는 시대상이다

사실 '호라이즌: 제로 던' 등 PS 독점작의 PC 발매는 발표 만이 남았거나 아직 고민하는 단계에 있는 것일지 모른다. 어쩌면 정말 루머에 그칠 내용일 수도 있고. 과정이야 어쨌든 중요한 건 SIE를 포함한 콘솔 기업의 플랫폼 확장은 그게 언제 결정될지만이 남은, 시대의 흐름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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